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리나의 시점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얼굴에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이름은 내 것이 맞았다. 늘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성씨인 '모리슨'은 여태껏 한 번도 불려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평생 단 한 번도. 하지만 이미 답을 다 알고 나를 기다려왔다는 듯, 낮고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입에 담던 그의 억조는 내 속을 아지러지게 비틀어놓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시는 거죠?" 이불 밑에서 손이 미친 듯이 떨렸다. 나는 힘주어 손을 숨겼다.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셨으면 좋겠습니다." 따뜻한 인상의 남자가 말했다. 선한 눈매였다. 저도 모르게 신뢰하고 싶어지는 그런 눈빛.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 없었지만. "겁주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걸 확인하러 왔을 뿐이에요." "마음을 가라앉히라고요?" 세 사람을 둘러보며 되물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세 명이, 병실 침대에 누워 손등에 링거를 꽂고 있는 내 앞에 서 있는데?" "……그건 그렇군요." 남자가 순순히 인정했다. 나는 머리맡 벽에 몸이 닿을 때까지 바짝 물러섰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오른편 난간에는 간호사 호출 벨이 걸려 있었다.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면 손등의 주삿바늘이 걸림돌이 될 터였다.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탈출로를 계산하고 있었다. 뒤편에 서 있는 조각 같은 인상의 남자는 내가 눈을 뜬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표정은 완벽히 차가웠고, 눈 한 번 제대로 깜빡이지 않았다. 그저 다른 두 사람이 말하는 동안 가만히 서서 나를 관조할 뿐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듯. 내가 패닉을 멈추기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오직 자신만이 알아채는 어떤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가 가장 읽기 힘든 상대였다.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야말로 언제나 가장 위험한 법이다. "백번을 말씀하셔도," 속마음과 달리 단정한 목소리로 말을이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편안해질 수는 없어요." "그것 역시 맞는 말씀입니다." 따뜻한 인상의 남자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원하는 게 뭔지 말씀하시고 이만 나가주세요." 그때, 뒤에 있던 남자가 움직였다. 단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앞의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즉시 입을 다물었다. 오직 그들만이 알아채는 신호라도 주고받은 것처럼. 그는 침대 발치로 걸어와 멈춰 섰다. 앉지도, 어디에 기대지도 않았다. 그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낮고 낮게 깔려 있었다. 지극히 무심하고 조용하게. "내 이름은 데미안 모리슨입니다. 재스퍼 모리슨의 장남이지요."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쪽은 둘째 헨리 모리슨." 따뜻한 인상의 남자를 향해 턱짓했다. "그리고 저쪽은 막내 아벨 모리슨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두 사람은 나와 눈을 맞추었다. 압박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를 똑똑히 보여주려는 듯 곧고 진실한 눈빛이었다. 세 사람의 얼굴을 차례로 담았다. 데미안. 헨리. 아벨. 형제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굵직하고 단단한 턱선은 닮았지만, 풍기는 기운은 전혀 달랐다. 따뜻하고 개방적인 인상의 헨리. 눈가에 다정함과 진솔함이 서려 있는 아벨. 그리고 단 한 번도 웃지 않은, 마치 웃는 법을 잊어버린 듯한 얼굴로 주변의 공기마저 가라앉히는 데미안. "우리는 몇 년 동안 누군가를 찾아 헤맸습니다."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네 살 때 사라진 아이였죠. 한순간도 찾는 것을 멈춘 적이 없습니다." 나는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아이의 이름은 리나 모리슨입니다." 정적이 흘렀다. " 그리고 당신이 바로 그 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극적인 억양도, 부드러움도, 어떠한 과장도 섞이지 않은 담담한 어조였다. 그저 사실만을 건네듯. "당신이 우리의 여동생이라고 확신합니다."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입 밖으로 터져 나온 소리는 웃음보다는 훨씬 가시 차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비싼 수트를 차려입은 남자 세 명이 병실로 찾아와서," 내가 말했다. "내가 자기들의 잃어버린 여동생이라고요?" 세 사람을 차갑게 훑었다. "내가 무슨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애로 보이나요?" "리나……." "아는 척 부르지 마세요." 생각보다 억센 목소리가 나갔다. " 난 당신들 몰라요. 단 한 명도 모른다고요. 지금 당장 안 나가면 유괴범이라고 소리 질러서 이 층에 있는 간호사들을 전부 부를 테니 그렇게 아세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미동조차 없었다. 그 당당함이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보육원 시절이 떠올랐다. 길고 차가운 복도, 여럿이 쓰던 방, 매일 아침 점호를 부르던 원장 수녀님. 내 기억이 닿는 아주 먼 옛날부터 나는 그곳에서 자랐다. 부모도, 형제도 없이, 내가 어디서 왔는지, 이 국가의 보호 아래 들어오기 전에 누구의 품에 있었는지 아는 이 하나 없이. 어딘가로 납치당했던 기억 따위는 없었다. 가족에 대한 기억도. 그 차가운 벽들 너머의 삶에 대한 기억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난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단호하고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가족 같은 건 없어요.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다고요. 그러니까 당신들이 뭘 찾아냈든, 사람을 잘못 보셨네요." 아벨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움직임은 다른 두 사람과 달랐다. 경계심이 적고, 타인과의 거리감을 위협으로 느끼지 않는 듯 자연스러웠다. "제발요." 그가 말했다. "지금 당장 우리 말을 믿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가져온 걸 한 번만 봐주세요." 그가 손을 들어 보였다. "보기만이라도요. 부탁입니다." 그의 다른 한 손에 들린 가방으로 시선이 쏠렸다.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저 안에 뭐가 들었을까? 대체 뭘 꺼내려는 걸까? 나는 머리맡 벽으로 몸을 더 밀착시켰다. 가방 잠금장치로 향하는 그의 손을 주시하며 속으로 다짐했다. *필요하면 소리를 질러. 망설이지 마, 먼저 비명을 지르는 거야.* 그가 꺼낸 것은 사진 한 장이었다. 그저 사진 한 장. 그가 사진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내가 선뜻 받지 않자, 그는 침대 끝 내 손이 닿는 곳에 사진을 내려놓고는 뒤로 물러섰다. 그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진을 주워 들었다. 세 명의 사내아이와 한 명의 계집아이.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여아가 두 오빠의 목에 팔을 감은 채 한가운데 서 있었다. 아이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온 얼굴로, 눈을 활짝 접어 올리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자지러지게. 아이들 뒤로는 넓고 잘 가꿔진 저택의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소년들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세 남자의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어린 여자아이는…….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사진으로 시선을 내렸다. 나와 똑같이 생겼다. 어설프게 닮은 수준이 아니었다. 스쳐 지나치며 부정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얼굴형. 눈매. 웃을 때 그려지는 입꼬리의 모양. 평생 거울 속에서 봐온 바로 그 얼굴이었다. 가슴이 턱 막혀왔다. "이 아이…… 누구예요?" 목소리가 거의 속삭임처럼 흘러나왔다. "너야, 리나." 헨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니야." 사진을 이불 위에 내려놓았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냥 나랑 닮은 아이일 뿐이에요. 세상엔 닮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너, 흉터 같은 점이 있지." 아벨이 말했다. "등 뒤, 왼쪽 밑에."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방 안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말이 맞았으니까. 내 등 뒤 왼쪽 하단에는 불규칙한 모양의 진한 점이 있었다. 평생 욕실 거울을 볼 때마다 확인하던 점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던, 내 몸의 흔적. 그걸 타인이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나를 만나본 적도, 옷 벗은 모습을 본 적도, 의료 기록을 열람한 적도 없는 타인이 그걸 알 수는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네가 우리 동생이니까." 세 사람이 동시에 입을 모았다. 그 완벽한 조화가 준비되지 않은 내 가슴을 크게 흔들어놓았다. 세 사람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같은 눈빛으로 나를 담고 있었다. 승리감에 도취된 것도, 무언가를 요구하는 눈빛도 아니었다. 그저 확신. 오랫동안 진실을 품어온 이들이 마침내 그것을 내려놓았을 때 풍기는 안도와 확신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우연일 수 있어요."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점 하나쯤은 흔할 수도 있잖아요." "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헨리가 다정하게 말하며 가방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래서 다 준비해 왔단다." 그가 서류 세 뭉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받아 들었다. 유전자 검사 결과지. 세 건의 서로 다른 검사지. 이름, 일치율 99.9%, 연구소의 직인과 날짜. 첫 번째 서류를 읽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까지.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사진 옆 이불 위에 서류를 내려놓고, 데미안의 머리 위 벽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무너지려는 정신을 겨우 잡아챘다. 보육원에서 자라는 내내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괜찮다고. 세상엔 가족 없이 자라는 사람도 많다고. 부모가 없다고 해서 내 삶이 가치 없는 건 아니라고. 나는 괜찮다고, 늘 담담하다고. "어머님 아버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널 찾다가 눈을 감으셨어." 데미안의 목소리였다. 낮고 무거웠다. 부드러움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오랫동안 짊어져 온 세월의 무게가 담긴 음성. "단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으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우리가 반드시 널 찾겠다고 두 분께 맹세했지."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우리 힘으로 세상에 나설 수 있게 된 그날부터, 한시도 멈추지 않고 널 찾아 헤맸어." 그 말이 내 안의 무언가를 완벽히 깨뜨렸다. 사진 때문이 아니었다. 유전자 검사지도, 등 뒤의 점 때문도 아니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두 사람이, 딸을 찾지 못한 채 피눈물을 흘리며 세상을 떠났다는 것. 그리고 오빠들에게 끝까지 찾아달라 유언을 남겼다는 그 서글픈 진실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 순간 아벨이 다가와 나를 품에 안았고, 헨리 역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데미안마저…… 그 차갑던 데미안마저 내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아주 잠시,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손길은 그 어떤 백 마디 말보다 무겁고 따뜻하게 전해졌다. "……당신들이 정말 내 오빠들이에요?" 엉망으로 뭉개진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 그들이 대답했다. 나는 더욱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안도감, 서러움, 분노,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가슴 깊은 곳에 오랫동안 꽁꽁 닫혀 있던 둑이 터져 나가듯,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울음이 겨우 진정되었을 때, 헨리가 물러서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턱에 굳은 힘이 들어가 있었다. 눈빛은 십 분 전보다 훨씬 더 어둡고 깊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리나?" 그가 물었다. "어쩌다 이런 데서 혼자…… 임신까지 한 채로 쓰러져 있었던 거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불 위를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던 기억이 났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다듬었던 단어들. 하지만 진심으로 내 대답을 기다려주는 이들 앞에서 그 비극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남편이……." 입을 뗐다가 멈추었다. 다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나를 쫓아냈어요. 그 사람과 시어머니, 그리고 그 사람이 만나는 여자가 함께……. 내가 없는 사이에 내 짐을 다 싸서 거실 한가운데 던져놨더라고요. 시어머니는 내 뺨을 쳤고…… 남편은 날 문밖 빗속으로 끌어내 팽개쳤어요."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살죽이는 서늘함이 피부에 와닿았다. 헨리의 턱 근육이 경련하듯 강하게 씹히는 것이 보였다. 아벨은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빛은 이미 이전의 다정한 오빠가 아니었다. 그리고 데미안은…… 데미안은 지독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평온함과는 거리가 먼, 폭풍전야의 고요함. 결단을 내리기 직전의 차가운 정적. "그놈 이름이 뭐지." 데미안이 물었다. 높낮이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 "에이든……." 나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에이든 노먼이에요." 세 형제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오직 그들만이 공유하는 차가운 눈빛이 교차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이미 완벽히 달라져 있었다. "가자." 헨리가 말했다. 목소리의 톤이 달라져 있었다. 따스함은 남아 있었지만 그 아래에 단단하고 잔혹한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짐 챙겨라." 그가 말을 멈추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네 짐은 어디 있지?" 나 역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트케이스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당연히 침대 옆에 놓여 있으리라 생각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썰렁한 바닥뿐이었다. "도둑맞았나 봐요." 내가 말했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동안에……." 헨리의 표정이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벨은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상관없다." 데미안이 말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확고했다. "필요한 건 전부 새로 구해주마." 그가 잠시 숨을 골랐다. "넌 모리슨가의 사람이니까." 마치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정리하는 선언과도 같은 말이었다.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반격이 시작됨을 알리는 선언. 불과 24시간 전만 해도 존재조차 몰랐던 세 오빠에게 둘러싸여, 손에 쥔 임신 진단서와 입고 있는 옷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병실 침대 위에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어쩌면 생애 처음으로, 진짜 내 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리나?" 아벨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를 바라보았다. "에이든 노먼." 다시 한번 똑똑히 답했다. 아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헨리 사이에 오간 눈빛, 그리고 헨리가 데미안에게 보낸 차가운 시선은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에이든 노먼은 자신에게 어떤 지옥이 몰아칠지, 꿈에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7월의 모리슨 저택, 재회의 날 특유의 공기가 온 저택을 감쌌다. 웅장한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진입로에는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으며, 분수대는 시원하게 물줄기를 내뿜었다. 현관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헨리 오빠가 요리하는 맛있는 냄새가 홀까지 풍겨왔다. 지난 5년 동안 수많은 뜻깊은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저택의 공기 자체가 완벽하고 온화하게 바뀐 듯했다.나는 거실 문가에 서서 그 모든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이단은 이제 여덟 살이었다.태어날 때부터 남달랐던 의연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또렷해졌다. 아이는 데미안 오빠의 단호함, 즉 사물을 서두르지 않고 온전히 직시하는 태도와 스스로 확신하지 않은 의견에는 절대로 휩쓸리지 않는 주관을 빼닮아 있었다. 동시에 마커스의 다정함, 즉 상대를 바라볼 때 따뜻하게 다독여주는 눈빛과 웃기로 마음먹기도 전에 튀어나오는 유쾌한 웃음소리도 그대로 품고 있었다.물론, 아이의 고집은 여전했다.그것만큼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이단은 지금 아벨 오빠와 무언가 심각한 협상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자신의 주장을 피력할 때 나오는 아벨 오빠 특유의 화려한 손짓과, 설득당하지 않았을 때 나오는 이단 특유의 팔짱 낀 자세가 눈에 들어왔다. 주제가 무엇이든, 이단은 데미안 오빠에게서 배운 대로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정적을 유지하며 단단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내고 있었다.아벨 오빠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이단은 묵묵히 버티고 있었다.이 싸움이 누구의 승리로 끝날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클라라는 네 살이었다.네 살이 된 지 석 달째였고, 아이는 그 석 달이라는 시간을 지극히 생산적으로 보내는 중이었다.사건은 지난 4월, 정원 사업에서 시작되었다.클라라가 명쾌한 논리로 몇 번이나 설명해 주었지만, 아이의 논리를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나를 오히려 의아해하는 눈빛 때문에 이 사업의 정확한 기원은 여전히 불분명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텃밭과 헨리 오빠의 씨앗 몇 봉지, 그리고
1월의 어느 수요일, 새벽 3시 17분. 클라라가 세상에 태어났다.수요일이나 새벽 3시 17분이라는 시간이 특별해서도, 1월이라는 계절에 거창한 의미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크리스마스를 지나며 만삭의 몸으로 거대한 변화를 마주할 준비를 하듯 조심스럽고도 단단한 걸음으로 저택을 거닐던, 춥고 어두운 그달에 클라라가 찾아왔을 뿐이었다.아이가 그때 태어난 건, 순전히 스스로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었다.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지극히 클라라다운 방식이었다.진통은 한밤중인 12시에 시작되었다.나는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었다. 지난 2주 동안 도통 숙면을 취하지 못하던 터였다. 임신 막바지의 지독한 신체적 불편함, 배 속의 공간이 좁아지며 아기와 나 사이에 묘한 밀당이 이어지던 중이었다. 첫 진통이 찾아왔을 때, 나는 잠시 미동도 없이 누워 생각했다. *'방금 그건 평소와 다른데.'*다음 세 번의 진통 간격을 쟀다.그러고 나서 마커스를 깨웠다."때가 됐어요."내가 문장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가 눈을 떴다.마커스는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는, 몇 주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왔던 사람 특유의 완벽한 몰입과 집중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간격이 어떻게 돼?" 그가 물었다."8분이요.""알았어." 그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았어. 아다에제 의사에게 연락할게.""벌써 문자 보냈어요." 내가 말했다.마커스가 나를 건너다보았다."당신을 깨우기 전에 진통 간격을 세 번 쟀거든요." 내가 덧붙였다. "확실히 하고 싶어서."그는 다정함과 황당함, 그리고 깊은 사랑이 한데 얽힌 표정으로 나를 딱 1초 동안 바라보았다."당연히 그랬겠지."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미소를 지었다.마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는 데미안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밤중에 오빠에게 꼭 연락을 취해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오빠는 3주 전 나지막이 '시작되면 반드시 알려달라'고 부닥했었고 마커스는 그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복도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
나는 서재에서 데미안 오빠를 찾아냈다.오빠는 모니터 화면들을 띄워둔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양손을 책상 표면에 평평하게 얹은 자세였다. 중앙 모니터에는 바로 그 기사가 떠 있었다. 내가 노크하고 들어왔을 때 이미 그 기사를 읽고 있었으며, 굳이 탭을 닫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오빠는 이 상황을 내게 숨기거나 조작하려 들지 않고 있었다.내가 들어서자 오빠가 고개를 들었다.나는 오빠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알고 있는 거 다 말해줘요." 내가 말했다."기사는 읽었겠지." 오빠가 말했다."읽었어요. 내가 알고 싶은 건 이 정보의 출처에 대해 오빠가 파악한 내용이에요."오빠가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애시워스 건에 관한 내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던 자야." 오빠가 입을 열었다. "나와 애시워스의 과거사, 그러니까 공개된 기록에는 없는 개인적인 원한이라는 프레임을 짜 넣었다는 건 회사 내부 문서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뜻이지." 오빠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시 말해, 내부자의 소행이라는 거다.""아벨 오빠가 추적 중이에요." 내가 말했다."알고 있다." 데미안 오빠가 응수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에요?"오빠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내가 늘 하던 대로 해야지." 오빠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완벽한 정보를 손에 쥐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는다.""오빠가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기사는 계속 퍼져나가고 있어요.""그렇겠지.""그리고 사실도 아닌 헛소문에 오빠 이름이 들먹거려지고 있고요.""그래." 오빠가 다시 한번 대답했다. 완벽하게 평정심을 유지한 목소리였다.나는 오빠를 가만히 건너다보았다.데미안 모리슨.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가문의 모두를 지켜온 사람. 회사를 이끌고, 약속을 지키고, 끄나풀을 솎아내고, 위협을 제거하며,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복도 끝에 서 있던 사람. 그런 사람이 자신을 향한 왜곡된 비난 기사가 언론에 도배되고 있는 순간에도 책상 앞에 손을
**리나의 시점**진료 예약은 오전 9시였다. 아다에제 의사의 진료실은 모리슨 저택에 입성한 뒤 첫 검진을 받았던 곳이자, 내 상황을 완벽히 숙지한 의사가 나를 취조받는 기분이 들지 않게 배려하며 신중하고 능숙하게 질문을 던졌던,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의미 있는 말들이 오갔던 바로 그 공간이었다.마커스가 나와 함께해 주었다.그는 매 검진마다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동행했다.내가 부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임신 초기, 나는 의학적 검진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히 받을 수 있고 그의 일정을 변경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했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마커스는 내 말을 가만히 들은 뒤 이렇게 답했었다. *'당신에게 내가 필요 없다는 건 알아. 내가 같이 가고 싶어서 그래. 그 둘은 엄연히 다른 거야.'* 나는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그 둘은 다른 거지.'* 그리고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아다에제 의사가 초음파 검사를 진행했다.진료실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모니터 화면이 밝게 빛났다."성별을 알고 싶으신가요?" 의사가 물었다.마커스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네." 내가 대답했다."딸이네요." 아다에제 의사가 미소를 지었다.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마커스를 건너다보았다.그의 얼굴.나는 이사회의장에서, 강변 산책로에서, 밤 11시의 주방에서, 결혼식 단상 앞에서, 그리고 새벽 2시의 아이 방에서 마커스 그레이의 얼굴을 보아왔다. 서로를 선택하며 함께한 3년의 세월 동안 그가 보여준 온갖 무수한 표정들을 하나하나 기억해 두었기에, 나는 그 사람의 모든 얼굴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이런 표정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완전히 무장 해제된 남자의 얼굴이었다.압도당한 것이 아니라, 경계가 완전히 풀려버린 모습. 늘 유지하던 특유의 단단한 틀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그 아래 숨겨진 본연의 모습이 아무런 방어막 없이 오롯이 드러난 표정이었다.그는 모니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의 턱 끝이 미세하게
**리나의 시점**결혼식 당일 아침 7시 반, 헨리 오빠가 내 방으로 찾아왔다.나는 이미 깨어 있었다. 내 배 속 아이는 수면 시간표에 대해 아주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있었고, 새벽 5시부터 그 주관을 강력하게 주장해대고 있었으니까. 오빠가 문을 두드리고 찻잔 두 개를 든 채 들어왔을 때, 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오빠의 얼굴에는 감당하기 힘든 감정을 어디에 쏟아내야 할지 몰라 헤매는 기색이 역력했다."앉아요." 내가 말했다.오빠는 창가 옆 의자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두 손으로 찻잔을 꽉 쥔 채.가만히 찻잔만을 내려다보았다."헨리 오빠." 내가 불렀다."나 괜찮아." 오빠가 말했다."괜찮은 거 알고 있어요." 내가 말했다.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에요."오빠가 고개를 들었다."결혼식 날 아침에 마땅히 지어야 할 표정을 완벽하게 짓고 있다고 말하려 했어요." 내가 미소를 지었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을 막 해내기 직전인 사람의 표정 말이에요."오빠는 잠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렇게 티가 나니?""완전히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거요?" 내가 응수했다. "네. 엄청나게 티 나요."오빠가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든 마인드 컨트롤을 해보려고 애쓰는 중이었는데.""컨트롤하려고 하지 마요." 내가 말했다. "오빠 결혼식이잖아요. 오늘만큼은 마음껏 넋을 놓아도 돼요."오빠는 다시 찻잔으로 시선을 옮겼다."루스는 정말 특별한 여자야." 오빠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저 가슴속에 맴도는 진실을 밖으로 털어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 특유의 읊조림이었다. "요즘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만약 루스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내 삶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 다들 돌보느라 정작 나 자신은…."오빠가 말을 멈추었다. "정작 나 자신은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예전처럼 계속 살아가고 있었겠지."나는 오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하지만 오빠는 루스를 찾았잖아요.""그래.
**리나의 시점**아벨 오빠와 카라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은 3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내가 이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벨 오빠가 1월부터 특유의 집요하고 완벽주의적인 태도로 기념일을 준비해 왔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쏟아붓는 그 열정. 사실 아벨 오빠의 계획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주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티가 났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아벨 오빠에게서는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읽어낼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풍겨 나왔으니까.오빠는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었다.아주 훌륭한 곳이었다. 몇 달 전부터 미리 예약해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 오빠가 그걸 무려 1월에 해냈다는 사실은 지난해 기념일이 채 다 지나가기도 전에 다음 해 기념일을 준비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지독하게 철두철미한 건지, 아니면 지독하게 아벨 오빠다운 건지. 나는 그 둘이 결코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하지만 그 예약은 취소되었다.아벨 오빠가 취소한 게 아니었다.카라가 취소했다.결혼기념일을 고작 사흘 앞둔 수요일, 카라는 예약을 취소하고 아벨 오빠 몰래 다른 일정을 준비했다. 예약이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대체안이 무엇인지 듣기까지, 그 24시간 동안 아벨 오빠가 풍겨낸 에너지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오빠는 지극히 프로페셔널하게 상황을 대했다.물론 그 프로페셔널함이란 막대한 에너지가 요구될 때 아벨 오빠가 보이는 특유의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상황 통제야말로 현재 가장 적절한 대응'이라고 결론 내린 사람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상황을 통제하려 애쓰는 게 겉으로 투명하게 다 보였다는 뜻이다.카라는 오빠가 마음껏 상황을 통제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그리고 목요일 저녁, 자신이 직접 준비한 특별한 대체안을 오빠에게 털어놓았다. 둘만의 아주 특별한 이벤트였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하지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지 불과 3분 만에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