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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Penulis: 천이설
문채아와 박도윤은 연인으로 지낸 지는 3년이었지만 알고 지낸 지는 13년이었다. 지난 13년 동안 박도윤은 문채아 말이라면 뭐든 믿어주었고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되어주었다.

강지유가 뭣 때문에 이런 허접한 일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채아는 박도윤이라면 이 일에 그녀의 잘못이 없다는 것쯤은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문영란은 몰라도 박도윤은 꼭 알아야만 했다.

하지만 박도윤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계속해서 차가운 눈빛으로 문채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팔은 강지유를 더 세게 감싸안았다.

“문채아, 마지막 경고야. 지유한테 구두 돌려주고 제대로 사과해.”

박도윤의 단호한 태도에 잠시나마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은 금세 다시 생각을 바꾸며 문채아가 훔친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조용한 거실 안, 문채아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강지유의 편은 이토록 많은데 말이다.

문채아는 더 이상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모든 게 다 허망하고 허탈하기만 했다.

박도윤은 결국 그녀가 아닌 강지유를 선택했다.

3년간의 사랑이, 3년간의 진심이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강지유는 아마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작정하고 뒷조사하면 문채아와 박도윤의 사이쯤은 쉽게 알아낼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와 이런 일을 꾸민 것이다. 문채아에게 박도윤은 더 이상 네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주기 위해, 네가 졌으니 순순히 고개를 조아리라고 알려주기 위해.

하지만 이대로 당할 문채아가 아니었다.

문채아는 떨궈진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린 후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 러그 위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웠다. 그러고는 박도윤을 빤히 바라보며 직접 112를 눌렀다.

“난 사과 안 해.”

“...”

박도윤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분노로 핏줄이 바짝 튀어나왔지만 문채아는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다. 똑같이 눈을 부릅뜨며 박도윤을 응시했다.

두 사람이 팽팽한 눈싸움을 벌이고 있던 그때, 강지유는 얼른 옆을 바라보며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갑자기 운전기사가 급하게 무언가를 안고 다가와서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가씨, 구두 여기 있어요! 아가씨가 연못에서 놀고 있었을 때 구두가 덩그러니 놓여있길래 제가 보관해 뒀어요. 아가씨한테는 중요한 구두니까요. 그런데 저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어머, 내 구두를 가져간 사람이 김 기사님이었어요? 그냥 두지 그걸 왜 가져가서는!”

강지유는 깜짝 놀라며 기사를 질책했다. 어느 정도 질책한 뒤에는 다시 시선을 돌려 문채아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우리 집 기사님이 구두가 더러워질까 봐 차로 가져가 보관해 뒀나 봐요. 나한테 너무나도 중요한 구두라서 그런 거니까 채아 씨도 이해하죠? 이런 일로 얼굴을 붉히고 싶지는 않은데.”

강지유는 잘 사과하는가 싶더니 이내 협박으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말만 이렇게 했지 강지유도 상당히 당황한 상태였다. 만약 정말 경찰이 왔으면 박씨 가문은 물론이고 그녀의 가문에도 영향이 미칠 테니까.

그래서 문채아가 112를 누르자마자 기사에게 신호를 준 것이었다.

문채아는 강지유의 생각을 전부 다 꿰뚫어 보고 있었지만 시선은 여전히 강지유가 아닌 박도윤 쪽에 고정하고 있었다.

“너도 내가 구두를 훔쳤다고 확신했잖아. 훔친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게 밝혀진 지금, 기분이 어때? 죄책감은 좀 들어? 하지만 덕분에 깨달은 게 하나 있어.”

문채아는 그렇게 말하며 강지유의 운전기사 쪽으로 다가가 구두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 게 아닌 건 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말이야. 아무리 그럴싸하게 포장해도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이니까.”

기사의 손에 들린 크리스탈 구두는 꼭 박도윤 같았다. 겉모습은 매우 화려하지만 막상 신으면 차고 또 아픈...

문채아는 이제껏 이 집안에서 기댈 곳이라고는 박도윤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좋아하는 것도 포기하고 늘 착한 얼굴만 보였다. 사귀지 않을 때도 언제나 언행을 조심하며 필요하면 스스로를 낮추기까지 했다.

하지만 박도윤은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의 사랑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숴버리고 그녀의 진심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이겨버리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문채아는 생각을 바꿨다. 박도윤이 그렇게도 이 약혼이 하고 싶다는데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자고.

문채아가 박도윤을 향해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얼굴에 가득 어려있던 분노와 원망이 지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무언가로부터 해방된 것처럼 매우 후련한 표정이었다.

박도윤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꼭 무언가가 그의 곁에서 영원히 떠날 것만 같은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을 빨리 마무리해야 했기에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문채아를 보며 말했다.

“오해였다는 게 밝혀졌고 지유도 사과했으니까 채아 너도 그쯤 해.”

문채아가 걸었던 신고 전화는 강지유의 운전기사가 구두를 들고 들어왔을 때 문영란에 의해 금방 끊어져 버렸다.

문영란은 박씨 부자의 체면이 무엇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었으니까.

문채아는 박도윤의 말에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돌린 후 운전기사의 손에 든 구두를 가볍게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모두가 방심한 사이 그 구두를 냅다 멀리 던져버렸다.

아름다운 포물선과 함께 구두는 그대로 벽으로 날아가 부딪혔다.

구두 위에 박혀 있던 크리스탈이 산산조각이 난 것을 본 강지유는 눈을 부릅뜨며 큰 소리로 외쳤다.

“미쳤어요? 갑자기 구두는 왜 던져요?!”

“몰라서 물어요?”

문채아가 손을 툭툭 털며 말을 이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사람을 도둑으로 몰아갔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죠.”

“그래서 사과했잖아요!”

“그딴 것도 사과라고. 강지유 씨는 본인의 사과가 대단히 값진 줄 아나 봐요?”

“문채아, 지유 씨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어떡해!”

당황한 문영란이 앞으로 나서며 강지유를 대신해 문채아를 질책했다.

문채아는 그런 엄마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쭉 이런 식으로 말했는데 혹시 제대로 안 들렸어요? 그래서 딸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을 때 남일 보듯 한 거예요? 엄마는 매번 저자세로 나가고 앞장서서 나를 혼내면 이 집안 사람들이 엄마를 존중해 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죠? 아니요. 그럴 일은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 만약 그 방법이 먹혔다면, 나를 이런 식으로 몰아가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강지유 씨가 엄마라는 존재를 이 집안의 일원으로 생각했다면 인사 온 첫날 나를 도둑으로 몰아가면서 이 난리를 피우지는 않았을...”

짝!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문채아의 얼굴이 사정없이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도우미들은 물론이고 딸의 말에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려갔던 문영란도 깜짝 놀라며 옆을 바라보았다.

문채아는 잠깐의 이명이 멈춘 후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서야 자신을 때린 사람이 박도윤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박도윤은 문채아가 문영란에게 뭐라 했을 때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다가 강지유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망설임 없이 문채아에게 손을 올렸다.

무거운 침묵이 계속 이어지던 그때, 계단 쪽에서 위엄있는 한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이야?”

사람들은 그 말에 움찔하며 하나둘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위층 서재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박진성이 아래로 내려온 것이었다.

새치가 군데군데 보이는 나이가 든 남성이었지만 두 눈은 여전히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박도윤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앞으로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제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에요.”

“문채아, 나는 오늘 일을 키우고 싶은 생각 따위 조금도 없었어. 지유가 우리 집에 인사 온 첫날이니까. 그런데 네 행동 때문에 더 이상 조용히 넘어갈 수 없게 됐어. 아버지까지 나오신 이상 따로 얘기 드릴 필요도 없어졌고. 김 집사님, 그거 가져와 주세요.”

박도윤의 냉랭한 말에 집사는 곧장 서랍을 열고 팔뚝만 한 굵기의 채찍을 가져왔다.

집에 채찍이 있는 이유는 이거로 쭉 체벌을 해왔기 때문이다.

문영란은 딸이 맞지 않게 막아주고 싶었지만 박진성의 얼굴을 보자마자 몸이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강지유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문채아을 향해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억울해하지는 말아요. 미래 와이프 될 사람 흉을 대놓고 보는데 도윤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이번 기회에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반성 좀 해요. 그리고 말할 때 뇌를 거치는 습관도 좀 기르고요.”

문채아는 그녀의 말을 그저 가만히 듣고 있기만 했다. 그러다 말이 다 끝난 뒤에야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내가 엉망이 된 꼴이 꼭 보고 싶은가 본데 이거 어쩌죠? 강지유 씨 덕분에 평생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이 없었던 그 빚을 꼭 써먹어야겠다고 방금 마음을 바꿨어요.”

그 말에 강지유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문 쪽을 바라보니 웬 기다란 기럭지를 가진 남자가 문지방에 멈춰선 채 문채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타이밍 좋게 햇살이 비춰들자 남자의 얼굴이 천천히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두 눈은 무척이나 깊었고 코는 오뚝했으며 입술을 웬만한 여자 입술보다 더 빨갰다.

여자들이 가만두지 않았을 것 같은 외모를 소유한 이 남자는 다름 아닌 재호 그룹의 대표이자 비즈니스계의 절대적 지위에 있는 강재혁이었다.

강재혁의 등장에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채아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강재혁을 향해 말했다.

“강재혁 씨, 날 여기서 데리고 나가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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