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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붉은 자국

Author: 소담결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06 16:43:31

3화. 붉은 자국

재현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보다 더 크게 다가온 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감각이었다.

하늘은 그 집요한 요구에 취한 듯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재현은 한 번도 스크린을 보지 않았다.

오직 제 손아귀에 잡힌 하늘의 온기만을 확인하며, 그는 어둠 속에서 만족스러운 듯 입매를 말아 올렸다.

상영관을 나서는 순간, 다시 밝은 조명 아래로 노출되자 재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해사한 소년의 미소로 돌아왔다.

“누나, 배고프지? 내가 진짜 맛있는 데 알아놨어. 가자!”

하지만 하늘의 손목에는 그가 남긴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살구색 원피스 소매 아래에서 조용히 박동하고 있었다.

재현의 차 안은 고가의 가죽 시트가 내뿜는 묵직한 냄새와 그가 뿌린 상큼한 시트러스 향수 향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재현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낮은 콧노래를 흥얼거렸지만, 조수석의 하늘은 자꾸만 살구색 원피스 소매를 끌어당겨 손목을 가렸다.

재현의 아귀힘이 남긴 붉은 자국이 화끈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팠다.

하지만 그 통증은 불쾌하기보다 이상할 정도로 감미롭게 다가왔다.

누군가 제 존재를 이토록 세게 쥐어본 적이 없었기에, 그 열감은 마치 ‘너는 내 것’이라 선언하는 확실한 낙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나, 손목 많이 아파? 아까 내가 너무 꽉 잡았나 봐.”

재현이 슬쩍 곁눈질하며 물었다.

미안하다는 말치고는 입가에 걸린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실 줄 몰랐다.

그는 신호가 걸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하늘의 손을 낚아채더니, 자신의 볼에 어린아이처럼 비벼댔다.

“아프면 나 때려도 돼. 근데 누나, 나 군대 가기 전까지는 1분 1초도 안 쉬고 누나만 보고 싶단 말이야. 나 군대 가면 누나 딴 놈들이 채가면 어떡해? 나 진짜 거기서 탈영할지도 몰라.”

“재현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무섭게.”

하늘이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하자, 재현은 만족스러운 듯 핸들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진짠데. 그러니까 누나, 그 피시방 아르바이트 이제 그만해. 그냥 내가 주는 용돈 써. 우리 아빠 카드 한도 엄청 높거든. 누나 학원비? 그런 거 내가 다 내줄게. 누나가 밤늦게까지 컵라면 치우고 남들 눈치 보는 거 생각하면, 나 진짜 짜증 나서 잠이 안 와.”

걱정을 가장한 제안이었으나 그 속엔 타협 없는 강요가 깃들어 있었다.

스무 살의 재현에게 사랑이란 상대를 귀한 곳에 모셔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화려한 새장 안에 가두는 것과 같았다. 하늘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내 힘으로 벌기로 오빠랑 약속했어. 고모네 집에도 눈치 보이고…….”

“……오빠?”

재현의 눈동자가 찰나의 순간 흔들리더니, 이내 묘한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방금까지 대형견처럼 애교를 부리던 얼굴에 기묘한 안도감과 여유가 서서히 차올랐다.

“아, 친오빠? 와, 다행이다. 난 또 어떤 놈인가 했네.”

재현은 핸들을 가볍게 두드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친오빠라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경계심을 푸는 척했지만,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에는 일종의 선민의식 같은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오빠면 인정이지. 가족이잖아. 근데 누나, 오빠가 누나를 너무 고생시키는 거 아냐? 아무리 약속했다지만, 동생이 밤새 아르바이트하는데 보고만 있는 건 좀…… 능력이 없는 건가?”

“아냐, 오빠는 나 대학 보내려고 복학해서도 얼마나 열심히 사는데. 내가 미안해서 자처한 거야.”

하늘이 다급히 오빠 바다를 변호하자, 재현은 핸들을 잡은 하늘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다정한 손길이었으나 뱉어내는 문장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가족이니까 그럴 수 있지. 근데 누나, 이제 누나한테는 내가 있잖아. 오빠한테 미안한 마음, 이제 나한테 다 써. 누나 힘들게 하는 그런 구식 약속 같은 거 이제 하지 말고. 응? 내가 그 오빠보다 훨씬 더 편하게 해줄 수 있는데.”

재현은 다시 아이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액셀을 밟았다.

아까의 거친 질주와는 달리 부드러운 출발이었으나, 차는 어느새 화려한 도심의 불빛을 뒤로하고 어둠이 짙게 깔린 한적한 교외로 향하고 있었다.

“누나, 오늘 내가 예약한 데는 오빠도 절대로 모르는 곳일걸? 거기 가면 오빠 걱정 같은 거 다 잊게 해줄게. 누나 옆엔 나만 있으면 돼. 알았지?”

하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점점 낯설어지고 있었지만, 어디로 가는지 묻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그럴 필요가 없다고 자신을 스스로 설득하고 있었으니까.

재현은 운전대를 잡지 않은 한 손으로 하늘의 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 위를 엄지손가락으로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마치 그 가족이라는 견고한 울타리조차, 자신이 새로 칠한 선명한 페인트로 덧칠해 지워버리겠다는 듯이 집요하고도 치밀한 손길이었다.

***

교외의 한적한 숲길을 한참 달린 차가 도착한 곳은 간판조차 없는 육중한 철문 앞이었다.

재현이 익숙하게 호출 벨을 누르자 문이 서서히 열렸고, 그 안에는 숲에 파묻힌 듯한 정갈한 한옥 건물이 나타났다.

“누나, 다 왔어. 여기가 내가 말한 데야.”

재현은 차에서 내려 직접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하늘의 허리를 감싸안듯 밀착시키며 안으로 이끌었다.

복도는 미로처럼 길었고, 안내하는 직원 외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안내받은 방은 사방이 완벽하게 차단된 개별 룸이었다.

“여기 메뉴판은 따로 없어. 내가 미리 제일 좋은 걸로 주문해 뒀거든. 누나는 그냥 맛있게 먹기만 하면 돼.”

재현은 상전이라도 모시듯 하늘의 의자를 직접 빼주었다.

테이블 위에는 화려한 전채 요리들이 미리 세팅되어 있었다.

평소 편의점 삼각김밥이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하늘에게, 이 공간의 화려함은 대접받는 기분보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압박감으로 먼저 다가왔다.

“재현아, 여기 너무 비싸 보여. 그냥 우리 평범한 데 가서 먹어도 되는데…….”

“누나. 내가 말했잖아. 누난 이런 대접받을 자격 충분하다고. 아, 잠깐만.”

재현이 말을 끊고 하늘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입가에 묻지도 않은 소스를 닦아내는 척하며, 그의 손가락이 하늘의 입술을 느릿하게 훑었다.

징— 징—.

그때, 정적을 깨고 하늘의 가방 안에서 거칠게 진동이 울렸다.

순간, 재현의 손가락이 멈췄다.

찰나였지만 하늘은 재현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서늘한 불꽃을 보았다.

하늘이 서둘러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액정 위에는 익숙한 이름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오빠]

“어, 오빠네…….”

하늘이 전화를 받으려 손가락을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재현의 하얗고 긴 손이 하늘의 손목을 덮쳤다.

차 안에서 남겼던 그 붉은 낙인 위를 다시 한번 강하게 압박하며, 그는 하늘의 휴대전화를 가볍게 앗아갔다.

“누나, 우리 첫 데이트잖아. 오늘 하루는 나한테만 집중해 주면 안 돼?”

재현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서운하다는 듯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소년처럼 칭얼거렸다.

하지만 휴대전화를 쥔 그의 손가락 마디에는 힘이 빡 들어가 있었다.

“오빠가 걱정할까 봐 그래. 금방 통화하고 줄게, 재현아.”

“내가 대신 받아줄까? 아니면 전원 꺼둘래?”

재현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질문의 내용은 선택지가 없는 강요였다.

재현은 휴대전화 화면에서 계속해서 명멸하는 '오빠'라는 글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비스듬히 입매를 올렸다.

“가족이라며. 가족이면 동생이 좋은 데서 데이트하는 거 방해하면 안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재현은 전화를 받지도, 끊지도 않은 채 진동이 멈출 때까지 가만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끊임없이 울리는 진동 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기괴하게 뒤흔들었다.

마침내 진동이 멈추자, 재현은 익숙한 동작으로 휴대전화의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검게 변해버린 화면 위로 재현의 만족스러운 미소가 비쳤다.

하늘은 그 미소를 보며, 왜인지 모르게 목 안쪽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꺼진 휴대전화를 제 주머니 속에 쏙 집어넣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포크를 들었다.

“자, 누나. 이제 우리 방해꾼 없어졌네. 식기 전에 얼른 먹자.”

재현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진 휴대전화가 마치 하늘의 마지막 숨구멍이었던 것처럼, 방 안의 공기가 급격히 희박해졌다.

하늘은 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재현이 턱을 괸 채 자신을 뚫어지게 관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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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화. 대화하늘은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주방 창을 활짝 열었다.“언니, 일단 이것부터 꽂아둘게.”하늘은 장바구니에서 가장 먼저 프리지어를 꺼냈다.투명한 유리병에 물을 채우고 꽃을 꽂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식탁 정중앙, 동혁이 앉게 될 자리를 가늠하며 꽃병의 위치를 몇 번이나 고쳐 잡았다.노란 꽃잎이 식탁 위로 화사한 그림자를 드리웠다.시은은 팔을 걷어붙이며 식재료를 꺼내기 시작했다.“자,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유 셰프님,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언니는 채소 좀 다듬어 줘. 전골은 육수가 생명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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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화. 저녁 준비사무실로 돌아가는 복도, 바다의 발걸음은 아침보다 한결 더 가벼워져 있었다.반면 동혁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쿠키 상자를 보며 오늘 하루가 유독 길게 느껴질 것임을 직감했다.숫자와 서류로 가득 찬 일터의 공기 속에, 자꾸만 달콤한 쌀가루 향기가 섞여 드는 기분이었다.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동질감이 감돌았다.한 명은 지켜내야 할 가족의 집으로, 한 명은 그 집의 문턱을 조심스레 넘으려는 초대받은 이의 긴장감을 품은 채로.창밖으로 비치는 아침의 햇살은 두 남자의 등 뒤를 비추며, 오

  • 멍든 꽃의 계절   62화. 쿠키 같은 든든한 달콤함

    62화. 쿠키 같은 든든한 달콤함폭풍 같던 하루가 지나간 밤, 집 안에는 낮에 구운 쿠키의 고소한 잔향이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하늘은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한참 동안 휴대전화 화면을 만지작거렸다.자판 위에서 망설이던 손가락이 몇 번을 지웠다 쓰기를 반복한 끝에야 짧은 문장 하나를 완성했다.[팀장님 덕분에 오빠랑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감사해요.]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마치 제 마음의 일부분을 떼어 보낸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하늘은 휴대전화를 가슴에 꼭 품은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누군

  • 멍든 꽃의 계절   61화. 남매의 시간

    61화. 남매의 시간뜻밖의 휴가를 얻어냈지만, 식탁 위를 떠도는 공기는 어색한 정적에 잠겼다.바다는 젓가락 끝으로 빈 접시를 의미 없이 톡톡 건드렸다.그동안 그가 하늘과 공유한 것은 '일상'이 아니라 '생존'이었다.여동생이 발작하지 않도록 주변을 살피고, 남자의 접근을 차단하며, 악몽을 꾸지 않는지 밤새 귀를 기울이는 것.그것이 바다가 아는 남매의 시간 전부였다.하지만 지금 눈앞의 하늘은 더 이상 가쁜 숨을 몰아쉬는 환자가 아니었다.뺨에 가시지 않은 온기를 머금은 채, 누군가의 배려에 마음을 흔들거리는 평범한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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