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3화. 붉은 자국
재현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보다 더 크게 다가온 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감각이었다.
하늘은 그 집요한 요구에 취한 듯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재현은 한 번도 스크린을 보지 않았다.
오직 제 손아귀에 잡힌 하늘의 온기만을 확인하며, 그는 어둠 속에서 만족스러운 듯 입매를 말아 올렸다.
상영관을 나서는 순간, 다시 밝은 조명 아래로 노출되자 재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해사한 소년의 미소로 돌아왔다.
“누나, 배고프지? 내가 진짜 맛있는 데 알아놨어. 가자!”
하지만 하늘의 손목에는 그가 남긴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살구색 원피스 소매 아래에서 조용히 박동하고 있었다.
재현의 차 안은 고가의 가죽 시트가 내뿜는 묵직한 냄새와 그가 뿌린 상큼한 시트러스 향수 향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재현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낮은 콧노래를 흥얼거렸지만, 조수석의 하늘은 자꾸만 살구색 원피스 소매를 끌어당겨 손목을 가렸다.
재현의 아귀힘이 남긴 붉은 자국이 화끈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팠다.
하지만 그 통증은 불쾌하기보다 이상할 정도로 감미롭게 다가왔다.
누군가 제 존재를 이토록 세게 쥐어본 적이 없었기에, 그 열감은 마치 ‘너는 내 것’이라 선언하는 확실한 낙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나, 손목 많이 아파? 아까 내가 너무 꽉 잡았나 봐.”
재현이 슬쩍 곁눈질하며 물었다.
미안하다는 말치고는 입가에 걸린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실 줄 몰랐다.
그는 신호가 걸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하늘의 손을 낚아채더니, 자신의 볼에 어린아이처럼 비벼댔다.
“아프면 나 때려도 돼. 근데 누나, 나 군대 가기 전까지는 1분 1초도 안 쉬고 누나만 보고 싶단 말이야. 나 군대 가면 누나 딴 놈들이 채가면 어떡해? 나 진짜 거기서 탈영할지도 몰라.”
“재현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무섭게.”
하늘이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하자, 재현은 만족스러운 듯 핸들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진짠데. 그러니까 누나, 그 피시방 아르바이트 이제 그만해. 그냥 내가 주는 용돈 써. 우리 아빠 카드 한도 엄청 높거든. 누나 학원비? 그런 거 내가 다 내줄게. 누나가 밤늦게까지 컵라면 치우고 남들 눈치 보는 거 생각하면, 나 진짜 짜증 나서 잠이 안 와.”
걱정을 가장한 제안이었으나 그 속엔 타협 없는 강요가 깃들어 있었다.
스무 살의 재현에게 사랑이란 상대를 귀한 곳에 모셔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화려한 새장 안에 가두는 것과 같았다. 하늘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내 힘으로 벌기로 오빠랑 약속했어. 고모네 집에도 눈치 보이고…….”
“……오빠?”
재현의 눈동자가 찰나의 순간 흔들리더니, 이내 묘한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방금까지 대형견처럼 애교를 부리던 얼굴에 기묘한 안도감과 여유가 서서히 차올랐다.
“아, 친오빠? 와, 다행이다. 난 또 어떤 놈인가 했네.”
재현은 핸들을 가볍게 두드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친오빠라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경계심을 푸는 척했지만,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에는 일종의 선민의식 같은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오빠면 인정이지. 가족이잖아. 근데 누나, 오빠가 누나를 너무 고생시키는 거 아냐? 아무리 약속했다지만, 동생이 밤새 아르바이트하는데 보고만 있는 건 좀…… 능력이 없는 건가?”
“아냐, 오빠는 나 대학 보내려고 복학해서도 얼마나 열심히 사는데. 내가 미안해서 자처한 거야.”
하늘이 다급히 오빠 바다를 변호하자, 재현은 핸들을 잡은 하늘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다정한 손길이었으나 뱉어내는 문장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가족이니까 그럴 수 있지. 근데 누나, 이제 누나한테는 내가 있잖아. 오빠한테 미안한 마음, 이제 나한테 다 써. 누나 힘들게 하는 그런 구식 약속 같은 거 이제 하지 말고. 응? 내가 그 오빠보다 훨씬 더 편하게 해줄 수 있는데.”
재현은 다시 아이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액셀을 밟았다.
아까의 거친 질주와는 달리 부드러운 출발이었으나, 차는 어느새 화려한 도심의 불빛을 뒤로하고 어둠이 짙게 깔린 한적한 교외로 향하고 있었다.
“누나, 오늘 내가 예약한 데는 오빠도 절대로 모르는 곳일걸? 거기 가면 오빠 걱정 같은 거 다 잊게 해줄게. 누나 옆엔 나만 있으면 돼. 알았지?”
하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점점 낯설어지고 있었지만, 어디로 가는지 묻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그럴 필요가 없다고 자신을 스스로 설득하고 있었으니까.재현은 운전대를 잡지 않은 한 손으로 하늘의 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 위를 엄지손가락으로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마치 그 가족이라는 견고한 울타리조차, 자신이 새로 칠한 선명한 페인트로 덧칠해 지워버리겠다는 듯이 집요하고도 치밀한 손길이었다.
***
교외의 한적한 숲길을 한참 달린 차가 도착한 곳은 간판조차 없는 육중한 철문 앞이었다.
재현이 익숙하게 호출 벨을 누르자 문이 서서히 열렸고, 그 안에는 숲에 파묻힌 듯한 정갈한 한옥 건물이 나타났다.
“누나, 다 왔어. 여기가 내가 말한 데야.”
재현은 차에서 내려 직접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하늘의 허리를 감싸안듯 밀착시키며 안으로 이끌었다.
복도는 미로처럼 길었고, 안내하는 직원 외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안내받은 방은 사방이 완벽하게 차단된 개별 룸이었다.
“여기 메뉴판은 따로 없어. 내가 미리 제일 좋은 걸로 주문해 뒀거든. 누나는 그냥 맛있게 먹기만 하면 돼.”
재현은 상전이라도 모시듯 하늘의 의자를 직접 빼주었다.
테이블 위에는 화려한 전채 요리들이 미리 세팅되어 있었다.
평소 편의점 삼각김밥이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하늘에게, 이 공간의 화려함은 대접받는 기분보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압박감으로 먼저 다가왔다.
“재현아, 여기 너무 비싸 보여. 그냥 우리 평범한 데 가서 먹어도 되는데…….”
“누나. 내가 말했잖아. 누난 이런 대접받을 자격 충분하다고. 아, 잠깐만.”
재현이 말을 끊고 하늘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입가에 묻지도 않은 소스를 닦아내는 척하며, 그의 손가락이 하늘의 입술을 느릿하게 훑었다.
징— 징—.
그때, 정적을 깨고 하늘의 가방 안에서 거칠게 진동이 울렸다.
순간, 재현의 손가락이 멈췄다.
찰나였지만 하늘은 재현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서늘한 불꽃을 보았다.
하늘이 서둘러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액정 위에는 익숙한 이름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오빠]
“어, 오빠네…….”
하늘이 전화를 받으려 손가락을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재현의 하얗고 긴 손이 하늘의 손목을 덮쳤다.
차 안에서 남겼던 그 붉은 낙인 위를 다시 한번 강하게 압박하며, 그는 하늘의 휴대전화를 가볍게 앗아갔다.
“누나, 우리 첫 데이트잖아. 오늘 하루는 나한테만 집중해 주면 안 돼?”
재현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서운하다는 듯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소년처럼 칭얼거렸다.
하지만 휴대전화를 쥔 그의 손가락 마디에는 힘이 빡 들어가 있었다.
“오빠가 걱정할까 봐 그래. 금방 통화하고 줄게, 재현아.”
“내가 대신 받아줄까? 아니면 전원 꺼둘래?”
재현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질문의 내용은 선택지가 없는 강요였다.
재현은 휴대전화 화면에서 계속해서 명멸하는 '오빠'라는 글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비스듬히 입매를 올렸다.
“가족이라며. 가족이면 동생이 좋은 데서 데이트하는 거 방해하면 안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재현은 전화를 받지도, 끊지도 않은 채 진동이 멈출 때까지 가만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끊임없이 울리는 진동 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기괴하게 뒤흔들었다.
마침내 진동이 멈추자, 재현은 익숙한 동작으로 휴대전화의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검게 변해버린 화면 위로 재현의 만족스러운 미소가 비쳤다.
하늘은 그 미소를 보며, 왜인지 모르게 목 안쪽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꺼진 휴대전화를 제 주머니 속에 쏙 집어넣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포크를 들었다.
“자, 누나. 이제 우리 방해꾼 없어졌네. 식기 전에 얼른 먹자.”
45화. 드디어 열린 새장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밴 공기는 무겁고 차가웠다.바다는 침대 옆 보조 의자에 몸을 구부린 채, 창백하게 질린 하늘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힘없이 늘어진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온기만이 동생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바다는 흐릿해진 시야를 닦아낼 생각도 못 한 채, 하늘의 손등 위로 툭툭 떨어지는 눈물을 그저 지켜만 보았다.병실 구석에서 묵묵히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조찬수 형사가 나직한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이재현의 구속은 피하지 못할 겁니다.”조찬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위로보다는 형사로서 내리는 판결에 가까운 확신이었다.“현장 체포에 증인들도 확실하고, 확보한 음성 파일이랑 아파트 CCTV 동선까지 일치합니다. 변호사 군단을 데려와도 이번엔 못 빠져나갑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그때, 정적을 깨고 병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고가의 코트를 걸친 중년의 남자가 허겁지겁 안으로 들이닥쳤다.이재현의 아버지, 이상현이었다.그는 병실 안의 공기를 살피기도 전에 바다의 앞으로 달려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둔탁한 소리가 타일 바닥을 울렸다.“제가 자식놈을 잘못 키웠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이상현은 바다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듯 손을 내밀었지만, 바다는 혐오감이 서린 눈으로 그 손을 피해 의자를 뒤로 물렸다.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그 비굴한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바다는 입술을 짓씹었다.아들은 제 죄를 정당화하며 비웃고, 아비는 그 죄를 돈과 권력으로 덮으려 무릎을 꿇는다.부자(父子)가 보여주는 이 기만적인 연극의 형태는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바다의 목소리는 분노를 넘어 차갑게 식어 있었다.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버리는 바다를 대신해 조찬수가 앞을 막아섰다.“이미 모든 증거와 증인이 확보된 사건입니다. 아드님을 정말로 생각하신다면, 이제라도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44화. 체포재현은 거실 벽면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집 안을 헤집는 사람들을 구경하듯 내려다보았다.입가에 걸린 느슨한 비소는 마치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을 위해 준비된 지루한 연극이라도 되는 양 여유로웠다.“하늘 씨 어디다 숨겼습니까!”늘 얼음장 같던 동혁의 이성이 처음으로 파열음을 냈다.평소의 절제된 모습은 간데없이, 핏발 선 눈으로 내지르는 고함이 거실의 정적을 찢었다.재현은 눈썹을 까닥이며 과장되게 몸을 움츠렸다.“와, 무서워라. 우리 팀장님, 화도 낼 줄 아는 사람이셨네? 근데 어쩌죠, 난 진짜 모른다니까요?”재현의 빈정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바다가 주머니에서 액정이 박살 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떨리는 손가락이 화면을 누르자, 재현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뚫고 흘러나왔다.짐승 같은 고함과 하늘의 비명, 그리고 강제로 끌려가는 둔탁한 마찰음.순간, 재현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가면이 조각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단단하게 고정되었던 눈매가 미세하게 경련했고, 입가에 머물던 비소가 기괴하게 일그러졌다.“이래도, 이래도 발뺌할 거야?”바다는 당장이라도 재현의 목을 물어뜯을 듯한 기세로 그를 쏘아보았다.전신을 타고 흐르는 분노 때문에 휴대전화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재현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셔츠 깃을 거칠게 매만지며 시선을 피했다.“……아니, 뭐. 누나를 좀 억지로 데리고 나오긴 했는데. 정말 단지 근처에서 얘기만 하고 헤어졌다니까요? 저 소리는 누나가 하도 고집을 부리니까 진정시키느라 그랬던 거고.”“이재현 씨. 아파트 CCTV 동선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당신 차 뒷좌석에 억지로 태워지는 유하늘 씨 모습, 아주 선명하게 찍혔단 말입니다. 거짓말인 거 다 아니까, 하늘 씨 어딨는지 당장 말해!”조찬수의 단호한 압박에 재현의 얼굴에서 마침내 핏기가 가셨다.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눈빛이 번뜩였다.하지만 여기서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게 끝이라는 걸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그는 턱 근육을 단단히 세우며 이빨 사이로
43화. 당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조찬수와 형사들은 별장 주변부터 살폈다.거실의 희미한 불빛 외엔 전부 커튼이 쳐져 있어 안의 상황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어떻게 하죠? 그냥 밀고 들어갈까요?”박 형사가 낮게 속삭이며 현관문 손잡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조찬수는 잠시 턱끝을 만지며, 고민에 빠졌다.영장 없는 가택 침입은 나중에 독이 될 수 있었지만,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직감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전진 신호를 보냈다.두 사람은 발소리를 죽이며 데크를 밟았다.나무판자가 비명을 지르지 않게 체중을 분산하며 현관 앞에 섰다.똑, 똑, 똑.박 형사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노크 소리는 밤의 정적 속으로 무력하게 흩어졌다.안에서는 그 흔한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조찬수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그는 박 형사를 뒤로 물리고 직접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거칠고 단호했다.“이재현 씨! 경찰입니다. 안에 있는 거 다 압니다. 문 여세요!”조찬수의 외침이 텅 빈 복도를 울리는 울림처럼 돌아왔다.문 뒤에서 바다와 시은은 서로의 손을 부서질 듯 움켜쥐었고, 동혁은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별장 주변의 탈출로를 눈으로 훑고 있었다.바다의 심장 소리가 귓전을 때릴 만큼 커졌을 때였다.끼이익—.기름칠이 덜 된 경첩이 불쾌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틈새로 쏟아진 빛과 함께 나타난 인물은 뜻밖에도 너무나 평온한 모습의 이재현이었다.실크 소재의 짙은 감색 잠옷 차림을 한 그는, 방금 자다 깬 듯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입가에는 수면의 여운이 남은 듯한 나른한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아니, 이 밤중에 무슨 실례입니까? 형사님들.”재현은 문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조찬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당황하거나 겁먹은 기색은커녕, 오히려 불청객을 맞이하는 집주인의 여유로운 짜증이 묻어났다.뒤편에 선 바다를 발견한 재현의 눈동자가 잠시 가늘어졌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42화. 일촉즉발재현은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진 하늘을 굽어보았다.방금 전의 폭발적인 광기는 어디로 갔는지, 그의 얼굴에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비탄이 서려 있었다.그는 느릿하게 무릎을 굽히고 앉아 하늘과 눈높이를 맞췄다..“그러게, 왜 자꾸 내 말을 안 들어, 누나.”재현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하늘의 붉게 부어오른 뺨을 아주 조심스럽게, 마치 깃털을 만지듯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가해자의 손길이라기엔 지나치게 애틋해서 더 기괴한 온기였다.하늘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하며 거북이처럼 어깨를 말아 쥐었다.그 사소한 거부의 몸짓에 재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어졌다.“왜 내가 옆에 있는데 다른 남자를 앉혀두고 웃어? 왜 그 팀장이라는 놈이랑 그렇게 길게 대화를 나눠. 사람 질투 나게.”그는 정말로 서운하다는 듯 입술을 짓씹었다.재현에게 있어 하늘의 외부 소통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배신이자, 정해진 궤도를 이탈한 행성처럼 보였다.그는 하늘의 턱끝을 들어 올려 억지로 시선을 맞추게 했다.공포로 초점이 흐릿해진 하늘의 눈동자 속에 오직 자신만이 담기길 원하는 갈구였다.“나만 보기로 약속했잖아. 그날 우리 분명히 약속했잖아. 그런데 왜 누나는 자꾸 약속을 안 지켜서 나를 이런 나쁜 놈으로 만들어? 나는 누나한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재현은 억울하다는 듯 웅얼거리며 하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그의 눈에 고였던 눈물 한 방울이 하늘의 뺨 위로 툭 떨어졌다.가해자의 눈물이 피해자의 얼굴 위에서 번지는 이질적인 풍경 속에서, 그는 나직하게 결론을 내렸다.“약속 안 지킨 누나가 나쁜 거야. 이건 다 누나가 자초한 거야, 알지?”그는 대답을 바라지 않는 듯 다시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재현의 등 뒤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그림자는 거대한 손이 되어 바닥에 쓰러진 하늘을 완전히 집어삼킬 듯 덮쳐오고 있었다.“내가…,
41화. 흔적 찾기경찰서 안의 탁한 공기는 밤샘 근무자들의 피로와 찌든 담배 냄새로 눅눅했다.조찬수 형사는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며 서류를 넘기다, 밀치듯 들어오는 두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다급하게 들이닥친 바다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그 곁을 지키는 동혁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형사님, 이것 좀 봐요. 당장 보라고요!”바다가 거칠게 내민 휴대전화는 액정이 거미줄처럼 박살 나 있었다.조찬수가 당황하며 잔을 내려놓기도 전에, 바다의 떨리는 손가락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지지직거리는 잡음 사이로 날카로운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곧이어 복도를 울리는 둔탁한 구타 소리와 짐승 같은 고함, 그리고 그 모든 소음에 짓눌려 신음처럼 새어 나오는 가녀린 여자의 비명이 스피커를 찢고 흘러나왔다.‘은혜도 모르는 년이! 내가 널 어떻게 가르쳤는데!’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조찬수의 미간이 깊게 팼다.불과 얼마 전,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법망을 비웃던 남자의 얼굴이 스쳤다.‘증거 불충분.’조찬수가 법적 절차를 이유로 내뱉었던 그 면죄부가 머릿속을 때렸다.자기 손으로 풀어준 괴물이 결국 어떤 사냥을 저질렀는지, 녹음 파일 속 절박한 비명이 증명하고 있었다.이재현.그 이름 석 자가 조찬수의 혓바닥 위에서 비릿하게 맴돌았다.“이거…… 이재현이죠?”조찬수의 물음에 바다는 대답 대신 이를 악물었다.턱 근육이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그놈이 내 동생 끌고 갔어요. 형사님이 증거 없다며 풀어준 그 새끼가요.”동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조찬수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형사님, 이제 '애매하다'라는 말은 안 통합니다. 위치 추적 시작하세요. 협조 안 하시면 이 녹음 파일 들고 바로 청문감사실로 갑니다.”조찬수는 마른세수를 하며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책상 위에 놓인 형사 수첩과 차 키를 움켜쥐는 그의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조금 전까지 그를 짓누르던 피로감은 이제 형사로서의 부채감과 분노로 치환되어 있었다.그는 옆자리에
40화. 납치현관문이 기어코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번호를 맞힌 것인지, 아니면 느슨해진 틈을 타 물리적인 힘으로 짓이긴 것인지 판단할 겨를조차 없었다.밀려 들어온 재현의 체취가 거실의 정적을 단숨에 집어삼켰다.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하늘의 시야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고, 곧이어 뼈가 으스러질 듯한 통증이 손목을 타고 뇌를 찔렀다.“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네. 이제 나와 함께 있어야지, 누나.”재현의 목소리는 기괴할 정도로 차분했다.그는 하늘의 손목을 낚아챈 채 짐승을 다루듯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비틀거리며 일어난 하늘의 몸이 종잇장처럼 흔들렸다.거실 바닥을 긁는 발소리와 재현의 거친 숨소리가 뒤섞였다.“제발, 재현아. 제발 그만해. 제발…….”하늘이 흐느끼며 매달렸지만, 재현은 돌아보지 않았다.오히려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복도를 향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그만두다니? 뭘? 나랑 헤어지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나랑 헤어지고 그 팀장이라는 새끼한테 가려고?”재현이 멈춰 서서 하늘을 돌아보았다.희게 질린 얼굴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연민도 없었다.오직 소유물을 향한 비뚤어진 집착만이 번득였다.“그렇게는 안 되지. 약속을 어긴 건 누나야. 누나는 앞으로 평생 내 곁에서 그 벌을 받아야 해.”재현은 하늘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집 밖으로 끌어냈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짧은 순간에도 그는 하늘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으며 도망칠 틈을 주지 않았다.몸부림치던 하늘의 주머니에서 무언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복도 바닥으로 떨어졌다.녹음기가 켜진 채 바닥을 뒹구는 휴대전화였다.하지만 재현은 승리감에 도취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녀를 지하 주차장으로 몰아넣었다.주차장의 서늘한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재현은 뒷좌석 문을 거칠게 열고 하늘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쾅, 소리를 내며 닫힌 문은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마침표와 같았다.“하늘아, 이제 아무도 방해 못 해. 우리 둘뿐이야.”운전석에 올라탄 재현이 백미러로 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