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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주해이!”
사내의 걸걸한 목소리가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갈 길을 멈춰 세운 해이는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곧 그의 얼굴에 반가운 웃음이 내걸렸다. 시원하게 웃는 입매가 매우 매력적인 남잔, 단숨에 제 친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뭐야. 어째 못 본 사이에 엄청나게 늙은 것 같다?”
“죽을 맛이야 지금. 그나저나 제대한 거야?”
“해병대 만기 전역했지, 인마.”
입대 전보다 조금 피부가 그을린 친구를 장난스럽게 바라보던 도원은 친근하게 어깨 위로 팔을 올리곤 평소 자주 찾는 술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야 어디 가? 나 학과실 가야 돼.”
“제대했으면 형님들한테 먼저 보고를 해야지 자식이!”
“됐어. 안 가.”
귀찮다는 듯 제 어깨 위에 올려진 팔을 치워낸 그는 이내 도원과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럼에도 도원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친구의 근육질 어깨 위에 매달리듯 제 팔을 감았다. 그 반동으로 휘청일 것 같았던 몸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니, 그가 살짝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야, 군대에서 대체 뭘 했길래 몸이 더 커졌냐. 징그럽게.”
“너도 미루지 말고, 빨리 갔다 와라.”
“...우울한 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먹으러 가자니까.”
칭얼대며 우는소리를 하는 제 친구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녀석이니 조금쯤은 어울려줘야 할 것 같아 그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볼일 끝내고 거기로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너 아직도 성장 중이냐?”
“헛소리는.”
“아니, 키가 더 커진 것 같아서 하는 소리야.”
도원이 다부지게 뻗은 친구의 골격을 감상하며 울상을 했다. 부러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체격이었다. 태생적으로 듬직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도원은 아니게 모르게 늘 해이를 동경해 왔다.
“그러니까 너도 군대를 갔다 와. 그럼, 키도 크고 체격도 커져.”
“너 이 새끼. 나 지금 군대 안 갔다 왔다고 놀리는 거지?”
말은 그리했지만,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음을 알았다. 그렇지 않아도 도원은 곧, 군 입소를 앞두고 있었다.
“갔다 와도 키 안 크기만 해봐! 내가 주해이 너 저주할 거야!”
“먼저 가 있어라.”
어깨 위에 매달린 덩어리를 손쉽게 떨구어내고 해이는 가벼운 걸음으로 과 건물로 들어섰다. 덩치에 비해 산뜻한 얼굴을 한 사내는 제법 많은 이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2년 만에 돌아온 학교는 여전히 여유로우면서 때론 활기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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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는 동기들과 기분 좋게 술을 마신 사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3일 전에 이사 온 원룸 건물 앞에 섰다.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자, 그의 발길에 따라 천장 센서 등이 켜졌다. 3층, 그가 301호라고 적힌 현관 앞에 서서 허공을 향해 손을 몇 차례 움직였다.
복도 센서 등이 고장인지 천장을 향해 손을 휘저어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고장인가.”
현관 도어락에 손을 뻗는 순간, 뒤편으로 누군가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무심결에 눈길을 돌리니 어둠에 잠긴 그림자가 보였다. 상대는 곧 제 집 비밀번호를 누르곤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웬일인지 그것에 시선이 빼앗겨있던 그가 이내 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1시 20분.
해이는 아마 옆집 사람도 술자리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옆집에 사는 사람이니 마주칠 일이 잦을 듯싶었다. 다음에 만날 땐 인사라도 하자고 생각하며 그도 곧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옆집은 매우 잠잠했다. 정말로 사람이 사는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조금의 소음도 들리지 않았고, 손님이 찾아오는 법도 없었다.
그러던 중 옆집 사람과 마주치게 된 건 다시 또 자정이 넘은 시간이 되어서였다. 대학 축제로 그때와 같이 술에 취해있던 해이는 센서 등을 아직 고치지 않은 어두운 복도를 걸어 집 현관 앞에 섰고, 때마침 집 밖을 나오려던 옆집 사람과 조우하게 되었다.
옆집 문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텔레비전 불빛 덕분에, 상대가 걸친 어두운색 겉옷과 모자를 푹 눌러쓴 외관이 얼핏 보였다. 생각보다 얄팍한 체격이 느껴지자, 해이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키가 작네.’
옆집 사람도 저 외에 누군가 서 있다는 걸 알아차린 듯 잠시 갈팡질팡한 모습을 보였다. 마치 사람이 있으니 다시 제 집으로 도망가려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양손 가득 분리수거 감을 든 채로 복도를 향해 걸어 나왔다.
저래서 앞은 보이는 걸까 싶을 정도로 모자가 시야를 다 가리고 있어서 어쩐지 더 눈길이 갔다. 해이는 집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서 옆집 사람이 제 앞을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다 부피가 큰 쓰레기를 들고 좁은 복도를 지나가기 버거워 보이기에 그가 좀 더 벽 쪽으로 몸을 붙이고 섰다.
옆집은 해이 앞을 스쳐 지나가며 더욱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해이는 모자 아래로 삐져나온 것이 없는 짤막한 머리카락에 그 사람의 뒷모습마저 유심히 눈에 담았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가 현관문을 열었다.
“...아, 인사한다는 걸 또 깜빡했네.”
현관문이 다시 닫히고 나서야 저가 왜 깜깜한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었는지를 기억해 냈다.
...
“형! 고생했어요. 내일 봐요.”
“그래, 수고해라.”
“또 아이스크림 사 가요?”
주말 오후,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끝낸 해이 손에 매장 로고가 찍힌 봉투가 들려있자, 뒤 타임으로 온 아르바이트생이 못 말린다는 듯 물었다.
“그래.”
“형 아이스크림 먹으려고 여기서 일하는 거죠”
“뭐, 그런 것도 있지.”
운동하는 걸 좋아하는 그는 원체 땀이 많은 사내였고 땀을 흘리며 몸을 움직이는 것 또한 좋아했다. 수분이 다 빠져나가도록 운동을 했을 땐 아이스크림을 먹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건 굳이 이렇게 운동을 하지 않는 날에도 이어지는 일과 같은 것이었다.
집 앞에 다다른 해이의 손엔 근처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도 들려있었다. 그는 제 집 현관 앞에 서서 옆집을 응시했다.
“혼자 먹기도 심심한데, 같이 먹자고 해볼까.”
그건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지만, 그렇다고 치기엔 그의 걸음이 매우 적극적이었다.
망설임 없이 옆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반응이 없어 몇 차례 더 눌러보았으나 문 너머는 아무도 없는 듯 잠잠했다. 쓸데없는 오기가 올라와 문을 다소 세게 두드려도 상대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집주인이 없는 모양이라고 돌아서려는데 손가락 하나만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틈을 두고 문이 열렸다.
“아, 안녕하세요. 계셨네요?”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사내의 손이 훅 들어와 손쉽게 문을 열어젖혔다. 옆집 사람의 볼품없는 몸뚱이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깥까지 딸려 나왔다. 졸지에 맨발로 복도를 밟게 된 상대는 더위가 시작되는 날씨에도 긴팔과 긴바지 차림이었다. 그런 데다 푹 눌러쓴 모자까지. 참 희한한 모양새였다.
“갑자기 문 연 건 죄송한데, 집에서도 모자를 쓰고 계세요?”
해이의 그 말에 상대는 제 모자를 더듬대더니 더욱 깊게 눌러썼다. 모자를 매만지는 손이 매우 작고 얇았다. 손을 올리면서 내려간 긴팔 사이로 보인 손목엔 주인과 어울리지 않는 큼지막한 남성용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옆집은 바닥을 바라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땅에 처박힌 고개 덕분에 뭐라 말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한 해이가 좀 더 상대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했던 냄새가 났다.
“네? 뭐라고요? 잘 못 들었어요.”
“...무슨 일로 오셨냐고요.”
바닥으로 향한 시선은 여전했지만, 옆집은 전보다 크고 명확하게 이야기했다. 어쩐지 여자가 부러 남자 목소리를 흉내 내는 양 어색한 음성이었다.
“아, 제가 이사 온 지는 꽤 됐는데, 인사를 못한 것 같아서요.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술 한잔해요.”
그는 모자 아래로 얼핏 보이는 상대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기울였다.
“아뇨. 괜찮아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도 못한 옆집은 매몰차게 거절의 의사를 전한 후 다소 세게 현관문을 닫았다. 곧이어 도어락이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 옆집 현관문 앞에 서서 무언가 고민하는 듯했던 그는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 집 안으로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 아이스크림과 캔맥주를 올려놓고 주방에서 숟가락 하나를 들고 온 해이는 곧장 맥주를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울대가 몇 번 꿀렁대는가 싶더니 금세 맥주 한 캔을 비웠다. 그러곤 안주로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양껏 퍼먹었다.
“별 희한한 녀석이네.”
여자가 남자 흉내를 내는 것인지. 덜자란 꼬맹이가 애써 어른을 흉내 내는 것인지 아리송했다. 아무튼, 아기 우유 냄새가 나는 수상한 작자였다.
“재이씨가 맛있게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그,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남자는 온갖 늑장을 부리다 발길을 돌렸고, 청년의 어쩐지 풀이 죽은 뒷모습을 보다가 재이도 이내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갔다.일을 나간 사이 에어컨을 틀지 않은 집 안에선 한증막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바쁘게 에어컨을 켜고 저녁 먹을 준비를 했다.오늘 또한 평온한 일상이었다.***2월의 어느 날.교정 안 곳곳엔 졸업을 축하하는 현수막들이 휘황찬란하게 걸려있었고, 발길 닿는 모든 장소가 축제 분위기였다. 졸업생과 그들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가족들, 연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졸업식을 즐겼다.그런 들뜬 분위기의 캠퍼스를 홀로 거닐던 남잔 뒤에서 제 어깨를 붙잡는 힘에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왜 혼자 다니냐.”도원은 근 몇 년간 오로지 학업에만 열중했던 제 친구를 조금 속상한 눈길로 훑었다. 이 바보 같은 녀석은 첫사랑을 못 잊고 외톨이처럼 홀로 다니더니, 졸업식마저 가족들을 부르지 않았다.“발령지는 확인했어?”그 말에 해이가 제 핸드폰을 확인했다.“어디야?”저의 물음에도 대꾸 없이 첫 발령지가 안내된 공문만 들여다보는 친구를 도원이 다시 독촉했다.
“할머니!”운동장을 가로질러 중앙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3학년 반이 있는 2층으로 걸음을 옮기는 이랑의 할머니가 보였다. 아이는 제 할머니를 목청껏 불렀고, 할머니는 그런 손녀를 매우 부끄러워하며 검지를 재빨리 제 입술 위에 얹었다.제발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저것이 목청만 커서는. 아이고 선생님, 여기까지 죄송해요.”“아니에요. 저도 이제 막 퇴근하던 차여서 같이 나왔어요.”제 손녀가 선생님 곁에 꼭 붙어있으니, 괜스레 죄송스러워서 얼른 아이를 건네받으려고 했지만, 이랑이 그것을 눈치채곤 할머니 손을 피해 좀 더 선생님 품을 파고들었다. 때마침 친구들과 계단을 내려오는 이랑의 오빠, 이현이 보였다. 아이는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내려오다가 할머니와 제 동생을 발견하곤 조금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다.“할머니, 안 데리러 와도 된다고 했잖아!”“이놈이. 너 혼자 그 먼 거리를 어떻게 와? 할머니랑 버스 타고 가야지.”“아, 오늘은 이혁이네서 논다고 오지 말랬잖아.”왁자지껄 이어지던 아이들의 대화는 이현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인해 어색하게 끊겼다. 남매의 할머니는 난감한 얼굴이었다. 재이는 그 모습을 보다가, 이현에게 다정히 웃으며 물었다.“이현이, 친구네서 놀다가 집에 혼자 찾아올 수 있어? 다 컸네.”“그럼요! 저 길 잘 알아요!”우쭐거리듯 턱을 치
남잔 제 아내가 자신의 약점을 틀어쥐고 저를 무너뜨리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동안에도 희망의 회로를 멈추지 않았다. 겉으론 저렇게 자신을 향한 복수심으로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고 해도 정말로 제 남편을 불구덩이 속으로 내몰진 않을 거라고.고작 몇 번의 계절을 함께 보낸 학생과 나눈 애틋한 사랑이, 자신과 함께한 긴 세월의 결혼 생활과 대적할 만큼의 애정은 아닐 거라고. 끝내는 자신을 저버리진 않을 거라고 말이다.그런 자만을 했었다. 아내를 향한 자신의 애정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그렇지만 이제야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알았으니까.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자신에게 있는 단 하나의 가족. 자신의 가정. 그 중심엔 늘 그녀 혼자 덜렁, 서 있었다. 그 공간 안에 재이 외엔 그 누구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둘만의 가정을 지켜나가고 있었거늘.근데, 그래왔는데 발칙하게도 아내는 자신을 찌르고 도망이나 가고, 종국엔 머저리 대학생과 사랑에 빠져 저를 내버릴 시도를 하고 있었다.그러나 이런 치졸하고 야만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남자는 이미 저의 치명적인 잘못을 알고 있었다. 시작점부터가 어긋나 버렸음을. 그리도 소중한 존재를 저 스스로 망가뜨리고 회복할 기회마저 놓쳐버렸다는 걸.‘내가 나락으로 가는 게 너의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드려야지. 그간 내 아내로 살아준 답례로.’“당신이 원하는 이혼 서류는 서재 책상 2번째 서랍 안에 있어. 열쇠는 어디에 있는지 알 테고.”남자가 이렇게 마주하게 되는 건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자기 아내를 제법 시간을 들여
전날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은 재이는 모처럼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남잔 재이의 작별을 마치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어영부영 바쁘다는 핑계로 다시 회사로 발길을 돌렸고, 늦은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이른 아침.그녀는 말끔하게 씻은 후 거실로 나와 텔레비전을 틀었다. 그러자 DR 제약회사의 비리에 관한 속보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국내에서 오랜 기간 사회공헌 활동을 이어오며 선행 기업으로 불려 온 DR 제약회사가 후원 보육원 아동들을 대상으로 불법 약물 실험을 했다는 의혹이 다시 불거졌습니다. 사실 이 의혹은 과거에도 몇 차례 제기됐지만, 당시에는 결정적인 증거가 확보되지 않아 사건이 흐지부지 마무리됐습니다. 그런데 오늘 익명의 제보자가 새로운 증거가 담긴 USB를 언론사에 보내오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사회부 기자 연결합니다.”앵커의 마무리 말에 화면은 사회부 기자로 연결됐다.“오늘 오전, 사회부 이한혁 기자 앞으로 발신인을 알 수 없는 택배 한 개가 도착했습니다. 봉투 안에는 USB가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몇 주 전에도 다른 익명의 제보자가 위와 같이 주장했지만, 당시에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했고, 제보자의 신원도 확인되지 않아 수사와 언론 보도 모두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한 채 사건은 사실상 종결됐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전달된 USB에는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자료가 담긴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내부 연구보고서와 약물 투여 기록, 실험 대상 명단과 실험으로 인한 사망자 명단은 물론, 사건 은폐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경찰청장과 DR 제약회사 이사회 관계자들의 명단 및 내부 연락 기록으로 보이는 자료도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습니
“처음엔 당신의 후원이 날 안도하게 했기 때문일까 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당신은… 내게 처음으로 다가온 호의였어요. 날 좋은 감정으로 바라본 유일한 사람.”천천히 곱씹듯이 이어지던 재이의 말이 점점 힘을 잃어갔다. 무언가 좌절한 사람처럼 표정마저 어두워진 그녀의 낯에 남자의 얼굴도 생기가 사라져갔다.“원하는 대학에 입학하고 공부하면서 난, 늘 당신을 생각했어요. 종종 날 만나러 와주는 당신을 기다리기도 했죠. 졸업하고 일을 시작하면서도 만남이 지속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어요. 언젠가 당신이 내게 베풀어준 온정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면서.”남자는 귀를 기울였다.아내가 하는 말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그만큼 집중해서 들었다.“그러던 중에 당신이 내게 청혼했어요. 나는 당연하게도 그러겠다고 답했고요. 당신에게 내가 가당키나 할까,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난 처음으로 생긴 가족이 무척이나 소중했어요”“나한테도 그래. 넌, 내게 단 하나뿐인 가족이야. 나한테 가족은 너뿐이야. 그래서 아이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고. 그런데 네가 자꾸 아기, 아기 노래를 부르니….”네가 나 외에 자꾸 다른 가족을 만들려고 하니까 심통이 나서 그런 행동을 했던 거라고.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진심에, 되려 그가 더 놀란 얼굴을 했다. 고작 그런 치졸한 질투심 때문이었다니.“왜 그랬어요?” 
그 뒤 재이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주변을 살폈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해이는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잊고 있었던 도원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야, 무슨 일이야?”걱정스러운 음성의 친구를 잠시 그렇게 방치했다. 아무런 대꾸도 없으니 전화 건너에서 이내 답답함에 심통이 잔뜩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야! 정신 차려! 뭔데 그래?”“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짙은 한숨과 함께 도원이 저가 그쪽으로 가겠다는 말을 남겨놓고 전화를 끊었다. 해이의 손에 들려있던 핸드폰이 다시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곧 골목을 지나치던 사람이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를 힐끗거렸다.다 큰 남자가 길에 서서 울고 있으니, 초면인데도 제가 다 멋쩍어졌다. 무슨 일이기에 저리도 서글프게 우는지, 얼굴이 온통 눈물과 콧물 범벅이었다. 그런데도 저는 지가 우는지도 모르는지 표정이 묘하게도 넋이 나가 있다.그러다 곧, 흐느끼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혹여 남자가 민망해할까 봐 자연스럽게 지나치긴 했지만, 뒤에서 줄곧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니, 행인은 손수건이라도 챙겨줄까 싶었다.그는 같은 남자로서 눈물이라도 닦았으면 하는 마음에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 뻘쭘하게 울고 있는 학생 곁에 섰다. 제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건네자, 눈물, 콧물 범벅된 얼굴로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