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더 껴안고 있다가, 유정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조백림을 또렷하게 바라봤다.“여기서 이러지 말고 이제 들어가.”“그래.”백림은 부드럽게 답했다.붉은 입술은 여전히 차가웠고,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였다. 남자는 다정한 눈길로 유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작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그녀만을 응시했다.유정이 뒤돌아 서씨 저택 안쪽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더니 손을 뻗어 백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말없이 그를 이끌었다.이에 백림은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꼬마 요정?”유정은 돌아보며, 반짝이는 눈 속에 결심을 담아 조용히 말했다.“오늘 밤 그냥 있어 줘.”백림은 낮게 웃었고, 눈빛엔 부드러움이 가득했다.“할아버님이 알게 되시면 화내실 거야.”유정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환하게 웃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눈까지 오는데, 손님 붙잡는 게 예의 아닌가?”그러고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속삭이듯 말했다.“게다가 할아버지는 이미 주무셔. 모를 거야.”그 말을 마치자마자, 유정은 그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섰고, 문도 유정이 뒤돌아 조심스레 닫았다.백림은 유정의 뒤를 따랐다. 안뜰의 희미한 조명 아래, 그녀의 목덜미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얼어붙은 귀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그 모습을 본 순간, 백림의 마음은 녹듯이 스르르 풀어졌다.‘이렇게 함께할 수 있다면, 혼날 각오쯤은 괜찮아.’유정은 발소리를 죽이며 빠르게 움직였다. 안뜰을 지나고, 거실을 지나, 그대로 2층까지 올라갔다.가슴이 쿵쾅거렸는데, 뭔가 나쁜 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긴장됐다. 그리고 백림은 그런 유정의 뒷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느라 애썼다.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밖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확인한 유정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백림은 돌아서 유정을 문에 기대게 하더니,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는 그대로 입을 맞췄다. 유정 또한 살짝 발을 들어 그 입맞춤에 응했다.마치 다툰 연인이 화해하고
십여 분 동안 내적 갈등을 겪은 끝에, 유정은 결국 스탠드 등을 켰다.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두 시. 창밖을 한 번 바라본 유정은 옷장 속에서 긴 롱패딩을 꺼내 입고 방을 나섰다.이 시각, 서씨 저택은 깊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다만 회색 담장 아래로 길게 뻗은 불빛만이 흐릿하게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하늘과 땅, 눈으로 모두 뒤덮인 세상은 경계조차 사라진 듯, 온통 혼돈 그 자체였다.유정은 눈 쌓인 바닥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무거운 나무문을 밀고 나서자, 바깥은 칠흑 같은 어둠과 싸늘한 공기로 가득했다.유정은 입술을 지그시 다물며 낮게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잠시 그렇게 눈밭에 멈춰 서 있던 유정은 돌아서려다, 그대로 얼어붙었다. 대문 옆 벽에 기대어 선 남자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백림은 가는 눈으로 유정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눈빛엔 놀람과 안도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백림의 검은색 코트 위로 눈송이가 소리 없이 내려앉아 있었고,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은 이미 축축이 젖어 있었다.피부는 차갑고 창백했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달처럼, 은은한 빛을 띠고 있었다.유정의 심장은 그 순간 멈췄다가,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그녀는 숨을 죽인 채 그를 응시했다.“아직 안 간 거야?”“응, 안 갔어.”백림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낮게 갈라졌다.“밤에 있었던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그냥, 네 가까이 있고 싶었어.”“그리고 더 무서운 건, 혹시 네가 할아버지 말에 마음이 흔들려서, 날 정말 버리면 어떡하나 그게 두려웠어.”백림의 말에 유정의 마음 어딘가가 갈라지듯 찢어졌고,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화나고, 서럽고, 분했다. 유정은 백림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고, 가까워질수록 시야가 흐려졌다.그리고 그 앞에 선 순간, 여태까지 묵혀왔던 감정들이 무너져 내렸다. 여자는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마구 때리며 울부짖었다.“나쁜 놈!”“왜
고효석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정이 먼저 나섰다.“할아버지, 또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저 바로 강성으로 돌아갈 거예요!”“너!” 서정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화가 났고, 유정은 고효석을 돌아보며 말했다.“미안해. 더는 배웅 못 하겠어.”효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 서로 마음에 두지 말자.”효석은 서정후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똑바로 돌아서 조용히 걸어 나갔다.이윽고 백림도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건넸다.“유정이는 오늘 밤 굶고 추위에 떨었어요. 먼저 좀 쉬게 해주시죠. 내일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리러 올게요.”“그때 할아버님께서 뭐라 하시든, 두 귀 쫑긋 세우고 들을게요.”백림은 돌아서려다 다시 서정후를 향해 말했다.“그리고 유정이 손등에 상처가 났어요. 약 좀 발라주시죠.”이어서 유정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할아버님이 널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니까, 너무 마음 상하게 생각하지 마. 난 이만 갈게.”유정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바래다줄게.”두 사람은 함께 밖으로 걸어 나갔다.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사락사락 떨어지는 소리가 겨울밤의 고요함을 더욱 짙게 만들고 있었다.백림은 대문을 나선 뒤 돌아서서 유정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네 할아버지가 너한텐 중요하다는 거 알아. 그래도 누가 뭐래도, 난 널 포기할 수 없어.”유정은 멍하니 백림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짙고 어두운 눈동자엔, 거의 집착에 가까운 단단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백림의 시선이 더 깊어졌다.“이제 들어가서 자. 내일 다시 올게. 걱정하지 마. 모든 건 내가 책임질게.”유정은 코끝이 찡해졌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백림의 눈동자엔 마치 별의 바다가 잠긴 듯한 잔잔한 떨림이 지나갔다.“지금 이 고갯짓 하나면, 나한텐 충분해.”백림은 조용히 돌아서 차 쪽으로 걸어갔고, 유정은 그 눈송이 속에 녹아드는 남자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천천히 문을 닫았다.다시 거실로
유정은 국을 받아 들고 단숨에 반 그릇을 들이켰다. 속이 따뜻해지자, 비로소 살 것 같았다.조백림은 냅킨을 집어 유정의 입가를 조심스레 닦아주며 낮게 물었다.“거기에는 먹을 건 없었어?”“있었지.”유정은 입안 가득 음식을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다 나눠줬어.”“바보.” 백림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 와중에도 네 몫은 안 챙겨놨냐?”서정후도 처음엔 한마디 하려다, 백림이 대신 나무라자 입을 다물고 헛기침만 했다.이때 고효석이 웃으며 말했다.“제 잘못이에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유정은 효석에게 반찬을 하나 집어 주며 말했다.“아니야. 너 나한테 빵 하나 남겨줬었잖아. 내가 그걸 또 누구한테 줬지. 네 잘못 아냐.”백림의 시선이 유정의 젓가락을 따라갔다가 조용히 눈을 내렸다. 유정은 잠깐 멈칫하더니, 남자에게도 반찬을 하나 집어 올려줬다.그런 모습에 백림은 유정을 힐끗 보더니, 얇게 다문 입가에 미세한 곡선을 그렸다.식사를 마치자, 서정후는 세 사람을 거실로 불러 앉혔다. 차를 따라주던 가사도우미에게는 그만 쉬라고 일러둔 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잘 됐다. 오늘 이렇게 다들 모였으니, 이참에 할 말을 확실히 해두자.”유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거야, 할아버지는...’서정후는 조백림을 바라보며 말했다.“너하고 유정이 파혼했잖아. 그리고 난 유정이랑 효석이를 허락했어. 그러니 넌 돌아가.”유정은 눈을 확 뜨며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할아버지!”효석이도 놀라서 나직이 외쳤다. “할아버지, 농담이죠?”서정후는 눈을 부릅떴다.“넌 우리 유정이 마음에 안 드냐?”“그런 거 아니예요!” 효석은 반사적으로 대답한 뒤, 급히 말을 이었다.“유정이는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일 뿐이에요. 저한텐 소중한 친구죠.”서정후는 손을 내저으며 말을 자르듯 말했다.“그런 말 말고, 딱 잘라서 말해. 좋아해, 안 좋아해?”효석은 잠시 얼어붙었고, 백림은 남자를 잠시 스쳐보더니 조용히 입
제설차가 투입되자, 채 반 시간도 되지 않아 길이 뚫렸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침내 차로 돌아가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산길은 여전히 위험했지만, 앞뒤로 나뉘어 선 두 대의 제설차가 차량 행렬을 호위하며 안전하게 그 길을 지났다.유정은 백림의 차에 탔다. 몸이 서서히 따뜻해지고, 사방이 환하게 밝혀졌을 때야 길게 숨을 내쉬었는데, 죽다 살아 돌아온 기분이었다.조금 전 산속에서의 모든 일들이, 마치 악몽처럼 느껴졌다. 휴대폰에 신호가 잡히자마자 유정은 외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했다.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지만, 안도감이 묻어났다.[무사하다니 됐다.]막 뉴스에서 유정 일행이 지나간 산길 여러 곳에서 산사태가 났다는 보도를 본 터였다.서정후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백림이 뒤쫓아 갔다는 사실에 한 줄기 희망을 걸고 있었다.전화를 끊고 나서, 백림은 유정의 다친 손을 조심스럽게 쥐고선 목소리를 낮춰 다그쳤다.“이런 날씨에 산에 들어간다고? 도대체 이 생각은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야?”유정은 서둘러 해명했다.“우리가 도착했을 땐 눈이 안 왔어. 그리고 마을 상황이 너무 급박했거든.”그러곤 약간 흥분한 채로, 마을 절반이 눈에 파묻힌 참상을 이야기했다.“이 추위에 사람들이 텐트에서 자고 있었어. 담요도 없는 집도 있었고. 우리가 물자 들고 가서 그나마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오늘 밤 어쩔 뻔했는지 몰라.”백림은 더는 나무랄 말도 못 하고, 유정의 붉게 튼 얼굴을 만지며 낮게 말했다.“너한테 무슨 일 생겼으면, 내가 어떻게 됐을지 생각은 해봤어?”유정은 괜스레 머쓱해져 백림의 얇은 옷차림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왜 이렇게 얇게 입고 왔어? 여기가 무슨 강성인 줄 알아?”백림은 슬쩍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흘겨봤다.“할아버님이 늘 하시는 말투 그대로네?”유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설마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는 거야?’이윽고 유정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등에 난 상처는
고효석은 돌무더기 위에서 곧장 내려와 제설차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총 두 대의 제설 차량이 도착했다. 모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제설차 뒤쪽에 세워진 검은색 롤스로이스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조백림은 조용히 차를 한쪽에 세우고 내린 뒤, 긴 다리로 빠르게 걸어왔다. 도로를 막고 있는 진흙과 돌무더기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졌다.백림은 곁에 있던 한 사람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유정, 여기 있나요?”“유정이요?”질문을 받은 이는 구호단체 소속으로 효석 쪽 사람들과는 낯선 사이였다. 그는 되물었다.“혹시 고효석 중위님 여자친구 말씀하시는 거예요?”백림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지금 어디 있나요?”남자가 손으로 가리킨 곳은 다들 쉬던 쪽이었다.“저쪽에 있을 거예요.”백림은 가슴을 쓸어내리듯 안도의 숨을 내쉬고,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그때 유정과 리나는 막 마른 가지를 주워 돌아오고 있었다. 길 건너편이 소란스러운 걸 본 리나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구조대 왔나 봐!”유정은 효석을 찾으려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들려왔다.“유정아!”목소리는 거칠고 절박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유정은 순간 자신이 착각한 줄 알았다.그때 키가 크고 길쭉한 남자의 실루엣이 나타났고, 조명이 닿자 점점 뚜렷해지는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곧 유정의 눈가가 뜨겁게 젖었고, 백림은 유정의 앞으로 성큼 다가와 그대로 끌어안았다.백림의 가슴은 숨이 가쁠 정도로 들썩였고, 품에 안은 유정이 마치 다시 찾은 전부인 것처럼 온몸으로 껴안았다. 그간의 공포와 불안이 백림을 짓눌렀던 듯, 한동안 말도 잇지 못했다. 유정도 남자의 품에 팔을 감았다. 그 순간, 마치 눈도, 바람도 멎은 듯했다.마음속을 뒤흔들던 두려움이 말끔히 사라졌다. 유정은 코끝이 시큰해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어떻게 온 거야?”백림은 자기 외투를 벗어 유정의 어깨에 감싸 안고, 차가운 그녀의 뺨을 두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