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이번 회차는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이용 시 유의 바랍니다.
사내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는 시선을 내려 제 옆구리에 박혀 있는 칼 손잡이를 봤다. 손잡이 근처를 중심으로 새빨간 피가 와이셔츠를 적셔갔다.
“너, 너…. 지금….”
과다 출혈로 눈앞이 흔들리자, 그가 아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겁에 질린 여잔 그대로 서재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아무도 남지 않은 서재 안에서 비틀거리던 사내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르륵 미끄러지듯이 주저앉았다.
“이리…와, 당…장.”
초점을 잃은 시선이 줄곧 아내가 뛰쳐나간 방문 밖을 바라봤다.
...
두 손에 잔뜩 묻은 피를 제 옷에 강박적으로 문질러 닦던 여잔, 닦아도 닦아도 계속 묻어나오는 피에, 그제야 그것이 저의 손목에서 새어 나오는 피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와 몸싸움을 하면서 칼날에 손목이 제법 깊이 베인 모양이었다.
상처를 처치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곧장 침실문을 찾아 열었다. 새하얀 시트가 뒤덮인 두 사람의 침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서 별안간 구역질이 올라와 신물을 게워 낸 재이는 맥없이 주저앉은 채, 엉망으로 뒤엉킨 긴 머리카락 사이로 남편의 금고를 지켜봤다.
갑자기 북받치는 감정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대체 저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남편을 칼로 찌르다니.
그럼에도 이렇게 살 궁리를 하고 있다니.
무서웠다. 두려움이 커지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도망, 도망가자.”
미친 사람 같은 몰골로 남편의 금고를 열고 그녀는 대강 눈에 보이는 가방 안에 현금을 쑤셔 넣었다. 금고 안에 그가 대량의 현금을 보관하고 있다는 건 일찍이 안 사실이었다. 남잔 그 사실을 굳이 재이에게 숨기지 않았다.
그녀가 저의 재산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녀가 이것을 탕진한다고 해도 딱히 상관없었기 때문이었다.
잡히는 대로 돈을 담아내고 있는 중에도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을 그녀가 손으로 마구 문질렀다. 흐느끼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재이는 이런 순간에도 남편의 금고를 털 생각을 한 걸 보면 어쩌면 저는 늘 그에게서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묵직한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다행히도 눈물은 멈춰 있었다. 마음을 다잡듯 그녀의 떨리는 손길이 엉망이 된 자기 머리를 정돈했다. 그러곤 ‘괜찮아’를 수도 없이 되뇌었다. 마치 주문을 거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기 전 재이의 떨리는 눈길이 남편이 있을 서재 쪽을 응시했으나 곧장 시선을 옮겼다. 다시 겁에 질린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그대로 집을 나섰다.
되도록 CCTV가 없는 골목을 전전하며 목적지 없이 걷고 또 걸었다. 무슨 정신으로 움직였는지 그제야 재이는 자신이 집에서 신는 실내용 슬리퍼를 그대로 신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시간이 지나면서 밤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들의 그림자에 숨어 몸을 구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기자, 또다시 눈물이 나왔다.
“...아가씨 괜찮아요?”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불안정해 보이는 여자를 훑었다. 개중엔 도움이 필요한지 묻는 행인들도 있었지만, 그저 여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저가 사람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다는 생각에, 공사가 중단된 어느 낡은 빌라 단지 안으로 급히 몸을 숨겼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건물 안은 미세하게 콘크리트 먼지 냄새가 났다. 여잔 부서진 잔해 더미 아래로 드리워진 시커먼 그림자 속으로 몸을 구겨 앉혔다.
줄곧 들고 있던 가방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숨을 골랐다. 그 집에서 들고나온 것이라곤 남편의 돈뭉치뿐이었다. 시선을 내리자, 슬리퍼 바깥으로 흙먼지가 묻은 발끝이 보였다.
마치 자신의 처지를 확인 시켜주는 몰골이었다. 재이의 입술 새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연락할 곳이 아무 데도 없는 인생을 살아왔다. 이것이 외로운 건지도 모르고 살아왔건만 이제야 늘 자신을 감싸고 있던 공허함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따가워.”
갑자기 잊고 있었던 아픔이 느껴졌다. 제 손목을 내려다보니 베인 상처 위로 피가 새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잔 폐건물 구석에 버려진 안전화를 주워 신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후 약국에서 간단한 처치를 하고 근처 목욕탕을 찾아 들어갔다. 자기 발 치수에 맞지 않는 커다란 신발을 질질 끌면서 들어간 목욕탕은 노쇠한 여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여인은 재이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매우 흥미롭게 지켜보는가 싶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아니, 넘어지기라도 했어?”
어쩐지 음울한 얼굴에 비척대는 꼴이 서방에게 버림받은 꼴이라 입이 근질근질했다. 목욕탕 주인은 단칸방 카운터에 앉아 고개를 쭉 내밀며 손님의 행색을 살폈다. 야반도주라도 한 것처럼 큰 짐가방에 옷은, 자다 나온 사람처럼 볼품이 없고 신발마저 큼지막한 남자 것을 신고 있었다.
쯧쯧.
무슨 일이길래 젊은 여자가 저런 꼴로 다 낡아빠진 목욕탕을 찾아왔을까.
“옷이라도 빌려줘?”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대답도 하지 않는 여자를 지켜보다가 주인이 ‘잠깐만’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편에 있는 캐비닛 안에서 잘 개어져 있는 자신의 여분 옷을 여자에게 건네니,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감사합니다.”
“목욕도 할 거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재이가 가방 안에서 대충 돈을 꺼내 주인에게 건넸다. 팔을 내밀면서 붕대에 감긴 여자의 손목이 드러나자, 주인은 속으로 한 번 더 혀를 끌끌 찼다.
‘무슨 사연이길래 저럴까.’
여탕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재이의 뒷모습을 여주인이 끝까지 눈으로 좇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가 다시 침실로 돌아왔을 땐 아내가 잠든 채로 흐느껴 울고 있었다.“재이야, 왜 그래.”놀란 그의 걸음이 침대 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보, 보고 싶어.”녀석을 상대로 애틋한 꿈이라도 꾸고 있는 모양인지, 아내는 매우 절절하게 울고 있었다. 순식간에 기분이 개같아졌다. 그는 아내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힘없이 아래로 내리며 여전히 눈가에서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응시했다.꿈에서도 혹여 제 눈물을 들킬까, 숨을 죽여 우는 꼴이 퍽 가여웠다. 헛웃음이 나왔다. 저를 상대로는 지독히도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던 여자가 정말 세기의 사랑이라도 하는 듯이 울고 있는 걸 보자니 내장이 꼬인 것처럼 속이 아팠다.아내의 몸을 마구잡이로 흔들어 깨우고 싶다는 저열한 마음까지 드는 걸 보니, 아마도 저는 정말 이 여자에게 단단히 꿰인 게 틀림없었다.아내를 하염없이 응시하는 걸 멈출 수가 없어서, 그렇게 시간을 버렸다. 그러다 울고 있는 아내 곁으로 누웠다. 우습게도 곁에서 느껴지는 체온에 안도감이 들었다.“...진짜 개같네.”맥이 빠진 목소리엔 슬픔이 공존했다. 깊은 한숨과 함께 두 눈을 감았다. 모순된 평온함에 취해 그는 금세 잠이 들었다.-“형! 재이 누나는?”마당 평상에 앉
“도서관 리모델링은 끝났나요?”며칠 전만 해도 바깥으로 나와 있던 부속 자재들이 멀끔하게 치워져 있는 모습을 보곤 재이가 보육교사에게 물었다. 교사는 아이와 블록 놀이를 하다 말고 그녀를 돌아봤다.“아뇨. 아직 마무리가 안 됐는데, 무슨 일인지 공사를 중단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그녀도 잘 모르는 일인지 미간을 모으며 고개를 갸웃했다.“사모님께선 뭐 들으신 것 없으세요?”자신이 들은 바를 떠올리며 여잔 후원처의 아내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제가 알기로는 후원처에서 결정한 잠정 중단이었다.“네. 전 따로 들은 게 없어서요.”그들은 이제 평범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일이 적어졌다. 보통은 그 혼자서 떠들었고 재이는 그저 듣기만 했다. 딱히 대꾸할 말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그래요? 공사가 커져서 시간이 좀 걸리나 봐요.”어영부영 대화가 마무리되고 나선 두 사람 다, 아이들을 돌보느라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재이가 봉사를 끝내고 나오니, 오늘도 역시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별다른 반응 없이 남자가 열어주는 차에 올라탔다.“오늘도 열심히 일했나 보네. 당신이 땀을 다 흘리는 걸 보니.”재이는 그제야 저가 땀을 흘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한쪽 손을 올려 이마를 훔치자 물기
“당신을 찌르고 도망치던 날, 난 그제야 모든 것에서 해방된 안도감을 느껴서, 이건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기분이 들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남편을 찔렀는데, 당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먼저 드는 게 아니라, 안도감이 든다니.”그땐 그녀가 제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이었으니, 그럴 수 있었다. 남잔 온갖 이유를 붙여가며 나름의 타당성을 찾으려 노력했다.“내가 먼저 널 겁 줬으니, 그건 당연한 감정이야. 찔린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네가 왜 죄책감을 가져.”마침, 요리가 된 음식을 들고 직원이 다가오자 남잔 부리나케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아이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하지. 일단 먹어.”“...당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건 단지 보육원 일 때문만은 아니에요. 당신이 이상한 종교를 믿고 있기 때문도 아니고요. 난 단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나이프를 든 남자의 손등에 힘줄이 붉어졌다. 그는 마치 아무 말도 못 들은 사람처럼, 살뜰히 아내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사랑을 운운할 만큼 철이 없진 않잖아. 정신 차려. 네 남편은 나고. 넌 그저 부부싸움을 하고 토라져 있었던 것뿐이야. 그때 마침 멀끔한 대학생이 당신을 붙들고 사랑하네, 마네 달콤한 말을 속삭이니, 그것에 잠시 심취해 있었던 거지.”그렇게라도 얼버무리며 상황을 종결시키려 드는 남자를 여자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녀의 표정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어쩌면 작은 연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거야, 아시겠지. 이렇게 대놓고 수상하게 공사하는 곳을 보면서도 그런 의심도 하지 않는 건 바보천치니까.그는 자신의 아내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증거도 찾았겠다, 이제 와 무엇을 할 건지 궁금해졌다. 겉으로만 겁을 줄 뿐 순해 빠진 자기 아내는 아마도 할 줄 아는 게 없을 터.“놀랍군. 꼭꼭 숨겨둔 장소를 찾아내다니. 그래 그럼, 이제 무엇을 할 거지? 날 신고라도 할 생각인가? 감옥은 무서운데.”남편의 가볍기 짝이 없는 말투와 그와 상반되는 이성적인 얼굴은 그녀에게 자괴감을 느끼게 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그의 머리카락을 잠시 바라보다가 재이가 천천히 입을 뗐다.“아뇨. 신고할 생각 없어요.”의외의 답이었다. 남자의 미간이 꿈틀 반응을 보이다, 곧 평소의 차가운 인상으로 돌아왔다.“뭐, 그건 지켜봐야지. 차에 타.”그 뒤 별다른 대화 없이 시간이 지나갔고, 어느새 차는 한적한 공원 앞에 세워졌다.“여긴 왜요?”대꾸 없이 먼저 차에서 내린 그가 손수 아내의 차 문을 열어주었다. 상대가 내릴 생각을 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한 배려의 행동이었다.“내려.”처음 기도원에 갔을 때가 생각나면서 좋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재이가 경계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저를 올려다보자,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비좁게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 비상구 표시가 부착된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비상계단이 아니라 또 다른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재이는 여기서 더 안으로 들어가도 되는지를 잠시 고민했지만, 두려움을 이겨내고 전등이 다 떼어진 어두운 곳으로 발을 디뎠다.쾅, 순간 굉음이 들려왔다.무거운 물건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소리였다. 흠칫 어깨를 움츠렸던 그녀가 천천히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바닥에 무언가 깨져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좀 더 가까이 걸음을 옮기니 다 시들어버린 난초와 흙이, 깨진 화분과 뒤엉켜 있었다.괜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 외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아까부터 후각을 자극하는 불쾌한 냄새와 텁텁한 공기가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재이는 창문조차 없이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서 잠시 우두커니 있다가, 이내 발길을 돌렸다. 저도 모르게 점차 걸음이 빨라졌다.비상구 표시가 되어 있는 수상한 공간을 벗어나 바깥으로 빠르게 나오자, 바로 그 앞에 다정한 미소로 얼굴을 꾸며낸 남편이 서 있었다.“이런, 놀라게 할 마음은 없었는데.”거의 달리다시피 건물을 벗어나다, 앞을 버티고 서 있는 저와 자칫 부딪칠뻔한 아내의 몸을 그가 단단히 잡아주며 능청을 떨었다.“...할 일이 그렇게 없어요?”제 몸을 잡은 남편의 손을 밀어내며 재이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만 쫓아다니는 것 같은 그의 행보에 순간, 골이 났다.&nb
자신의 차에 기대 서 있던 남잔, 제 아내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수상한 점은 발견했나?”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람처럼 짓궂은 표정을 짓는 그를 재이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자기 남편이 끔찍했다. 의미 없는 결혼 생활을 이어 나가는 이유를 그도 모르지 않을 터였다. 이 남자는 지금 아내가 무엇을 하기 위해 자원봉사를 자처했는지 알면서도 놔두는 것이었다.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거나, 무능한 자신의 아내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치부하는 것이거나. 재이는 그라면 후자라고 생각했다.“매번 이렇게 오지 않아도 돼요.”“내 아내가 다시 또 도망을 가면 곤란하니까.”조수석 문을 열어 턱짓하는 그를 향해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말고 재이가 천천히 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자, 곧장 문이 닫혔다.“약물 실험을 하는 장소를 알려줄까?”재이는 웃는 낯으로 자신의 의중을 떠보는 남편을 무덤덤한 시선으로 응시하다가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했다.“당신에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그러면 곤란한데. 네가 바라는 거라면 다 해준다고 했잖아.”“그냥 평소처럼 해요.”“정말 평소처럼 해도 돼?”마치 들뜬 사람처럼 살짝 높아진 그 목소리에 여자는 다시 말문을 닫았다. 더는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