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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경계의 바깥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3-05 14:17:29

따사로운 오후, 유리창 너머로 은은하게 햇살이 흘렀다. 

서윤은 책상 앞에 앉아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연습장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연필심을 쥔 손끝은 차갑고 말라 있었고, 그녀의 머릿속엔 더 이상 말로 

옮길 수 없는 무언가가 가득했다.

그건 분명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이름을 쉽게 붙이지 못했다. 

이건 걱정일까, 설렘일까. 아니면, 금기를 넘는 조용한 충동일까.

이준은 요즘 아침이면 괜히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원래 단정함을 유지하는 편이었지만, 요즘은 그 단정함에 미세한 긴장감이 더해졌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표정. 누군가를 만나는 하루의 설렘.

그리고 그는 그 '누군가'가 되어버린 자신을, 이제 부정할 수 없었다.

별관, 늦은 오후. 오늘은 둘 모두 약속 없이 마주쳤다. 

우연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서로를 향한 발걸음이었다.

서윤은 먼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굳이 처방이 없는데도 오셨네요."

이준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그냥요. 이 공간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요즘은 조금 안정이 되어서."

그 말에 서윤은 애써 담담한 얼굴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은 알 수 없이 요동쳤다. 그가 이 공간을 찾는 이유가 

'안정'이 아닌 다른 감정에서 비롯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의 정적 후, 서윤은 조용히 조명을 낮추고 작은 러그 위에 두 개의 쿠션을 펼쳤다. 

바닥에 앉은 이준은 다리를 편하게 뻗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렸을 땐 이런 시간을 상상도 못했어요. 

누군가랑 조용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차분해질 수 있다는 걸."

서윤은 그 옆에 앉으며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속도로 감정을 배우는 것 같아요. 

대표님도 그 과정을 겪고 계신 거고요."

그 말에 이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럼 서윤 씨는요? 당신은 지금 어떤 감정을 배우고 있어요?"

질문은 부드러웠지만, 예리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을 아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주 작게 입을 열었다.

"내 감정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는 걸... 다시 받아들이고 있어요. 

그게 겁나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젠... 용기를 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 말은 거의 고백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보다 조심스러웠기에, 더 진하게 마음에 남았다.

이준은 자리에서 일어날 때,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이 공간 안에서만 당신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면... 

그건 선을 넘는 걸까요?"

서윤은 그의 말에 잠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그 선은 대표님이 아니라, 저 자신에게 묻고 싶은 말이에요."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표정은, 이미 경계 너머로 발을 디딘 사람의 것이었다.

이준은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서며 아주 작게, 

그녀만 들을 수 있을 만큼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선 바깥에서, 나는 당신을 기다릴게요."

그 말이 남기고 간 여운은, 오래도록 그녀의 가슴속을 울렸다.

*    *    *    *    *    *    *    *    *    *    *    *    *    *    *    *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 업무도, 통화도, 

아무런 움직임도 잠시 멈춘 늦은 밤. 

사무실 복도 끝 창가에 서윤은 가만히 서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밤이 잔잔하게 펼쳐졌다. 

수많은 불빛들 사이, 어쩌면 그와 마주했던 그 공간도 

어딘가에 조용히 숨 쉬고 있을 것이다. 그를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그의 목소리, 시선, 손끝의 체온이 떠올랐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생각은 멈추지 않았고, 그 감정은 더는 숨겨지지 않았다.

이준은 요즘 자주 그 공간에 가고 싶어진다. 

그가 만들어준 장소였지만, 이젠 어느새 그녀가 그 공간의 숨결이 되어 있었다. 

서윤 없는 별관은 의미가 없었다. 그곳은 서윤의 목소리, 

손길, 시선이 고스란히 남은 장소였다.

그는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40분. 계약된 시간은 아니었지만, 서윤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 없이 폰을 다시 내려놓았다.

서윤이 별관에 도착했을 때, 이준은 이미 그곳에 앉아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마주친 둘의 눈빛에는 놀람보다 익숙함이 먼저 스쳤다.

서윤이 조용히 웃었다.

"대표님도... 오셨네요."

이준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어요. 당신도 그렇죠?"

그 말에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그 옆에 앉았다. 

둘 사이엔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공기 같은 것이 있었다. 

말보다 감각으로 느껴지는 감정.

그녀가 차를 따르자, 찻잔 사이로 따스한 증기가 피어올랐다.

"요즘은 어떠세요? 몸 상태나... 마음은."

그 질문은 늘 해왔던 것처럼 들렸지만, 이번엔 무언가 달랐다.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준은 잠시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당신 덕분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그게 불안하기도 해요. 당신이 없으면, 다시 무너질까 봐."

그 말은 담담했지만, 분명한 고백이었다.

서윤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저도... 무서워요. 대표님에게 감정이 생기면,

 내 역할을 잃는 것 같아서. 나 자신이 흐려질까 봐."

서로를 바라보며 그렇게 앉아 있는 시간. 침묵은 그저 공백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리되지 못한 마음의 숨결이었다.

이준이 먼저 일어섰다. 그러나 돌아서기 전, 그

녀에게 다가와 아주 짧게 말했다.

"지금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계속 당신에게 가고 있어요. 그 방향으로."

그 말은 마음의 방향을 고백한 것이었다.

서윤은 그 자리에 앉은 채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도, 지금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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