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은 주말, 백호균은 다시 임씨 저택을 찾아갔다.서재에서 담소를 나누던 중, 임시호에게 강재석의 전화가 걸려 왔다. 강재석은 임구택과 소희의 일은 일절 묻지 않았고, 단지 앞으로 며칠 소희를 데리고 운성에 다녀오겠다고만 전했다.이에 임시호는 다급히 말했다.“소희와 구택 사이의 사정을 저도 조금은 알고 있어요. 이미 구택에게 전화를 걸어 아내를 데리러 가라고 했고요.”“소희는 출산이 한 달도 남지 않아서 먼 길을 오가는 건 안전상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그러나 강재석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사람을 붙여 세심히 돌보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게. 돌아오지 못하면 운성에서 출산해도 되니까.]그 말에 임시호의 얼굴이 굳어졌다.“그건...”강재석은 단호하게 끊었다.[이렇게 하는 거로 하죠.]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어버렸다.임시호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백호균에게 서재에서 잠시 쉬라 하고, 다시 구택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두 번이나 걸었음에도 연결되지 않았다.어쩔 수 없이 서재로 돌아와 백호균을 맞이한 임시호는 내내 찌푸린 얼굴이었다.이에 백호균이 살펴보고는 물었다.“무슨 일 있나요?”임시호는 한숨을 내쉬었다.“아이들이 커 가면서 점점 말을 듣지 않네요.”백호균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부부 싸움이야 원래 흔한 법이지요. 강재석 어르신이 손녀를 너무 아끼다 보니, 데려간다고 하면 데려가는 거고요.”임시호는 여전히 미간을 좁혔다.“하지만 어떻게 소희가 운성에서 출산하게 둘 수 있겠나요?”백호균이 제안했다.“그렇다면 직접 가보는 게 낫겠군요.”임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쩔 수 없네요.”백호균은 미소 지었다.“시아버지가 직접 나서서 말한다면, 소희도 분명 체면을 생각해 따라줄 거예요.”그러고는 곧 일어나 자리를 정리했다.“어서 가는 게 좋겠군요. 이런 일은 미루지 않는 게 상책이니까요.”시호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괜한 웃음거리만 보여드렸군요.”백호균은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오래 머물 수 없었던 구연은 곧 휴대폰을 꺼내 자료를 하나하나 스캔해 저장했다. 이후 모든 것을 원래대로 정리해 두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랍을 잠갔다.구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사무실을 빠져나온 뒤 모니터 화면을 원상복구했다. 그러고는 곧장 백호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순조로워요!]곧 기쁜 기색이 무더나는 짧은 답장이 왔다.[수고했구나.]구연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 섞인 미소가 번졌다. 그러고는 즉시 스캔한 자료들을 다른 곳으로 전송했다.다음 날, 구연은 다시 심명을 불러내 만났다.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했는데, 뜻밖에도 심명이 먼저 와 있었고 옆에는 낯선 인물이 앉아 있었다.심명은 구연을 보자 손을 들어 반겼다.“구연 씨!”구연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다가, 심명의 옆 사람을 보고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심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개했다.“내 친구 남바보라고 해요!”그러자 옆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볍게 웃었다. 검은 셔츠 차림에, 목에는 사파이어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혼혈의 이목구비는 잘생겼지만 어딘가 날카로운 기운을 풍겼다. 남자는 심명을 비스듬히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얘 농담은 믿지 마요. 난 남궁민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구연은 심장이 순간 크게 뛰는 걸 느꼈지만 표정을 다잡고 고개를 끄덕였다.“백구연이에요.”그러나 안심할 틈도 없이, 남궁민은 구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구연 씨,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나요?”이에 구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고 심명이 웃으며 끼어들었다.“설마 또 전 여자친구 같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예쁜 여자만 보면 어디서 본 것 같다고 하는 네 수작, 십 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너무 진부해.”이에 남궁민은 도도하게 코웃음을 쳤다.“내가 꼬실 필요가 있나? 늘 여자가 날 따라오지.”구연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남궁민 씨가 착각하신 것 같네요. 저와는 처음 뵙는 겁니다.”이에 남궁민은 어깨를 으쓱였다.“그럼 내가 잘못 봤네요.”구연은 화제를
출근하자마자 우행과 칼리는 구택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사무실에서 나온 우행이 칼리에게 물었다.“사장님, 무슨 일 있었나요?”칼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 점심 무렵에 잠깐 나갔다 오시더니, 그때부터 계속 저러세요.”우행은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서류를 들고 자리를 떠났다.그때 마침 구연이 사무실 쪽으로 향하자, 칼리가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귀띔했다.“사장님, 방금 화내셨으니까 조심하세요.”“고마워요.”구연은 안심시키듯 웃어 보이고, 서류를 들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구택은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게 사인을 했다. 그러나 구택의 휴대폰이 울리자, 구연의 시선이 흘끗 화면을 스쳤다. 발신자는 노정순이었다.구택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깊게 찡그린 채, 바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서류를 돌려주며 짧게 말했다.“이제 나가보세요.”구연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난 뒤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닫자마자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스피커폰으로 전환된 듯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또렷했다.노정순의 음성이 날카로웠다.[아침에 강재석 어르신이 네 아버지한테 전화하셨어. 소희가 도씨 저택에 머문다던데, 무슨 일이냐?]구택은 차갑게 대꾸했다.“별일 아니에요. 그저 할아버님 곁에 있고 싶다 해서요.”노정순은 믿지 않는 듯 단호했다.[넌 정말 안심하고 소희 혼자 밖에서 지내게 할 수 있겠어? 분명 뭔가 있는 거 아니니?]“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구택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났다.“지금 바빠서 이만 끊을게요.”뚝 전화를 끊자마자, 안에서 쾅 하고 서류가 탁자에 내던져지는 소리가 이어졌다.화장실에서 나온 구연의 얼굴은 평소보다 창백했고 이를 눈치챈 칼리가 곧장 다가왔다.“구연 씨, 어디 아파요?”구연은 배를 감싸 쥐며 힘겹게 웃었다.“점심때 먹은 해산물이 신선하지 않았나 봐요. 배가 좀...”칼리는 서랍을 열어 약을 꺼내주었다.“이거 효과 좋아요. 하나 드세요.”“고마
“그러죠.’심명은 고개를 숙인 채 대충 대답만 했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이에 구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곧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소희는 청원으로 돌아가, 아주머니에게 자신의 짐을 간단히 챙기게 한 뒤에 차를 타고 도씨 저택으로 향했다.옆에 있던 연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정말 도씨 저택에 가서 지낼 거야?”소희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연희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도 같이 갈래. 마침 아심이도 거기 있으니까 우리 셋, 임산부들이 함께 지내면 딱 좋잖아.”소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연희야, 제발 장난치지 마.”연희는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도씨 저택에 도착하자, 도우미들이 소희의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소희와 성연희는 정원 테라스에 앉아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를 이어갔다.연희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고 눈빛에는 의문이 가득했다.“뭔가 이상해. 뭔가 안 맞는단 말이야.”소희는 주스를 한 모금 마신 뒤 담담히 입을 열었다.“맞아. 일부러 그랬어. 심명을 불러서 연극을 한 거야.”연희의 눈이 크게 뜨였다.“역시! 어쩐지 네가 다 안 알려줬다고 생각했어. 도대체 무슨 일이야?”소희는 시선을 멀리 정원 끝으로 던지며 천천히 말했다.“내 쪽에서 온 보고에 따르면, 오빠가 곤경에 처했어. 내가 직접 가야 해.”이에 연희는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너, 삼각주에 가려는 거야?”그제야 모든 것이 퍼즐처럼 맞아떨어졌다. 소희가 괜히 구택을 자극해 집을 옮긴 것도, 며칠간 자취를 감춰도 들키지 않으려는 계산이었다.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안 돼!” 연희는 단호히 거절했다.“지금 넌 아이를 품고 있어. 거기 가서 뭘 할 수 있겠어? 위험하기만 하지. 난 절대로 허락 못 해!”그러고는 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지금 당장 네 남편에게 전화할 거야!”“연희야!” 소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오빠가 사로잡혀 있고, 백협은 큰 타격을 입어 우두머리 없는
소희는 구택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아마도 경호원이 이 일을 알려준 걸 거야.”구택의 입술은 단단히 다물려 있었고, 분노가 억눌린 채 번져 나왔다.“둘 사이의 소문이 온라인에 가득한 걸 몰라? 이런 때에 함께 병원에 가면 어떤 결과가 따를지 생각은 해봤어?”소희는 눈을 치켜들며 반문했다.“지금 나를 믿지 않는 거야?”구택은 눈살을 찌푸렸다.“당연히 믿지만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건 원치 않아.”소희는 단호히 맞섰다.“나도 아이도 떳떳해. 남들이 뭐라 하든 두렵지 않아.”구택의 눈빛은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그럼 내 입장은? 내가 어떤 기분일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어?”심명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이건 소희 잘못이 아니고 내가 병문안하러 병원에 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 혼자라서 검진까지 함께 가준 것뿐이고요.”연희도 목소리를 높였다.“임구택 사장님은 무슨 자격으로 소희를 추궁하죠? 반성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죠.”“왜 소희가 두 번이나 혼자 산전 검사를 받으러 가게 내버려두죠? 곧 출산이라는 거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연희는 숨을 몰아쉬며 몰아붙였다.“검사보고서는 제대로 보기는 한 거예요? 재검이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니!”구택은 한동안 말이 막혔다가, 결국 얼굴에 죄책감을 띠며 낮게 말했다.“그날 밤 신제품 문제로 정신이 없어서 보고서는 결과만 대충 봤어요.”이에 연희는 냉소를 터뜨렸다.구택은 소희를 깊이 바라보며 낮게 물었다.“소희야,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변한 거지? 그날 네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건 내 잘못이지만 왜 재검을 간다고 말하지 않았어?”“내가 보지 못했다 해도 네가 알려줬다면 반드시 함께 갔을 거야.”그러나 연희가 소희 앞을 막아서며 날카롭게 말했다.“사장님 마음속엔 언제나 일이 우선이잖아요. 약속 깨고 혼자 두고 간 당신에게, 왜 굳이 알려야 했겠어요?”소희는 눈을 떨구며 담담히 말했다.“그땐 별생각 없었어. 그냥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이틀 뒤, 구연은 심명에게 전화를 걸어 프로젝트 관련해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심명은 흔쾌히 승낙했지만, 임씨그룹으로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두 사람은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구연은 먼저 도착해 여유 있는 시간 동안 대화할 문제들을 정리하고, 서류에 하나하나 표시를 해두었다. 그리고 약속 시각이 한참 지나서야 심명이 나타났다.남자는 하얀 셔츠 차림에 귀에는 검은색 귀걸이를 하고 있었고, 묘하게 이상한 매력을 풍겼다.구연은 심명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숙여 서류를 정리했다. 남자가 다가오자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심명 씨.”심명이 가볍게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얼굴 상처는 괜찮아졌나요?”남자가 첫마디부터 자신을 걱정하자, 구연은 잠시 멍해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괜찮아요.”심명은 안도하는 듯 표정을 풀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구연의 심장은 순간적으로 빠르게 뛰었다. 그러나 애써 평정심을 되찾으며 서류를 내밀었다.“이 몇 가지 사안에 대해서는 같이 맞춰야 하거든요.”“말해 봐요. 나는 들을 테니까.”심명은 의자에 기대어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구연을 지켜봤다.구연은 괜히 그 시선을 피하며 호흡을 가다듬고는 일 이야기를 시작했다.대화가 십 분 남짓 이어지던 순간 차가운 그림자가 성큼 다가왔다.곧장 심명의 앞에 서더니 주먹이 남자의 얼굴에 날아들었다.심명은 불시에 얻어맞고 몸을 젖혔고 놀란 남자는 곧 반격하려 했다.구택의 눈빛은 먹빛처럼 싸늘했고 주먹은 다시 심명을 향해 날아갔다.이에 구연은 급히 몸을 날려 구택의 앞을 막았다.“사장님, 말씀으로 풀 수 있는 문제예요!”“구연 씨, 비켜봐요!”심명은 입가의 피를 닦으며 낮게 호통치자 구택의 얼굴은 철처럼 굳어 있었다.“비키라고요!”구연은 물러서지 않고 차갑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이미 인터넷에 심명 씨와 사모님의 소문이 떠도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이 자리에서 몸싸움을 벌이시면 그 소문이 기정사실화로 될 거예요.”구택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냉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