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4화. 흔들리는 시작

Auteur: 데이지
last update Dernière mise à jour: 2026-03-05 14:16:36

이준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서윤의 손길이 남긴 온기는 이미 사라졌지만,

그 감각은 피부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따뜻함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마음에 슬쩍 손을 얹고 갔다는 듯한.

그는 몇 번이고 몸을 뒤척였지만, 도무지 편해지지 않았다. 

피곤했지만 졸리지 않았고, 고요했지만 마음은 어딘가 불안정했다. 

무엇보다, 그의 생각이 자꾸만 서윤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목소리, 손끝, 그리고 미소까지.

도대체 왜 그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그건 이준 본인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이준은 이레제약 본관 회의실에 들어섰다.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를 마주한 임원들은 뭔가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고, 말투는 예전보다 덜 날카로워졌다. 

짧은 질문 하나에도, 조금은 더 상대의 말을 기다리는 여유가 생겨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대표가 보여주는 미세한 변화에 대해, 

감히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이준은 회의 도중 몇 차례 창밖을 바라보았다. 

봄이 깊어지는 창가, 하얀 목련꽃이 흔들리는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그 흔들림이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디로 향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을 뿐이었다.

서윤은 별관에 머물며 그날 오후의 처방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촉각 대신 시각 자극을 활용한 감정 이완 처방이 예정되어 있었다. 

은은한 조도, 부드러운 색감, 시선을 부드럽게 붙잡는 영상 자료들. 

그리고 그 속에 은밀하게 섞인 심상 유도.

그녀는 거울 앞에 앉아 잠깐 머리를 매만졌다. 

얼굴에 힘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오늘은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준이 그녀를 어떻게 바라볼지가 신경 쓰였다.

그는 이제껏 한 번도 그녀에게 사적인 관심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어제, 그가 손끝으로 건넨 미세한 접촉은 자꾸만 그녀의 마음에 맴돌았다.

그건 분명히, 아무렇지도 않은 제스처가 아니었다.

오후가 되어 이준이 도착했다. 오늘도 정해진 시간보다 3분 일찍이었다.

서윤은 부드러운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오늘도 오셨네요."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어제보다 조금 더 편한 자세였다.

"어제 잠은 좀 주무셨어요?"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처음엔 뒤척였는데, 새벽쯤엔 괜찮아졌습니다."

그 말에 서윤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그보다 더 빨리 안정을 느끼실 수 있도록 해보죠."

그녀는 영상 장비를 조정하고, 조명을 낮추었다. 

그리고 이준의 앞에 조용히 앉았다. 방 안이 어두워지자, 

화면 속 영상이 천천히 재생되었다.

느리게 움직이는 파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리고 풀숲 사이로 부는 빛.

이준은 어느새 그 영상에 빠져들었다. 

그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고, 손끝에 힘이 풀렸다.

그 조용한 안정 속에서, 서윤은 그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상처받은 마음을 안고 세상과 단절하려 했던 그가, 

지금은 점점 이 공간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마음의 틈을 내주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그녀 역시 부인할 수 없는 감정을 품게 만들고 있었다.

치유란 언제나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천천히 감각을 나누는 이 시간 속에서

그들의 거리는 점점, 아주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    *    *    *    *    *    *    *    *    *    *    *    *

그날 밤, 이준은 혼자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전날 밤보다 더 깊은 밤, 회의도 없고 전화도 울리지 않는 고요한 시간이었다. 

창밖의 불빛들이 반쯤 닫힌 블라인드 사이로 어렴풋이 번져들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책상 앞도, 회의실도 아닌, 

그냥 조용히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작은 구석에서. 

눈을 감아보려 했지만, 다시금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영상 속 파도, 창가를 스치는 바람,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 더 선명했던 서윤의 눈빛.

그가 본 건 단지 힐러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건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의 눈빛이었고, 

그 시선 안에 담긴 온도는 이준의 마음을 고요하게 흔들고 있었다.

서윤은 별관의 방을 정리하며 촛불을 하나씩 껐다. 

오늘 이준의 반응은 확실히 달랐다. 

그는 점점 더 자연스럽게 그녀의 공간에 들어오고 있었고, 

긴장감 없이 스스로를 위탁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에게 의미하는 건 단순히 환자의 신뢰를 얻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가 그의 감정선 안으로 조용히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치유는 결국, 마음과 마음 사이에 오가는 흐름이라는 것을. 그날 그녀는 더 깊이 실감했다.

다음 날 오후, 특별한 처방은 없었다. 격일로 운영되는 일정 사이, 

서윤은 이준의 사무실로 잠시 호출을 받았다. 별다른 사유는 없었다. 

회의 명목도, 업무 지시도 아닌, 단지 "차 한 잔 마시죠"라는 짧은 메시지.

서윤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별관에서 본관으로 향했다. 

고층 엘리베이터 안,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그 얼굴엔 아주 희미하지만, 무언가 설레는 감정이 묻어 있었다.

이준의 집무실은 조용했고, 짙은 와인 컬러의 커튼 사이로 

부드러운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커튼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도시의 윤곽, 

그리고 그 앞에 서윤이 들어섰다.

"오랜만에 주간에 뵙네요, 대표님."

이준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굴엔 특별한 표정이 없었지만, 

그 시선은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서윤 씨 덕분에 잠을 자는 시간이 조금씩 정리가 되고 있어요. 

그냥,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서윤은 조용히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도 기쁩니다."

이준은 찻잔을 건넸다. 허브티였다. 진한 캐모마일 향이 퍼지는 공간, 

그 사이에서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있었다. 업무가 아닌, 

처방도 아닌, 단지 두 사람의 존재만으로 구성된 공간.

그건 처음이었다. 서윤은 조용히 물었다.

"이런 자리, 자주 하시는 편은 아니신가요?"

이준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런 건 처음이에요."

그의 대답은 짧았지만, 정직했다. 

서윤은 그 말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역시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둘 사이의 대화는 짧고 간결했지만, 

그 속에는 이전과는 다른 결이 섞여 있었다. 

긴장이라기보다는 조심, 경계라기보다는 집중.

그리고 그 순간, 커튼 사이로 불어든 햇살이 서윤의 얼굴을 비췄다. 

그 빛 아래에서 그녀는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고, 

이준은 무심코 그녀의 옆선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곡선, 미간에 살짝 잡힌 주름, 그리고 입꼬리에 머문 잔잔한 미소.

그는 고개를 돌려 찻잔을 들었지만, 입을 대진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날, 손을 얹었던 순간."

서윤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제 반응이 기억나세요?"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네. 기억나요."

이준은 천천히 웃었다. 아주 작게.

"그게 꽤 오래 남더군요. 생각보다."

그 말은, 이준이 그녀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그 감각이 그를 계속 따라다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서윤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감정을 숨기려는 게 아니라, 

드러내는 순간을 고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 사이에 붉은 커튼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감정이라는 이름의 차양, 서서히 드러나는 관계의 기미.

그리고 그 아래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조금씩, 감정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Continuez à lire ce livre gratuitement
Scanner le code pour télécharger l'application

Latest chapter

  • 대표님의 은밀한 처방전   27화. 밤은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늦은 밤. 창밖에는 빗방울이 조용히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공기 속, 어두운 사무실은 이미 조명을 끈 채 반쯤 잠든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가 밤 열한 시를 알리고 있었고, 이준은 아직 퇴근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서윤의 메모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은색 펜으로 눌러 쓴 글씨. 조심스럽게 꾹꾹 눌러 쓴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글귀에는, 하루치 피로를 다독이는 온기가 담겨 있었다.“오늘은 커피 말고, 따뜻한 우유를 드세요. 몸이 먼저 회복돼야 마음도 따라와요.”그 짧은 문장 속에 담긴 배려가, 이준의 마음에 조용한 파장을 남기고 있었다.언제부턴가 그는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돌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고 있었다. 경계보다, 익숙함보다, 더 빠르게 스며드는 감정이 있었다.그리고 그런 감정을 누구보다 먼저 느끼고 있는 사람은 서윤 자신이었다.그날따라 서윤은, 평소보다 더 조용히 이준의 공간을 정리하고 나왔다.마치 어떤 분위기나 감정의 파동이 그 안에 잔잔하게 남아 있는 걸, 무너뜨리고 싶지 않다는 듯이.현관을 나서던 순간, 이준이 뒤늦게 불러세운 건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서윤 씨.”서윤은 천천히 돌아섰다. 문고리를 손에 쥔 채, 그의 목소리를 향해 눈길을 줬다.“…오늘은 그냥 보내고 싶지 않네요.”그 말 한마디가 무겁게 가라앉은 밤공기를 흔들었다. 그리고 서윤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복도를 따라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둘 사이의 거리에는 어떤 설명도, 조건도 없었다. 단지 마음이 머물고 싶은 곳에 천천히 닿아가고 있을 뿐.사무실 안은 여전히 어둡고 고요했지만, 서로의 존재가 그 공간을 천천히 따뜻하게 채우고 있었다. 이준은 조용히 서윤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아무런 전조 없이,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손끝을 감쌌다.서윤의 손은 놀랄 만큼 차가웠고, 이준의 손은 그만큼이나 조심스러웠다.“…요즘, 이상해요. 감정이 자꾸 앞서요

  • 대표님의 은밀한 처방전   26화. 입 안에서 천천히 녹는 마음

    아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찾아왔다. 하지만 서윤의 몸과 마음엔 어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부엌 한쪽에 놓인 머그잔, 접힌 담요, 창가에 기대어 있던 남자의 등. 그것들이 모두 낯설지 않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조금씩 그와 닮아가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서윤은 조용히 물을 끓이며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정리했다. 이준이라는 사람은, 다가오지 않으면서도 한 걸음씩 들어오고 있었다. 경계를 넘지 않지만, 머뭇거림조차 배려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방식으로.현관 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이 창 너머로 스며들어 이준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회색 니트와 트레이닝 팬츠 차림의 그는 전날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고, 그 표정에도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묻어 있었다."잘 주무셨어요?"이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의 침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조심스러운 인사였다.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따랐다. 컵 사이로 퍼지는 향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조금 부드럽게 만들었다."어제… 불편하진 않으셨어요?"그의 질문엔 진심이 묻어 있었다. 단지 매너나 형식이 아닌, 진짜 걱정이. 서윤은 머리끝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천천히 대답했다."생각보다… 괜찮았어요."이준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 미세한 변화 하나가 무겁던 아침을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그는 창가 쪽으로 걸어가 블라인드를 반쯤 올렸다. 밝아진 실내가 둘 사이를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만들어주었다.식탁에 마주 앉아 조용히 아침을 나누는 시간. 특별한 대화 없이도 두 사람 사이엔 무언가 흐르고 있었다. 작은 눈빛,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 커피 향이 닿는 순간들. 그런 것들이 감정을 조금씩 증폭시켰다.식사를 마친 이준이 문득 말했다."오늘 병원 가지 않으셔도 돼요?"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미소를 보였다. "당분간은 오후 일정으로만 잡아놨어요. 오전엔 시간 여유가 있어서요."

  • 대표님의 은밀한 처방전   25화. 조금 더 가까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어색한 정적이 없었다. 오히려 말이 필요 없는 편안함이 천천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이준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그녀가 기대고 있는 어깨 너머로 고요한 밤을 바라보았다.서윤은 여전히 그의 어깨에 가볍게 몸을 기댄 채, 잔잔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체온이 등 너머로 조심스럽게 전해졌고, 그 감각이 마치 오랜만에 돌아온 따뜻한 집처럼 익숙하고 부드러웠다.이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 서윤 씨가 이렇게 가까이 있어 주는 게, 어쩐지 믿기지 않아요."서윤은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말했다."믿지 않아도 괜찮아요. 대신… 그냥 느끼기만 해도 돼요."그 짧은 문장이, 이준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늘 분석하고, 이해하려 했던 그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단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싶었다.조용한 시간이 흘렀고, 서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 움직임에 조금 놀란 듯 그녀를 바라봤다."벌써 가세요?"그녀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오래 있으면, 다음이 더 어색해질까 봐요. 오늘은 여기까지."이준은 잠시 머뭇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럼… 다음도 있는 거죠?"서윤은 그를 바라보며 대답 대신 손을 살짝 흔들었다. 짧은 손짓 하나에 이준은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으며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고마웠어요. 오늘. 그리고… 맛있었어요. 정말로."그녀의 말에 이준은 다시 한 번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서윤 씨가 있어줘서 가능했어요. 오늘이라는 시간이."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 그 속에는 다음을 기다리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서윤이 돌아간 뒤, 이준은 조용히 거실 정리를 마치고, 부엌에 남은 찻잔을 씻었다. 물소리가 가라앉자, 집 안엔 그녀의 잔향만이 남았다. 라벤더 향초가 꺼진 자리에서도, 그녀가 앉았던 쿠션의 모양에서도.그는 그 향기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마치 그 따

  • 대표님의 은밀한 처방전   24화. 온기를 남기고 간 밤

    이준은 서윤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조용히 사무실 창가에 서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도시는 밤을 향해 깊어지고 있었고, 불규칙하게 점등된 창들 사이로 사람들의 삶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그는 아직도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그저 그녀와 마주했던 진료실의 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그 시각, 서윤 역시 자신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라벤더 향초는 반쯤 타들어가 있었고, 불빛은 어느새 작아져 그녀의 그림자도 흐릿해지고 있었다.이준의 마지막 말, '오늘 서윤 씨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었어요', 그 말이 이상하게도 밤새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 어떤 위로보다도 진심처럼 느껴졌기에.다음 날 아침, 진료실 앞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그 짧은 눈맞춤에는 이전과는 다른 작은 울림이 있었다."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좋은 아침이에요. 잘 쉬셨어요?""네, 덕분에요. 대표님도요?"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천천히 되새겼다. 덕분에 그 말이 그토록 따뜻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오전 회의 후, 이준은 커피 한 잔을 들고 옥상으로 향했다. 거기엔 이미 서윤이 라벤더 화분 옆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그가 다가오는 걸 느끼고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다."여기… 생각보다 조용해서 좋아요. 자주 오세요?""네, 예전에는 종종 왔는데… 요즘은 그럴 여유가 없었어요."이준은 그녀 옆에 앉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어제… 그 말.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는 말요. 이상하지 않으셨어요?"서윤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오히려… 저도 같은 기분이었어요. 요즘은 마음이 먼저 움직이게 되는 날들이 많거든요."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햇살에 살짝 반사된 그녀의 머리카락, 바람에 흔들리는 화분의 그림자, 그 모든 것이 조용하고 따뜻하게 그를 감싸 안았다.그날 저녁, 퇴근 무렵의 복도에서 다시 마주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었다. 병

  • 대표님의 은밀한 처방전   23화. 혼자가 아닌, 둘이 만든 정적

    병원 건물은 평일의 마지막 빛을 받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준은 자신의 진료실에 들어서자 창문을 반쯤 열었다. 가을바람이 천천히 밀려들며 서랍 위에 둔 종이들을 살짝 흔들었다.그는 조용히 그 바람을 마주했다. 이전에는 이처럼 하루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어색했다. 하지만 요즘은… 하루의 끝자락에서 꼭 한 번은 서윤을 떠올리게 되는 자신을, 조금은 받아들이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서윤은 병원 구내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들고 나타났다. 하나는 늘 자신이 마시던 라떼, 다른 하나는 얼마 전 이준이 마셨던 블랙."오늘도 환자 많으세요?"서윤의 물음에 이준은 커피를 건네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주말 전이라 그런지 예약이 많아요."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커피잔을 가리키며 물었다."근데… 제 커피까지요?"서윤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냥… 어제 감사했어요. 혼자서만 좋은 시간을 보낸 건 아닌 것 같아서요."그 말에 이준은 잠시 멈칫했다. ‘혼자가 아닌’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그날 오후, 병원 옥상은 조용했다. 이준은 짧은 틈을 내어 옥상으로 올라왔고, 그곳엔 이미 서윤이 라벤더 화분을 옮겨 놓고 있었다."조금 더 빛이 잘 드는 쪽으로요. 향이 더 진해질 것 같아서."그녀의 설명에 이준은 미소를 머금었다. 두 사람은 난간 가까이에 나란히 앉았다. 바람이 불어 잎이 흔들렸고, 조용한 정적이 둘 사이를 채웠다.하지만 그 정적은 더 이상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가 있는 공간을 자연스럽게 감싸주는, 조용하고 다정한 시간이었다.서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가끔 생각해요.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과, 그냥 함께 있는 거요."이준은 그 말을 곱씹듯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말없이도 편한 게… 참 귀한 거라는 걸 요즘 많이 느껴요."그들은 그렇게, 말보다 마음이 앞서는 오후를 함께했다.해질 무렵,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 대표님의 은밀한 처방전   22화. 마음이 머무는 곳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병원 복도에는 환자들의 움직임과 간호사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얽혀 들려왔다. 이준은 짧은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서윤이 있는 카운슬링실을 향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그녀가 있는 공간을 향해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안에서 들려오는 서윤의 웃음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 누군가와 상담 중인 듯,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뜻하게 흘렀다.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평온해졌다.그는 괜히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을 조심스레 쥐었다 놓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진료실로 돌아갔다. 다가가고 싶지만 방해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 그것이 그가 이제 막 배우고 있는 감정의 온도였다.오후 내내, 이준은 어딘가 산만했다. 환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마음속 한편에서는 계속 그녀의 웃음소리가 맴돌았다. 그저 평범한 한순간이었을 뿐인데, 그 순간이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진료가 끝난 늦은 오후, 그는 다시 그녀를 향해 걸었다. 이번엔 노크를 했다. 서윤이 문을 열었을 때, 이준은 조용히 작은 플라스틱 화분 하나를 내밀었다."이거… 복도에서 보다가 예뻐서요. 카운슬링실 창가에 놓으면 좋을 것 같아서."서윤은 화분을 받아 들고 천천히 웃었다. 화분 안에는 작은 허브 잎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라벤더였다."감사해요. 이준 씨. 향이 좋네요.""서윤 씨가 알려준 향이에요. 그날 이후로… 자꾸 찾게 되더라고요."두 사람은 창가에 화분을 함께 놓았다. 창문 너머로 햇살이 스며들고, 그 빛에 비친 라벤더 잎은 고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가끔 생각해요."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 공간이 참 이상해요. 마음이 무거운 이야기가 오가는데, 어쩐지 점점 더 따뜻해져요. 사람들의 고백이 이 공간을 다정하게 바꿔주는 것 같기도 하고."이준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그리고 이준 씨와 나누는

Plus de chapitres
Découvrez et lisez de bons romans gratuitement
Accédez gratuitement à un grand nombre de bons romans sur GoodNovel. Téléchargez les livres que vous aimez et lisez où et quand vous voulez.
Lisez des livres gratuitement sur l'APP
Scanner le code pour lire sur l'application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