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독수공방의 여왕님
독수공방의 여왕님
작가: 별빛찬란

제1화

작가: 별빛찬란
서재 앞에 선 서다윤은 안에서 들려오는 남편 지승현의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있었다.

한참 뒤 서재 문이 열렸다.

지승현이 붉어진 얼굴로 안에서 걸어 나왔다.

서다윤은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기 직전에야 겨우 손에서 힘을 풀고 평온한 얼굴로 다가가서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치료는 다 끝났어?”

지승현이 손을 들어 부드럽게 서다윤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응.”

“어때?”

“예전이랑 똑같아. 선생님이 내가 겪었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할 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들어. 비록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다행히 치료가 끝나고 나면 한결 편안해져.”

실제로 지승현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윤 씨가 승현 씨의 신음 소리를 듣고 걱정을 많이 했나 봐요.”

안효민이 생글생글 웃으며 따라서 나왔다. 촉촉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가 사람을 홀릴 듯했다.

서다윤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안 선생님은 업계에서 굉장히 유명한 심리상담가잖아요. 선생님께서 제 남편을 열심히 치료해 주고 계셔서 마음이 놓여요.”

“승현 씨가 협조를 잘해준 덕분에 치료도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는 거예요.”

안효민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지승현은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시선을 피했다.

“아까 놀라서 식은땀이 났으니 샤워 좀 하고 올게.”

“저는 지아를 보러 가볼게요.”

나란히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서다윤은 눈빛 속 서늘함을 거두어들인 뒤 몸을 돌려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서재 안 휴게실로 곧장 들어간 서다윤은 구석 자리에 놓인 쓰레기통에 시선을 고정했다.

손을 뻗어 쓰레기통을 뒤집자 종이 뭉치가 와르르 쏟아졌고, 그 중에 사용된 콘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배신의 증거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서다윤은 자조하듯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어느샌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 자체가 우스운 건 아니었다.

진짜로 우스운 건 자신의 아내와는 못하는 걸 다른 여자와는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3년 전 두 사람은 피지공화국에서 결혼했다. 신혼 첫날 밤, 지승현은 호텔은 분위기가 별로라며 굳이 직접 운전하여 산꼭대기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서다윤에게 차 안에서 하자고 제안했다.

서다윤은 거절했고 흥이 식은 지승현은 짜증이 난 상태로 난폭하게 운전하더니 결국 차가 산길에서 미끄러져 추락했다. 그 사고로 인해 지승현은 척추를 다쳤다.

두 사람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지승현은 그때부터 발기부전을 앓게 되었다.

지승현은 서다윤에게 더 이상 욕망을 느끼지 못했고, 심지어 서다윤이 가까이 다가오면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날 밤 아찔했던 순간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승현은 더 이상 정상적인 남자로 살아갈 수 없었다.

서다윤은 아주 오랫동안 지승현과 함께 진료를 받으러 다녔다. 결과적으로 의사는 지승현이 발기부전을 앓는 이유가 외상 때문이 아니라 심리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그 뒤로 안효민이 지승현의 전담 심리상담가가 되었다.

안효민은 이혼한 싱글맘이었다. 매일 두 시간 동안 이어지는 치료를 위해 오가는 것이 번거롭다는 이유로 반년 전 지승현은 안효민에게 딸을 데리고 그들의 집으로 들어와 살라고 했다.

처음에 서다윤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3일 전 저녁, 물을 마시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우연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승현 씨, 승현 씨는 매번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잖아. 다윤 씨가 우연히 들었다가 의심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소파에 앉아 있던 훤칠한 남자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다윤이는 처녀야. 경험이 없어서 남녀 간의 일에 대해 잘 모르니까 의심할 리가 없어.”

“하지만 승현 씨 이제 다 나았잖아. 다윤 씨랑... 한 번 해볼 생각은 없는 거야?”

안효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지승현의 몸에 손을 올렸다.

지승현은 눈을 감았다.

“시도해 봤는데 걔랑은 안 돼.”

“나하고만 된다는 거야?”

안효민이 앙칼진 고양이처럼 지승현의 귀를 깨물었다.

“네가 사람을 홀리는 능력이 어디 보통이어야지. 아마 스님이 와도 못 당할걸?”

두 사람의 몸이 겹쳤다.

계단 위에 서 있던 서다윤은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차게 식는 걸 느꼈다. 끝없는 한기가 몸을 휘감았다.

관자놀이는 미친 듯이 지끈거리고, 머리는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당장이라도 터질 듯했다.

서다윤은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동안 지승현이 신음을 냈던 건 괴로운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 아니라 예쁜 심리상담가가 안겨 준 쾌락 때문이었다는 걸 말이다.

다음 날, 서다윤은 쓰레기통에서 콘돔 하나를 발견했다.

오늘 발견한 것까지 더하면 총 세 개였다.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단 한 번도 자신과 관계를 가지지 못했던 남편이 다른 여자와는 3일 만에 콘돔 3개를 사용했다.

이번에 발견한 세 번째 콘돔이 서다윤의 마지막 희망까지 완전히 짓밟았다.

역겨운 외도의 증거를 다시 쓰레기통 안에 집어넣은 뒤 서다윤은 완전히 무뎌진 얼굴로 서재에서 나왔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조용히 앉았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온 지승현이 기운 넘치는 모습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너랑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

“나 할 말 있어.”

지승현이 서다윤의 앞에 섰을 때,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서다윤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먼저 얘기해.”

“앞으로 안 선생님을 대신해 지아의 등하교를 좀 맡아 줘. 어차피 너는 집에만 있고 할 일도 없잖아. 한가할 텐데 시간도 때울 겸 네가 좀 도와. 안 선생님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남편을 빼앗아 간 내연녀를 대신해 아이의 등하교까지 맡으라니.

“내가 왜?”

서다윤이 날 선 어투로 따져 물었다.

지승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서다윤의 태도에 불만이 있는 듯했지만 그래도 참을성 있게 서다윤을 달랬다.

“다윤아, 너도 이제는 철 좀 들어야지. 너는 집에서 빈둥거리며 재벌가 사모님으로 편하게 살고 있지만 나는 아니야. 내가 밖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알아?”

“사실 지금 내가 청수 그룹 대표 자리를 확실하게 지키고 있는 게 아니야. 지난 1년 동안 실적도 그저 그랬고 주가도 제자리걸음이었거든. 그래서 부대표가 몇몇 이사와 연합해 다음 주주총회에서 나에 대한 불신임안을 발의하려고 준비 중이야. 나에게는 지금 당장 상황을 뒤집을 만한 호재가 필요해. 그런데 마침 안 선생님이 투자 업계의 거물인 제이와 아는 사이래. 안 선생님이 나를 도와준다면 이번에는 반드시 내가 이기게 될 거야.”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안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라는 말이야?”

지승현은 무심한 눈빛으로 서다윤을 바라봤다. 덤덤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은은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

“너는 별로 쓸모가 없잖아. 그리고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말이야. 내가 너한테 제이를 소개해 달라고 한다면 그렇게 해줄 수 있어? 아니잖아.”

서다윤은 지승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애초에 서다윤은 지승현에게 제이를 소개해 줄 필요가 없었다.

서다윤이 바로 제이였기 때문이다.

서다윤은 대학교 때 금융을 전공했으나 졸업한 뒤에는 금융과 관련된 일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다윤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4년 동안 허송세월을 했기 때문에 별 볼 일 없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도 몰랐다. 서다윤이 금융 분야 쪽으로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그러나 재능이 있다고 하여 그 분야를 무조건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금융을 전공한 이유는 가족들의 강요 때문이었고, 사실 서다윤이 사랑하는 것은 조향이었다.

서다윤의 꿈은 조향사가 되는 것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서다윤은 특별히 작은 공방을 마련해 매일 향료를 다루며 언젠가는 자신만의 향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마치 디올이나 샤넬처럼 말이다.

서다윤이 투자 업계의 거물 제이가 된 계기는 남편이 힘겹게 사업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신분을 숨긴 채 줄곧 뒤에서 묵묵히 힘을 키운 것도, 언젠가 지승현의 사업에 위기가 닥쳤을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서다윤도 사실 나름대로 가정을 위해 헌신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남편의 배신이었다.

게다가 더 우스운 건 안효민이 뻔뻔하게도 제이를 안다고 떠벌리고 다녔다는 점이었다.

“지승현, 너는 내가 우습나 봐?”

서다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승현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그런 뜻이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나는 3년 동안 치료를 받았어. 다들 그러던데 사람은 삶이 너무 편해지면 허튼 생각을 하게 된대. 나는 네가 집에서 하는 일도 없이 지내다가 괜히 허튼 생각을 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허튼 생각? 그게 뭔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안효민이 웃으며 다가왔다.

지승현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방금 다윤이랑 의논을 마쳤어요. 앞으로 지아의 등하교는 다윤이가 대신 맡아 줄 거예요.”

안효민은 일부러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좀... 다윤 씨한테 너무 폐 끼치는 건 아닐까 싶네요. 그냥 가정부한테 부탁할게요.”

“그냥 내 말대로 해요. 다윤이가 세심한 편이라 가정부한테 맡기는 것보다 나을 거예요.”

“그러면 다윤 씨는...”

“다윤이는 이미 동의했어요.”

서다윤은 힘주어 주먹을 움켜쥐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차 없이 부정했다.

“나는 동의한 적 없어요. 동의할 생각도 없고요.”

바로 그 순간, 서다윤은 결심했다. 지승현과 좋게 헤어질 생각은 이제 없었다.

사실 서다윤은 평화롭게 이혼을 제안할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다.

다른 이의 진심을 짓밟은 사람이 좋은 결말을 맞이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지승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다윤은 오늘따라 유난히 반항적이었다.

말 잘 듣고, 배려심 많고, 순순히 굴던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분위기가 완전히 얼어붙은 상황이었다.

“탕, 탕, 탕! 저한테 총이 있으니까 다들 어서 항복해요!”

안효민의 다섯 살 된 딸 안지아가 핑크색의 무언가를 손에 쥔 채 장난스럽게 그들을 향해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딸의 손에 들린 것을 본 순간 안효민은 표정이 확 바뀌더니 이내 호통을 쳤다.

“그건 어디서 난 거야?”

남녀 간의 일에 전혀 경험이 없는 서다윤이라 해도, 모양만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안지아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서다윤을 가리켰다.

“이건 아줌마 방에서 가져온 거예요.”

지승현은 충격을 받았고, 곧 눈동자에 분노가 서서히 번져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했던 말이 정말로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인가?

아내가 욕구를 참지 못해 저런 물건까지 사용했다는 사실에 남자로서 체면이 서지 않았다.

지승현은 손을 뻗어 그것을 낚아채더니 수치스러움에 역정을 내며 서다윤에게 따져 물었다.

“서다윤, 너 욕구불만이야?”

이 작품을 무료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독수공방의 여왕님   제30화

    서다윤이 가장 우려하던 일이 결국 터지고야 말았다.그녀는 속으로 나지막이 독한 년이라고 욕설을 내뱉고는 김선영에게로 급히 다가갔다.김선영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가녀린 두 손은 사시나무 떨듯 진동하고 있었다.서다윤은 얼른 김선영의 손을 꼭 쥐며 긴장된 목소리로 불렀다.“어머니...”하지만 안효민은 개판이 된 현장을 수습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는 듯 유유히 자리를 떴다. 어차피 자신이 남아 있어 봐야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이라는 계산이었다.그녀는 지난밤 잠을 설친 터라 딸을 데리고 낮잠이나 잘 생각으로 곧장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김선영의 손끝은 빙판처럼 서늘했다. 마치 시신의 살결을 만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서다윤은 그녀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음을 직감했다. 심신이 미약한 김선영이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해 철저히 함구해 왔던 치부가 결국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김선영이 자신에게 얼마나 깊은 미안함을 품고 사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 지승현에게는 그런 최소한의 양심조차 없었다.과거 김선영은 지승현이 감히 다윤을 배신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대노하셨던 적이 있었다.서다윤은 시어머니의 힘을 빌려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지승현의 이 더러운 짓거리가 그녀의 건강을 해치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어머니, 일단 저기 소파에 가서 앉으세요.”서다윤은 김선영을 부축해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어머니, 방금 들으신 거예요?”그녀는 가슴을 졸이며 물었다. 김선영이 어디서부터 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소파에 겨우 신체를 맡긴 김선영은 눈물이 차올라 고통스러운 듯 목이 메어 도무지 입을 열지 못했다.“어머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전 정말 괜찮아요...”눈앞의 김선영이 너무나 안쓰러웠던 서다윤은 애써 덤덤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를 달랬다.“다... 다윤아. 방금 한 말이 대체 무슨 소리야? 승현이가... 안 선생이랑 바람을 피웠다고? 그게 정말이야? 승현이가 안 선생이랑은..

  • 독수공방의 여왕님   제29화

    서다윤은 입꼬리를 비틀며 냉소하더니, 아주 시원스럽게 응낙했다.“그래.”가방 하나뿐이겠는가. 그동안 그가 선물해 준 모든 물건을 싹 다 비워내라고 해도 기꺼이 동의할 터였다. 귀찮게 일일이 정리할 필요 없이 한 번에 치울 수 있으니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누군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면, 그가 선물한 물건들은 그저 집구석에 굴러다니는 쓰레기 더미에 불과했으니까.안효민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짐짓 미안해하는 척 가식을 떨었다.“승현 씨, 그건 예의가 아니죠. 다윤 씨에게 주신 선물인데 어떻게 제게 주라고 하세요. 저도 가방 많으니까 괜찮아요. 진짜 안 주셔도 돼요...”“괜찮아요. 그거 전 세계에 딱 세 개밖에 없는 초고가 한정판 백인데, 다윤이는 어차피 격식 있는 자리에 갈 일도 없으니 갖고 있어 봐야 낭비예요. 안 선생님이 들고 다니는 게 격에 훨씬 잘 맞을 겁니다.”“맞아요, 안 선생님. 사양하지 말고 가져가요. 그 가방 안 선생님 이미지랑 아주 찰떡이니까 이따가 챙겨줄게요.”쓰레기 같은 여자에게는 쓰레기가 딱이었다.서다윤은 원래 아침을 먹으려던 참이었으나, 눈앞의 역겨운 꼴을 보고 있자니 순식간에 입맛이 싹 달아나 버렸다.안효민의 몸에서 익숙한 향수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자신이 직접 조향한 시그니처 향수였다.이게 무슨 뜻이겠는가.친딸이 계단에서 굴러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그 절박한 순간에도 두 남녀는 병원 구석에서 틈을 타 뜨거운 정사라도 나누었다는 방증이었다.참으로 대단한 정성이었다.위장이 울렁거리며 구역질이 밀려오자, 그녀는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려 2층으로 향했다.다시 계단을 내려왔을 때 그녀의 손에는 그 한정판 핸드백이 들려 있었다. 지승현은 이미 출근하고 없었고 안지아 역시 보이지 않았다.오직 안효민 혼자 거실 소파에 우아하게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홀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오만한 자태는 마치 자신이 이 집의 진짜 안주인이라도 된 듯 기세등등했다.서다윤은 그녀의 앞에 다가가 손에 든 백을

  • 독수공방의 여왕님   제28화

    지승현은 깜짝 놀란 눈으로 서다윤을 꾸짖었다.“다윤아, 너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서다윤은 안효민의 가증스러운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 매섭게 몰아붙였다.“이 여자 입으로 직접 말하게 해봐. 정말 제이를 알기는 하는지. 그렇게 잘 아는 대단한 인맥이면서 고작 다리 하나 놓아주는 게 왜 그렇게 오래 걸리겠어? 매번 차일피일 미루는 꼴을 보니 그냥 거짓말로 사기 친 게 분명한데!”“다윤 씨, 말을 왜 그렇게 함부로 해요? 내가 승현 씨를 속여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요? 정말 억지 좀 부리지 마세요!”안효민은 앙칼진 기세로 쏘아붙였지만,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당혹감과 켕기는 기색이 역력했다.“좋아요. 사기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 나와 승현 씨가 보는 앞에서 제이에게 전화를 걸어 두 사람 관계를 증명해 보세요.”안효민은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지난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그분은 지금 외부와 연락을 끊고 수행 중이라 휴대폰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요.”“그러면서 어떻게 그분과 소통한다는 거죠? 만나지도 못하고 전화도 안 연결되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연락한다는 말인가요? 초능력으로 텔레파시라도 보내시게요?”서다윤의 집요한 압박에 안효민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자 결국 배수진을 치듯 질러버렸다.“나름대로 연락할 방법이 있어요. 늦어도 사흘 안에 그분과 승현 씨가 직접 대면하게 해드릴게요!”“정말요?”지승현의 눈에 기대와 기쁨이 서렸다.그가 이토록 제이와의 협력에 목을 매는 이유는 금융계에서 이 거물의 평판이 워낙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주식시장에 날고 기는 큰손들은 널렸지만, 대부분이 돈만 밝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이기주의자들뿐이었다.물론 그것이 금융계의 철저한 생존 방식이기도 했다.하지만 제이는 달랐다. 그녀는 의리가 있었고 거시적인 판을 볼 줄 알았으며 절대 개미들의 고혈을 짜내거나 악의적으로 주가를 폭락시키지 않았다.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수천만 원 남짓한 종잣돈으로 시

  • 독수공방의 여왕님   제27화

    한참 뒤에야 조세혁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어디 살아?”“녹턴 별장이요.”그 말을 끝으로 차 안에는 다시 무겁고 서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원래라면 감히 앉지도 못할 뒷좌석 상석에 구겨지듯 앉아 있던 진현우는 한동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라 차의 속도가 줄어들자 점차 긴장이 풀렸는지, 속으로 남몰래 쾌재를 불렀다.‘대표님이 사랑에 눈이 머니 엉뚱하게 비서인 내가 다 호강을 누리네.'차가 녹턴 별장 앞에 멈춰 서자, 서다윤은 차에서 내리기 전 정중히 뒷좌석을 향해 목례를 건넸다.“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조 대표님.”진현우는 화들짝 놀라며 어색한 미소와 함께 손을 휘휘 저었다.“아닙니다, 별말씀을요! 조심히 들어가세요!”서다윤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넘겨주며, 운전석의 조세혁에게도 나지막이 감사를 전했다.“고마웠어요.”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이 별장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조세혁의 시선은 집요하게 그 뒤를 쫓았다.진현우는 멍하니 앞을 주시하는 대표와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며 헛기침을 삼켰다.“에헴, 에헴...”조세혁은 그제야 복잡한 눈빛을 거두고 밀려드는 짜증을 억누르며 차에서 내려 뒷좌석으로 옮겨 탔다.운전석으로 돌아간 진현우는 입을 꾹 다물고 참아보려 애썼지만 결국 오지랖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대표님, 서다윤 씨는 엄연히 가정이 있는 몸입니다...”“네가 왜 설쳐? 내가 남의 가정이라도 파탄 낼까 봐 겁나?”“대표님이 걷잡을 수 없이 깊이 빠지실까 걱정돼서 그러죠. 잘나가는 대표님이 남편 있는 유부녀와 눈이 맞았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이미지에...”조세혁의 짙고 어두운 눈동자에 매서운 그늘이 번졌다.“입방정 한 번 상스럽게 떠는군. 상처 입은 여자가 비 오는 밤거리를 얇은 드레스 한 장 걸치고 걷고 있는데, 사람 탈을 쓰고 어떻게 그냥 지나쳐?”완벽한 논리에 진현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이래저래 자기 혼자만 모진 놈

  • 독수공방의 여왕님   제26화

    그제야 지승현은 전화를 받았다.안효민의 전화였다. 그녀는 다급하고 흐느끼는 목소리로 울먹였다.“승현 씨, 지아가 다쳤어. 계단에서 굴러떨어져서 머리가 찢어졌어. 지금 병원이야.”안지아가 다쳤다는 말에 지승현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차 세워요!”“지금 어느 병원이야? 얼른 위치 보내줘!”지승현은 바로 곁에 자신의 진짜 아내가 앉아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은 듯했다.전화를 끊은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다윤아, 지아가 다쳐서 병원에 있대. 나 당장 가봐야 하니까 넌 그냥 택시 타고 들어가. 시간도 늦었으니 어차피 너도 나랑 같이 가고 싶진 않을 거 아냐.”‘그 아이가 너랑 무슨 상관인데?'서다윤은 비아냥거리며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이내 관두기로 했다.어차피 이제 27일만 지나면 완전히 남남이 될 사이인데 이제 와서 그와 이런 구차한 일로 입씨름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그녀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차 문을 열고 내렸다.차는 단 한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그 흔한 걱정이나 당부의 말 한마디 남기지 않은 채 그녀를 홀로 버려두고 쏜살같이 멀어져 갔다.서다윤은 텅 빈 도로 위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다.이미 마음은 재가 되어 부스러진 지 오래였건만, 바짝 메마른 심장 깊은 곳에서 차가운 통증이 울컥 밀려왔다.그는 그녀에게 휴대폰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고 곧 비가 쏟아질 거라는 사실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상간녀의 아이에게 사고가 났다는 소식에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팽개쳐 버렸다.가느다란 드레스 한 장만 걸친 그녀가 이 어둡고 바람 부는 밤길에 어떤 위험에 처할지는 안중에도 없었다.‘허허, 이게 정녕 내가 과거에 온 힘을 다해 결혼하려 했던 남자란 말인가?’차가운 빗방울이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지만, 서다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혼이 나간 사람처럼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다.차라리 비라도 시원하게 내리는 편이 나았다.헛된 미련에 홀려 이성을 잃었던 제 어리석은 머릿속을 깨끗

  • 독수공방의 여왕님   제25화

    서다윤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시선을 옮기니, 대략 스물넷 남짓으로 보이는 앳된 아가씨가 서 있었다.귀티 나는 딥그린 벨벳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목에는 아무런 장신구도 걸치지 않았지만 귓가에는 앙증맞은 진주 귀걸이가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첫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볼수록 은은한 매력이 풍기는 얼굴이었다.부드러운 눈썹 아래로 크진 않지만 총명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그리고 입꼬리를 올릴 때 살짝 지어지는 호선이 인상적이었다.“안목이 없으신 게 아니라, 애초에 이 브랜드를 알아볼 수준이 안되시는 것 같네요. 아틀리에 자크는 주로 유럽 왕실 전용으로 옷을 짓는 브랜드인데, 이곳 의상을 두고 저렴하다고 깎아내리시다니. 풋...”강하린이 입을 가리며 가볍게 실소를 터뜨렸다.“제가 보기엔 드레스가 저렴한 게 아니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으스대는 그쪽 안목이 참 저렴해 보이네요.”청천벽력 같은 노골적인 독설에, 잔뜩 치장한 영애의 얼굴이 순식간에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그럼에도 감히 말 한마디 받아치지 못한 채 입술만 바르르 떨 따름이었다.눈앞의 아가씨가 다름 아닌 조세혁의 사촌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도저히 건드릴 수 없는 상대였기에 결국 여자는 무안함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트집을 잡던 여자가 사라지자 서다윤은 강하린을 향해 고마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아니에요. 저도 쥐뿔도 없으면서 남 깎아내리며 우월감 느끼는 부류들이 제일 꼴불견이더라고요.”서다윤은 그녀의 솔직하고 털털한 성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강하린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와, 언니. 몸에서 나는 향이 진짜 좋네요. 무슨 향수 쓰세요?”“이건 정말 대중적이지 않은 건데... 브랜드제품은 아니고, 제가 직접 조향해서 쓰는 거예요.”서다윤이 멋쩍은 듯 대답했다.“언니가 직접 향수를 만드신다고요?”강하린이 눈을 빛내며 흥미를 보였다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작품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