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은 그녀에게 이건 그저 덧없는 꿈일 뿐 기대를 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곧이어 배정우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슬기야, 그날 서촌에서 네가 불길 속에 있는 걸 보고 너무 놀랐어. 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뛰어 들어갔어. 그때 우리 둘이 함께 거기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어.”임슬기는 몸이 점점 더 심하게 떨렸다.‘배정우가 이런 말을 한다고? 그리고 서촌이라니... 정말 서촌에서 날 구해준 사람이 승윤 씨가 아니라 정우였단 말이야?’진승윤이 말했을 때 그녀는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던 게
“흥, 임슬기. 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어차피 정우도 믿지 않을 테니까 마음대로 지껄여 봐.”그러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임슬기를 어떻게 괴롭혀 둘의 이혼을 더 빨리 진행시킬지 생각했다.지난 2년 동안 배정우는 반도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었다. 연다인은 그녀가 들어와 살게 되면 배정우와 더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임슬기를 대하는 배정우의 태도만 더 좋아졌다.완전히 제 발등을 찍은 꼴이 돼버렸다. 배씨 가문 사모님의 자리에 앉지 못하면 단 하루로 편히 살 수 없었다.부엌으로 들어가던 연다인은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
“무슨 일이야?”연다인이 임슬기를 보며 훌쩍거렸다.“슬기가 화를 내면서 내 몸에 국을 쏟았어.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을까 봐 걱정돼...”휴대폰 너머의 배정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알았어. 지금 갈게.”연다인은 전화를 끊자마자 약 올리듯 웃으며 말했다.“임슬기, 우리 둘 중에 누가 벌을 받게 될까?”그녀는 절대로 배정우와 임슬기가 다시 만나는 꼴을 볼 수 없었다. 13년 전의 비밀이든 2년 전의 비밀이든 영원히 이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되었다.임슬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연다인을 보다가 결국 웃음을
그는 침대 옆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창백하고 깡마른 임슬기를 거칠게 잡아 일으켰다.“임슬기, 아직도 자는 척이야? 사람 때릴 힘도 있으면서 어디서 연약한 척인데?”임슬기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익숙한 남자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왜? 말문이 막혔어?”“무슨 말을 하겠어. 내가 말하면 믿어주긴 할 거고?”그 한마디에 배정우는 흠칫 놀라더니 가슴 한쪽이 저도 모르게 아팠다.어젯밤에 술에 취하긴 했지만 그때도 이 질문을 했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걸 직접 똑똑히 봤는데 믿지
연다인은 위층으로 올라가 유리문 밖에 서서 쓰러져 있는 임슬기를 내려다보며 욕설을 퍼부었다.“임슬기, 봤지? 정우는 네가 말하는 그 빌어먹을 진실 따위에 관심도 없어.”그러고는 유리문을 열려다가 그제야 배정우가 문을 잠그고 열쇠까지 가져갔다는 걸 알았다.그녀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유리문을 발로 걷어찼다.“젠장.”힘없이 난간에 기댄 임슬기가 겨우 눈을 떴다.“연다인, 네가 이겼다면서 왜 그렇게 화를 내?”“흥. 얼마나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고작 햇볕에 내놓는 게 전부라니. 생각할수록 열 받아.”화가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창문이 없이 뻥 뚫린 베란다라 비가 오면 그대로 젖게 될 것이다.‘정우는... 오늘 밤에는 들어오지 않겠지. 다인이가 옆에 있으니까.’그 생각에 임슬기는 또다시 가슴이 아팠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유리문도 잠겨 있어서 피할 곳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내밀어 아래층 잔디밭을 내려다보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난번에도 여기서 기어 내려갔으니 이번에도... 가능하지 않을까?임슬기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조심스럽게 난간을 넘었다. 하지만 다리를 다쳐 미끄러진 바람에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손바닥에 박힌 도자기
‘임신?’임슬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의사를 쳐다보았다.“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제가 임신했다고요?”의사가 한숨을 내쉬었다.“네. 근데 폐암에 걸린 상태로는 임신해선 안 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잘 쉬셔야 한다고요. 근데 항암 치료도 받지 않고 또 자꾸 다쳐서 병원에 오면 어떡합니까? 슬기 씨, 이러면 제가 아무리 명의라도 슬기 씨를 치료하지 못해요.”의사가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슬기 씨, 아이를 포기해요. 그럼 며칠이라도 더 살 수 있어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임슬기의 머릿속에는 임신이라는 말만
배정우는 임슬기가 떨어지거나 다쳤을까 봐 비를 맞으면서 아래층을 찾아 헤맸지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한참 뒤 진승윤의 전화를 받고서야 임슬기가 도망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허. 또 도망쳤어?’“정우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네가 믿지 않아서 이젠 너무 지쳤어.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해?”임슬기의 목소리에 배정우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눈빛에 살기가 가득하여 어둡기 그지없었다.“나랑 이혼하고 다른 남자한테 가려고? 어림도 없어.”배정우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임슬기의 머리채를 잡고 억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봐.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
“혼자 와. 한 시간 줄게. 안 오면 지금 당장 임종현 한쪽 팔부터 박살 낸다.”속으론 수상하다고 느꼈지만 종현이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임슬기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임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슬기는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뿐이었다.이쯤 되자 임슬기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결국 임슬기는 어쩔 수 없이 강재호를 불러 김현정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강재호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나가려는 임슬기를 덥석 붙잡았다.“임슬기 씨, 어디 가세요?”강재호가 보기에도 어딘가
“슬기 언니, 매일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돼요. 주말엔 종현이 데리고 잠깐 놀러 다녀와요.”임슬기는 김현정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자꾸 나 보내려고 하니까 더 마음이 쓰여. 종현이도 이제 중3이라 주말에도 공부하느라 바쁠 거야.”김현정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정말이예요. 슬기 언니, 나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안 해요.”“밥 먹자, 반찬 다 식겠다.”그 말에 김현정은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임슬기는 몰래 그녀를 흘낏 바라보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최근 들어 밤마다 피투성이가 된 김현정이 욕조에
아파트.연다인이 막 집에 들어서자마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 앞에 선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배정우, 너 여기 왜 왔어?”“내 집인데, 내가 오면 안 돼?”연다인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네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김현정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무슨 짓?”연다인은 잽싸게 그의 팔을 감싸며 새침하게 말했다.“배정우, 설마 너도 날 의심해? 날 믿는다고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언니가 나 대신 전해줘요. 그냥...”깊게 숨을 들이쉰 김현정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채 돌아서서 임슬기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그 사람 싫다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임슬기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눈썹을 찌푸린 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김현정과 육문주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들 사이엔 원망도, 오해도 없었다. 오직 자신으로 인해 생겨난 비극적인 사고만 있을 뿐이었다.어떻게 그녀가 그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을까...그들은 자신과 배정우처럼 넘
“현정 씨,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줘요. 내가 다 설명할게요, 네?”육문주가 다가오며 애타게 말했다. 하지만 김현정은 옆에 있던 과도 하나를 집어 들더니, 손목에 바짝 갖다 댄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꺼져! 더 다가오면 진짜 그어버릴 거야.”“현정아!”임슬기가 놀라서 곧장 달려들어 과도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육문주 쪽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문주 씨, 나가요. 현정이가 진정되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육문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떨군 채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그가 나가자 임슬기는 과도를 방 한구
임슬기는 여전히 김현정이 걱정돼 매일 병원에 머물며 곁을 지켰다.하루하루 달래고 위로하며 시간을 보내자 삼사일쯤 지나서는 김현정의 상태도 많이 나아졌다. 웃음도 점점 많아졌고 말수도 늘었다.모든 게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던 찰나 연다인이 불쑥 병실에 나타났다.병실 안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던 두 사람을 보며 연다인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임슬기, 정우가 전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변호사 붙여줬거든? 네가 들고 온 그 내용증명? 그냥 휴지 조각일 뿐이야.”그 목소리를 들은 임슬기의 웃음이 순간 굳었다.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
임슬기는 김현정의 눈물을 닦아주며 웃었다.“바보야, 울고 싶을 땐 내 뒤로 숨어. 나는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걸 보고 싶어. 알겠지?”“네, 알아요.”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낮게 흐느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재호는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눈치 보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나가려 일어섰지만, 하필 그 순간 임슬기의 눈에 띄고 말았다.임슬기는 손등으로 얼굴의 눈물을 대충 훔치며 강재호를 바라봤다.“아, 미안해요. 잠깐 잊고 있었어요.”“슬기 씨, 그런 말씀 마세요.”강재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딱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