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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신경전

Author: 소담결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4-07 06:52:26

4화.신경전

재현이 건네준 스테이크 조각이 하늘의 접시 위에 툭 떨어졌다.

핏기가 가시지 않은 고기의 단면이 하늘의 손목에 남은 자국만큼이나 붉게 일렁이고 있었다.

하늘은 그 붉은 색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조금 전 꺼져버린 휴대전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아주 조용히 새장 속에 고립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방 안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조용해진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고막을 긁어대며 거슬리게 울리던 휴대전화 진동이 멎어서일까.

아니면, 이 폐쇄적인 공간에서 자신을 바깥 세계와 이어주던 마지막 가느다란 끈이 끊어졌기 때문일까.

하늘은 무의식적으로 테이블 아래에서 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재현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진 휴대전화가 마치 갑자기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명치끝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누나, 왜 그래? 입에 안 맞아? 안 먹어?”

고개를 들자, 맞은편에서 재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었다.

선량하고 해사한, 그가 가진 가장 무해한 얼굴이었다.

마치 조금 전 타인의 연락을 강제로 차단하고 기기를 탈취한 일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평온하게 식사를 했다.

“아니……. 오빠가 걱정할까 봐. 전원을 꺼두는 건 좀 심한 거 아닐까?”

하늘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지만, 재현은 대답 대신 스테이크를 한 점 더 썰어 하늘의 접시 위로 옮겨주었다.

칼날이 접시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걱정이라니. 누나, 오빠가 누나를 너무 어린애 취급하는 거 아냐? 누나도 이제 성인이고, 남자 친구랑 데이트 중인데. 그런 눈치 없는 연락은 좀 무시해도 돼.”

재현은 포크를 내려놓고 턱을 괴며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유리구슬처럼 투명하면서도 속내를 알 수 없었다.

“만약 오빠가 누나를 진짜 아낀다면, 지금쯤 누나가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을 거라고 믿어줘야지. 자꾸 확인하려 드는 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야. 안 그래?”

‘집착’이라는 단어가 재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을 때, 하늘은 형용할 수 없는 기시감에 몸을 떨었다.

정작 집착에 사로잡힌 것은 누구인가.

하지만 재현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달콤했고, 그가 내미는 논리는 교묘하게 하늘의 죄책감을 파고들었다.

“자, 얼른 먹어. 나 성의 봐서라도 한 입만, 응?”

재현이 아이처럼 눈을 맞추며 보챘다.

그 천진난만한 재촉에 하늘은 결국 저항을 포기한 채 포크를 들었다.

입안으로 밀어 넣은 고기는 지나치게 연해 씹을 것도 없이 녹아내렸지만, 목구멍을 넘어가는 감각은 까끌까끌한 모래알을 삼킨 듯 버거웠다.

하늘은 고개를 숙인 채 접시만 내려다보았다.

핏기가 가시지 않은 고기의 단면이 제 손목에 남은 자국만큼이나 선명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 붉은 색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하늘은 조금 전 꺼져버린 휴대전화의 검은 화면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아주 조용하고 우아하게 고립되고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

요양병원의 오후는 늘 그렇듯 나른한 소독약 냄새와 기계적인 소음들로 채워져 있었다.

동혁은 익숙하게 자동문을 지나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퇴근길의 고단함이 어깨에 묻어 있었지만, 손에 들린 하얀 종이봉투만큼은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러운 모양새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고생이 많으시네요.”

동혁은 습관 같은 인사를 건네며 데스크 위에 봉투를 올렸다.

봉투 겉면에는 인근 카페의 로고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안에는 졸음을 한 번에 깨울 수 있을 것 같은 차가운 커피가 들어있었다.

스테이션 안에서 차트를 정리하던 시은이 고개를 들며 장난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박순자 할머니 손자분 같은 남자만 있으면 저 당장이라도 시집가겠어요. 어쩜 매번 이렇게 세심하세요?”

시은의 너스레에 동혁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운 듯 시선을 내렸다.

칭찬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한 모양이었다.

“하하, 아닙니다.”

“아니에요. 병원에만 맡기고 얼굴 한 번 안 비치는 보호자들이 태반인데, 동혁 씨는 정말….”

시은은 말을 잇다 말고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늘 마음이 쓰이던, 요즘 들어 부쩍 수척해진 모습으로 결근이 잦아진 하늘의 얼굴이 스쳤다.

“저기, 동혁 씨. 제가 정말 아끼고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한 명 있는데, 한 번 생각해 보실래요? 동혁 씨랑 결이 참 잘 맞을 것 같아서요.”

동혁은 예상치 못한 제안에 잠시 멈칫했다.

“아, 아뇨. 아직은 마음의 여유가 좀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아, 아쉽다. 정말 정말 착하고 예쁜 아이인데. 우리 병원 보물 같거든요.”

시은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의 눈에 비친 하늘과 동혁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퍼즐 조각처럼 보였을 것이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마음만 기쁘게 받을게요.”

동혁은 정중하게 거절의 뜻을 표하며 가볍게 목례했다.

그는 시은의 호의가 향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꿈에도 모른 채, 다시 할머니의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식사를 마친 재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시금 예의 그 다정한 연인으로 돌아와 하늘의 원피스 자락을 정리해 주고, 얇은 카디건을 어깨에 직접 걸쳐주었다.

“이제 갈까? 누나 피곤하겠다.”

재현은 하늘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방을 나섰다.

철저하게 계산된 동선에 따라 직원이 다시 그들을 배웅했고, 육중한 철문이 닫히며 숲속의 요새 같던 식당은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

차에 올라탄 재현은 여전히 하늘의 휴대전화를 돌려주지 않았다.

하늘 역시 그것을 달라고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채,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어둠만을 응시했다.

도심의 불빛이 다시 보이기 시작할 무렵, 재현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누나, 오늘 정말 행복했어. 우리 내일도 보는 거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재현은 차를 몰아 하늘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그의 주머니에서 하늘의 휴대전화가 드디어 세상 빛을 보았다.

차갑게 식은 기계의 감촉이 살갗에 닿자, 하늘은 안도감과 동시에 묘한 모멸감을 느꼈다.

하늘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 전원을 켰다.

액정 조명이 어두운 골목을 비추는 순간, 쏟아지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들.

그리고 골목 끝, 가로등 그림자보다 더 짙은 형체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하늘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바다였다.

“오빠……?”

짙게 내려앉은 눈썹 아래로 초조함이 서린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

“하늘아. 왜 이렇게 늦었어? 전화는 왜 안 받고, 어디 있었던 거야?”

바다의 목소리에는 질책보다 안도감이,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하늘은 저도 모르게 등 뒤로 손목을 감추었다.

살구색 원피스 소매 아래 숨겨진 붉은 낙인이 바다의 시선에 닿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났다.

“아…… 그게, 오빠. 미안해. 배터리가 다 된 줄도 모르고…….”

비겁한 변명이 입술 끝에서 맴돌 때였다.

차 문 닫히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안녕하세요, 형님. 처음 뵙겠습니다. 이재현이라고 합니다.”

어느새 차에서 내린 재현이 하늘의 곁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어깨를 감싸안았다.

조금 전 식당에서의 그 서늘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붙임성 좋은 소년의 얼굴로 바다를 향해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하늘 누나 남자 친구예요.”

“……누나?”

바다의 시선이 재현의 얼굴에 꽂혔다.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 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묘한 오만함을 바다는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네. 제가 세 살 어립니다. 하하, 의외인가요?”

“그럼……. 이제 고작 스무 살이라는 건가?”

바다의 낮은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재현은 그 어조에 담긴 미세한 불신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감싸 쥐고 있던 하늘의 어깨에 더욱 힘을 주며, 도전적인 눈빛으로 바다를 마주 보았다.

“네, 스무 살입니다. 혹시 제가 너무 어려서 마음에 안 드시나요?”

재현의 물음은 질문이라기보다 도발에 가까웠다.

스무 살 특유의 거침없는 태도가 바다의 성미를 건드렸다.

바다는 재현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사람 됨됨이가 중요하지. 다만 그쪽 됨됨이는 아직 모르니,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것도 없군요.”

순간, 재현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해사하게 휘어져 있던 입꼬리가 미세하게 경련하며 싸늘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스무 살의 치기 어린 자존심에 바다의 정중한 거절이 비수처럼 꽂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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