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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마음의 거울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3-05 14:16:57

서윤은 자신의 손끝이 아직 기억하고 있는 감각을 생각했다. 

손바닥에 얹혔던 온기, 그 안에서 미세하게 떨리던 맥박. 

그리고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던 그의 고집스러운 정적.

그날 밤 이후로, 이준은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그의 눈빛은 이야기하고 있었다. 더는 거절하지 않겠다는 뜻을. 

그리고 아마도 그녀만이 아닌 스스로의 마음도.

오늘은 처방이 없는 날이었다. 서윤은 별관에서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고, 

이준은 본관 회의실에서 마지막 미팅을 마치고 나오는 중이었다. 

하지만 우연처럼, 아니 어쩌면 의도된 흐름처럼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다.

"오늘은 안 오시네요."

서윤이 먼저 웃으며 말했다.

이준은 그녀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늘은 그냥, 잠깐 걸으려구요."

"산책하시려구요?"

그는 문득 생각이 난 듯 입꼬리를 올렸다.

"혼자 걷는 게 익숙해서요. 그런데 오늘은... 같이 걷고 싶은 사람이 생겼네요."

서윤은 그 말을 곧장 이해하지 않았다. 

아니, 이해했지만 의식하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그 말의 주체는 그녀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별관 뒤편 작은 정원길.

잔잔한 조명 아래 둘은 나란히 걸었다. 특별한 대화는 없었다. 

꽃 이름도, 계절도, 날씨도 묻지 않았다. 단지 걸었다.

 바람을 느끼며, 발소리가 겹치는 리듬에 귀를 기울이며.

그러다 이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끔, 이런 시간도 필요하겠죠. 말없이 누군가 옆에 있다는 거."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래요. 누군가 옆에 있어주는 시간. 그게 꼭 말이 필요하진 않죠."

이준은 그녀를 옆눈으로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서윤 씨는, 언제 제일 혼자라는 느낌이 드세요?"

그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서윤은 그걸 느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외로움을 서윤의 언어로 확인하고 싶어 하고 있었다.

"모두가 나를 이해한다고 말할 때요."

그녀의 대답에 이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좀... 뜻밖이네요."

서윤은 천천히 숨을 쉬었다.

"다들 제가 사람 마음을 잘 안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힘들다는 말을 하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네가 해결할 수 있잖아'라고 해요. 그 말이요, 

가끔 저를 제일 고립되게 만들어요."

그 말은 이준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다. 자신도 그런 말을,

 혹은 그런 태도를 얼마나 반복해왔는지 생각하게 했다.

"그럼 서윤 씨는 누구한테 기대요?"

"기대지 않아요. 기대다 보면 무너지는 쪽은 늘 기대한 쪽이니까."

이준은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러다,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흘렸다.

"그럼... 내가 잘못한 거네요."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이준은 멈춰 섰다. 

그 시선엔 어둠 속에서 떠오른 고백 같은 정직함이 있었다.

"저는... 그날 이후, 자꾸 당신에게 기대고 싶어져요. 

아무 말도 안 해도, 그냥 거기 있어 주는 사람처럼. 

근데 그게, 당신을 더 외롭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생각 못 했어요."

그 고백은 예기치 않았지만, 서윤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에요. 저, 기대 받는 게 무서운 거지 싫은 건 아니에요. 

그날 이후로... 저도 생각 많이 했어요. 

어떻게 해야 이 관계를 상처 없이 이어갈 수 있을까."

바람이 불었다. 이준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서윤은 그 손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잡았다.

그 손은 따뜻했다. 단지 체온 때문이 아니었다. 마음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그 온기가 가슴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날 밤, 별관의 불이 꺼지고 커튼이 닫혔을 때,

서윤은 혼자 남은 방에서 그의 손을 다시 떠올렸다.

그건 단순한 손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에 닿기 시작한 거울이었다.

*    *    *    *    *    *    *    *    *    *    *    *    *    *    *    *

이준은 여전히 서툴렀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도, 

그것을 인정하는 데에도. 하지만 이제는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그 자신이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맨 얼굴을 들키는 것.

서윤은 그 사실을 조심스럽게 알아가고 있었다. 이준의 말없는 시선, 

조심스레 내미는 손짓, 그리고 침묵 속에서도 느껴지는 미세한 동요들. 

그것이 이준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백이라는 걸.

그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달라졌다. 

겉으로 보기엔 이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서로를 향한 마음의 결이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서윤은 여전히 계약의 테두리를 지키려 했고, 

이준은 그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조금씩 흘려보냈다. 

그들은 마치 얇은 유리 위를 걷는 사람들처럼, 

조심스러우면서도 서로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밤, 별관의 작은 휴게실. 이준은 서윤에게 차를 권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이준 대표님, 이 차를 기억하고 계셨네요."

"당신이 좋아했잖아요. 그날, 처음으로 잘 잤다고 했던 날에도 마셨던 차라서."

서윤은 고개를 숙였다. 

그런 사소한 기억까지 새기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따뜻했다.

이준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물었다.

"서윤 씨는... 다른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신경 써본 적 있어요?"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웃었다.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돌보는 감정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누군가를 지켜보고, 다치지 않게 해주는 역할."

이준은 그 말을 곱씹듯 되새기며,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은요? 저한테 느끼는 건, 돌보는 감정인가요?"

서윤은 답하지 못했다. 대신, 손에 든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다만, 대표님은 처음이에요. 

제가 누군가를 지켜보는 게 아니라, 같이 멈춰 서고 싶다고 느낀 사람."

그 말에 이준은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늘 사람들 앞에서 멈추는 법을 몰랐다. 

늘 앞서 걷거나, 뒤에서 밀어내거나.

그런데 서윤은, 그와 같은 속도로 걸어주고 있었다. 

그것이 그를 안심시켰다.

다음 날 저녁, 이준은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별관을 찾았다.

"오늘, 특별히 힘든 일 있으셨어요?"

서윤이 물었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당신 얼굴이 보고 싶어서요."

그 대답은 솔직했고, 무방비였다. 서윤은 순간 마음이 찌릿했다. 

그런 말은 너무 무기처럼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무기는 차가운 것이 아니라 따뜻한 무게였다. 

그녀는 그 따뜻함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내주었다.

그날의 처방은 단순했다. 말없이 마주 앉아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는 시간. 

서로의 체온이 물을 통해 전해졌다.

"지금 이 순간, 아무 생각도 안 나요."

이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그게 좋은 거예요. 생각은 머리를 차갑게 만들지만, 

지금 우리는 따뜻한 데 있으니까요."

서윤의 말에, 이준은 처음으로 조금 길게 미소를 지었다.

밤이 깊었다. 이준이 돌아가고 난 뒤, 서윤은 한동안 불을 끄지 못했다. 

손끝에 남은 따뜻함이, 너무 또렷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일의 일부가 아니었다. 감정의 일부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를 무섭게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감정은... 조금은 기대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녀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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