유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설마 송연석이나 나영하가 나한테 앙갚음이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 난 하나도 안 무서운데요?”구은정은 유진을 바라보며, 애정이 담긴 듯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무섭고 안 무섭고의 문제가 아니야. 밖에 나와서는 괜히 문제를 일으킬 만한 사람과는 애초에 엮이지 않는 게 제일 좋아. 알겠어?”유진은 그의 말을 곱씹듯 잠시 눈을 깜빡였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여진구가 성큼성큼 걸어와 두 사람 사이에 일부러 끼어들며 말했다.“유진, 내가 도와줄게. 굳이 남의 도움 받을 필요 없어.”은정은 어금니를 살짝 물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지만, 이번엔 굳이 대응하지 않았다. 모두 함께 텐트를 정리하고 밤새 어질러진 자리도 깨끗하게 원상 복구했다.이제 산을 떠나려는 참에, 하명아가 다시 다가왔다. 그녀는 작은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유진 씨, 이거 두부 간식이랑 다른 과자예요. 어젯밤 보니까 맛있게 먹더라고요. 남은 거 다 챙겨왔어요. 널 만나서 정말 반가웠고요!”아마도 어젯밤 유진이 자신을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준 덕분에 더욱 호감이 생긴 듯했다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참 묘한 법이다. 어떤 사람과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친숙함이 느껴지고, 어떤 사람과는 첫눈에 거리감이 생긴다.유진과 명아는 분명 전자였다. 유진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가 건넨 간식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가져온 간식 중 일부를 건네며 말했다.“나도 만나서 반가웠어요!”명아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다음에 기회 되면 다 같이 여행 가요!”“좋죠!”그때,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던 사이, 연석이 갑자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에는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둘이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요?”그러자 명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왜 그래?”연석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그를 더욱 수상하게 만들었다.“넌 왜 자꾸 저 사람들이랑 어울
유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더욱 놀랐다. 처음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그때, 방연하와 여진구가 다가와 둥그렇게 둘러서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만 돌려 말하고 분명하게 말해요.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나영하 씨가 뭔가를 잃어버렸고, 그걸 우리가 훔쳤다고 의심하는 거예요?”연석은 마치 정의의 사도라도 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분노했다.“그래요! 영하 씨가 2천만 원짜리 시계를 잃어버렸어요. 그것도 강가에서! 누가 강가에 갔는지는 본인이 잘 알겠죠?”진구는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러니까, 강가에 갔다 온 사람이라면 무조건 도둑이라는 말인가요?”그때, 오예나까지 거들고 나섰다. 그녀는 턱을 치켜들고 차갑게 진구와 은정을 노려보며 말했다.“영하 언니가 강가에서 세수를 하다가 시계를 바위 위에 올려뒀는데, 텐트에 돌아와서야 생각이 나서 다시 가 보니 없어졌어요.”“그리고 그 시간 동안 강가에 다녀온 건 둘뿐이잖아요. 도대체 누가 가져갔는지 뻔한 거 아닌가요?”유진은 화가 치밀어 즉시 반박했다.“선배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유진이 반사적으로 진구를 두둔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은정이 차갑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그러면 네 말은 내가?”은정의 날카로운 눈빛에 유진은 순간 움찔하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런 뜻이 아니라, 여기 있는 두 사람 절대 그런 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하지만 유진이 맨 처음 진구를 감싸는 모습이 은정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그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은정은 아무 말 없이 유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그러나 오예나는 비웃으며 말했다.“겉으론 부자인 척하면서, 뒤에서는 이런 짓을 하다니. 정말 비열하네요.”방연하는 격분하여 예나에게 달려들 뻔했다.“닥쳐요! 당신 시계가 천만 원이 아니라 억 단위라 해도, 우리에겐 눈길 한 번 줄 가치도 없어요!”“혹시 본인이 어디 두고선 우리한테 누명 씌우는 거 아닌가요? 혹시라도 돈 뜯어내려고 그
송연석의 얼굴에는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오늘 아침에야 없어진 거 아니었어요? 근데 왜 어젯밤부터 조사해야 하죠?”임유진은 이미 구은정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화를 내거나 초조해하지 않고, 마치 흥미로운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히 어젯밤부터 확인해야죠. 어쩌면 나영하 씨가 어젯밤에 강가에 갔다가 놓고 온 걸 깜빡했을 수도 있잖아요?”방연하는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곧바로 거들었다.“그러고 보니, 영하 씨도 어젯밤에 강가에 갔었나 보네요? 그 늦은 밤에 혼자 간 건 아니겠죠?”연석은 당황한 나머지 화를 내며 소리쳤다.“헛소리하지 마요!”이에 연하는 비웃으며 말했다.“우린 영하 씨 얘기하는 건데, 연석 씨는 왜 그렇게 발끈하는 거예요?”하명아도 의아한 표정으로 송연석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러게,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야?”연석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더듬거리며 변명했다.“그, 그게, 난 그냥 사람이 많은 쪽이 적은 사람을 몰아붙이는 게 보기 싫어서 그래!”유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흥분하는 거 보니까, 모르는 사람들은 본인 여자친구가 억울한 줄 알겠네요?”“무슨 말이에요?”연석은 안절부절못하며 화를 내며 다가오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유진을 밀치려 했다. 그러나 연석보다 먼저 은정이 유진을 보호하듯 뒤로 끌어당기더니, 강한 힘으로 연석을 발로 차버렸다.“네 더러운 손 대지 마요. 얘한테 손대면, 시계랑 함께 이곳에서 사라지게 해줄 테니까.”여진구도 즉시 유진 앞을 막아서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연석은 배를 맞고 몇 걸음이나 뒤로 밀려나더니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연석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배를 감싸 쥐었다. 명아는 놀란 듯 급히 다가와 그를 부축하며 의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도대체 왜 그래? 뭔가 숨기는 거 있어?”연석은 눈을 피하며 머뭇거렸다.“아, 그냥 배가 아파서.”예나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어떻게 사람을 때릴 수 있어요
방연하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궁금해지네요. 어젯밤 CCTV를 확인하자는 말이 나오자마자 나영하 씨가 갑자기 겁을 먹었잖아요?”영하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그 옆에 있던 하명아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송연석을 향한 의심스러운 시선이 점점 깊어졌다.연석은 영하보다 더 초조해하며 서둘러 말했다.“일단 시계를 찾는 게 우선이잖아요. 시계가 진짜로 없어진 게 아니라면 경찰을 부를 필요도 없잖아요!”영하는 잽싸게 맞장구쳤다.“맞아요! 당장 텐트로 가서 찾아볼게요!”영하는 급히 텐트로 뛰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헐떡이며 다시 돌아왔다. 영하는 손에 시계를 들고 흔들며 말했다.“정말 텐트 안에 있었어요! 내가 착각했나 봐요!”이번엔 연석뿐만 아니라, 그녀를 따라다니며 감싸주던 오예나까지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이에 여진구는 비웃음을 터뜨렸다.“내 인생에서 이렇게 어이없는 일은 처음 봐요. 덕분에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네요.”방연하는 팔짱을 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그러게요. 다행히 구은정 씨가 경찰을 불렀지. 안 그랬으면, 평생 도둑이라는 오명을 쓰고 살아야 했을 거예요. 그리고 2천만 원까지 뜯겼겠죠?”예나는 여전히 뻔뻔한 태도를 유지하며 연하를 향해 손가락질했다.“누구한테 하는 말이에요?”짝! 임유진이 재빠르게 그녀의 손을 쳐내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처음엔 당당하게 우릴 도둑이라고 몰아붙이다가, 증거가 나온 순간 바로 시계를 찾았다고요? 우리가 바보라도 되는 줄 알아요?”“그런 주제에 아직도 뻔뻔하게 구네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죠?”평소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이던 유진이 강한 태도로 나서자, 분위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예나는 당황한 나머지 맞받아치려다가, 은정이 무표정하게 쏘아보는 걸 보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됐어요. 그만해요.”그때, 연하가 휴대폰을 꺼내 들며 냉소적으로 말했다.“나영하 씨, 넌
하명아가 떠난 후, 방연하는 임유진의 팔짱을 끼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저 송연석, 진짜 징그럽다. 근데 저 둘이 나영하를 만난 것도 재수 없긴 하지.”여진구는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유혹을 못 이겨서 저지른 건 본인 책임이야. 운이 나빴던 게 아니라 그냥 스스로 자초한 일이지.”“맞는 말이에요!”연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러니까 우리 선배를 칭찬해야 해. 그런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직한 사람!”진구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이제 알겠지?”그러면서도 눈 끝으로는 슬쩍 유진을 바라봤으나, 유진은 곁눈질로 구은정을 바라보았다.은정은 묵묵히 짐을 정리하고 있었고, 평소처럼 유진이 쳐다보면 자연스럽게 눈을 맞춰주던 반응도 없었다.‘화가 난 걸까?’유진은 속으로 의아해하며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다들 산에서 내려갈 즈음, 영하와 예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명아도 차를 몰고 먼저 떠났다. 명아가 차에 타려 하자, 송연석이 차 문을 붙잡고 애원했다.“명아야, 내 말 좀 들어봐!”연석은 급하게 휴대폰을 열어 보여주며 말했다.“봐, 나영하가 먼저 나한테 연락해서 유혹한 거야! 내가 먼저 접근한 게 아니라고! 대화 기록을 보여줄게!”그러더니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애원했다.“명아야, 내가 잘못했어. 우리가 이렇게 오래 만났잖아. 한 번만 용서해 줘, 응?”“다시는 안 그럴게. 정말이야!”사실, 영하는 떠나기 직전 명아에게 일부러 연석과 잠자리를 가졌다고 말했다. 영하는 뻔뻔하게 모든 걸 털어놓고선 가버렸고, 결국 연석만 남아 이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하지만 명아의 반응은 냉정했다. 그녀는 연석이 차에 타려 하자 힘껏 밀쳐내며 단호하게 말했다.“이 차는 내가 산 거야. 우리 이제 헤어졌으니까 알아서 돌아가.”그 말과 함께 명아는 차 문을 닫고 바로 출발했다. 유진은 조수석에 앉아 지나가면서, 길 위에서 분노에 찬 얼굴로 욕설을 퍼붓는 연석을 보게 되었다.“잘했네!”연
유진은 살짝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방연하가 왜요?”구은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영하가 우리 둘이 새벽에 밖에 나갔던 걸 은근히 언급했잖아. 굳이 방연하한테 해명할 필요 없어.”“첫째, 나는 방연하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 내 눈엔 그저 네 친구일 뿐이야.”“둘째, 나는 걔를 좋아하지 않아. 단지 걔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네가 나를 걔의 소유물처럼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은정은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기억해 둬. 너는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걔에게 설명해 줄 의무가 없어.”유진은 순간 멍해졌다가, 곧 그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리고 은정은 계속해서 말했다.“이번 주말은 즐겁게 보내려고 나온 거니까 분위기를 망치고 싶진 않아.”“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방연하한테 분명하게 말할 거야. 더 이상 나한테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유진은 가만히 듣다가 중얼거렸다.“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은데?”은정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예전에 유진에게 했던 말과 똑같았다. 이제는 그 말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만 같아,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은정은 목소리를 조금 부드럽게 낮추며 물었다.“그런 말을 전에 들어본 적 있어?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나?”유진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은정은 약간 실망한 듯했지만, 유진을 바라보는 눈빛은 한층 깊어졌다.“그냥 내가 한 말만 기억해 두면 돼.”그러자 유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진짜로 연하한테 마음을 줄 생각 없어요?”‘이번 여행에서 연하와 함께 지내면서, 연하의 성격도 어느 정도 알았을 텐데.’은정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그의 목소리는 더욱 낮고 깊어졌다.“그럼 너는? 정말 나랑 걔가 이어지길 바라는 거야?”은정의 깊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유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순간적으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은정은 유진의 부드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손을 들어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지만, 결국 참았다.“그냥 신경 쓰지 마. 난 걔를 좋아하지 않아. 그러
강렬한 햇살이 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차 안은 따뜻했고, 반복되는 도로 풍경이 졸음을 유발했다.전날 밤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한 임유진은 지루한 차 안에서 금세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잠들었다.햇살이 유진의 얼굴을 비추며 피부를 더욱 맑고 투명하게 만들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과 편안하게 잠든 모습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구은정은 차 속도를 줄이고, 보다 부드럽고 안정적으로 운전했다.한 시간이 지나 강성에 도착하자, 유진은 잠에서 깨어났다. 여진구와 방연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고, 이후 남쪽 도심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질녘이었고, 유진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녀의 휠체어를 밀어주던 은정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이틀 동안 챙겨줘서 고마워요. 집에 들어가서 차 한잔 마시고 갈래요?”저녁노을이 은정의 얼굴을 물들이며 원래 차가운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곧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 다음 주에 보자.”유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주엔 출근해야 해요. 오래 못 가서 업무가 많이 쌓였을 거예요. 토요일에도 출근할 수도 있어서 못 가게 되면 미리 연락할게요.”은정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그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리 바빠도 건강 챙겨.”“알았어요!”유진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노을빛이 유진의 얼굴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었고, 그녀의 밝은 미소가 더욱 돋보였다.“그럼 들어갈게요. 운전 조심해요!”“잘 가.”은정은 역광 속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유진은 배낭을 메고 직접 휠체어를 밀며 도로 건너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문턱 앞에서 한 번 더 돌아보았다.은정이 여전히 그 자리에서 서 있는 것을 보고, 유진은 환하게 웃어 보인 후 문 안으로 들어갔다.유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은정은 조용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희미한 연기가 황혼 속에서 퍼지며, 그의 깊고 어두운 눈빛을 가렸다.유진이 집으로 돌아오자, 유진을 챙겨주는 노하숙 아주머니가
“열어 보면 알겠지!”유진은 상자를 집어 들고 임유민의 품에 안겨주었다. 유민은 혹시나 장난이 아닐까 싶어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물건을 꺼내 본 순간, 유민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것은 도자기로 만들어진 마트료시카 인형이었다.“이거 정말 못생겼네!”유민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난 어린애도 아닌데, 이런 걸 왜 줘? 아니, 어린애들도 이런 거 안 좋아할걸?”유진은 웃으며 그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이건 네가 원래 아이 같다는 걸 상기시키려는 거야. 너무 어른스러운 척하지 마!”유민은 찌푸린 얼굴로 유진의 손을 피하며 반박했다. “누가 어른스러운 척했어? 누나가 가볍게 구는 거지, 나까지 누나처럼 행동하라는 건 아니잖아!”유진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나처럼 사는 게 뭐가 어때서?”유민은 손에 든 마트료시카의 둥근 얼굴을 바라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누나가 항상 그렇게 행동하니까, 내가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거야. 그래야 누나를 보호할 수 있잖아.”변성기를 지나고 있는 유민의 목소리는 아직 어딘가 거칠었지만, 그 속에는 단단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이에 유진은 웃으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유진은 자신의 키와 거의 비슷해진 유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난 나를 지킬 수 있어. 진짜로 어린애가 아니라고!”그러자 유민은 코웃음을 치며 마트료시카를 손에 들고 문 쪽으로 향했다.“나 갈게. 누나도 푹 쉬어.”“마음에 안들면 네가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선물해!”유진은 문틀을 잡고 몸을 내밀며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임유민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걸어 나갔다.‘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선물하라고?’그랬다간 그 여자애가 유민의 취향을 의심하며 멀어질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직 좋아하는 여자애도 없었다.방으로 돌아온 유민은 마트료시카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유민은 싫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피규어 컬렉션 진열장 한쪽에 올려두었다.다른 피규어들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