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4화.신경전
재현이 건네준 스테이크 조각이 하늘의 접시 위에 툭 떨어졌다.
핏기가 가시지 않은 고기의 단면이 하늘의 손목에 남은 자국만큼이나 붉게 일렁이고 있었다.
하늘은 그 붉은 색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조금 전 꺼져버린 휴대전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아주 조용히 새장 속에 고립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방 안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조용해진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고막을 긁어대며 거슬리게 울리던 휴대전화 진동이 멎어서일까.
아니면, 이 폐쇄적인 공간에서 자신을 바깥 세계와 이어주던 마지막 가느다란 끈이 끊어졌기 때문일까.
하늘은 무의식적으로 테이블 아래에서 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재현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진 휴대전화가 마치 갑자기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명치끝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누나, 왜 그래? 입에 안 맞아? 안 먹어?”
고개를 들자, 맞은편에서 재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었다.
선량하고 해사한, 그가 가진 가장 무해한 얼굴이었다.
마치 조금 전 타인의 연락을 강제로 차단하고 기기를 탈취한 일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평온하게 식사를 했다.
“아니……. 오빠가 걱정할까 봐. 전원을 꺼두는 건 좀 심한 거 아닐까?”
하늘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지만, 재현은 대답 대신 스테이크를 한 점 더 썰어 하늘의 접시 위로 옮겨주었다.
칼날이 접시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걱정이라니. 누나, 오빠가 누나를 너무 어린애 취급하는 거 아냐? 누나도 이제 성인이고, 남자 친구랑 데이트 중인데. 그런 눈치 없는 연락은 좀 무시해도 돼.”
재현은 포크를 내려놓고 턱을 괴며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유리구슬처럼 투명하면서도 속내를 알 수 없었다.
“만약 오빠가 누나를 진짜 아낀다면, 지금쯤 누나가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을 거라고 믿어줘야지. 자꾸 확인하려 드는 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야. 안 그래?”
‘집착’이라는 단어가 재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을 때, 하늘은 형용할 수 없는 기시감에 몸을 떨었다.
정작 집착에 사로잡힌 것은 누구인가.
하지만 재현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달콤했고, 그가 내미는 논리는 교묘하게 하늘의 죄책감을 파고들었다.
“자, 얼른 먹어. 나 성의 봐서라도 한 입만, 응?”
재현이 아이처럼 눈을 맞추며 보챘다.
그 천진난만한 재촉에 하늘은 결국 저항을 포기한 채 포크를 들었다.
입안으로 밀어 넣은 고기는 지나치게 연해 씹을 것도 없이 녹아내렸지만, 목구멍을 넘어가는 감각은 까끌까끌한 모래알을 삼킨 듯 버거웠다.
하늘은 고개를 숙인 채 접시만 내려다보았다.
핏기가 가시지 않은 고기의 단면이 제 손목에 남은 자국만큼이나 선명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 붉은 색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하늘은 조금 전 꺼져버린 휴대전화의 검은 화면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아주 조용하고 우아하게 고립되고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
요양병원의 오후는 늘 그렇듯 나른한 소독약 냄새와 기계적인 소음들로 채워져 있었다.
동혁은 익숙하게 자동문을 지나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퇴근길의 고단함이 어깨에 묻어 있었지만, 손에 들린 하얀 종이봉투만큼은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러운 모양새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고생이 많으시네요.”
동혁은 습관 같은 인사를 건네며 데스크 위에 봉투를 올렸다.
봉투 겉면에는 인근 카페의 로고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안에는 졸음을 한 번에 깨울 수 있을 것 같은 차가운 커피가 들어있었다.
스테이션 안에서 차트를 정리하던 시은이 고개를 들며 장난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박순자 할머니 손자분 같은 남자만 있으면 저 당장이라도 시집가겠어요. 어쩜 매번 이렇게 세심하세요?”
시은의 너스레에 동혁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운 듯 시선을 내렸다.
칭찬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한 모양이었다.
“하하, 아닙니다.”
“아니에요. 병원에만 맡기고 얼굴 한 번 안 비치는 보호자들이 태반인데, 동혁 씨는 정말….”
시은은 말을 잇다 말고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늘 마음이 쓰이던, 요즘 들어 부쩍 수척해진 모습으로 결근이 잦아진 하늘의 얼굴이 스쳤다.
“저기, 동혁 씨. 제가 정말 아끼고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한 명 있는데, 한 번 생각해 보실래요? 동혁 씨랑 결이 참 잘 맞을 것 같아서요.”
동혁은 예상치 못한 제안에 잠시 멈칫했다.
“아, 아뇨. 아직은 마음의 여유가 좀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아, 아쉽다. 정말 정말 착하고 예쁜 아이인데. 우리 병원 보물 같거든요.”
시은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의 눈에 비친 하늘과 동혁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퍼즐 조각처럼 보였을 것이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마음만 기쁘게 받을게요.”
동혁은 정중하게 거절의 뜻을 표하며 가볍게 목례했다.
그는 시은의 호의가 향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꿈에도 모른 채, 다시 할머니의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식사를 마친 재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시금 예의 그 다정한 연인으로 돌아와 하늘의 원피스 자락을 정리해 주고, 얇은 카디건을 어깨에 직접 걸쳐주었다.
“이제 갈까? 누나 피곤하겠다.”
재현은 하늘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방을 나섰다.
철저하게 계산된 동선에 따라 직원이 다시 그들을 배웅했고, 육중한 철문이 닫히며 숲속의 요새 같던 식당은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
차에 올라탄 재현은 여전히 하늘의 휴대전화를 돌려주지 않았다.
하늘 역시 그것을 달라고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채,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어둠만을 응시했다.
도심의 불빛이 다시 보이기 시작할 무렵, 재현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누나, 오늘 정말 행복했어. 우리 내일도 보는 거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재현은 차를 몰아 하늘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그의 주머니에서 하늘의 휴대전화가 드디어 세상 빛을 보았다.
차갑게 식은 기계의 감촉이 살갗에 닿자, 하늘은 안도감과 동시에 묘한 모멸감을 느꼈다.
하늘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 전원을 켰다.
액정 조명이 어두운 골목을 비추는 순간, 쏟아지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들.
그리고 골목 끝, 가로등 그림자보다 더 짙은 형체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하늘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바다였다.
“오빠……?”
짙게 내려앉은 눈썹 아래로 초조함이 서린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
“하늘아. 왜 이렇게 늦었어? 전화는 왜 안 받고, 어디 있었던 거야?”
바다의 목소리에는 질책보다 안도감이,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하늘은 저도 모르게 등 뒤로 손목을 감추었다.
살구색 원피스 소매 아래 숨겨진 붉은 낙인이 바다의 시선에 닿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났다.
“아…… 그게, 오빠. 미안해. 배터리가 다 된 줄도 모르고…….”
비겁한 변명이 입술 끝에서 맴돌 때였다.
차 문 닫히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안녕하세요, 형님. 처음 뵙겠습니다. 이재현이라고 합니다.”
어느새 차에서 내린 재현이 하늘의 곁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어깨를 감싸안았다.
조금 전 식당에서의 그 서늘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붙임성 좋은 소년의 얼굴로 바다를 향해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하늘 누나 남자 친구예요.”
“……누나?”
바다의 시선이 재현의 얼굴에 꽂혔다.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 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묘한 오만함을 바다는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네. 제가 세 살 어립니다. 하하, 의외인가요?”
“그럼……. 이제 고작 스무 살이라는 건가?”
바다의 낮은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재현은 그 어조에 담긴 미세한 불신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감싸 쥐고 있던 하늘의 어깨에 더욱 힘을 주며, 도전적인 눈빛으로 바다를 마주 보았다.
“네, 스무 살입니다. 혹시 제가 너무 어려서 마음에 안 드시나요?”
재현의 물음은 질문이라기보다 도발에 가까웠다.
스무 살 특유의 거침없는 태도가 바다의 성미를 건드렸다.
바다는 재현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사람 됨됨이가 중요하지. 다만 그쪽 됨됨이는 아직 모르니,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것도 없군요.”
바다의 차가운 일갈에 재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일촉즉발의 침묵 속에서, 바다의 시선이 재현의 손끝에 닿았다.
재현이 하늘의 어깨를 꽉 움켜쥔 탓에, 살구색 원피스 위로 하늘의 하얀 살점이 불거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로 언뜻 보이는, 짓물린 듯 선명한 붉은 손자국.
바다의 미간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89화. 다시 다가오는 어둠단어의 매끄러운 이음새가 부끄러움에 툭툭 끊어져 나갔다.생전 처음 제 입으로 뱉어본 낯선 호칭이 혀끝을 스치자마자, 하늘은 제풀에 민망해져 칼을 쥔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귀 끝이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그 작은 읊조림이 떨어지기 무섭게, 동혁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항상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던 남자의 눈동자가 일순간 크게 일렁였다.제 고집으로 밀어붙인 결과물이었음에도, 막상 하늘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두 글자가 주는 파괴력은 동혁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뚝딱거리는 연인의 목소리가 이토록 가슴 깊은 곳을 난도질하듯 간지럽힐 줄은 몰랐다.동혁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이내 밀려오는 벅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직하게 실소를 흘렸다.입매가 걷잡을 수 없이 호선을 그리며 무너져 내렸다.그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하늘의 가냘픈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 내렸다.“……한 번 더 들어보려다가 내가 먼저 녹을 것 같네.”동혁이 패배를 인정하듯 낮게 읊조리며, 얼굴을 드러낸 하늘의 이마 위로 제 이마를 툭 기댔다.가까워진 거리 사이로 서로의 가쁜 숨결이 엉겨 붙었다.하늘은 제 손목을 쥔 동혁의 손바닥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놀리던 장본인 역시 전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이제 만족했어요? 정말 부끄러워 죽겠어.”하늘의 앙탈 같은 부끄러움에 동혁은 귀엽다는 듯 웃었다.단단하던 그의 가슴팍이 부드럽게 들썩이며 낮고 묵직한 웃음소리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사내에서는 결재 서류의 오타 하나도 용납하지 않던 구 팀장의 서슬 퍼런 이성이, 고작 여자의 수줍은 투정 한 자락에 이토록 무력하게 허물어지고 있었다.동혁은 얼굴을 감싸 쥔 하늘의 가냘픈 손목을 살며시 쥐어 아래로 내려놓았다.“그렇게 부끄러워할 거면서 대답은 또 어떻게 참고 했습니까.”동혁이 하늘의 붉어진 뺨을 제 손가락 등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서늘한 그의 손끝이 닿자마자 하늘은 으스스 몸을 떨며
88화. 자기야 2동혁은 이제 아주 재미가 들린 모양이었다.단어와 단어 사이에 숨을 쉬듯, ‘자기’라는 낯선 호칭을 아무렇지 않게 베어 물었다.동혁의 단단한 팔에 매달리듯 팔짱을 낀 채 이끄는 대로 발을 옮기는 하늘의 뺨 위로 한층 더 진한 홍조가 번져나갔다.숨길 수 없는 열기가 귀 끝을 지나 목덜미까지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자기라니. 진짜 낯간지럽게 무슨…….’하늘은 애써 속으로 투덜거리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하지만 그런 새침한 생각과 달리, 얄미울 정도로 뻔뻔한 남자의 다정함이 가슴 밑바닥을 간지럽히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돌려세운 얼굴 위로, 숨기지 못한 호선이 맑게 피어올랐다.마침내 제 나이에 걸맞은 소박하고도 완전한 행복이 걸린 순간이었다.동혁은 제 팔뚝에 닿는 하늘의 미세한 떨림과, 일부러 시선을 피하면서도 입꼬리를 숨기지 못하는 옆얼굴을 놓치지 않았다.장난스럽게 던진 애칭이었지만, 그것이 하늘의 얼굴에서 어두운 기억을 지워내고 생기를 불어넣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도하는 것은 꽤 짜릿한 일이었다.동혁은 카트를 쥔 손에 슬며시 힘을 주며, 하늘이 걷기 편하도록 제 보폭을 한 번 더 고쳐 잡았다.***조리대 위에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짙게 베어났다.마트에서 사 온 재료들이 알록달록하게 그릇을 채우고 있었고, 두 사람은 식탁에 나란히 앉아 본격적으로 김밥을 만들기 시작했다.큼직한 손으로 김발을 쥐고 제법 진지한 미간을 한 채 김밥을 단단하게 말아내는 것은 동혁의 몫이었다.하늘은 동혁이 흐트러짐 없이 잘 말아둔 김밥을 도마 위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예쁘게 썰어 하얀 접시에 차곡차곡 담아냈다.서툴지만 제법 합이 맞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일상의 한 페이지였다.하늘은 칼끝에 묻은 참기름을 쓱 닦아내며, 예쁘게 썰고 남은 못생긴 김밥 꼬투리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속 재료가 삐죽이 튀어나와 가장 간이 잘 밴 놈이었다.하늘은 그것을 동혁의 입가로 쑥 내밀며 장난스레 속삭였다.“원래 김밥은 이 끝부분이 제일
87화. 자기야동혁의 깔끔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한마디에 하늘이 입을 벌린 채 뱉으려던 유구한 변명들이 공중으로 허망하게 흩어졌다.당황한 하늘이 동혁의 옆구리를 손가락 끝으로 콕 찌르는지도 모른 채, 동혁은 아주 자연스러운 얼굴로 아주머니가 건넨 햄 조각을 받아 하늘의 입가에 동혁은 이쑤시개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햄 조각을 하늘의 입술 근처로 슬며시 가져다 댔다.아주머니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머물러 있는 것을 확인한 그가, 낮고 은밀하게 속삭였다.“자기야. 한 입 먹어봐.”예고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온 노골적인 애칭에 하늘의 사고회로가 순간 정지했다.깜짝 놀란 하늘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동혁을 향했다.‘자기’라는 단어가 이토록 매끄럽게 흘러나올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정작 동혁은 당황한 하늘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극히 태연했다.오히려 기회가 왔다는 듯 짐짓 다정한 눈빛을 가장하며, 그녀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한입 크기의 햄을 쏙 집어넣었다.짭조름하고 고소한 기름진 맛이 입안에 퍼지는 동안에도 하늘은 씹는 것조차 잊은 채 붉어진 얼굴로 그를 째려보았다.“어때? 맛있어?”반말과 존댓말의 경계를 교묘하게 넘나드는 동혁의 나직한 음성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시식 코너 아주머니는 눈앞의 젊은 부부가 부려대는 닭살 돋는 애정 행각이 그저 흐뭇한지 껄껄 웃으며 흐뭇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하늘은 쏟아지는 민망함을 삼키려 서둘러 우물우물 햄을 씹었다.아주머니 앞에서 대놓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순순히 장단을 맞춰주는 것뿐이었다.“네, 네…… 맛있네요.”겨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하는 하늘의 귀 끝이 이미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남자의 완벽한 포커페이스 뒤에 숨겨진 짓궂은 장난기에 완전히 말려든 꼴이었다.동혁은 귀여운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얌전히 햄을 받아먹는 하늘의 부리 같은 입술을 보며 속으로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색시 입맛에 맞다니 신랑이 사줘. 이 햄을 팬에서 달달 볶듯이,
86화. 햄 볶듯이 행복하게툭, 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끊어지는 감각과 함께 하늘은 눈을 번쩍 떴다.암막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살.정신이 맑아지기도 전에 가슴을 옥죄어오는 압박감이 먼저 찾아왔다.오늘 토요일, 사람 많은 대형 마트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출발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건만, 사방이 카트와 낯선 타인들로 가득 찬 공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명치끝이 찌릿하며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숨이 조금씩 가빠지자, 하늘은 본능적으로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며칠 전 병원에서 받아온 하얀 약 봉투가 손끝에 걸렸다.정제되지 않은 불안을 가라앉혀 줄 신경안정제.하늘은 약봉지 하나를 뜯어 손에 쥔 채 서둘러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섰다.온기 없는 방 안에 혼자 갇혀 있다가는 불안에 집어삼켜질 것 같았다.거실로 나오자 옅은 커피 향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던 동혁이 고개를 돌렸다.단정하게 정돈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요동치던 심장 소리가 신기하게도 아주 조금씩 사그라들었다.“일어났어요?”동혁의 나직한 목소리가 거실의 정적을 부드럽게 깼다.하늘은 제 손에 쥔 약봉지를 슬그머니 손바닥 안으로 감추며 메마른 목소리를 가다듬었다.“네……. 일찍 일어나셨나 봐요.”“평소 습관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휴일인데도 눈이 번쩍 떠지더군요.”동혁이 소리 내어 가볍게 웃었다.무장해제 된 편안한 웃음이었다.하늘은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려 살짝 미소를 지으며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려던 하늘은 식탁 위를 보고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하얀 식탁보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상.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와 몽글몽글한 스크램블 에그가 노란 주스 잔과 함께 예쁘게 놓여 있었다.하늘이 멍하니 식탁을 바라보다 동혁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천천히 다가왔다.“장 보러 가기 전에, 속을 좀 채우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부지런하셔라…….”하늘이 결국 참지 못하고 환하게 웃어버렸다.남자의
85화. 즐거운 주말“팀장님…….”‘쪽.’갑자기 거리를 좁혀온 동혁의 입술이 하늘의 달아오른 입술 위로 짧고 가볍게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서늘한 향수 냄새와 함께 뜨거운 온기가 부딪쳤다.“팀장님 금지라고 했을 텐데요.”동혁이 하늘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사내에서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오직 제 연인 앞에서만 무장해제 되는 어여쁜 웃음이었다.남자가 이토록 예쁘게 웃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그의 호선 그린 입매가 저녁 조명 아래서 눈부시게 빛났다.“바, 밥 먹다 말고 진짜 뭐 하시는 거예요! 빨리 밥이나 먹어요.”하늘은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숨기려 허둥지둥 숟가락을 쥐고 국물을 크게 떠 넣었다.뜨거운 국물 때문인지, 방금 전의 입맞춤 때문인지 두 뺨이 새빨간 장미처럼 화사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귀 끝까지 붉어진 채 밥그릇에 고개를 처박은 하늘을 보며, 동혁은 흐뭇한 눈길로 다시 수저를 들었다.“토요일에 같이 장 보러 가요.”동혁이 물컵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못을 박았다.단순히 흘러가는 말이 아닌, 주말의 일정을 확실하게 고정해 두겠다는 다정한 통보였다.세상 밖으로 나가 적응하겠다던 하늘의 조금 전 결심을, 그는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고 곧장 현실의 계획으로 실행에 옮겨준 것이다.“네!”하늘이 기다렸다는 듯 활기차게 대답했다.붉게 물들었던 두 뺨에는 여전히 부끄러운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대답하는 목소리만큼은 주방의 정적을 단숨에 깨뜨릴 정도로 싱그럽고 청량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일부러 숟가락으로 밥알을 꾹꾹 누르며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냈다.오빠라는 거대한 울타리에서 벗어나 홀로 서는 첫걸음이 구동혁이라는 남자와 함께라는 사실이, 두려움보다는 기분 좋은 설렘으로 가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동혁은 밥그릇에 고개를 처박다시피 한 하늘의 정수리를 보며 가볍게 콧노래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저렇게까지 정직하게 반응해 주니, 앞으로 다가올 주말이 벌써 길게 느
84화. 세상에서 가장 멋없는 프러포즈어둠이 밀려든 거실에는 낮게 맞물리는 숨소리와 옷가지가 스치는 서글픈 마찰음만이 간헐적으로 이어졌다.동혁의 입술은 하늘의 도발을 집어삼키듯 집요했고,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은 손길에는 빈틈이 없었다.밀어낼 생각도 없으면서 동혁의 단단한 어깨를 유영하듯 쥐고 있던 하늘의 손가락 끝이 점차 잘게 떨려왔다.얼마나 숨을 나눴을까.입술이 떨어지는 짧은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노골적으로 얽혔다.하늘은 붉게 달아오른 숨을 몰아쉬며, 제 목덜미를 받치고 있는 동혁의 손등 위로 뺨을 살며시 기댔다.“……반응이 너무 정직하신 거 아니에요?”하늘이 자극적인 장난기를 거두고 조금은 물기 어린 음성으로 속삭였다.동혁은 엄지손가락으로 하늘의 젖은 입술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그의 시선은 하늘의 얼굴을 지나 거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종이 쇼핑백으로 향했다.유바다가 밤새 피를 말려가며 개어놓았을 동생의 흔적들.동혁은 그것이 하늘에게 줄 안도감과 슬픔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정직하지 않으면 잡아두질 못하니까.”동혁이 하늘의 이마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며 밀착했던 몸을 한 걸음 물리 시켰다.남자의 품이 떨어져 나가자 차가운 거실 공기가 그새를 메웠다.동혁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던지며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저녁은 먹었습니까.”“아직요. 팀장님 기다리느라.”“구동혁입니다.”동혁이 냉장고 문을 열며 낮게 정정했다.“집에서까지 그 딱딱한 직함으로 불리고 싶진 않군요. 입을 맞추고 싶을 때 부르는 치트키라면서, 방금은 도발치고 너무 진지했습니다.”하늘은 소파에 멍하니 앉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냉철하기로 소문난 남자가 제 호칭 하나에 이토록 예민하게 구는 모양새가 제법 비현실적이면서도 기분이 좋았다.하늘은 소파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은 채, 냉장고에서 식재료를 꺼내 조리대 위에 늘어놓는 동혁의 등판을 가만히 응시했다.완벽하게 재단된 와이셔츠 위로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