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날 저녁, 지희는 독고춘에게 근처 숙소를 마련해주었다.
그곳은 그녀의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깔끔한 원룸이었다.“이곳에서 지내면 돼요. 필요한 건 다 있을 거에요.”“...방이 하나뿐이군.”“원룸이니까요.”지희가 웃었다.그녀는 잠시 머뭇하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매니저 일은 처음이겠지만…지아가 옆에서 잘 알려줄거에요.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말아 주세요.”독고춘은 그 말의 의미를 곱씹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현관 쪽에서 지아가 얼굴을 내밀었다.“내일부터 매니저 교육 들어 갑니다! 제가 또 언니 아이돌 시절부터 쫒아다니며 온갖 산전수전 다 겪은 경력 10년차 베테랑 매니저랍니다. 걱정 붙들어 매세요!”“...그러지.”그의 말투는 단호했지만, 표정은 숨길수 없이 어색했다.그 모습을 본 지아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리고 멀리서 지희의 웃음소리도 들려왔다.그 소리는 낯선 도시에 처음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원룸 안으로 스며들었다.---다음 날 아침.독고춘은 검은 바지에 흰 와이셔츠, 그리고 지아가 챙겨준 검은 점퍼를 걸쳤다.머리는 깔끔하게 빗어 넘겼지만, 거울 속의 그는 여전히 어색했다.‘이게 매니저 복장인가? 불편하군.’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지아가 웃었다.“괜찮아요. 생각보다 잘 어울려요. 언니도 곧 올 거예요.”현관문이 열리자 지희가 들어왔다.선글라스와 모자, 트렌치코트.아직 이른 아침인데, 이미 스타였다.“꼬춘 씨 준비됐어요?”그녀가 익숙하게 말했다.강주희의 말을 들은 독고춘은 인상을 구겼다.“아, 또 불편해요?”지희는 장난스럽게 눈썹을 올렸다.“그럼 뭐라 불려드려요? 춘씨? 아니면 독고씨?”“...둘중 편한대로.”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에이, 둘다 너무 딱딱하잖아. 그냥 꼬춘 씨라고 부를래.”지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미소를 지었다.지아는 옆에서 ‘이쯤 되면 즐기는거 아닌가…’ 하는 표정이었다.---촬영장은 도심 외곽의 세트장이었다.수십 명의 스태프, 조명, 카메라, 커피차 냄새.모든 게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독고춘은 눈으로 그 모든 걸 조용히 훑었다.산속에선 바람소리와 새소리밖에 없었는데, 여긴 사람의 목소리로 가득했다.“춘오빠, 가만히 서 있지 말고요.”지아가 다가왔다.“배우 이동 동선, 짐 위치, 대기실 동선! 다 체크해야 돼요.”“...내가?”“그게 매니저 일이에요.”그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묵묵히 지희의 가방을 챙겼다.“...짐은 내가 들지.”지희가 그걸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아, 그거 무거워요. 둘이서 들어야 해요.”“...괜찮아.”그는 짧게 대답하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한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이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속삭였다.“힘 진짜 세다… 저번에 시퍼런 눈을 봤을때도 그렇고 뭔가 신비한 사람이란 말이야.”지아의 눈은 독고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호기심으로 반짝였다.---촬영 중, 독고춘은 멀리서 지희를 바라봤다.조명이 그녀를 감싸고, 대사 한 줄이 끝날 때마다 스태프들이 숨을 고르듯 멈췄다.그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평소와 다른사람이군.’지희가 대사를 마치고 잠시 쉬는 사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꼬춘 씨! 물 좀!”“...독고...춘.”그는 무표정하게 물병을 건넸다.지희가 웃으며 물병을 받았다.“근데 진짜… 나 이름 부를 때마다 왜 이렇게 재미있지?”“...재미있나?”그의 혼잣말은 작았지만 묘하게 진심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순간 그 눈빛에 말을 잃었다.“알겠어요.”잠시 후, 지희는 작게 웃으며 덧붙였다.“그럼 춘씨라고 부를까? 아, 아니야. 뭔가 입에 감기지가 않아. 그래도 꼬춘씨가 싫어하니까 춘씨라고 불러야겠죠?”그는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표정이 아주 조금, 진짜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지아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흥분했다.‘됐다… 뭔가 시작됐다!’---촬영이 끝나갈 무렵,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지희는 의자에 앉아 대본을 덮으며 말했다.“독...고오오오춘 씨.”그는 고개를 돌렸다.“오늘 어땠어요?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짧게 중얼거렸다.“...나쁘진 않군.”그 한마디에 지희는 괜히 웃음이 났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손을 모았다.“나쁘진 않다라…뭐,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네요.”멀리서 스태프들이 철수하고 햇빛이 저물어가는 가운데, 독고춘의 눈에 검은 연기의 기운이 잠깐 스쳤다.그 연기는 지희의 뱃속에서 깜빡거리던 아기 원귀의 기척이었다.‘아직… 울고 있구나.’그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아주 작게,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편히 보내주마.”그 목소리는 지희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배 속에서 미묘한 온기가 번졌다.잠시 정적이 흐르는 방안, 명옥이 감은 눈을 뜨며 천천히 말했다. “…그 아이의 기운이 더 강해졌구나.” 그 말을 들은 지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네?” “네 뱃속의 원귀 말이다.” 명옥의 목소리가 낮고 또렷했다. 지아는 깜짝 놀라 숨을 삼켰고, 독고춘은 굳은 표정으로 명옥을 바라봤다. “그 아이가 너를 상하게 할게야.이대로 두면…네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단다.” 지희의 입술이 말라붙으며,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럼…어떻게 해야 하죠?" 명옥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는 슬픔과 이해가 함께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독고춘을 바라보았다. “아이야, 이젠 네가 힘을 써야겠구나.” 독고춘의 눈빛이 깊게 흔들렸다. 명옥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아이가 느껴야 할 ‘부모의 사랑’은 반쪽짜리가 아니야. 너도 그 아이를 품어야 한다. 그게 진심이어야만 해.” 독고춘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두 손이 무릎 위에서 천천히 움켜쥐어졌다. 그때 명옥이 다시 지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지었느냐?” 지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이름까지는...” “그럼 빨리 지어줘야지.” 명옥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이름은 존재의 첫 숨이다. 그 이름을 불러줄 때, 아이의 혼이 세상에 닿을게야.” 지희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루 끝에서 바람이 일었다. 꽃잎 몇 장이 지희의 무릎 위에 떨어졌다.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랑.”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 지희의 배 속이 따뜻하게 흔들렸다. 마치 그 말에 답이라도 하듯, 작은 기운이 안쪽에서 ‘살짝’ 움직였다. 명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사랑이라. 그 이름 참 좋구나.그 아이에게도, 너희에게도 필요한 이름이지.”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었다. 꽃잎이 흩날리며 마루 위를 덮었다. 그 아래, 지희의 배 속에서는 아주 약하게 푸른 불꽃이 반짝였다. 검은 연기 속에
촬영을 마친 밤,아파트 안에는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창밖엔 도시의 불빛이 깜빡이며 비쳤다. 부엌에서는 식용유가 부드럽게 튀는 소리가 났고,냄비에서는 된장찌개의 구수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독고춘은 조용히 양파를 썰고 있었다. 소파 위에는 지아가 잡지를 들고 누워 있었다. 눈은 반쯤 감긴 채, 나직이 말했다. “아… 오늘은 진짜 체력 바닥이에요. 손가락 하나 까딱할수 없을것 같은 그런 나약한 기분?” “...뭘했다고.” 독고춘이 짧게 중얼거렸다. 지아가 피식 웃으며 몸을 뒤척였다. “오빠는 참 대단하단 말이야...안 피곤해요?” "...별로." 그때, 욕실 문이 열리며 따뜻한 수증기와 함께 지희가 나왔다. 머리는 반쯤 젖은 채,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그 속엔 아직 풀리지 않은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아야, 오늘은 푹 쉬자. 내일 스케줄 없지?” “네, 언니.”지아가 하품을 하며 팔을 베고 누웠다. 지희는 곧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저녁 준비해요? 피곤할텐데 그냥 배달 시켜먹지?” “...딱히.” “꼬춘씨가 저녁 해주면 좋지, 뭐.” 지희는 식탁 위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조용히 물었다. “가연이 좋아해요?” 독고춘은 칼질을 멈췄다. 칼끝이 도마 위에서 딱 하고 멈추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갑자기 그게 뭔...” 지희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가연이 귀엽잖아요. 그런 귀여운 타입 좋아할거 같은데 아니에요?” 독고춘은 대답디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희를 바라보았다. "아님 말고. 그럼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꼬춘씨는 좋아하는 타입 있어요?" 독고춘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척 하더니 곧 작게 중얼거렸다. “...명옥님 같은 사람.” 그 순간, 지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명옥님? 그 할머니 같은 타입이 좋다고요? 진심으로?” 지희의 물음에 독고춘은 더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도마위의 칼질 소리가 시작되었고, 지희는 어안이벙벙한 표정이
다음날 드라마 촬영장, 오전. 지희의 대기실 공기는 분주하면서도 묘하게 서늘했다. 화장대 조명 아래, 지희는 메이크업 브러시의 감촉을 느끼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완벽하게 꾸며진 얼굴이었지만, 그 안의 표정은 어딘가 낯설었다. “언니, 피곤해 보여요.” 지아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괜찮아. 그냥 어제 일이 좀… 잊히질 않아서.” 그때 ,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에는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강지희 배우님께 전달하라는 물건입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상자를 내려놓고, 말없이 빠르게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아무도 그 남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지아가 상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언니, 열어봐도 돼요?” 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냥 팬이 보낸 선물이겠지 뭐.” 지아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오래된 인형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드레스, 창백한 피부, 그리고... 그 인형은 배 쪽이 칼로 날카롭게 찢겨져 있었다. 지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지희언니...이거, 진짜 좀 이상해요...” 지희도 섬뜩함을 느끼고 얼굴을 구기며 말없이 입을 막았다. 그 인형의 찢긴 틈새 안쪽에서 희미하게 원귀의 기운이 새어나왔다. 독고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이미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젠장." --- 그날 오후, 촬영장은 여느 때처럼 밝고 활기찼다. 하지만 세 사람의 얼굴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아까 그 인형... 버렸죠?” 지아가 물었다. 지희는 촬영장로 향하며 대답했다. “응, 버렸어. 그 인형을 봤더니 뭔가 좀 오싹해지네...” 그녀의 손이 아랫배로 향했다.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곧, 조명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감독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울려 퍼졌다. “조명! 각도 그대로! 주희씨는 조금만 더 오른쪽으로—좋아요
라디오 방송국의 복도는 조용했다. 하지만 조명 아래에 깃든 공기는 묘하게 무거웠다. “오빠, 저쪽.” 지아가 손으로 안내하자, 독고춘은 굳은 얼굴로 뒤따랐다. 그의 시선은 계속 천장과 벽을 오갔다. 일렁이는 희미한 그림자들, 그리고 그 틈새에서 작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이때까지 독고춘은 아직 검은 연기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다 보니 어느새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지아가 문을 열자, 따뜻한 조명이 쏟아졌다. “안녕하세요.” 지희는 활짝 웃으며 모두에게 인사하고 자리에앉았다. 스탭들과 작가들이 분주히 움직였고,독고춘은 문 옆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얼마후,방 안에서 들려오는 라디오 오프닝 음악,지희의 맑은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별빛처럼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는 시간, 강지희의 ‘별빛사이’입니다.” --- 라디오 방송이 끝나고, 밤. “오늘도 완벽했어요! 언니 최고!” 지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희는 피곤한 듯 손을 흔들었다. “이제 드라마 촬영장으로 바로 가죠!” 지아는 태블릿을 확인하고 씩씩하게 앞서 걸었다. 세 사람이 라디오 건물을 나올때, 독고춘은 한 번 뒤돌아봤다. 붉은 네온 아래, 누군가 그를 지켜보는 듯한 시선이 스쳤다. --- 드라마 세트장은 밤에도 낮처럼 밝았다. 커다란 조명탑들이 하얀 빛을 쏟아내며 인공의 낮을 만들고 있었다. 강지희는 긴 머리를 묶고 의상 점검을 받으며 스탠바이 중이었다. 그 옆엔 오늘 첫 촬영을 함께하는 서가연이 있었다. “지희 언니! 진짜 오랜만이에요.같이 작품 하는 게 벌써 세 번째죠?” 서가연의 눈웃음은 달콤했다. 사탕을 입에 문 듯한 웃음,누가 봐도 사랑받는 얼굴이었다. 지희도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 오랜만이야. 이번엔 서로 싸우는 역할이라 좀 어색하네?” “제가 완전 불리해요! 이렇게 이쁜 언니랑 싸우는데 제가 어떻게 이기겠어요?” 가연이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렸다. 그 모습에 주변 스태프들이
달빛이 한옥 처마 끝을 스치며 흩어졌다. 바람은 차고, 공기는 맑았다. 산 아래의 세상은 이미 잠들었지만,이 깊은 산속 한옥만은 아직 깨어 있었다. 명옥은 등불을 들고 마당으로 걸어나왔다. 그녀의 발끝마다 푸른빛이 어른거렸다. 그 불빛은 마치 작은 생명체처럼 흔들리며 그녀를 따라왔다. “아이야, 보이느냐?” 그녀의 목소리는 고요한 밤공기 속에서 울렸다. 독고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허공에서 일렁이는 푸른 불빛 하나에 고정되어 있었다. 명옥은 깊고 고요한 눈으로 독고춘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너는 나의 후손임이 분명한것 같구나. 기괴한 인연이로다.' “저게… 뭐에요?” 독고춘은 허공의 푸른 불꽃을 손으로 가르키며 말했다. “죽은자의 의지란다.” 명옥은 등불을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답했다. “미련이 남은 자의 마지막 불씨.푸른불꽃은 떠나지 못한 이들의 숨결이야.” 그녀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푸른불꽃이 그녀의 손끝에 내려앉았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불꽃이 살랑이며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췄다. “죽음은 끝이 아니란다. 사람은 삶의 끝에서, 마음의 모양을 남기고 가지. 그 마음이 깨끗하면 그대로 사라지지만… 한 줌의 미련이 남으면, 저렇게 푸르게 깨어나는 거야.” 독고춘은 말없이 그 빛을 바라봤다. 불빛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명옥은 조용히 불꽃을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에서 은은한 푸른 기운이 번졌다. “가자, 이제 돌아가야지. 여긴 이제 네가 머물곳이 아니란다.” 그녀가 눈을 감자, 불빛은 점점 작아지며 하늘로 스며들었다. 순간, 바람이 불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독고춘은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그럼…'검은 연기'는 뭐죠?” 명옥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 눈빛엔 오래된 슬픔이 비쳤다. “그것을 본적이 있나 보구나. 그것도 사람의 혼이다. 다만… 저 푸른불꽃처럼 순수하지 못한 혼이지. 나는 그것을 원귀라고 부르고 있지.” “원...귀?” “
그날 저녁, 촬영을 마친 세 사람은 촬영장 근처의 카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나눴다. 밖엔 소복히 눈이 쌓이고 있었다. 지아는 독고춘을 보며 말했다. “오빠, 오늘 진짜 고생했어요.” "...너도." “오, 뭐야?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지희가 웃으며 말했다.“...피곤하군.” 독고춘은 한숨을 쉬며 커피를 내려놨다. 눈이 살금살금 내리는 창밖을 보니 문득 명옥이가 생각났다. 식사는 잘 하고 계시는지. 분명 눈이 쌓일텐데. "지금 무슨 생각해요?" 한동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독고춘을 보며 주희가 물었다. 그 물음에 지아가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그윽하게 창밖을 바라보는 저 눈빛...혹시 첫사랑 생각?" "오, 그런거야, 꼬춘씨? 심심한데 첫사랑 얘기좀 해줘봐. 궁금하네. 산속에는 언제부터 살았어? 그 할머니랑은 무슨 관계야? 친할머니야, 외할머니야?" "...말이 많으면서도...짧군." 독고춘이 인상을 쓰며 한마디 던지자 갑자기 주희가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Yo,Yo! 넌 저번부터 말이 짧았지. 하지만 난? 찌질하게 참았지. What? 나는 말 짧으면 안돼라는 법이 있나? Ye, 그게 우리나라 법인지, 다른 나라 법인지 Ha? 알고보니 그냥 니가 범인. YO, 너는 내게 말이짧다고 지껄이지 No, 그게 바로 한심한 짓거리. 창밖엔 눈이 내리고 너의 눈엔 화가 내리고. Ah, 이건 단순한 사고일 뿐이고 지금 너의 사고는 멈춰 있을 뿐이고. 넌 항상 고개를 끄덕여. 그 덕에 내 기분? 완전 꾸덕. Yeah~" "오오, 대박! 랩퍼 본능 미쳤다 언니! 이래서 내가 언니한테 반했다니까! 역시 랩하는 아이돌 출신은 확실히 달라!" "괜찮았어? "네, 언니! 완전!" 지아는 또 신이나서 박수를 치며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다행히 카페에 손님은 세사람 뿐이었고 카페 사장도 강주희의 열렬한 팬이라 '앵콜'을 외치며 박수치기 바빴다. 독고춘은 급격하게 텐션이 올라버린 두 여자의 장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