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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Author: Priscilla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5 08:49:43

리나의 시점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얼굴에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이름은 내 것이 맞았다. 늘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성씨인 '모리슨'은 여태껏 한 번도 불려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평생 단 한 번도.

하지만 이미 답을 다 알고 나를 기다려왔다는 듯, 낮고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입에 담던 그의 억조는 내 속을 아지러지게 비틀어놓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시는 거죠?"

이불 밑에서 손이 미친 듯이 떨렸다. 나는 힘주어 손을 숨겼다.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셨으면 좋겠습니다." 따뜻한 인상의 남자가 말했다. 선한 눈매였다. 저도 모르게 신뢰하고 싶어지는 그런 눈빛.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 없었지만. "겁주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걸 확인하러 왔을 뿐이에요."

"마음을 가라앉히라고요?" 세 사람을 둘러보며 되물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세 명이, 병실 침대에 누워 손등에 링거를 꽂고 있는 내 앞에 서 있는데?"

"……그건 그렇군요." 남자가 순순히 인정했다.

나는 머리맡 벽에 몸이 닿을 때까지 바짝 물러섰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오른편 난간에는 간호사 호출 벨이 걸려 있었다.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면 손등의 주삿바늘이 걸림돌이 될 터였다.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탈출로를 계산하고 있었다.

뒤편에 서 있는 조각 같은 인상의 남자는 내가 눈을 뜬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표정은 완벽히 차가웠고, 눈 한 번 제대로 깜빡이지 않았다.

그저 다른 두 사람이 말하는 동안 가만히 서서 나를 관조할 뿐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듯. 내가 패닉을 멈추기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오직 자신만이 알아채는 어떤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가 가장 읽기 힘든 상대였다.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야말로 언제나 가장 위험한 법이다.

"백번을 말씀하셔도," 속마음과 달리 단정한 목소리로 말을이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편안해질 수는 없어요."

"그것 역시 맞는 말씀입니다." 따뜻한 인상의 남자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원하는 게 뭔지 말씀하시고 이만 나가주세요."

그때, 뒤에 있던 남자가 움직였다.

단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앞의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즉시 입을 다물었다. 오직 그들만이 알아채는 신호라도 주고받은 것처럼. 그는 침대 발치로 걸어와 멈춰 섰다. 앉지도, 어디에 기대지도 않았다. 그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낮고 낮게 깔려 있었다. 지극히 무심하고 조용하게.

"내 이름은 데미안 모리슨입니다. 재스퍼 모리슨의 장남이지요."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쪽은 둘째 헨리 모리슨." 따뜻한 인상의 남자를 향해 턱짓했다. "그리고 저쪽은 막내 아벨 모리슨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두 사람은 나와 눈을 맞추었다. 압박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를 똑똑히 보여주려는 듯 곧고 진실한 눈빛이었다.

세 사람의 얼굴을 차례로 담았다.

데미안. 헨리. 아벨.

형제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굵직하고 단단한 턱선은 닮았지만, 풍기는 기운은 전혀 달랐다. 따뜻하고 개방적인 인상의 헨리. 눈가에 다정함과 진솔함이 서려 있는 아벨. 그리고 단 한 번도 웃지 않은, 마치 웃는 법을 잊어버린 듯한 얼굴로 주변의 공기마저 가라앉히는 데미안.

"우리는 몇 년 동안 누군가를 찾아 헤맸습니다."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네 살 때 사라진 아이였죠. 한순간도 찾는 것을 멈춘 적이 없습니다."

나는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아이의 이름은 리나 모리슨입니다."

정적이 흘렀다.

" 그리고 당신이 바로 그 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극적인 억양도, 부드러움도, 어떠한 과장도 섞이지 않은 담담한 어조였다. 그저 사실만을 건네듯. "당신이 우리의 여동생이라고 확신합니다."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입 밖으로 터져 나온 소리는 웃음보다는 훨씬 가시 차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비싼 수트를 차려입은 남자 세 명이 병실로 찾아와서," 내가 말했다. "내가 자기들의 잃어버린 여동생이라고요?" 세 사람을 차갑게 훑었다. "내가 무슨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애로 보이나요?"

"리나……."

"아는 척 부르지 마세요." 생각보다 억센 목소리가 나갔다. " 난 당신들 몰라요. 단 한 명도 모른다고요. 지금 당장 안 나가면 유괴범이라고 소리 질러서 이 층에 있는 간호사들을 전부 부를 테니 그렇게 아세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미동조차 없었다.

그 당당함이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보육원 시절이 떠올랐다. 길고 차가운 복도, 여럿이 쓰던 방, 매일 아침 점호를 부르던 원장 수녀님. 내 기억이 닿는 아주 먼 옛날부터 나는 그곳에서 자랐다. 부모도, 형제도 없이, 내가 어디서 왔는지, 이 국가의 보호 아래 들어오기 전에 누구의 품에 있었는지 아는 이 하나 없이.

어딘가로 납치당했던 기억 따위는 없었다.

가족에 대한 기억도.

그 차가운 벽들 너머의 삶에 대한 기억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난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단호하고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가족 같은 건 없어요.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다고요. 그러니까 당신들이 뭘 찾아냈든, 사람을 잘못 보셨네요."

아벨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움직임은 다른 두 사람과 달랐다. 경계심이 적고, 타인과의 거리감을 위협으로 느끼지 않는 듯 자연스러웠다.

"제발요." 그가 말했다. "지금 당장 우리 말을 믿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가져온 걸 한 번만 봐주세요." 그가 손을 들어 보였다. "보기만이라도요. 부탁입니다."

그의 다른 한 손에 들린 가방으로 시선이 쏠렸다.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저 안에 뭐가 들었을까? 대체 뭘 꺼내려는 걸까? 나는 머리맡 벽으로 몸을 더 밀착시켰다. 가방 잠금장치로 향하는 그의 손을 주시하며 속으로 다짐했다. *필요하면 소리를 질러. 망설이지 마, 먼저 비명을 지르는 거야.*

그가 꺼낸 것은 사진 한 장이었다.

그저 사진 한 장.

그가 사진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내가 선뜻 받지 않자, 그는 침대 끝 내 손이 닿는 곳에 사진을 내려놓고는 뒤로 물러섰다.

그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진을 주워 들었다.

세 명의 사내아이와 한 명의 계집아이.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여아가 두 오빠의 목에 팔을 감은 채 한가운데 서 있었다. 아이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온 얼굴로, 눈을 활짝 접어 올리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자지러지게. 아이들 뒤로는 넓고 잘 가꿔진 저택의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소년들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세 남자의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어린 여자아이는…….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사진으로 시선을 내렸다.

나와 똑같이 생겼다. 어설프게 닮은 수준이 아니었다. 스쳐 지나치며 부정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얼굴형. 눈매. 웃을 때 그려지는 입꼬리의 모양. 평생 거울 속에서 봐온 바로 그 얼굴이었다.

가슴이 턱 막혀왔다.

"이 아이…… 누구예요?" 목소리가 거의 속삭임처럼 흘러나왔다.

"너야, 리나." 헨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니야." 사진을 이불 위에 내려놓았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냥 나랑 닮은 아이일 뿐이에요. 세상엔 닮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너, 흉터 같은 점이 있지." 아벨이 말했다. "등 뒤, 왼쪽 밑에."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방 안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말이 맞았으니까.

내 등 뒤 왼쪽 하단에는 불규칙한 모양의 진한 점이 있었다. 평생 욕실 거울을 볼 때마다 확인하던 점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던, 내 몸의 흔적.

그걸 타인이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나를 만나본 적도, 옷 벗은 모습을 본 적도, 의료 기록을 열람한 적도 없는 타인이 그걸 알 수는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네가 우리 동생이니까."

세 사람이 동시에 입을 모았다.

그 완벽한 조화가 준비되지 않은 내 가슴을 크게 흔들어놓았다. 세 사람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같은 눈빛으로 나를 담고 있었다. 승리감에 도취된 것도, 무언가를 요구하는 눈빛도 아니었다. 그저 확신. 오랫동안 진실을 품어온 이들이 마침내 그것을 내려놓았을 때 풍기는 안도와 확신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우연일 수 있어요."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점 하나쯤은 흔할 수도 있잖아요."

"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헨리가 다정하게 말하며 가방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래서 다 준비해 왔단다."

그가 서류 세 뭉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받아 들었다.

유전자 검사 결과지.

세 건의 서로 다른 검사지. 이름, 일치율 99.9%, 연구소의 직인과 날짜. 첫 번째 서류를 읽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까지.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사진 옆 이불 위에 서류를 내려놓고, 데미안의 머리 위 벽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무너지려는 정신을 겨우 잡아챘다.

보육원에서 자라는 내내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괜찮다고. 세상엔 가족 없이 자라는 사람도 많다고. 부모가 없다고 해서 내 삶이 가치 없는 건 아니라고. 나는 괜찮다고, 늘 담담하다고.

"어머님 아버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널 찾다가 눈을 감으셨어."

데미안의 목소리였다. 낮고 무거웠다. 부드러움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오랫동안 짊어져 온 세월의 무게가 담긴 음성.

"단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으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우리가 반드시 널 찾겠다고 두 분께 맹세했지."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우리 힘으로 세상에 나설 수 있게 된 그날부터, 한시도 멈추지 않고 널 찾아 헤맸어."

그 말이 내 안의 무언가를 완벽히 깨뜨렸다.

사진 때문이 아니었다. 유전자 검사지도, 등 뒤의 점 때문도 아니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두 사람이, 딸을 찾지 못한 채 피눈물을 흘리며 세상을 떠났다는 것. 그리고 오빠들에게 끝까지 찾아달라 유언을 남겼다는 그 서글픈 진실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 순간 아벨이 다가와 나를 품에 안았고, 헨리 역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데미안마저…… 그 차갑던 데미안마저 내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아주 잠시,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손길은 그 어떤 백 마디 말보다 무겁고 따뜻하게 전해졌다.

"……당신들이 정말 내 오빠들이에요?" 엉망으로 뭉개진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 그들이 대답했다.

나는 더욱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안도감, 서러움, 분노,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가슴 깊은 곳에 오랫동안 꽁꽁 닫혀 있던 둑이 터져 나가듯,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울음이 겨우 진정되었을 때, 헨리가 물러서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턱에 굳은 힘이 들어가 있었다. 눈빛은 십 분 전보다 훨씬 더 어둡고 깊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리나?" 그가 물었다. "어쩌다 이런 데서 혼자…… 임신까지 한 채로 쓰러져 있었던 거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불 위를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던 기억이 났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다듬었던 단어들. 하지만 진심으로 내 대답을 기다려주는 이들 앞에서 그 비극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남편이……." 입을 뗐다가 멈추었다. 다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나를 쫓아냈어요. 그 사람과 시어머니, 그리고 그 사람이 만나는 여자가 함께……. 내가 없는 사이에 내 짐을 다 싸서 거실 한가운데 던져놨더라고요. 시어머니는 내 뺨을 쳤고…… 남편은 날 문밖 빗속으로 끌어내 팽개쳤어요."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살죽이는 서늘함이 피부에 와닿았다.

헨리의 턱 근육이 경련하듯 강하게 씹히는 것이 보였다. 아벨은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빛은 이미 이전의 다정한 오빠가 아니었다. 그리고 데미안은…… 데미안은 지독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평온함과는 거리가 먼, 폭풍전야의 고요함. 결단을 내리기 직전의 차가운 정적.

"그놈 이름이 뭐지."

데미안이 물었다. 높낮이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

"에이든……." 나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에이든 노먼이에요."

세 형제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오직 그들만이 공유하는 차가운 눈빛이 교차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이미 완벽히 달라져 있었다.

"가자." 헨리가 말했다. 목소리의 톤이 달라져 있었다. 따스함은 남아 있었지만 그 아래에 단단하고 잔혹한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짐 챙겨라." 그가 말을 멈추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네 짐은 어디 있지?"

나 역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트케이스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당연히 침대 옆에 놓여 있으리라 생각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썰렁한 바닥뿐이었다.

"도둑맞았나 봐요." 내가 말했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동안에……."

헨리의 표정이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벨은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상관없다." 데미안이 말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확고했다. "필요한 건 전부 새로 구해주마." 그가 잠시 숨을 골랐다. "넌 모리슨가의 사람이니까."

마치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정리하는 선언과도 같은 말이었다.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반격이 시작됨을 알리는 선언.

불과 24시간 전만 해도 존재조차 몰랐던 세 오빠에게 둘러싸여, 손에 쥔 임신 진단서와 입고 있는 옷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병실 침대 위에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어쩌면 생애 처음으로, 진짜 내 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리나?" 아벨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를 바라보았다.

"에이든 노먼." 다시 한번 똑똑히 답했다.

아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헨리 사이에 오간 눈빛, 그리고 헨리가 데미안에게 보낸 차가운 시선은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에이든 노먼은 자신에게 어떤 지옥이 몰아칠지, 꿈에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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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나의 시점제이드는 여전히 지시를 기다리며 내 곁에 서 있었다.주변 로비는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행사를 정리하는 직원들, 카메라 장비를 챙기는 취재진, 특유의 따뜻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언론 홍보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헨리 오빠, 그리고 어떤 공간에 있든 특유의 정교하고 완벽한 일 처리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클레어까지. 그 모든 풍경은 불과 30초 전과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 모든 장면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그 사람, 어디 있지?" 내가 물었다."메인 로비 입구입니다." 제이드가 답했다. "보안팀이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아주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단어를 신중하게 고를 때 나오는 그 특유의 침묵. 제이드가 이처럼 말을 아낀다는 건 다음에 이어질 내용에 상당한 주의가 필요함을 의미했다. "목소리가 아주 큽니다.""얼마나?""상당히요." 그녀가 말했다. "자신의 계약을 파기한 책임자를 만나겠다고 요구하는 중입니다. 대략 20분 전부터 같은 말을 반복하며 갈수록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보안팀이 입구에서 막아서고는 있지만, 제 발로 돌아갈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혼자 왔어?""네, 대표님. 변호사나 동행인은 없습니다.""위협적인 언행도 있었나?""직접적인 위협은 없었습니다." 제이드가 말했다. "분통을 터뜨리며 항의하는 수준입니다. 아직 법적으로 문제 삼을 만한 선을 넘지는 않았습니다." 그녀가 다시 말을 멈추었다. "대표님이 여기 계시다는 건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담당자를 나오라고 소리치고 있을 뿐, 그 책임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그 사실을 가만히 반추해 보았다.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계약서 맨 위에 내 가문의 이름이 박힌 모리슨 코퍼레이션 본사 로비에 서서, 이 일을 저지른 책임자를 당장 내놓으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으면서도, 그 책임자가 자신이 임신한 채 빗속으로 쫓아냈던 바로 그 여자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로비 건너편에 서 있는 데미안 오빠를 바라보

  • 모리슨 가문의 잃어버린 상속녀   제10장

    리나의 시점그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정확히 3분 동안 시체처럼 가만히 누워 있었다.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걸어가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보며 크게 읊조렸다. "절대 안 돼."오늘 하루 전체를 두고 한 말이었다.기자회견. 사방에서 터져 나올 카메라 플래시. 쏟아질 질문 세례.불과 6주 전만 해도 버스 정류장 벤치에서 잠을 청하던 내가,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거대 기업의 대표이사(CEO)로서 수많은 기자들 앞에 서서 취임 선언을 한다니.절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그럼에도 양치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벨은 이미 식탁에 앉아 프린트된 목록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앉아." 그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해 주면 어디가 부러지나 보네.""앉기나 해. 소피아가 오기 전까지 40분 남았어. 머리를 만지기 전에 이 답변들부터 달달 외워둬야 할 테니까."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가 식탁 너머로 목록을 스르륵 밀어주었다. 종이를 내려다보았다.열두 개의 질문. 기자들이 물어볼 확률이 가장 높은 문항들이었다. 각 질문 옆에는 아벨의 글씨체로 답변의 가이드라인이 딱 한 줄씩 적혀 있었다. 대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방향성이었다. *비전 강조할 것. 회사 이야기로 돌릴 것.**에이든에 대해 언급하지 말 것.*마지막 문장에는 밑줄이 두 줄이나 그어져 있었다."에이든에 대해 언급하지 말 것." 소리 내어 읽었다."어떤 상황에서든 절대로.""만약 그쪽에서 직설적으로 물어보면?""직설적으로 물어볼 거다." 아벨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넌 미소를 지으며 사생활은 말 그대로 개인적인 일일 뿐이며,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모리슨 코퍼레이션의 미래를 논하기 위함이라고 답하면 돼." 그가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할 수 있겠어?"솔직하게 스스로에게 물었다."응." 내가 답했다."좋아."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못 하겠다면 지금 당장 말해야 다른 답변을 준비할 테니까.""할 수 있다고

  • 모리슨 가문의 잃어버린 상속녀   제9장

    리나의 시점금요일 아침, 아벨이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내 교육 장소로 들어섰다. 자신이 무언가를 단단히 즐기기 직전에나 지어 보이던 바로 그 특유의 표정을 띤 채였다.그가 내 앞 테이블 위로 서류 봉투를 던지듯 내려놓았다."에이든 노먼." 그가 말했다. "현재 상황이다."서류 봉투를 한번, 그리고 그를 한번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군요.""전문가적 관점에서만 말이지." 그가 의자에 앉으며 팔짱을 꼈다. "열어봐."사진 속에 담긴 모습은 차마 눈 두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첫째 주에만 계약 다섯 건이 날아갔다. 그다음 며칠 동안은 세 건이 추가로 재계약 불가를 통보받았다. 기존 계약을 파기당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재계약이 불발된 것이었는데, 그게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잔혹했다. 에이든이 반발하거나 손쓸 명분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더 이상 열리지 않는 문을 향해 주먹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가 하틀리 그룹에 걸어댄 전화는 9일째 먹통이었다. 중개인을 거쳐 어떻게든 연결을 시도해 보았으나, 중개인 중 두 명은 에이든과의 접촉 사실을 곧바로 모리슨 코퍼레이션 측에 직접 밀고해 왔다. 그 업계의 충성심이 현재 누구를 향해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그는 미친 듯이 뒤를 파헤치는 중이었다. 아벨의 정보통에 따르면,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이 무너져 내리는 그 경계마다 왜 자꾸 '모리슨'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는지 조사할 흥신소를 고용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비즈니스상의 라이벌이나 수작을 부리는 경쟁업체의 소행쯤으로 여길 뿐이었다. 그 일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비 오는 날 거리로 쫓아낸 여자가, 자신의 전화기를 먹통으로 만든 원인이라는 사실을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서류 한 장을 넘겼다."몇 년 동안 연락도 끊고 살던 사람들한테까지 전화를 돌리고 있더군." 아벨이 말했다. "옛 인맥들, 전 직장 동료들, 상황을 파악해 줄 만한 선이 닿는 자라면 누구에게든 붙잡고 늘어지는 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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