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이 끝날 무렵, 서선혁은 술에 많이 취해 있었다. 간신히 버티며 집에 도착한 그는 부모님께 간단히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자마자 일어나질 못했다.어머니가 꿀물을 들고 들어왔다.“이거 마시고 씻고 자.”“네.” 선혁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는데, 머리가 어지러워 몸을 움직이기도 싫었다.“그냥 거기 둬요.”어머니는 찻잔을 내려놓고 문을 닫은 뒤 나갔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선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씻으러 가야겠다며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누웠다. 머리가 무겁고 멍했다.그때, 침대 옆에 놓인 핸드폰 화면이 깜빡였다. 새 메시지가 왔고. 화면이 꺼지기 직전, 선혁은 손을 뻗어 핸드폰을 들어 앱을 열었다.바로 의현에게서 온 문자였다.[미안, 이제야 너 메시지 봤어.][요 며칠은 정말 시간이 없었어. 올해 할아버지 큰형네 가족이 다 같이 와서, 매일 모임이 있었거든. 오늘 밤에서야 겨우 한숨 돌렸어.]선혁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메시지를 읽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지만, 무심코 의현에게 음성 전화를 걸었다.7초, 8초쯤 지났을까? 전화를 받는 소리가 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의현이 물었다.[여보세요?]선혁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말이 없자, 의현이 다시 살짝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서선혁?]조용한 밤. 의현의 목소리엔 약간의 불확실함이 묻어 있었다. 선혁이 실수로 음성 통화를 눌렀다고 생각했는지, 숨결에도 조심스러운 기색이 배어 있었다.선혁은 술기운이 섞인 쉰 목소리로 말했다.“너 나한테 거짓말했잖아.”의현이 잠시 말을 멈췄다.[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는데?]선혁은 몇 초를 더 망설이다가 낮게 말했다.“너랑 조협, 커플 스킨 입었잖아. 절대 처음으로 논 거 아닐 거야. 꽤 오래 같이 한 거 맞지?”“새 파트너 생겼으면, 나한텐 얘기해야 하는 거 아냐?”이에 의현은 웃었다.[우리 진짜 오늘이 처음 같이 한 거야. 그 스킨은 걔가 선물한 거고, 난 예뻐서 그냥 받은 거고.]선혁은 아무 말이 없었고, 의현도
“잘 가.”유정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VIP 대기실로 돌아오니, 부모님은 외할아버지와 통화 중이었다. 유정은 조백림 옆에 앉아 조용히 말했다.“아까 서선혁 만났어.”백림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경성 가는 길이었어?”“아니, 친척 배웅 왔대.”유정은 직원이 가져다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는데, 약간 쓴맛에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근데, 걔 진짜 의현이 안 좋아하나 봐.”백림은 유정의 손을 잡았다.“그 말, 본인한테 들은 거야?”이에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거절했대. 근데 난 둘이 좀 아까운 것 같아.”꽤 아쉬워하는 유정을 보며 백림이 웃었다.“오작교 해주는 게 그렇게 재밌어?”유정은 전의를 불태우듯 말했다.“처음 맡은 오작교인데 실패하면 안 되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겠어.”...그날 밤, 선혁은 집안 모임에 참석했다. 작은아버지, 큰아버지, 사촌 형제들까지 서른 명이 넘게 모여 무척이나 북적였다.경성에서 일하는 그가 설에 겨우 내려왔으니, 사촌 형제들이 잔을 돌릴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연거푸 일곱 잔, 여덟 잔을 마시고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 선혁은 전화를 받는 척하며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밖에 나와 정신을 좀 차리려던 그는 문득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게임 앱 아이콘이 보이자 의현이 떠올랐다.손끝이 잠시 머뭇거리다 게임을 열었는데, 의현은 접속 중이었다. 심지어 게임 중이었고, 누군가와 듀오를 하고 있었다.선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관전 버튼을 눌렀다. 의현은 이제 성준 캐릭터는 쓰지 않고 윤영이라는 캐릭터를 플레이하고 있었고, 함께한 팀원은 조협이라는 캐릭터였다. 두 사람은 커플 스킨을 입고 찰떡같이 호흡을 맞췄다. 윤영이 체력이 낮아질 때마다 조협은 반드시 제시간에 도착해 그녀를 지키고, 심지어 3킬까지 따냈다.상대편 채팅창엔 계속 투덜거리는 말들이 올라왔다.[저 커플 좀 봐라. 길 하나는 남겨줘야지.][애정행각으로 내 눈을 테러하네.][난 게임하러 왔지, 꽁냥대는 꼴 보러 온 거 아님.
설날 이튿날, 소희와 임구택, 그리고 임유진, 임유민 남매까지 넷이 하루 종일 고스톱을 쳤다.셋째 날, 임구택은 원래 소희를 청원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아직 출발도 못 했는데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손님은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고, 국내에서도 이름난 학자였으며, 서울에서 내려와 손녀 백구연을 데리고 왔다.구연은 스물두 살로, 이전엔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몸은 마른 편이었고, 이목구비는 작고 섬세했지만 정교했으며, 이름처럼 맑고 차가운 인상에 당찬 분위기를 풍겼다.이름에 구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어선지, 임시호는 일부러 구택에게 그녀를 소개했고, 구연은 냉담한 표정으로 구택에게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반면 백호균은 구택을 두고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예전엔 두 집안이 교류가 있었지만,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터였다. 백호균은 경성에 집을 사서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 예정이었고, 이튿날에 도착해 셋째 날 아침 일찍 인사를 온 것이었다.백호균은 학계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이었고, 임시호도 그를 매우 존중해 서재로 안내하여 이야기를 나눴다.“백구연 씨!” 유진이 다정하게 인사하며 웃으며 말했다. “어른들 얘기하시는 동안 우리랑 놀래요?”백구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괜찮아요, 물어봐 줘서 고마워요.”그 말을 마치고 백호균을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이에 유진은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성격이 엄청 차갑네!”유민이 말을 받았다.“약간 예전의 숙모 느낌도 있어!”그 말에 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진짜? 나는 전혀 몰랐는데?”유진은 구연의 뒷모습을 돌아보았는데, 뒤에서 보니, 정말 조금 닮은 것도 같았다.백호균은 임씨 저택에 두 시간가량 머물렀고, 이내 작별 인사를 하며 말했다.“이제 강성에 정착했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회장님!”임시호는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선생과 나는 황혼에 친구를 다시 만난 셈이지요. 절대 부담 갖지 마세요.”백호균은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그렇다면 앞으로 자주 폐 끼치죠.”임시호가 말했다.“언
조엄화는 유명현의 비명을 들으며 가슴을 부여잡고 오열했다. 끝내 무너진 그녀는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제발, 제발 그만 좀 때려요. 다신 유정이한테 손 안 댈게요, 진짜예요. 제발 우리 아들 살려줘요.”조백림은 담담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어 조엄화를 촬영했다.“지난번 일 이후, 유정이 곁에는 항상 사람이 붙어 있어요. 그런데도 또 손을 대면...”백림은 말을 멈추고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다음에 당신 아들이 영상에 나오면, 그땐 지금처럼 멀쩡하진 못할 거예요. 제 말 이해하셨죠?”조엄화는 혼이 빠진 눈으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알겠어요. 절대, 절대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약속해요.”유준성도 아내를 부축하며 나섰다.“명현이랑 신희만 무사하면 뭐든 할게요. 제발 아이들만은...”백림은 둘을 잠시 내려다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말끔한 슈트 너머로 뿜어져 나오는 냉혹함과 기세는 방 안 공기를 짓누르듯 무거웠다.백림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방 안엔 흐느끼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유준성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이제 그만하자. 이 사람들 건드리면 안 돼. 그냥 명현이랑 신희 형량 마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자. 이번 일도 결국은 신희 잘못이잖아.”조엄화는 끝까지 참았던 분노와 억울함이 섞인 눈물 속에서도, 더는 저항할 용기를 낼 수 없었다.백림이 마당을 지나 나오자, 마침 도착한 유지태와 신화선이 그를 맞닥뜨렸다.백림은 자연스럽게 웃으며 인사했다.“할아버님, 할머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유지태는 삼가의 저택 안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듣고 얼굴이 어두워졌다.“무슨 짓을 한 거냐?”백림은 여유롭게 고개를 갸웃했다.“숙모님께서 유정이를 초대하셨다기에, 저도 명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여드리러 왔어요.”유지태는 순간 눈빛이 변했다.“명현이한테 뭘 한 거지?”백림은 오히려 되물었다.“그보다, 숙모님이 유정이를 어떻게 초대했는지부터 여쭤보셔야죠.”그 말에 유지태는 입을 다물었다.“방금 그분과는 합의
화장실 바깥, 직원 복장을 한 남자는 손가락으로 은빛 단검의 날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작고 날카로운 그 칼날엔 냉기마저 감돌았다.이 복도에는 총 네 개의 룸이 있었고, 안에서는 모두 설날 가족 모임이 한창이었다. 건물의 방음 상태가 좋아 복도는 고요했고, 긴장감마저 감돌았다.그때,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남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달려들어 그의 목덜미를 정확히 가격했다.남자는 한마디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곧바로 뒤따라온 사람들이 조용히 그를 들고 사라졌다.단 30초도 걸리지 않은 일이었다. 복도는 다시 원래의 정적을 되찾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고요했다.조씨 저택.룸이 있었고, 안에서는 모두 설날 가족 모임이 한창이었다. 건물의 방음 상태가 좋아 복도는 고요했고, 긴장감마저 감돌았다.그때,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남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달려들어 그의 목덜미를 정확히 가격했다.남자는 한마디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곧바로 뒤따라온 사람들이 조용히 그를 들고 사라졌다.단 30초도 걸리지 않은 일이었다. 복도는 다시 원래의 정적을 되찾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고요했다.조씨 저택.백림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유정에게 물었다.[점심 먹고 나서는 뭐 할 거야?]“부모님이랑 잠깐 쇼핑 가려고.”유정은 대답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그래,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넌 네 일 보면 돼. 내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백림은 아쉬운 듯 유정과 한참을 더 이야기하다가 아쉽게 통화를 마쳤다.두 시간 뒤, 백림은 조엄화가 머무는 별장 거실에 앉아 있었다. 얇은 입술 사이로 담배를 물고, 뿜어내는 연기 사이엔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백림은 말없이 조엄화를 노려봤다. 처음엔 끝까지 발뺌하던 조엄화도, 백림이 데려온 사람을 보고 나서부터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어차피 유
서은혜는 유정의 팔짱을 끼고 함께 병원을 향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유지태와 신화선은 연신 당부를 쏟아냈다.“병원 도착하면 꼭 연락 줘야 해!”차가 유씨 저택을 벗어나자, 서은혜는 유정의 배를 쓰다듬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쩌다 갑자기 배가 아픈 거니?”유준탁 역시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조금만 참아. 근처 병원으로 바로 갈게.”그때 유정이 서은혜의 손을 가볍게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예전에 유신희가 아픈 척할 때마다 화가 났는데, 내가 해보니까 이거 꽤 괜찮네요.”서은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까지 고통에 찡그렸던 얼굴엔 장난기 어린 미소가 가득했다.“너! 너, 연기한 거니?”유준탁도 깜짝 놀라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뒷자리를 돌아보았다.“무슨 일이야? 진짜 괜찮은 거야?”“아빠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의도가 안 보이세요? 숙모가 집이랑 회사를 팔려고 하니까, 우리한테 그 방패 역할을 하라고 부른 거잖아요.”“내가 가만히 있었으면, 아빠 또 흔들렸을걸요?”유정은 조금도 걱정하는 기색 없이 단호했다. 사실 그녀는 조엄화가 진짜로 회사를 팔 거라곤 믿지 않았다. 그 두 어른은 항상 계산에 밝았고, 죽기 전까지는 절대 모든 걸 내줄 사람들이 아니었다.유준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그분들은 내 부모야.”“그러니까, 보지 말아야 덜 흔들리죠.”유정은 서은혜의 팔짱을 꼭 끼며 유준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엄마가 그 집에서 당한 게 몇 년이에요? 이사 나오고 얼마나 편해졌는지 아빠도 봤잖아요. 아빠, 다시 엄마를 그 집으로 보내실 수 있어요?”유준탁은 서은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우린 돌아가지 않아. 그리고 그분들과 함께 살지도 않을 거야. 내가 약속해.”서은혜는 유정의 손을 꼭 쥐었는데, 감격스러움이 눈가에 고스란히 번졌다.“점심은 밖에서 먹어요. 내가 예약할테니까!”유정은 기분 좋게 휴대폰을 꺼냈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마음을 굳힌 모습에 흡족했다.그렇게 세 사람은 어디서 먹을지 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