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현을 집에 데려다준 후, 배정우는 이유 모를 짜증에 결국 킹스 클럽으로 향했다. 술에 취할 때쯤 육문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배정우가 술을 계속 들이붓자, 육문주는 짜증 내며 말했다.“술이나 처마시고 있을 시간에 치료나 받아요.”“내가 기억을 되찾아 뭐 해? 임슬기는 이미 날 잊어버렸는데.”배정우는 잔을 육문주 앞으로 밀어 놓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임슬기가 지금 너희는 다 기억하는데, 오직 나만 잊었다고. 이게 말이 돼? 연기하는 거 아니야?”“단정할 순 없어요. 인간의 뇌는 가장 아팠던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
‘다시 시작하자고?’임슬기는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이 울었다.왜 이 남자는 항상 술만 마시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걸까. 그들은 정말로 돌아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는데.그리고 임슬기는 진심으로 배정우가 미웠다. 그의 무정함, 어리석음, 냉담함과 그녀를 향한 속박.예전에 배정우는 이혼하지 않는 이유는 절대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임슬기를 곁에 두고 계속 괴롭히기 위해서라고 말했었다.‘다시 시작하자고? 또 한 번 속이려는 거야? 하지만 정우야, 이번에는 정말로 속지 않을 거야.’“슬기야?”전화기 너머에서 다시 들
전화를 여러 번 걸었지만, 배정우는 받지 않았다.초조해진 임슬기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었고, 얼굴은 붉어져 평소와 다르게 생기가 돌아 보였다.“아가씨, 임종현과 무슨 관계예요? 몇 반인지도 모르세요?”임슬기는 입술을 깨물며 배정우한테 전화를 계속 걸며 사과했다.“죄송해요. 제 동생이에요. 2년 동안 못 봤어요.”경비원은 비웃듯 그녀를 흘끔 보며 말했다.“2년 동안 못 봤으면 신원 확인이 안 되는데요.”그때 드디어 전화가 연결되었다.“무슨 일이야?”“배정우 씨, 종현이 몇 학년 몇 반이에요? 담임 선생님
안 그래도 몸이 허약했던 임슬기는 잡아당기는 힘에 즉시 비틀거리며 배를 책상 모서리에 부딪혔다.“아!”갑작스러운 통증에 임슬기는 숨을 헐떡이며 배를 움켜쥐고 책상에 기댔다.그 순간, 계속 침묵하고 있던 임종현은 갑자기 뛰어와 최민경을 밀치며 소리쳤다.“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우리 엄마는 왜 불러요!”최민경은 눈살을 찌푸렸다.“이렇게 큰 일이 났는데도 엄마가 안 오다니, 임씨 가문의 교육이 어떤지 뻔하네!”“다시 한번 말해봐요!”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은 건 임종현의 영원한 아픔이었다. 예전엔 임슬기가 보호해 줘서
“너! 너희들!”최민경은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너희들 지금 말도 안 되는 억지를 피우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거야?”마치 진짜 피해자인 양 주저앉아 우는 최민경의 모습에 우현식조차 보기 힘들어 한마디 했다.“엄마, 그만 좀 해요.”한창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춘기였던 터라, 우현식은 창피함에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임종현을 고아라고 놀렸어요.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다고.”말을 마친 우현식은 최민경이 쏘아보자, 겁에 질려 바로 덧붙였다.“하지만 내가 먼저 때린 건 아니에요! 임
임종현이 물을 사 오는 동안, 임슬기는 이미 약을 먹고 벤치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여기 물. 약 먹어요.”임슬기는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고마워.”“대체 무슨 병인 거예요?”임종현은 한 발짝 떨어져 서서 눈살을 찌푸렸다.“대충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요.”임종현의 관심에 임슬기는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폐암에 대한 건 여전히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임슬기는 임종현도 배정우처럼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폐렴이야.”“그냥 폐렴이요?”임종현은 자신의 교복
“안 그럴 거야. 이제 종현이 곁을 다시는 떠나지 않을 거야.”임슬기는 코를 훌쩍였다.“누나는 종현이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 졸업하고, 대학 가고, 결혼해서 아이 낳는 모습까지 다 보고 싶어. 누나가 곁에 있을게. 앞으로 계속...”임슬기는 만약 죽지 않는다면, 정말로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다.임종현은 주먹을 꽉 잡으며 말했다.“하지만 난 아직 용서는 못 하겠어요.”“종현아, 누나한테 시간을 줘. 나중에 모든 진실을 알게 될 거야. 알겠지?”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껴안고 있었다.임종현은 임슬기의 손을 떼어내고 돌아서서
남자의 몸에서는 희미한 술 냄새와 담배 향이 났다. 또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임슬기는 숨이 막혀 몸을 비틀며 저항했다.“놔요.”하지만 배정우는 놓아주기는커녕 더욱 단단히 끌어안더니, 차가운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가져다 대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싫어.”“배정우 씨,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슬기야, 가지 마. 내 곁에 있어 줘.”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에 임슬기는 숨이 턱 막혀왔다.한참 후, 배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진짜로 날 잊었으면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응?”임슬기는 이를 악물고 냉정하게 말했다
“현정아.”임슬기는 김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어도 속으론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사랑 문제는 본래 타인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녀로 인해 시작된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김현정은 조용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더니, 임슬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마음 아픈 눈빛을 보냈다.“언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텐 아무 말 없이 계속 숨길 생각이었죠?”“...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나도
차로 돌아온 배정우는 주머니에서 단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손에 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권민, 연다인 행적 좀 추적해 봐.”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가 들고 있는 단추를 보고 물었다.“단추도 조사해 볼까요?”배정우는 단추를 권민 손에 툭 던지며 말했다.“조사해. 그리고 지난달 파티 밤의 CCTV 영상도, 빠짐없이 확인해.”그 말을 들은 권민은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대표님, 그날 CCTV는 이미 없어진 상태입니다. 호텔 쪽 말로는 장비 고장이 있었다고 합니다.”‘고장? 참 타이밍 좋게도.
하지만 임슬기는 결국 찌르지 못했다. 칼끝은 배정우에게 닿지 않았다.배정우는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슬기야...”“배정우, 여긴 왜 온 거야?”그 순간 진승윤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배정우를 거칠게 끌어내고는 병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곧장 임슬기 곁으로 달려가 그녀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괜찮아, 슬기야.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아무 일도 안 생겨.”임슬기는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
“내 입이 독하긴 해도, 배정우 씨는 손에 칼을 숨기고 있잖아요.”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배정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 섞인 미소를 띠었다.“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기겠어요.”그 말은 마치 날이 서 있는 칼처럼 배정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배정우는 잠시 멍해있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했다.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임슬기가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잔뜩 겁먹은 표정까지 떠오르자 배정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넌 내가 그렇게 무서워? 응?”임슬기는 눈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
육문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 밤, 연다인이 김현정이 마시던 술에 약을 탔어요.”말을 끝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그 여자가 직접 인정한 말이에요.”그렇게 말한 육문주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여러 해를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는 이 일에 배정우가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슬기가 그렇게까지 의심하고 원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그래서 그 역시 배정우를 위해 변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배정우의
배정우는 권민에게 임종현을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 자리에 남았다.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는 곁에 놓인 양동이를 들었다.차가운 물 한 통을 그대로 퍼부었다.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자마자 배정우의 핏기 어린 눈빛과 마주쳤다. 그 순간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끝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배정우는 이 남자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칼을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 댔다.“말해. 누가 시킨 거야? 목적이
임종현은 그 남자가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목이 터질 듯한 절규가 가슴 깊은 데서부터 쏟아져 나왔다.“누나! 임슬기, 정신 차려. 제발 눈 좀 뜨라고!”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임슬기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해 오른손을 겨우 들어 임종현에게 신호를 보냈다.무언의 손짓이었다. 마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슬기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기회 봐서 너라도 도망쳐’임종현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연다인이 했던 말. 임슬기는 임씨 가문의 죄인이라는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