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3화. 붉은 자국
재현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보다 더 크게 다가온 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감각이었다.
하늘은 그 집요한 요구에 취한 듯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재현은 한 번도 스크린을 보지 않았다.
오직 제 손아귀에 잡힌 하늘의 온기만을 확인하며, 그는 어둠 속에서 만족스러운 듯 입매를 말아 올렸다.
상영관을 나서는 순간, 다시 밝은 조명 아래로 노출되자 재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해사한 소년의 미소로 돌아왔다.
“누나, 배고프지? 내가 진짜 맛있는 데 알아놨어. 가자!”
하지만 하늘의 손목에는 그가 남긴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살구색 원피스 소매 아래에서 조용히 박동하고 있었다.
재현의 차 안은 고가의 가죽 시트가 내뿜는 묵직한 냄새와 그가 뿌린 상큼한 시트러스 향수 향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재현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낮은 콧노래를 흥얼거렸지만, 조수석의 하늘은 자꾸만 살구색 원피스 소매를 끌어당겨 손목을 가렸다.
재현의 아귀힘이 남긴 붉은 자국이 화끈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팠다.
하지만 그 통증은 불쾌하기보다 이상할 정도로 감미롭게 다가왔다.
누군가 제 존재를 이토록 세게 쥐어본 적이 없었기에, 그 열감은 마치 ‘너는 내 것’이라 선언하는 확실한 낙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나, 손목 많이 아파? 아까 내가 너무 꽉 잡았나 봐.”
재현이 슬쩍 곁눈질하며 물었다.
미안하다는 말치고는 입가에 걸린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실 줄 몰랐다.
그는 신호가 걸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하늘의 손을 낚아채더니, 자신의 볼에 어린아이처럼 비벼댔다.
“아프면 나 때려도 돼. 근데 누나, 나 군대 가기 전까지는 1분 1초도 안 쉬고 누나만 보고 싶단 말이야. 나 군대 가면 누나 딴 놈들이 채가면 어떡해? 나 진짜 거기서 탈영할지도 몰라.”
“재현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무섭게.”
하늘이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하자, 재현은 만족스러운 듯 핸들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진짠데. 그러니까 누나, 그 피시방 아르바이트 이제 그만해. 그냥 내가 주는 용돈 써. 우리 아빠 카드 한도 엄청 높거든. 누나 학원비? 그런 거 내가 다 내줄게. 누나가 밤늦게까지 컵라면 치우고 남들 눈치 보는 거 생각하면, 나 진짜 짜증 나서 잠이 안 와.”
걱정을 가장한 제안이었으나 그 속엔 타협 없는 강요가 깃들어 있었다.
스무 살의 재현에게 사랑이란 상대를 귀한 곳에 모셔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화려한 새장 안에 가두는 것과 같았다. 하늘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내 힘으로 벌기로 오빠랑 약속했어. 고모네 집에도 눈치 보이고…….”
“……오빠?”
재현의 눈동자가 찰나의 순간 흔들리더니, 이내 묘한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방금까지 대형견처럼 애교를 부리던 얼굴에 기묘한 안도감과 여유가 서서히 차올랐다.
“아, 친오빠? 와, 다행이다. 난 또 어떤 놈인가 했네.”
재현은 핸들을 가볍게 두드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친오빠라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경계심을 푸는 척했지만,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에는 일종의 선민의식 같은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오빠면 인정이지. 가족이잖아. 근데 누나, 오빠가 누나를 너무 고생시키는 거 아냐? 아무리 약속했다지만, 동생이 밤새 아르바이트하는데 보고만 있는 건 좀…… 능력이 없는 건가?”
“아냐, 오빠는 나 대학 보내려고 복학해서도 얼마나 열심히 사는데. 내가 미안해서 자처한 거야.”
하늘이 다급히 오빠 바다를 변호하자, 재현은 핸들을 잡은 하늘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다정한 손길이었으나 뱉어내는 문장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가족이니까 그럴 수 있지. 근데 누나, 이제 누나한테는 내가 있잖아. 오빠한테 미안한 마음, 이제 나한테 다 써. 누나 힘들게 하는 그런 구식 약속 같은 거 이제 하지 말고. 응? 내가 그 오빠보다 훨씬 더 편하게 해줄 수 있는데.”
재현은 다시 아이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액셀을 밟았다.
아까의 거친 질주와는 달리 부드러운 출발이었으나, 차는 어느새 화려한 도심의 불빛을 뒤로하고 어둠이 짙게 깔린 한적한 교외로 향하고 있었다.
“누나, 오늘 내가 예약한 데는 오빠도 절대로 모르는 곳일걸? 거기 가면 오빠 걱정 같은 거 다 잊게 해줄게. 누나 옆엔 나만 있으면 돼. 알았지?”
하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점점 낯설어지고 있었지만, 어디로 가는지 묻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그럴 필요가 없다고 자신을 스스로 설득하고 있었으니까.재현은 운전대를 잡지 않은 한 손으로 하늘의 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 위를 엄지손가락으로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마치 그 가족이라는 견고한 울타리조차, 자신이 새로 칠한 선명한 페인트로 덧칠해 지워버리겠다는 듯이 집요하고도 치밀한 손길이었다.
***
교외의 한적한 숲길을 한참 달린 차가 도착한 곳은 간판조차 없는 육중한 철문 앞이었다.
재현이 익숙하게 호출 벨을 누르자 문이 서서히 열렸고, 그 안에는 숲에 파묻힌 듯한 정갈한 한옥 건물이 나타났다.
“누나, 다 왔어. 여기가 내가 말한 데야.”
재현은 차에서 내려 직접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하늘의 허리를 감싸안듯 밀착시키며 안으로 이끌었다.
복도는 미로처럼 길었고, 안내하는 직원 외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안내받은 방은 사방이 완벽하게 차단된 개별 룸이었다.
“여기 메뉴판은 따로 없어. 내가 미리 제일 좋은 걸로 주문해 뒀거든. 누나는 그냥 맛있게 먹기만 하면 돼.”
재현은 상전이라도 모시듯 하늘의 의자를 직접 빼주었다.
테이블 위에는 화려한 전채 요리들이 미리 세팅되어 있었다.
평소 편의점 삼각김밥이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하늘에게, 이 공간의 화려함은 대접받는 기분보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압박감으로 먼저 다가왔다.
“재현아, 여기 너무 비싸 보여. 그냥 우리 평범한 데 가서 먹어도 되는데…….”
“누나. 내가 말했잖아. 누난 이런 대접받을 자격 충분하다고. 아, 잠깐만.”
재현이 말을 끊고 하늘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입가에 묻지도 않은 소스를 닦아내는 척하며, 그의 손가락이 하늘의 입술을 느릿하게 훑었다.
징— 징—.
그때, 정적을 깨고 하늘의 가방 안에서 거칠게 진동이 울렸다.
순간, 재현의 손가락이 멈췄다.
찰나였지만 하늘은 재현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서늘한 불꽃을 보았다.
하늘이 서둘러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액정 위에는 익숙한 이름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오빠]
“어, 오빠네…….”
하늘이 전화를 받으려 손가락을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재현의 하얗고 긴 손이 하늘의 손목을 덮쳤다.
차 안에서 남겼던 그 붉은 낙인 위를 다시 한번 강하게 압박하며, 그는 하늘의 휴대전화를 가볍게 앗아갔다.
“누나, 우리 첫 데이트잖아. 오늘 하루는 나한테만 집중해 주면 안 돼?”
재현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서운하다는 듯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소년처럼 칭얼거렸다.
하지만 휴대전화를 쥔 그의 손가락 마디에는 힘이 빡 들어가 있었다.
“오빠가 걱정할까 봐 그래. 금방 통화하고 줄게, 재현아.”
“내가 대신 받아줄까? 아니면 전원 꺼둘래?”
재현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질문의 내용은 선택지가 없는 강요였다.
재현은 휴대전화 화면에서 계속해서 명멸하는 '오빠'라는 글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비스듬히 입매를 올렸다.
“가족이라며. 가족이면 동생이 좋은 데서 데이트하는 거 방해하면 안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재현은 전화를 받지도, 끊지도 않은 채 진동이 멈출 때까지 가만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끊임없이 울리는 진동 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기괴하게 뒤흔들었다.
마침내 진동이 멈추자, 재현은 익숙한 동작으로 휴대전화의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검게 변해버린 화면 위로 재현의 만족스러운 미소가 비쳤다.
하늘은 그 미소를 보며, 왜인지 모르게 목 안쪽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꺼진 휴대전화를 제 주머니 속에 쏙 집어넣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포크를 들었다.
“자, 누나. 이제 우리 방해꾼 없어졌네. 식기 전에 얼른 먹자.”
재현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진 휴대전화가 마치 하늘의 마지막 숨구멍이었던 것처럼, 방 안의 공기가 급격히 희박해졌다.
하늘은 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재현이 턱을 괸 채 자신을 뚫어지게 관찰하고 있었다.
89화. 다시 다가오는 어둠단어의 매끄러운 이음새가 부끄러움에 툭툭 끊어져 나갔다.생전 처음 제 입으로 뱉어본 낯선 호칭이 혀끝을 스치자마자, 하늘은 제풀에 민망해져 칼을 쥔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귀 끝이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그 작은 읊조림이 떨어지기 무섭게, 동혁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항상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던 남자의 눈동자가 일순간 크게 일렁였다.제 고집으로 밀어붙인 결과물이었음에도, 막상 하늘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두 글자가 주는 파괴력은 동혁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뚝딱거리는 연인의 목소리가 이토록 가슴 깊은 곳을 난도질하듯 간지럽힐 줄은 몰랐다.동혁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이내 밀려오는 벅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직하게 실소를 흘렸다.입매가 걷잡을 수 없이 호선을 그리며 무너져 내렸다.그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하늘의 가냘픈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 내렸다.“……한 번 더 들어보려다가 내가 먼저 녹을 것 같네.”동혁이 패배를 인정하듯 낮게 읊조리며, 얼굴을 드러낸 하늘의 이마 위로 제 이마를 툭 기댔다.가까워진 거리 사이로 서로의 가쁜 숨결이 엉겨 붙었다.하늘은 제 손목을 쥔 동혁의 손바닥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놀리던 장본인 역시 전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이제 만족했어요? 정말 부끄러워 죽겠어.”하늘의 앙탈 같은 부끄러움에 동혁은 귀엽다는 듯 웃었다.단단하던 그의 가슴팍이 부드럽게 들썩이며 낮고 묵직한 웃음소리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사내에서는 결재 서류의 오타 하나도 용납하지 않던 구 팀장의 서슬 퍼런 이성이, 고작 여자의 수줍은 투정 한 자락에 이토록 무력하게 허물어지고 있었다.동혁은 얼굴을 감싸 쥔 하늘의 가냘픈 손목을 살며시 쥐어 아래로 내려놓았다.“그렇게 부끄러워할 거면서 대답은 또 어떻게 참고 했습니까.”동혁이 하늘의 붉어진 뺨을 제 손가락 등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서늘한 그의 손끝이 닿자마자 하늘은 으스스 몸을 떨며
88화. 자기야 2동혁은 이제 아주 재미가 들린 모양이었다.단어와 단어 사이에 숨을 쉬듯, ‘자기’라는 낯선 호칭을 아무렇지 않게 베어 물었다.동혁의 단단한 팔에 매달리듯 팔짱을 낀 채 이끄는 대로 발을 옮기는 하늘의 뺨 위로 한층 더 진한 홍조가 번져나갔다.숨길 수 없는 열기가 귀 끝을 지나 목덜미까지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자기라니. 진짜 낯간지럽게 무슨…….’하늘은 애써 속으로 투덜거리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하지만 그런 새침한 생각과 달리, 얄미울 정도로 뻔뻔한 남자의 다정함이 가슴 밑바닥을 간지럽히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돌려세운 얼굴 위로, 숨기지 못한 호선이 맑게 피어올랐다.마침내 제 나이에 걸맞은 소박하고도 완전한 행복이 걸린 순간이었다.동혁은 제 팔뚝에 닿는 하늘의 미세한 떨림과, 일부러 시선을 피하면서도 입꼬리를 숨기지 못하는 옆얼굴을 놓치지 않았다.장난스럽게 던진 애칭이었지만, 그것이 하늘의 얼굴에서 어두운 기억을 지워내고 생기를 불어넣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도하는 것은 꽤 짜릿한 일이었다.동혁은 카트를 쥔 손에 슬며시 힘을 주며, 하늘이 걷기 편하도록 제 보폭을 한 번 더 고쳐 잡았다.***조리대 위에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짙게 베어났다.마트에서 사 온 재료들이 알록달록하게 그릇을 채우고 있었고, 두 사람은 식탁에 나란히 앉아 본격적으로 김밥을 만들기 시작했다.큼직한 손으로 김발을 쥐고 제법 진지한 미간을 한 채 김밥을 단단하게 말아내는 것은 동혁의 몫이었다.하늘은 동혁이 흐트러짐 없이 잘 말아둔 김밥을 도마 위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예쁘게 썰어 하얀 접시에 차곡차곡 담아냈다.서툴지만 제법 합이 맞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일상의 한 페이지였다.하늘은 칼끝에 묻은 참기름을 쓱 닦아내며, 예쁘게 썰고 남은 못생긴 김밥 꼬투리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속 재료가 삐죽이 튀어나와 가장 간이 잘 밴 놈이었다.하늘은 그것을 동혁의 입가로 쑥 내밀며 장난스레 속삭였다.“원래 김밥은 이 끝부분이 제일
87화. 자기야동혁의 깔끔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한마디에 하늘이 입을 벌린 채 뱉으려던 유구한 변명들이 공중으로 허망하게 흩어졌다.당황한 하늘이 동혁의 옆구리를 손가락 끝으로 콕 찌르는지도 모른 채, 동혁은 아주 자연스러운 얼굴로 아주머니가 건넨 햄 조각을 받아 하늘의 입가에 동혁은 이쑤시개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햄 조각을 하늘의 입술 근처로 슬며시 가져다 댔다.아주머니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머물러 있는 것을 확인한 그가, 낮고 은밀하게 속삭였다.“자기야. 한 입 먹어봐.”예고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온 노골적인 애칭에 하늘의 사고회로가 순간 정지했다.깜짝 놀란 하늘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동혁을 향했다.‘자기’라는 단어가 이토록 매끄럽게 흘러나올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정작 동혁은 당황한 하늘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극히 태연했다.오히려 기회가 왔다는 듯 짐짓 다정한 눈빛을 가장하며, 그녀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한입 크기의 햄을 쏙 집어넣었다.짭조름하고 고소한 기름진 맛이 입안에 퍼지는 동안에도 하늘은 씹는 것조차 잊은 채 붉어진 얼굴로 그를 째려보았다.“어때? 맛있어?”반말과 존댓말의 경계를 교묘하게 넘나드는 동혁의 나직한 음성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시식 코너 아주머니는 눈앞의 젊은 부부가 부려대는 닭살 돋는 애정 행각이 그저 흐뭇한지 껄껄 웃으며 흐뭇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하늘은 쏟아지는 민망함을 삼키려 서둘러 우물우물 햄을 씹었다.아주머니 앞에서 대놓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순순히 장단을 맞춰주는 것뿐이었다.“네, 네…… 맛있네요.”겨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하는 하늘의 귀 끝이 이미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남자의 완벽한 포커페이스 뒤에 숨겨진 짓궂은 장난기에 완전히 말려든 꼴이었다.동혁은 귀여운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얌전히 햄을 받아먹는 하늘의 부리 같은 입술을 보며 속으로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색시 입맛에 맞다니 신랑이 사줘. 이 햄을 팬에서 달달 볶듯이,
86화. 햄 볶듯이 행복하게툭, 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끊어지는 감각과 함께 하늘은 눈을 번쩍 떴다.암막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살.정신이 맑아지기도 전에 가슴을 옥죄어오는 압박감이 먼저 찾아왔다.오늘 토요일, 사람 많은 대형 마트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출발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건만, 사방이 카트와 낯선 타인들로 가득 찬 공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명치끝이 찌릿하며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숨이 조금씩 가빠지자, 하늘은 본능적으로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며칠 전 병원에서 받아온 하얀 약 봉투가 손끝에 걸렸다.정제되지 않은 불안을 가라앉혀 줄 신경안정제.하늘은 약봉지 하나를 뜯어 손에 쥔 채 서둘러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섰다.온기 없는 방 안에 혼자 갇혀 있다가는 불안에 집어삼켜질 것 같았다.거실로 나오자 옅은 커피 향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던 동혁이 고개를 돌렸다.단정하게 정돈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요동치던 심장 소리가 신기하게도 아주 조금씩 사그라들었다.“일어났어요?”동혁의 나직한 목소리가 거실의 정적을 부드럽게 깼다.하늘은 제 손에 쥔 약봉지를 슬그머니 손바닥 안으로 감추며 메마른 목소리를 가다듬었다.“네……. 일찍 일어나셨나 봐요.”“평소 습관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휴일인데도 눈이 번쩍 떠지더군요.”동혁이 소리 내어 가볍게 웃었다.무장해제 된 편안한 웃음이었다.하늘은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려 살짝 미소를 지으며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려던 하늘은 식탁 위를 보고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하얀 식탁보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상.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와 몽글몽글한 스크램블 에그가 노란 주스 잔과 함께 예쁘게 놓여 있었다.하늘이 멍하니 식탁을 바라보다 동혁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천천히 다가왔다.“장 보러 가기 전에, 속을 좀 채우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부지런하셔라…….”하늘이 결국 참지 못하고 환하게 웃어버렸다.남자의
85화. 즐거운 주말“팀장님…….”‘쪽.’갑자기 거리를 좁혀온 동혁의 입술이 하늘의 달아오른 입술 위로 짧고 가볍게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서늘한 향수 냄새와 함께 뜨거운 온기가 부딪쳤다.“팀장님 금지라고 했을 텐데요.”동혁이 하늘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사내에서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오직 제 연인 앞에서만 무장해제 되는 어여쁜 웃음이었다.남자가 이토록 예쁘게 웃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그의 호선 그린 입매가 저녁 조명 아래서 눈부시게 빛났다.“바, 밥 먹다 말고 진짜 뭐 하시는 거예요! 빨리 밥이나 먹어요.”하늘은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숨기려 허둥지둥 숟가락을 쥐고 국물을 크게 떠 넣었다.뜨거운 국물 때문인지, 방금 전의 입맞춤 때문인지 두 뺨이 새빨간 장미처럼 화사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귀 끝까지 붉어진 채 밥그릇에 고개를 처박은 하늘을 보며, 동혁은 흐뭇한 눈길로 다시 수저를 들었다.“토요일에 같이 장 보러 가요.”동혁이 물컵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못을 박았다.단순히 흘러가는 말이 아닌, 주말의 일정을 확실하게 고정해 두겠다는 다정한 통보였다.세상 밖으로 나가 적응하겠다던 하늘의 조금 전 결심을, 그는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고 곧장 현실의 계획으로 실행에 옮겨준 것이다.“네!”하늘이 기다렸다는 듯 활기차게 대답했다.붉게 물들었던 두 뺨에는 여전히 부끄러운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대답하는 목소리만큼은 주방의 정적을 단숨에 깨뜨릴 정도로 싱그럽고 청량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일부러 숟가락으로 밥알을 꾹꾹 누르며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냈다.오빠라는 거대한 울타리에서 벗어나 홀로 서는 첫걸음이 구동혁이라는 남자와 함께라는 사실이, 두려움보다는 기분 좋은 설렘으로 가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동혁은 밥그릇에 고개를 처박다시피 한 하늘의 정수리를 보며 가볍게 콧노래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저렇게까지 정직하게 반응해 주니, 앞으로 다가올 주말이 벌써 길게 느
84화. 세상에서 가장 멋없는 프러포즈어둠이 밀려든 거실에는 낮게 맞물리는 숨소리와 옷가지가 스치는 서글픈 마찰음만이 간헐적으로 이어졌다.동혁의 입술은 하늘의 도발을 집어삼키듯 집요했고,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은 손길에는 빈틈이 없었다.밀어낼 생각도 없으면서 동혁의 단단한 어깨를 유영하듯 쥐고 있던 하늘의 손가락 끝이 점차 잘게 떨려왔다.얼마나 숨을 나눴을까.입술이 떨어지는 짧은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노골적으로 얽혔다.하늘은 붉게 달아오른 숨을 몰아쉬며, 제 목덜미를 받치고 있는 동혁의 손등 위로 뺨을 살며시 기댔다.“……반응이 너무 정직하신 거 아니에요?”하늘이 자극적인 장난기를 거두고 조금은 물기 어린 음성으로 속삭였다.동혁은 엄지손가락으로 하늘의 젖은 입술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그의 시선은 하늘의 얼굴을 지나 거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종이 쇼핑백으로 향했다.유바다가 밤새 피를 말려가며 개어놓았을 동생의 흔적들.동혁은 그것이 하늘에게 줄 안도감과 슬픔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정직하지 않으면 잡아두질 못하니까.”동혁이 하늘의 이마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며 밀착했던 몸을 한 걸음 물리 시켰다.남자의 품이 떨어져 나가자 차가운 거실 공기가 그새를 메웠다.동혁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던지며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저녁은 먹었습니까.”“아직요. 팀장님 기다리느라.”“구동혁입니다.”동혁이 냉장고 문을 열며 낮게 정정했다.“집에서까지 그 딱딱한 직함으로 불리고 싶진 않군요. 입을 맞추고 싶을 때 부르는 치트키라면서, 방금은 도발치고 너무 진지했습니다.”하늘은 소파에 멍하니 앉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냉철하기로 소문난 남자가 제 호칭 하나에 이토록 예민하게 구는 모양새가 제법 비현실적이면서도 기분이 좋았다.하늘은 소파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은 채, 냉장고에서 식재료를 꺼내 조리대 위에 늘어놓는 동혁의 등판을 가만히 응시했다.완벽하게 재단된 와이셔츠 위로 드
29화. 다시, 출근야간 근무, 병원의 고요한 복도, 아무도 없을 거라 방심했던 그 시간.카디건 속에 꽁꽁 감춰두었던 추악한 흔적들을 치매 노인의 눈앞에 무방비하게 드러냈던 자기 모습이 잔상처럼 스쳤다.구동혁은 그 비극적인 풍경을 침대 커튼 사이로, 혹은 스치듯 지나가며 보았을 것이다.“하늘 씨는 그 멍을 보며 본인의 잘못이라고 말했습니다. 본인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고요. 그때 제가 저도 모르게 끼어들었습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순간,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하늘은 베갯잇을 꽉 움켜쥐었다.억눌려
28화. 새장의 진실재현이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하늘은 도망치듯 방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오빠, 나 너무 피곤해서 바로 자려고.“바다의 대답도 듣기 전에 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몸을 웅크렸다.하루 종일 재현의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휴대전화의 진동 하나, 화면의 빛 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관자놀이가 깨질 듯 지끈거렸다.다행히 재현은 바다의 환심을 사느라 평소처럼 하늘의 휴대전화를 쥐 잡듯 뒤지지 않았다.바다와 재현, 두 남자가 거실에서 서로를 탐색하며 붙어 있었던 시간이 역설적이게도 하늘에게는 가장 안전한 방패막이가
27화. 새장 속을 벗어나려는 새세면대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요란했지만, 하늘의 머릿속은 그보다 더 시끄러운 경고음으로 가득 찼다.아무리 쥐어짜 봐도 당장 재현의 감시를 따돌릴 묘수는 보이지 않았다.‘언제든 기다리겠습니다.’어젯밤 동혁이 보낸 마지막 문장이 부표처럼 떠올랐다.그 ‘언제든’이라는 말은, 설령 오늘 하루 종일 재현의 그림자에 갇혀 숨죽이고 있더라도, 어제처럼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틈이 나더라도 상관없다는 뜻일지도 몰랐다.하늘은 거울 속의 창백한 자신을 응시했다.오늘 하루, 유일한 방패는
26화. 생각지도 못한 위기창틀을 잡은 하늘의 손끝이 하얗게 질려갔다.얇은 커튼 너머로 보이는 동혁의 실루엣은 미동도 없었다.마치 그 자리에 뿌리내린 고목처럼, 혹은 밤의 어둠 그 자체가 된 것처럼. 휴대전화가 손바닥 안에서 다시 한번 묵직하게 떨렸다.[바다 씨가 있어서 아무 일 없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안심되지 않아서 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지랖 부려서 죄송합니다.]동혁의 문장은 지나치게 정중해서 오히려 그 이면의 절박함을 드러냈다.하늘은 자판 위에서 망설이던 손가락을 움직였다.재현이 곁에 있을 때는 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