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소복이 쌓여 있던 눈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지희와 지아가 먼저 대문을 나섰다. 독고춘은 옷가지 몇 벌을 싼 보따리 하나를 든 채 문턱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루에 앉은 명옥이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따뜻하지만 어딘가 쓸쓸한 눈빛이었다. "어서 가거라. 부디 그 아이가 스스로 떠날 수 있게 잘 돌봐 주려무나." 독고춘은 고개를 숙였다. 스무 해 동안 그가 본 세상은 오로지 이 산속뿐이었다. 산을 넘는 바람과 새소리, 그리고 처음 만난 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아름다운 명옥. "…금방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녀오겠습니다." 입 밖으로 내고 보니 낯선 말이었다. 이 집에 온 뒤로 그는 단 한 번도 어딘가에 다녀와 본 적이 없었다. 명옥은 부드럽게 웃었다. "사람이 누굴 돕는다는 건 방법보다 마음이 먼저란다. 네가 그 아이를 돕고자 하는 마음을 품는다면, 그 아이도 널 받아들이고 스스로 떠날 게다." 독고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문턱을 넘었다. 등 뒤에서 대문이 닫히자 처마 끝의 종이 작게 울었다. 그는 한 번 더 돌아보려다 그만두고, 앞서간 두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눈 녹은 산길을 내려갔다. 새벽에는 지아의 어깨에 매달려 겨우 올랐던 길을, 지희는 제 발로 가볍게 내려가고 있었다. 독고춘의 눈에는 그 배 위에 얌전히 웅크린 검은 연기가 여전히 보였다. ─── 산 아래에 세워 둔 차는 독고춘이 어릴 적에 보았던 것들보다 훨씬 크고 세련돼 보였다. 지아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몸을 구겨 넣듯 올라탔다. 한복 차림으로 안전벨트와 씨름하는 모습에 지아는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떨었다. 차가 산을 벗어나자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바뀌었다. 논밭이 끝난 자리에 회색 건물이 들어섰고, 건물은 갈수록 높아져 이윽고 하늘을 가릴 정도가 되었다. 독고춘은 창에 이마를 붙이다시피 하고 그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린 나이에 산으로 들어간 뒤로 처음 보는 바깥세상은 사람도, 차도, 불빛도 지나치게 많았다. 산에서는 온종일 걸어도 사람 하나 마주치지 않는 날이 많았는데, 이곳에서는 창밖을 한 번 스칠 때마다 수십 명의 얼굴이 지나갔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췄을 때였다. 건물 한 면을 통째로 덮은 커다란 화면 속에서, 뒷좌석에 앉은 여자와 똑같은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독고춘은 화면과 뒷자리의 지희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저건." "아, 저거요? 언니가 찍은 화장품 광고예요. 저기 말고도 서울 시내에 한 스무 군데는 걸려 있을걸요?" 지아가 신이 나서 대답했다. 지희는 창밖을 흘끗 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만 봐요. 저 정도 가지고 호들갑은." ─── 서울로 돌아온 지희의 집은 넓고 세련된 인테리어로 가득했다. 유리벽 너머로 도심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고, 집 안에는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독고춘은 낯선 세계에 떨어진 사람처럼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쓸데없이 넓군." 그 모습에 지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죠. 언니는 톱스타예요. 이 정도는 기본이죠!" "…톱스타?"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지희가 소파에 앉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나, 배우 활동을 잠시 쉬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미 계약된 광고랑 드라마가 너무 많아서 당분간은 어쩔 수가 없네요." 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말인데, 그쪽이 내 세컨드 매니저로 일해 줬으면 좋겠어요. 촬영장에서도 계속 곁에 있을 수 있고, 혹시 또 쓰러지더라도 바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매니저?" 독고춘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니가 일하는 동안 옆에서 이것저것 챙겨 주는 사람이에요. 지금은 제가 혼자 하고 있고요." "…해 본 적 없는데." "괜찮아요! 제가 다 가르쳐 드릴게요. 운전은 제가 하면 되고, 그쪽은 언니 옆에 있기만 하면 돼요." 지아는 눈을 반짝이며 한 발짝 다가섰다. 독고춘은 두 여자를 말없이 번갈아 보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하아." 거절은 아니었다. 지희의 얼굴에 안도와 설렘이 뒤섞인 미소가 번졌다. "앞으로 우리, 잘 지내 봐요." "좋아요! 제 후임 매니저의 탄생이네요!" 지아가 두 손을 모으고 들썩이며 외쳤다. "아, 맞다. 우리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네요. 저는 강지희예요. 방금 들었다시피 직업은 배우, 나이는 스물일곱." "전 이지아요. 지희 언니 로드 매니저 겸 보디가드, 나이는 스물넷이고요." 독고춘은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조금 굳은 어조로 말했다. "…독고춘. 나이는… 스물아홉쯤." 제 이름과 나이를 누군가에게 말해 보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독고춘?" 지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도꼬춘…? 성이 도고, 이름이 꼬춘 씨?" 지아가 "언니…" 하고 말리려 했지만 지희는 이미 웃음을 터뜨린 뒤였다. "꼬춘 씨! 이름 참 특이하네요. 완전 귀여운 이름이야." 지희는 장난스럽게 손뼉을 쳤다. "앞으로 꼬춘 씨라고 부를게요." "…독고, 춘." 표정은 심각했고 목소리는 낮았다. "알아요, 알아요. 근데 그냥 춘 씨라고 부르는 것보다 꼬춘 씨가 더 입에 착 달라붙잖아요? 괜찮죠, 꼬춘 씨?" 그는 대답 대신 인상을 구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희는 개구진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꼬춘 씨." 악수를 청한 것이었지만 독고춘은 더욱 인상을 구길 뿐이었다. 지아는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숙였다. "춘 씨, 언니가 원래 저래요. 나쁜 뜻은 없어요. 아, 그냥 편하게 오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저한테는 편하게 말씀하셔도 되는 부분이에요!" 독고춘은 지희를 노려보다가 지아 쪽으로 시선을 돌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놀리려는 게 아니라 친근하게 부르려는 거예요. 앞으로 큰 프로젝트를 함께 해야 하니까. 알겠어요?" 지희가 그를 쏘아보며 덧붙였다. "이왕이면 귀엽게, 꼬춘 씨. 오케이?" 독고춘은 입을 다물었다. 좀처럼 흔들리지 않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진하게 스쳤다. 연예인 처음 보냐, 미친 사람만 모여 있냐며 날카롭게 쏘아 붙이던 여자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이 여자,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그럼 은정이의 한이라는 게 대체 뭐죠?"조심스럽게 입을 연 주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독고춘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저도 잘 모릅니다."주미는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독고춘은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박도윤.""...네?""...그 남자와 관련이 있을지도.""오빠가요?""...확실한 건 아닙니다."독고춘의 말에 주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은정이와 자신의 오빠가 얽혀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주미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어색한 침묵이 계속되자 지희가 주미의 손을 잡았다."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또 이상한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주세요.""아, 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잠시 후, 세 사람이 병실을 나갔다.철컥.문이 닫히자 다시 조용한 적막이 병실 안을 채웠다.주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박도윤."설마...?"주미는 고개를 저었다.오빠가 은정이에게 무언가를 숨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와서 아무것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주미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얼마 뒤, 병원에서 퇴원 수속을 마친 그녀는 곧장 H금융으로 향했다.---H금융 본사.익숙한 건물 앞에 멈춰 선 주미는 잠시 고개를 들어 높은 건물을 올려다봤다.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드나들던 곳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주미는 굳은 얼굴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녀는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주미는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걸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 문 앞에 멈춰 섰다.부사장실.주미는 문 앞에서 한동안 망설였지만 곧 천천히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똑똑."들어오세요."문
서울의 OO병원에 도착한 세 사람은 주미가 문자로 알려준 병실로 향했다. 병실 문 앞에 멈춰 선 지희는 문에 붙은 '박주미' 이름표를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철컥. "주미씨?"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세 사람을 발견한 주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 오셨어요?" "아니, 아니. 그냥 누워 있어요." 지희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왜 일어나려고 해요?" "괜찮아요. 아까 수액 맞고 나니까 조금 나아진 것 같아서..." 주미는 희미하게 웃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핏기가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근데 진짜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요? 아, 저는 지희 언니 매니저 이지아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초면에 누워 있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언니. 아참, 주미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야, 주미씨가 너보다 어리면 어쩌려고." "...지희 언니? 잘 못들었습니다?" "주미씨가 너보다 어려 보인다고. 안 그래요, 꼬춘씨?" "...음." "허! 형부까지 이러면 저 섭섭해요?" "푸흣..." 지희와 지아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주미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나마 무거웠던 병실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 사이, 독고춘은 조용히 주미의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그의 시선은 한 번도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주미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저, 왜 그러세요?" 그제야 독고춘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어젯밤부터 꿈을 꾼 겁니까?" "아, 네. 꿈이야 자주 꿨지만... 그런 이상한 꿈은 분명 어젯밤부터였어요." 지희의 표정도 조금 굳었다. 주미가 그런 꿈을 꾸기 시작한 건, 자신들과 만난 바로 그날 밤이었다. "꼬춘씨. 뭔가 보여요?" 독고춘은
주미와 통화를 끝낸 지희는 한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결국 서울로 가야겠네." 남은 휴가가 아직 이틀이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아쉬울 상황이 아니었다. 지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소파 쪽을 바라봤다. 독고춘은 여전히 소파에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잘도 자네." 지희는 작게 중얼거리며 소파 앞으로 다가갔다. "꼬춘씨." 그녀가 살짝 몸을 흔들어 깨웠으나 대답이 없었다. "꼬춘씨, 일어나요." 지희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엔 일찍 일어나던 사람이 왠일이래." 다시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흔들던 순간, 덥석. 독고춘의 손이 지희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 지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강한 힘이 손목을 잡아당겼다. "아앗!" 푹! 지희의 몸이 그대로 소파 위로 넘어졌다. 그리고 잠결에 움직인 독고춘의 팔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어머머..." 지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독고춘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누워버린 상태였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독고춘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꼬춘씨? 지금 뭐하세요?" 지희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익... 하! 진짜 꼼짝도 못 하겠네. 힘이 얼마나 쎈 거야. 이봐요! 얼른 일어나라고요!"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지희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아니, 하... 이게 무슨 꼴이야." 그때, 철컥.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짜잔! 지아 등!...장..." 지아의 목소리가 뚝 끊기며 지희와 눈이 마주쳤다. 지아는 눈을 껌뻑껌뻑 거린 뒤, 소파 위에 엉켜 있는 두 사람을 다시 바라봤다. 잠시 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지아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아침부터 러브러브 일 줄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그 말에 지희가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주미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헉...!"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주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꿈이었다.분명 꿈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꿈속에서 느꼈던 공포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하아..."주미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은정이의 뒷모습과 자신을 휘감던 검은 연기, 그리고 귓가를 맴돌던 목소리까지 모든 장면이 뒤섞여 머릿속을 어지럽혔다.그때였다."주미야."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주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엄마?""왜 그렇게 놀라? 계속 불러도 일어나지도 않고. 악몽이라도 꿨어?""...아니, 아니야."주미의 어머니 한정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딸을 바라봤다."너, 왜 그래? 혹시 어디 아픈거야?""괜찮아, 엄마. 지금 몇 시지?"주미는 멍한 얼굴로 휴대폰을 확인했다.평소라면 이미 출근 준비를 끝냈어야 할 시간이 지나 있었다."...아, 회사 가야지."주미는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러나,휘청.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다."어?"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정희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주미야!"주미는 애써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손끝까지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괜찮긴 뭐가 괜찮아!"그녀는 딸의 얼굴을 살피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오늘 회사 가지 마.""엄마, 나 정말 괜찮아.""괜찮기는! 일단 병원부터 가자."주미가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엄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결국 주미는 엄마의 부축을 받아 집을 나섰다.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은 뒤 의사는 크게 걱정할 만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검사 결과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습니다.""정말 괜찮은 건가요? 애가 쓰러질뻔 했는데.""네. 다만 최근에 피로가 많이 쌓인 것 같습니다. 며칠 푹 쉬면서 수액 치료를 받
호텔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바닷물에 젖은 발과 옷자락을 정리하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나니, 하루 종일 이어졌던 긴장도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먼저 씻고 나온 지희는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채 침대에 앉았다.휴대폰을 손에 들었지만 화면에는 별다른 관심이 가지 않았다.평소 같았으면 SNS를 확인하거나 연예 쪽 기사를 확인했을 텐데, 오늘따라 손가락만 괜히 화면 위를 움직였다.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욕실 쪽을 바라봤다.아직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다."..."지희는 괜히 입술을 꾹 다물었다.지금까지 독고춘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 결코 짧지는 않았다.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있었고, 촬영장에도 함께 있었고, 심지어 오늘은 바닷가에서 사람들 앞에 그에게 안겨 호텔 로비까지 들어왔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이 가장 어색했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같은 방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지희는 괜히 침대 위에 놓인 베개를 끌어안았다."...왜 이러지."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순간,철컥.욕실 문이 열리고 독고춘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닦으며 걸어 나왔다.지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독고춘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지희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애매해졌다."..."독고춘 역시 지희를 잠시 바라봤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이상하게 눈길이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잠시 동안 눈이 마주치자 지희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독고춘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아직도 그 여자가 신경 쓰이나?""뭐, 그렇긴 한데...아 몰라요, 몰라."지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벌러덩 누웠다.독고춘은 반대편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 거리가 평소보다 가깝게 느껴졌다.지희는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그러나 이번에도 몇 초 지나지 않아 화면을 껐다.옆에 있는 독
저녁 노을이 바다 위로 천천히 가라앉을 무렵, 호텔 레스토랑 창가. 붉게 물든 석양이 유리창 너머로 잔잔한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 지희는 식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후우..."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독고춘이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 "...땅 꺼지겠군." "아, 진짜!" 지희가 눈을 흘기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요?" "...그 여자가 신경 쓰이나." "그럼 안 쓰이겠어요?" 지희는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헝클었다. "사랑이 엄마 친구잖아요. 안색도 너무 안 좋아 보였고..." "...신경 쓴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 "아오, 진짜." 지희는 결국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꼬춘씨는 걱정도 안돼요? 분명 주미씨가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조만간 다시 만나겠지. 그때까지는 별일 없을거다." "하아, 그럼 일단 안심이네요. --- 레스토랑을 나온 두 사람은 말없이 해변을 따라 걸었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짙푸른 밤하늘 위에는 별들이 하나둘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철썩. 철썩. 잔잔한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고, 차가운 겨울 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걷던 지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독고춘이 슬쩍 그녀를 바라봤다. "...또 한숨이군." "안 쉬게 생겼어요?" 지희는 볼을 살짝 부풀렸다. "원래 휴가 오면 아무 생각 없이 놀아야 되잖아요." "...음." "근데 오늘은 머릿속이 엉망이에요." 지희는 괜히 발끝으로 모래를 툭 걷어찼다. "고은정씨 일도 그렇고... 주미 씨도 계속 신경 쓰이고." "...신경 쓴다고 달라질 건 없다고 했을텐데." "알아요." 지희는 피식 웃었다. "근데 사람 마음이 원래 그런 거예요." "..." "꼬춘씨처럼 뭐든 무덤덤하게 살면 얼마나 편할까요." 독고춘은 대답 대신 잔잔한 바다를 바라봤다. 잠시 후, 나지
하얀 눈이 내리던 12월의 어느 날, CF 촬영 현장. 지희는 새하얀 코트를 입고 조명 아래 섰다. “하나, 둘, 셋— 액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조명이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비추는 순간, 갑자기 칼로 찌르듯한 통증이 복부에서 폭발했다. “으—!” 지희가 비명을 억누르며 몸을 굽혔다. “컷! 컷! 지희 씨!” 깜짝 놀란 스탭들이 우르르 지희에게로 달려왔다. 부축할 새도 없이 그녀는 다리가 풀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한순간에 촬영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지아는 "언니!"언니!"를 외치며 지희에
촬영장은 여느 때처럼 분주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조명이 지희의 얼굴을 하얗게 비췄다. 현장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지희의 표정에는 묘한 긴장이 스며 있었다. “컷! 방금 좋았는데 지희씨 표정이 살짝 굳었어! 자자, 다시 한번 갈게요!” 감독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희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숙였다. 배 안쪽에서 찌릿하고 통증이 올라왔다. 손이 본능적으로 아랫배로 향했다. “지희 씨 괜찮아요?” 조명팀의 누군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지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네, 괜찮
밝은 조명들이 환히 비춰주는 서울의 밤 열한 시. 지희의 아파트 창밖으로 고속도로 차량의 불빛이 물결처럼 번졌다. 거실 한쪽엔 트로피와 화보, 광고 포스터가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 어떤 것에도 따뜻함은 없었다. 지희는 소파에 기대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 아랫배를 눌렀다. 또다시 따끔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며칠 전보다 더 자주, 더 깊이. '그 아이는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하였느니.계속해서 네 속을 찌를게야.' “말도 안 돼. 그딴 소리 들으려고 내가...” 지희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말
그날은, 평소보다 안개가 더 짙었다. 산 입구에서 낯선 차 한 대가 멈춰섰다. 그리고, 두 여자가 내렸다. 한 명은 마치 화면 속에서 막 걸어나온 듯했다. 도시의 공기 대신 향수를 두른 듯한 여인. 긴 다리, 완벽한 비율, 그리고 어디서든 시선을 잡아끄는 도도한 분위기. 그녀의 이름은 강지희.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배우이자, 대기업의 자녀로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여자였다. 그 뒤를 따라 내리는 또 한 사람, 조심스럽게 안경을 고쳐쓰며 뒤따르는 매니저 이지아. 작고 말랐지만, 눈빛만큼은 호기심으로 가득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