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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낌새

Penulis: 소담결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4-08 10:56:57

5화. 낌새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침묵 속에서, 하늘은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서둘러 재현의 팔을 가볍게 밀어내며 대화의 흐름을 끊었다.

“재현아, 오늘은 이만 가봐. 오빠가 기다리고 있어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오늘 정말 즐거웠어.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어. 그래, 누나.”

재현은 순식간에 다시 소년의 미소를 가면처럼 갈아 끼웠다.

그는 바다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하늘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시켰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연락해. 오빠랑 얘기하느라 늦게 하면 나 화낼지도 몰라. 알았지?”

달콤한 속삭임이었으나 분명한 경고였다.

하늘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고, 재현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차에 올라탔다.

재현의 차가 골목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바다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멀어지는 붉은 미등을 응시하는 바다의 표정은 예상대로 굳어 있었고, 그 옆에서 하늘은 죄지은 사람처럼 제 손목만 만지작거렸다.

바다의 시선이 잠시 하늘의 손목에 머물렀다.

붉게 번진 자국.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다는 추궁하지 않았다.

방금 목격한 낯선 사내의 무례함이나, 동생의 손목에 남은 기괴한 흔적에 입을 여는 대신 그는 지독한 인내를 선택했다.

계단을 오르려던 하늘의 뒷등 위로 바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하늘아.”

멈춰 선 하늘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돌아보는 얼굴에는 당혹감과 미안함, 그리고 정체 모를 수치심이 뒤섞여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정수리 위에서 부서져 바다의 눈가를 깊은 음영으로 덮었다.

그는 동생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떨구며 툭 던지듯 말했다.

“다치면 말해라.”

질문도 훈계도 아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네 편에 서겠다는 투박하지만, 벼려진 칼날 같은 선언이었다.

“…응?”

“혼자 앓지 말고. 네 잘못으로 다친 거 아니니까, 그냥 말하라고.”

바다는 그 말을 끝으로 먼저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서늘한 밤공기와 무거운 안심만이 남았다.

하늘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서 바다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재현이 남긴 손목의 통증은 화끈거리는 열감을 동반했지만, 바다의 말은 가슴속 깊은 곳을 차갑게 식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집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정적에 잠겨 있었다.

재현이 제대하며 얻은 오피스텔에서 두 남매는 함께 지내고 있었다.

가방도 내려놓지 못한 채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자,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짧게 몸을 떨었다.

재현이었다.

[누나, 오빠랑은 얘기 잘했어? 이제 오로지 내 생각만 해.]

액정의 불빛이 어두운 방 안을 날카롭게 갈랐다.

문장 끝에 붙은 이모티콘은 해맑았으나, 행간에 박힌 독점욕은 숨길 길 없이 선명했다.

하늘은 답장하려다 말고 엄지손가락을 멈췄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실루엣이 생경했다.

다시 진동이 울렸다.

이번에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재현]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건, 조금 전의 그 다정한 미성과는 사뭇 다른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누나, 왜 답장이 늦어. 오빠랑 무슨 얘기 했어? 내 욕했어?”

“아니, 그런 거 아냐. 그냥…….”

“그냥 뭐. 누나, 나 지금 누나 집 앞이야. 아까 거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늘은 홀린 듯 창가로 다가가 커튼 틈새를 살폈다.

가로등 아래, 아까 재현의 차가 서 있던 그 자리에 검은 그림자가 머물러 있었다.

재현은 차에서 내려 위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휴대전화 너머로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불 켜져 있네. 누나 방 거기구나? 예쁘다.”

관찰당하고 있다는 감각이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게 피부를 훑었다.

바다가 거실에서 인기척을 내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재현이 소리라도 지르거나 바다와 다시 마주친다면, 방금 겨우 봉합한 평화는 순식간에 난도질당할 것이 뻔했다.

“재현아, 제발…… 일단 가. 내일 연락할게.”

“내일 언제? 눈 뜨자마자 연락해. 안 그러면 나 또 올지도 몰라.”

전화가 끊겼다.

창밖의 그림자가 천천히 차에 올라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하늘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손목의 붉은 자국이 다시 화끈거렸다.

***

현관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건 새벽 공기의 서늘함이 아니었다.

어젯밤 꿈속까지 집요하게 따라붙던, 그 상큼해서 더 기괴했던 시트러스 향수 냄새였다.

가로등이 채 꺼지기도 전인 이른 아침.

재현은 마치 그 자리에 박제되어 있던 사람처럼 어제와 똑같은 위치에 서 있었다.

보닛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하늘의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일찍 나왔네, 누나. 잠은 잘 잤어?”

재현은 밤새 한잠도 못 잔 사람 특유의 피로감 대신, 오히려 갓 세수한 아이 같은 말간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그 눈 밑엔 미세한 푸른 기가 감돌았다.

정말로 밤을 새워 이곳을 지킨 것인지, 아니면 동이 트기도 전에 달려온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재현아, 여기 왜 있어?”

“어제 말했잖아. 눈 뜨자마자 연락하라고. 근데 답장이 없길래, 혹시 오빠가 또 누나 붙잡고 안 놔주나 해서 걱정돼서.”

재현은 성큼 다가와 자연스럽게 하늘의 가방을 뺏어 들었다.

거절할 틈도 주지 않는 능숙한 탈취였다.

가방끈이 스치며 어제의 그 붉은 손목이 드러나자, 재현의 시선이 그곳에 잠시 머물렀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입매를 비틀며 하늘의 손을 잡아 제 입술 근처로 가져갔다.

“학원까지 데려다줄게. 타, 누나.”

“아냐, 재현아. 버스 타고 가면 돼. 오빠가 보면…….”

“형님은 아까 나가는 거 봤어. 복학 준비하느라 바쁘다며? 누나 걱정은 나한테 맡기고 본인 앞가림이나 잘하면 좋을 텐데.”

재현의 목소리에 섞인 비릿한 조소가 하늘의 심장을 찔렀다.

바다를 '형님'이라 부르면서도 그 안에는 단 한 줌의 존중도 들어있지 않았다.

재현은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하늘을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차 문이 닫히는 소리는 마치 철창이 잠기는 소리처럼 육중하게 울렸다.

시동이 걸리고 차가 미끄러지듯 골목을 빠져나갔다.

재현은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흥얼거렸다.

“누나, 앞으로는 학원 갈 때 내가 매일 데리러 올게. 아르바이트 가는 시간도 미리 알려줘. 오빠 고생시키지 말고, 내 차 타면 편하잖아. 응?”

재현은 백미러로 하늘을 살피며 덧붙였다.

“물론, 오빠한테는 비밀로 하고. 우리 둘만 아는 비밀이 많아질수록 더 애틋해지는 법이니까.”

창밖에서 쏟아지는 오전의 햇살은 평화로웠지만, 책상 위에 엎어둔 하늘의 휴대전화는 그 정적을 비웃듯 파르르 몸을 떨었다.

.

짧은 진동.

메시지였다.

하늘은 못 본 척 화면을 외면하며, 필기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진동이 울렸다.

이번에는 길었다.

지이잉지이잉.

재현이었다.

하늘은 당황하며 무음 버튼을 눌렀다.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운전 중이라고 했잖아. 벌써 도착했을 리가 없는데.'

겨우 진동이 멈췄나 싶을 때, 이번에는 연달아 메시지가 쏟아졌다.

알림 설정이 꺼져 있음에도 화면이 깜빡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누나, 왜 안 받아?]

[수업 시작한 거 알아. 근데 목소리 듣고 싶어서.]

[받을 때까지 할 거야.]

협박에 가까운 문장들이 망막을 찔렀다.

하늘은 휴대전화를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하지만 가방 안에서도 불빛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하늘이 강의실 뒷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전화를 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재현의 서늘한 미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나왔네. 누나 목소리 듣기 되게 힘들다.”

“재현아, 나 수업 중이라고 했잖아. 급한 일이야?”

“응, 급해. 누나가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거든.”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끝이 미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는 차 안이 아니었다.

바람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

하늘은 본능적으로 복도 끝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너…… 어디야?”

“어디긴. 누나 학원 앞이지. 아까 데려다줄 때 건물 위치 봐뒀거든.”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하늘이 창밖을 내다보자, 대학 본관 앞 벤치에 앉아 여유롭게 손을 흔드는 재현이 보였다.

그는 전화를 귀에 댄 채, 마치 사냥감을 포착한 포식자처럼 하늘이 서 있는 3층 창가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누나, 지금 내려올래? 아니면 내가 올라갈까? 선생님께 인사도 드리고, 오빠 대신 내가 보호자라고 말해줄 수도 있는데.”

재현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그 안에는 거절할 수 없는 압박이 서려 있었다.

하늘은 복도 벽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르 주저앉았다.

“누나, 지금 내려와.”

재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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