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어떤 일이 있어도 연다인의 뜻대로 되도록 내버려둘 순 없었다.진승윤이 국을 다 마신 뒤 두 사람은 몇 마디 더 나누고 나서야 임슬기는 자신의 병실로 돌아갔다.임슬기는 장승태가 죄를 인정하리라 기대하지도 않았고 더더욱 그가 연다인을 지목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쪽에서 얻을 수 있는 단서는 없다고 생각했다.결국 오정태의 시신을 되찾으려면 계획대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바로 그때 임슬기의 휴대폰이 울렸다.[그
‘연다인을 처리하겠다고?’솔깃한 제안이었지만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또다시 배신할 수 있는 법이다.임슬기는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송재현, 난 널 믿지 않아.”한때 임슬기는 이 어린 시절 친구를 진심으로 믿었다. 송재현이 자신을 다시 디자인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힘든 시기를 함께 버텨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송재현은 몇 번이고 그녀를 배신했다.그날 밤 호텔에서 송재현이 자신을 깎아내리고 모든 죄를 덮어씌우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했다.그녀는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그를 쉽게 용서할 만큼 너그럽지도 않았다.“슬기야
‘죽어도 싸다고?’그 말에 임슬기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침대 위에서 장승태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죽어 마땅한 건 너야! 날 모함하고, 함정에 빠뜨리고, 집사님까지 죽였어!”그러나 이성은 그녀에게 장승태가 지금 죽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죽으면 연다인을 고발할 사람이 사라지니까.“이 사람 어떻게 할래요? 슬기 씨 손에 맡길게요.”임슬기는 이를 악물고 핏발 선 눈으로 장승태를 노려보았다.지금 당장이라도 오정태의 복수를 위해 그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우선 가둬둬요. 내일 바로 경찰서에 갈 거예
그 말에 임슬기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진승윤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잠시 당황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진 변호사님의 약혼녀라고요?”“맞아요. 승윤 씨가 얘기 안 했어요?”임슬기는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저는 진 변호사님의 사적인 일에 대해 묻지 않았거든요.”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와 진승윤의 관계는 오직 배정우로 인해 얽힌 것이었고 함께하는 일이라 해봐야 사건을 조사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김서우의 눈빛에서 적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가 경쟁자를 바라볼 때의 본능적인 경계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깁스를 한 손을 든 채 진승윤이 걸어 들어왔다.“방금 보낸 문자, 무슨 뜻이에요?”아무리 감정을 억누르고 있어도 임슬기는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평소 온화하고 부드러웠던 진승윤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그녀는 설명하고 싶었지만 김서우를 떠올리며 꾹 참았다.“말 그대로예요.”“말 그대로?”진승윤이 눈살을 찌푸렸다.“나랑 슬기 씨 생사를 함께한 친구 아니었어요? 그런데 친구한테 이러는 거예요?”임슬기는 순간 멍해지며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저릿했다.‘친구...’사실 그녀에게 이렇게 생사
‘난리? 내가 언제 난리를 쳤는데?’그저 전화를 받지 않았을 뿐인데 그것도 난리라고 할 수 있을까?“난 지금 환자이자 임산부야. 제발 좀 쉬게 해줘.”그 말이 끝나자 전화기 너머에서 순간 정적이 흘렀다.임슬기는 그가 전화를 끊을 거라 생각했지만 곧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쉬게 해달라고? 아니겠지. 남자 만나러 가는 걸 내가 방해한 거겠지!”“배정우,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헛소리? 네가 병원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어. 너...”배정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슬기는 화가 나서 전화를
임슬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하게 키스 당했고 필사적으로 배정우의 가슴을 밀쳐냈다.분명 가장 친밀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녀의 마음에는 설렘이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 오히려 역겨울 뿐이었다.연다인을 건드린 이 남자가 더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힘은 너무 약했고 폭주한 배정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그의 행동이 점점 도를 지나치자 임슬기는 다급히 손을 뻗어 근처에 있던 재떨이를 움켜쥐고는 별다른 생각도 없이 그의 머리에 세게 내리쳤다.“너 미쳤어?”통증에 신음하며 그녀를 놓은 배정우가 머리를 감싼 채 휘청거렸다.침대 옆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 채 굳어버렸다.배정우의 차가운 시선을 감지한 임슬기는 순간 멈칫하더니 황급히 손을 놓았다.‘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겨우 이런 작은 상처 때문에 나를 상처 입힌 남자를 걱정한다고? 내가 어쩌다 이렇게 비참하고 비굴해진 거지?’그렇게 생각한 순간 배정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임슬기가 먼저 냉정하게 말했다.“됐어,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배정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이 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조금 전까진 그를 욕하더니, 지금 와서 걱정하는 척이라니.어떻게 이렇게
반달이 지난 뒤 임슬기는 여전히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사에게서 이틀 뒤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너무 잘 됐어요! 드디어 퇴원할 수 있다니! 뭐 드시고 싶어요? 내가 다 준비할게요! 이건 꼭 축하해야죠.”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현정아, 너 먹방 유튜버나 해볼래? 그럼 돈 좀 벌 수도 있겠다.”“진짜요? 근데 난 언니한테 해주는 게 제일 좋아요.”김현정은 그렇게 말하며 임슬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았다.“언니, 우리 그냥 앞으로 같이 살래요? 내가 언니 먹여
“꺅!”연다인은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정을 노려봤다.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임종현이 있는 앞이라 억지로 연기해야 했다.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김현정 씨,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곧바로 임종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억울한 척 말을 이었다.“종현아, 누나는 그런 뜻 아니야. 나는 그냥... 다들 알고 있는 줄 알고...”울먹이는 얼굴에 눈가가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그 모습에 임종현은 약간 망설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됐어요. 형이랑
임종현이 부탁하면 임슬기는 늘 거절을 잘 못했다.하지만 배정우와 다시 잘 지내라는 이 부탁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가 원한다 한들 배정우가 원하지 않으니까.배정우는 그녀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어떻게 다시 처음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종현아.”임슬기는 고개를 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그 부탁은... 누나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그녀는 억지로 울음을 삼킨 채 고개를 들었다.“이미 그 사람은 연다인이랑 함께잖아.”임종현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
이제 이 동생도 부끄럼을 탈 줄 안다니.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종현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종현아, 누나 좀 도와줘. 침대 좀 올려줄래?”임종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발치로 가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이 정도 높이면 돼요? 더 올려요?”“응, 지금 딱 좋아. 고마워.”임슬기는 그의 손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종현아, 그 손... 필기하는 데는 지장 없겠어?”그 말을 들은 종현은 고개를 숙여 손을 내려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심하진 않아요. 그리고 이번에
“현정아.”임슬기는 김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어도 속으론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사랑 문제는 본래 타인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녀로 인해 시작된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김현정은 조용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더니, 임슬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마음 아픈 눈빛을 보냈다.“언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텐 아무 말 없이 계속 숨길 생각이었죠?”“...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나도
차로 돌아온 배정우는 주머니에서 단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손에 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권민, 연다인 행적 좀 추적해 봐.”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가 들고 있는 단추를 보고 물었다.“단추도 조사해 볼까요?”배정우는 단추를 권민 손에 툭 던지며 말했다.“조사해. 그리고 지난달 파티 밤의 CCTV 영상도, 빠짐없이 확인해.”그 말을 들은 권민은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대표님, 그날 CCTV는 이미 없어진 상태입니다. 호텔 쪽 말로는 장비 고장이 있었다고 합니다.”‘고장? 참 타이밍 좋게도.
하지만 임슬기는 결국 찌르지 못했다. 칼끝은 배정우에게 닿지 않았다.배정우는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슬기야...”“배정우, 여긴 왜 온 거야?”그 순간 진승윤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배정우를 거칠게 끌어내고는 병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곧장 임슬기 곁으로 달려가 그녀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괜찮아, 슬기야.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아무 일도 안 생겨.”임슬기는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
“내 입이 독하긴 해도, 배정우 씨는 손에 칼을 숨기고 있잖아요.”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배정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 섞인 미소를 띠었다.“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기겠어요.”그 말은 마치 날이 서 있는 칼처럼 배정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배정우는 잠시 멍해있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했다.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임슬기가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잔뜩 겁먹은 표정까지 떠오르자 배정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넌 내가 그렇게 무서워? 응?”임슬기는 눈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