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2화. 재현과 하늘
다음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피시방 카운터에서 기계적으로 손님을 응대하던 하늘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저기요.“
낮고 부드러운, 그러나 공기를 단번에 장악하는 목소리.
고개를 든 하늘의 눈에 맑게 웃고 있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서늘한 눈매를 가진 그 단골 손님이었다.
"저 기억해요? 저 여기 단골인데.“
재현이 카운터 너머로 몸을 훅 숙여왔다.
낯선 향수 냄새와 함께 그의 시선이 하늘의 떨리는 눈동자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그쪽 보고 싶어서 또 왔어요“
해사하게 웃는 그의 손이 하늘의 손등 위로 아주 잠깐, 그러나 소름 끼치도록 뜨겁게 머물렀다 떠났다.
하늘의 평온한 지옥이 흔들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저, 퇴근 몇 시에 해요? 집 근처면 데려다주고 싶은데. 요즘 세상이 험하잖아요.”
재현의 목소리에는 거절하기 힘든 다정함과 은근한 소유욕이 교묘하게 섞여 있었다.
하늘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자석에 이끌리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지옥의 문턱인 줄도 모르고, 하늘은 난생 처음 자신에게 쏟아진 눈부신 관심에 마음을 통째로 내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운터 밑으로 감춘 하늘의 손이 설렘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란히 걷는 밤길, 처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두근거림으로 가득 찼다.
재현은 하늘이 처음 느꼈던 이미지 그대로였다.
자신과 다르게 적극적이고 자연스러운 친밀감을 뿜어내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에게 없는 눈부신 모습이 부러우면서도, 그의 곁에 있으면 비로소 평범한 세상의 온기에 편입되는 듯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하늘 씨, 실례지만 나이를 물어봐도 될까요?”
“스물세 살이에요.”
“와, 대박! 저는 당연히 저랑 동갑일 줄 알았는데.”
재현이 과장 섞인 몸짓으로 놀라며 연신 동안이라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평소라면 부담스러웠을 그 호들갑이 도리어 기분 좋게 다가왔다. 하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재현 씨는 몇 살인데요?”
“저요? 음…… 하늘 씨보다 어려요. 이제 막 스무 살 됐거든요.”
“정말요?”
“네. 아, 참. 하늘 씨는 어느 대학 다녀요?”
순간, 하늘의 입이 납으로 봉해진 듯 굳게 다물어졌다.
재현은 하늘의 표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은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갔다.
“저는 부성 대학교 경영학과 다니고 있어요. 사실 대학 가기 싫었는데 부모님이 대학은 꼭 나와야 한다고 하도 우기셔서, 그냥 성적 맞춰서 대충 들어갔거든요. 하늘 씨는 무슨 과예요?”
하늘은 방금까지 구름 위를 걷던 기분이 진흙탕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꼈다.
대학에 가라고 등 떠밀어주는 부모도, 가고 싶어도 현실 앞에 포기해야 했던 전공도 없었다.
억지로 외면했던 현실이 차가운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하늘 씨?”
“……저 대학 안 갔어요. 간호조무사 자격증 학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어요.”
대답하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재현은 그제야 분위기를 감지한 듯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아, 이런. 제가 실수했다면 사과할게요. 괜한 걸 물어봤네요.”
“아니에요, 실수라뇨. 그냥…… 평범한 일인데요, 뭐.”
하늘은 애써 담담한 척 대답했다. 하지만 스스로 말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아릿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질문이 자신에게는 자격지심의 확인서가 되어야 하는 현실.
그 뒤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하늘의 빌라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저, 하늘 씨. 괜찮다면…… 제가 매일 데려다 드려도 될까요?”
“네?”
“사실 저 하늘 씨랑 잘 지내보고 싶어서 매일 피시방 가는 거예요. 게임 하러 가는 게 아니라, 하늘 씨 보러요.”
예상치 못한 고백에 하늘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멍하니 재현을 바라보는 하늘의 시선 위로, 그의 진지한 눈동자가 겹쳤다.
“하늘 씨만 괜찮다면, 저랑 사귀어 주실래요?”
“어…… 왜요?”
하늘은 제 입에서 튀어나온 멍청한 질문에 당황해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재현은 오히려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듯 순수한 웃음을 지었다.
“첫눈에 반했으니까요. 얼굴도 예쁘시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도 멋있고. 가끔 실수할 때 짓는 표정이 정말 귀여웠거든요.”
심장이 고막을 뚫고 나올 듯 요동쳤다.
머릿속이 하얘지며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누구의 1순위도 되어본 적 없던 삶에, 누군가 '첫눈에 반했다'라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제가 너무 갑작스러웠나요? 싫으시면 기다릴 수 있어요, 저.”
재현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렸다. 하늘은 잠시 망설였다.
이 눈 부신 빛을 따라가도 될까. 이 손을 잡으면 정말 내 어두운 방 안에 볕이 들까.
하늘은 조그맣게, 하지만 분명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안 기다리셔도 돼요.”
“……그럼, 허락인가요? 우리 오늘부터 1일 되는 거예요?”
재현의 목소리가 환희로 일렁였다. 하늘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늘의 첫 연애가 시작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도 위험한 덫이 그녀의 발목을 부드럽게 감아쥔 순간이었다.
***
주말 오후. 두 사람의 첫 데이트가 시작 되었다.
여느 연인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은 카페부터 찾아갔다.
재현이 트레이를 들고 다가왔다. 그가 가져온 것은 하늘이 좋아하는 연한 아메리카노와, 이 카페에서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 딸기 생크림 케이크였다.
“여기 이게 제일 유명하대. 누나 단 거 좋아하잖아.”
재현이 케이크 접시를 하늘의 바로 앞, 정중앙에 놓아주었다. 그 동작은 배려라기보다 마치 ‘내가 널 위해 준비한 완벽한 선물’을 배치하는 의식 같았다. 하늘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고개를 들었지만, 재현의 시선이 자신을 넘어 카페 안을 훑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현아?”
“잠깐만, 누나.”
재현의 시선이 근처 테이블에 앉아 하늘을 힐끗거리던 두 남성에게 고정되었다.
찰나였다.
평소의 싱그러운 미소가 사라진 재현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보란 듯이 테이블 너머로 몸을 숙여, 하늘의 뺨에 묻지도 않은 가상의 먼지를 털어내는 시늉을 했다.
“너무 예쁘게 하고 오니까 불안하네. 딴 놈들이 누나 쳐다보는 거, 나 정말 싫거든.”
재현의 낮은 목소리가 하늘의 귓가에 닿았다.
그것은 달콤한 속삭임이었으나, 동시에 그가 그어놓은 보이지 않는 선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말라는 경고처럼 들렸다.
“누난 그냥 내가 주는 것만 먹고, 내가 보여주는 것만 봐. 알았지?”
재현은 다시 평소의 그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포크를 건넸다.
하늘은 얼떨결에 포크를 받아서 들었지만, 입안으로 들어온 딸기 케이크는 지나치게 달아 어딘지 모르게 비릿한 끝맛을 남겼다.
재현의 당당함은 이제 하늘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아니라, 외부 세계를 차단하는 투명하고 단단한 유리 벽이 되어 그녀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
영화가 시작되고 스크린의 푸른 빛이 간헐적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하지만 재현은 화려한 영상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고개는 시종일관 옆자리, 하늘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그의 시선이 하늘의 뺨과 목선을 느릿하게 훑어내렸다.
“재현아, 영화 안 봐? 되게 유명한 거래서 예매한 건데…….”
하늘이 나직이 속삭이며 고개를 돌리자, 재현이 기다렸다는 듯 하늘의 작은 손을 빈틈없이 맞잡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영화보다 누나가 더 재밌어. 아니, 누나가 너무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어.”
재현의 목소리는 스크린의 폭발음 뒤로 낮게 깔렸다.
깍지 낀 손가락에 들어간 힘이 강해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하늘은 아주 잠깐 통증을 느꼈지만, 자신을 이토록 간절하게 바라보는 연하 연인의 애정이라 여기며 참아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사랑을 속삭일 때, 재현은 하늘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시켰다.
“누나, 나중에 나 군대 가면 보고 싶어서 어떻게 견디지? 나 없는 동안 누나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만 있었으면 좋겠어. 딴 놈들이 누나 쳐다보는 거 생각하면 나 진짜 미칠 것 같아.”
뜨거운 숨결이 닿는 곳마다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누나"라고 부르는 다정한 호칭과는 상반되게, 하늘의 손목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은 자신의 소유물을 확인하는 감별사처럼 치밀했다.
“누나, 약속해 줘. 나 없어도 오늘처럼 예쁘게 하고 나가지 않겠다고. 응?”
9화. 첫 균열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유독 날카롭게 들렸다.신발을 벗기도 전, 거실 소파에 화석처럼 굳어 앉아 있는 바다와 눈이 마주쳤다.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듯 붉게 충혈된 눈이 하늘의 전신을 훑었다.“어디 갔다 와?”낮게 깔린 목소리가 바닥을 긁으며 다가왔다. 하늘은 가방끈을 꽉 움켜쥐었다.“오빠, 그게…….”“제정신 박힌 놈이면 지 여자 친구 학원 빼먹게 안 해. 밤늦게 불러내서 외박시키는 짓거리는 더더욱 안 하고. 그놈이야? 네가 전에 말한, 호감 있다던 그 자식.”“……응.”기어들어 가는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을 덮쳤다.“헤어져.”“오빠!”“그 새끼 하는 짓을 봐! 그게 제대로 된 인간이 할 짓이라고 생각해? 너를 아끼는 게 아니라 망가뜨리고 있잖아, 지금!”“나를 사랑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야!”비명 섞인 외침이 거실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바다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그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으며 하늘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유일한 사람? 그럼 나는! 고모랑 고모부, 주미는! 시은이는! 우리가 다 너한테 관심 없어서 이러는 것 같아? 순간의 달콤함에 눈 멀어서 진짜를 못 보지 말고 제발 정신 차려. 당장 끝내.”하늘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랐다.억울함과 서러움, 그리고 재현이 주었던 그 몽글몽글한 온기를 부정당하는 고통이 뒤섞였다.바다는 차마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서늘한 목소리만이 공중에 흩어졌다.“그 자식이 너한테 한 행동들, 하나하나 뜯어서 다시 생각해 봐. 그게 정말 너를 위한 건지.”“진정한 사랑이 뭔데! 나를 위해 맛집 찾아주고, 나만 생각하면서 선물 고르고, 좋은 곳 데려가 주고……. 온종일 나만 바라봐 주는 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뭔데!”하늘은 악을 쓰며 울음을 터뜨렸다.재현의 품 안에서 느꼈던 그 압도적인 관심은 평생 결핍에 시달려온 하늘에게 구원과도 같았다.하지만 바다의 시선은
8화. 몰래 넘어버린 선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두 사람 사이로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오로지 하늘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이었다.낯선 호텔 침구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릴 만큼 방 안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누나 먼저 씻을래?”재현이 먼저 정적을 깼다.일상적인 제안이었지만 하늘은 소스라치게 놀라 어깨를 움찔거렸다.“응? 아, 아니. 나 집에서 이미 씻고 나왔어.”“아, 그래? 나도 씻고 오긴 했는데. 그럼, 우리 같이 누울까?”재현의 말에 하늘의 심장이 늑골을 뚫고 나올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오빠 몰래 현관문을 나설 때만 해도 그저 재현이 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앞섰다.하지만 막상 마주한 현실, 밀폐된 공간이 주는 압박감은 하늘의 이성을 뒤늦게 깨우고 있었다.“누나, 너무 굳어 있는 거 아니야? 안 잡아먹어.”재현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그 웃음소리가 공기를 가볍게 흔들었지만, 하늘의 공포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재현은 하늘의 경직된 안색을 살피더니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긴장 풀리게 술이라도 한잔할까?”“그, 그럴까?”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재현은 로비로 전화를 걸어 익숙하게 룸서비스를 시켰다.와인 리스트를 읊는 목소리나 전화를 끊는 태도가 지나치게 매끄러웠다.그가 보여주는 모든 편안함이 하늘에게는 오히려 낯선 이질감으로 다가왔다.“저……. 재현아.”“응, 누나.”재현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하늘을 돌아보았다.“이런 데 자주 와? 네 행동이 너무 익숙해 보여서. 어딜 가도 자연스럽고……. 꼭 와봤던 사람처럼.”재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그는 잠시 하늘을 응시하다가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앉았다.“하하, 누나. 혹시 질투하는 거야? 내가 다른 여자랑 이런 데 와봤을까 봐?”“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정말 그런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재현의 입에서 '다른 여자'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하늘의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하게 울렸다.만약 정말
7화. 위태로운 거짓저녁 식탁 위로는 평소와 다름없는 된장찌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하지만 하늘은 숟가락을 쥔 손끝이 자꾸만 겉도는 것을 느꼈다.맞은편에 앉은 바다는 유독 말이 없었다.낡은 식탁 위로 서걱거리는 수저 소리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오늘 학원은 잘 다녀왔어?”바다가 무심하게 던진 질문에 하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평소라면 "응, 오늘도 실습하느라 힘들었어."라고 대답했을 일상적인 대화였지만, 오늘만큼은 그 질문이 살갗을 파고드는 예리한 취조처럼 느껴졌다.재현과 보낸 달콤했던 오후, 입안을 맴돌던 설탕 가득한 조각 케이크의 맛, 그리고 자신을 사랑한다며 속삭이던 그 해맑은 눈동자.하늘은 그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만약 바다가 오늘 일을 알게 된다면, 재현을 다시는 못 보게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를 지배했다.“응……. 평소랑 똑같았어. 시험이 얼마 안 남아서 다들 예민하더라고.”태어나 처음 해보는 정교한 거짓말이었다.하늘은 바다의 눈을 피하며 찌개 속 두부만 연신 으깨어댔다.바다의 숟가락질이 잠시 멈췄다.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시은이 보내준 메시지 속, 카페 창가에 앉아 남자에게 입을 맞추듯 케이크를 받아먹던 하늘의 모습과 눈앞에서 태연히 거짓말을 하는 동생의 얼굴이 겹쳤다.“그래? 별일 없었고?”“응. 별일 없었어.”하늘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처음 받아본 그 강렬한 애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 온 오빠를 속이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신을 다독였다.재현이 그랬다.우리 둘만의 비밀이 많아질수록 사랑은 더 견고해지는 거라고.바다는 으깨진 두부처럼 처참하게 무너지는 신뢰의 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밥을 밀어 넣었다.동생의 입가엔 아직 재현이 닦아주지 못한 미세한 설탕 가루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아 속이 뒤틀렸다.“하늘아.”“응, 오빠.”“무슨 일이 있어도, 오빠는 네 편이야. 알지?”그건 바다가 건네는 마지막 경고이자
6화. 조금씩 만들어지는 새장재현은 익숙한 솜씨로 핸들을 돌려 번화가 한복판으로 차를 밀어 넣었다.“누나, 내가 진짜 괜찮은 디저트 맛집 알아냈거든. 사진 보자마자 누나랑 꼭 와야겠다 싶더라고. 누나가 좋아할 만한 게 너무 많아.”재현의 목소리는 여느 평범한 연인들처럼 들떴지만, 조수석의 하늘은 자꾸만 휴대전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 이 시각에는 실습 이론 수업이 한창일 터였다.“근데 재현아, 나 이렇게 수업 빠지면 안 돼. 이번엔 꼭 합격해서 자격증 따기로 약속했단 말이야.”하늘의 조심스러운 항변에 재현이 신호 대기 중 차를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방금까지 해사하던 얼굴에 미묘한 그늘이 졌다.그는 마치 상처받은 아이 같은 눈을 하고 낮게 읊조렸다.“누난 나랑 있는 게 싫어?”“……그런 뜻이 아니라.”“난 누나 보고 싶어서 밤새 한잠도 못 자고 달려온 건데. 누나는 자격증 공부가 나보다 더 중요한가 봐.”말투는 앙탈에 가까웠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누군가 자신을 이토록 원한다는 사실, 맛있는 걸 보고 자신을 떠올렸다는 그 고백 앞에서 하늘은 무너졌다.아니, 애초에 누군가를 냉정하게 밀어낼 줄 모르는 성정이었다.미움받을까 봐, 혹은 이 다정한 관심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워 싫은 소리 한마디 못 하는 성격.자기 자신도 답답하다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이었다.하늘은 차라리 이 상황을 긍정하기로 했다.바다와 시은 외에 타인이 자신을 이토록 열렬히 좋아해 주는 건 처음이었으니까.그저 고맙고 기분 좋게 받아들이면 그만이라고, 자신을 다독였다.어느새 도착한 카페는 평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재현은 익숙하게 창가 명당 자리를 골라 하늘을 의자에 앉혔다.“누나, 여기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누나가 좋아할 만한 거로만 싹 골라 올게.”“응, 고마워.”하늘은 재현이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사를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그저 눈앞에 놓인 달콤한 연애라는
5화. 낌새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침묵 속에서, 하늘은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서둘러 재현의 팔을 가볍게 밀어내며 대화의 흐름을 끊었다.“재현아, 오늘은 이만 가봐. 오빠가 기다리고 있어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오늘 정말 즐거웠어.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어. 그래, 누나.”재현은 순식간에 다시 소년의 미소를 가면처럼 갈아 끼웠다.그는 바다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하늘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시켰다.“집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연락해. 오빠랑 얘기하느라 늦게 하면 나 화낼지도 몰라. 알았지?”달콤한 속삭임이었으나 분명한 경고였다.하늘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고, 재현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차에 올라탔다.재현의 차가 골목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바다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멀어지는 붉은 미등을 응시하는 바다의 표정은 예상대로 굳어 있었고, 그 옆에서 하늘은 죄지은 사람처럼 제 손목만 만지작거렸다.바다의 시선이 잠시 하늘의 손목에 머물렀다.붉게 번진 자국.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바다는 추궁하지 않았다.방금 목격한 낯선 사내의 무례함이나, 동생의 손목에 남은 기괴한 흔적에 입을 여는 대신 그는 지독한 인내를 선택했다.계단을 오르려던 하늘의 뒷등 위로 바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하늘아.”멈춰 선 하늘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돌아보는 얼굴에는 당혹감과 미안함, 그리고 정체 모를 수치심이 뒤섞여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정수리 위에서 부서져 바다의 눈가를 깊은 음영으로 덮었다.그는 동생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떨구며 툭 던지듯 말했다.“다치면 말해라.”질문도 훈계도 아니었다.어떤 일이 있어도 네 편에 서겠다는 투박하지만, 벼려진 칼날 같은 선언이었다.“…응?”“혼자 앓지 말고. 네 잘못으로 다친 거 아니니까, 그냥 말하라고.”바다는 그 말을 끝으로 먼저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서늘한 밤공기와 무거운 안심만이 남았다.하늘은
4화.신경전재현이 건네준 스테이크 조각이 하늘의 접시 위에 툭 떨어졌다.핏기가 가시지 않은 고기의 단면이 하늘의 손목에 남은 자국만큼이나 붉게 일렁이고 있었다.하늘은 그 붉은 색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조금 전 꺼져버린 휴대전화를 떠올렸다.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아주 조용히 새장 속에 고립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이상하게도, 방 안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조용해진 것 같았다.조금 전까지 고막을 긁어대며 거슬리게 울리던 휴대전화 진동이 멎어서일까.아니면, 이 폐쇄적인 공간에서 자신을 바깥 세계와 이어주던 마지막 가느다란 끈이 끊어졌기 때문일까.하늘은 무의식적으로 테이블 아래에서 제 손을 꽉 움켜쥐었다.재현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진 휴대전화가 마치 갑자기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명치끝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누나, 왜 그래? 입에 안 맞아? 안 먹어?”고개를 들자, 맞은편에서 재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었다.선량하고 해사한, 그가 가진 가장 무해한 얼굴이었다.마치 조금 전 타인의 연락을 강제로 차단하고 기기를 탈취한 일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평온하게 식사를 했다.“아니……. 오빠가 걱정할까 봐. 전원을 꺼두는 건 좀 심한 거 아닐까?”하늘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지만, 재현은 대답 대신 스테이크를 한 점 더 썰어 하늘의 접시 위로 옮겨주었다.칼날이 접시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걱정이라니. 누나, 오빠가 누나를 너무 어린애 취급하는 거 아냐? 누나도 이제 성인이고, 남자 친구랑 데이트 중인데. 그런 눈치 없는 연락은 좀 무시해도 돼.”재현은 포크를 내려놓고 턱을 괴며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그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유리구슬처럼 투명하면서도 속내를 알 수 없었다.“만약 오빠가 누나를 진짜 아낀다면, 지금쯤 누나가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을 거라고 믿어줘야지. 자꾸 확인하려 드는 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야. 안 그래?”‘집착’이라는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