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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Author: Priscilla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8-05 08:47:34

리나의 시점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길거리에 서 있었다.

도시는 서서히 잠들어가고 있었다. 엔진 소리가 멀어지고, 상점들의 불빛이 하나둘 꺼져갔다. 옷깃을 세우고 고개를 숙인 채 바삐 걸음을 옮기는 마지막 행인들 중, 그 누구도 서로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빗물에 젖은 보도블록을 긁는 가방 소리, 빗소리, 그리고 풀벌레 울음소리. 그 적막함 속에 나 혼자 남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모든 재산을 끌고 어두운 밤거리를 홀로 헤매고 있으면서도, 앞으로 내게 일어날 그 어떤 일도 두렵지 않다는 게 참 이상한 일이었다.

차라리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길 바랐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와 이 삶을 끝내주기를. 살아서 이 모든 감정을 감내해야 하는 고통보다는, 죽음이 차라리 더 나아 보였으니까.

그때, 무언가가 내 의식을 날카롭게 깨웠다.

아기였다.

가슴을 턱 짓누르는 듯한 강렬하고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에 눈이 번쩍 뜨였다. 걸음을 멈춰 섰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를 위해서라도 살아야 해."

쉬어터지고 갈라진 목소리로 어둠 속을 향해 중얼거렸다. 손바닥을 배 위에 살포시 얹었다.

빗속에 가만히 서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몇 시간을 내리 걸었다.

정확히 얼마나 걸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발이 아려오고, 짐을 끌느라 팔이 끊어질 듯 경련이 일어나고, 찬 기운이 뼈마디까지 스며들기 시작한 두 번째 시간 즈음부터 시간 감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몸은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피곤이 밀려왔고, 속이 비어 헛구역질이 나올 만큼 날카로운 허기가 배 속을 쥐어짜였다. 젖은 머리타래가 얼굴에 볼품없이 들러붙었다. 신발 속은 물에 완전히 잠겨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가락 사이로 물이 찌럭거렸다.

그럼에도 계속 걸었다.

멈춰 선다는 건 어디든 앉아서 생각을 하게 된다는 뜻이었고, 지금의 나는 생각을 할 여유 따위는 없었으니까. 아직은 안 됐다.

나를 향해 나가라던 그의 차가운 눈빛도, 물건을 품평하듯 내 턱을 잡던 바네사의 손길도, 빗속까지 따라와 귓가에 환청처럼 맴도는 그 집의 비웃음 소리도…… 그 무엇도 떠올려선 안 됐다.

고개를 숙인 채 오직 앞만 보고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

버스 정류장 셸터. 지붕이 있고 삼면이 막혀 있으며 플라스틱 의자가 놓인 작은 구조물.

비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눈물이 터져 나올 뻔했다.

"오늘 밤만……."

얇게 떨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 밤만 여기서 버티자."

안으로 들어가 짐가방을 지붕 밑으로 밀어 넣고 벤치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앉는 순간 다리의 긴장이 풀리며 안도감이 밀려왔다. 무릎 위에 팔꿈치를 괴고 몸을 웅크린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지붕 위로 빗방울이 거세게 쏟아져 내렸다. 개방된 쪽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젖은 옷 위로 스며들었다. 찬 공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집 문을 열고 들어서서 바닥에 나뒹굴던 짐가방을 본 순간부터 차오르던 모든 감정이 폭발하며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그 잔인한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었다.

나를 바라보던 에이든의 무심한 눈빛. 서늘하고, 확신에 차 있으며, 이미 끝났다는 표정.

내 뺨을 후려치던 시어머니의 손바닥.

내 앞에 쪼그려 앉아 턱을 잡던 바네사의 오만한 푸른 눈동자. *이 집은 이제 내 집이야.*

쓰레기처럼 내던져진 내 삶의 흔적들.

주먹을 꽉 쥐었다.

턱이 아플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내가 너무 싫어!"

울부짖음이 셸터 벽을 울리며 날것 그대로 터져 나왔다. 손바닥으로 의자를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아악! 남자는 다 짐승이야! 세상 전부 다 싫어!"

목소리가 갈라지고 깨졌지만 상관없었다.

벤치 위에 누워 꺼꺼 울음을 터뜨렸다. 조용히 울 수도, 감정을 추스를 수도 없었다. 가슴이 턱턱 막히고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한, 내 목소리 같지도 않은 기괴한 비명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가슴속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눈물이 말라, 마지막에는 작고 피곤한 신음만 남을 때까지.

그리고 잠에 빠져들었다.

무언가가 나를 깨웠다.

웅성거리는 목소리. 사람들의 움직임. 아스팔트를 구르는 바퀴 소리.

천천히 눈을 떴다.

눈부신 아침이었다.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목과 허리, 골반까지 단단한 벤치 위에서 젖은 옷을 입고 밤을 지샌 대가가 온몸의 통증으로 밀려왔다. 기지개를 켜며 신음을 뱉고,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찰나의 순간, 아주 짧은 찰나 동안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기억이 돌아왔다.

그 모든 비극이.

손을 내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류장은 더 이상 비어 있지 않았다. 수트를 입은 남성들, 가방을 든 여성들, 웃고 장난치며 지나는 교복 차림의 아이들까지, 사람들이 사방으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모퉁이에는 노점이 문을 열었고, 근처에서는 누군가 큰 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엔진 소리와 빵빵거리는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버스들. 이미 활기차게 돌아가는 도시의 소음이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정류장을 지나치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쏠려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커다란 수트케이스 두 개를 옆에 두고, 어제 입은 옷 그대로, 퉁퉁 부어오른 눈에, 밤새 사방으로 뻗친 머리를 한 채 공공 벤치에 앉아 있으니. 누가 봐도 갈 곳 없는 처량한 신세였다.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짐을 챙겨 들고 고개를 숙인 채, 누구와도 눈을 맞추지 않고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정류장이 저 멀리 뒤로 물러나고 반 블록쯤 더 걸어가서야 걸음을 낮췄다.

속도를 줄였다.

내 몰골을 내려다보았다.

씻어야 했다. 밥도 먹어야 했고, 일자리도 찾아야 했다.

돈도, 인맥도 없이, 삐걱거리는 수트케이스 두 개에 든 짐이 전부인 상태로 그 모든 것을 해내야 했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몇 분 후, 건물 외벽에 붙은 공중화장실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 악취에 숨을 참으며 서둘러 몸을 단장하기 시작했다.

찬물. 종이 타월. 가방 깊숙이서 찾아낸 작은 바디워시. 가능한 한 빨리 씻어내고 뻣뻣한 종이 타월로 물기를 닦아낸 뒤, 그나마 가장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어내리고 뺨을 문질러 혈색을 돌게 했다.

보잘것없는 단장이었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나았다.

다 치우기도 전에 문에서 톡톡 소리가 났다.

"잠시만요!" 소리쳐 알려주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세면대 위 금 간 거울로 자신을 확인했다. 그나마 사람 꼴은 갖춘 모습이었다. 화장실을 나오자 밖에 서 있던 남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보도 위에 서서 길거리를 둘러보았다.

반 블록 앞에 작은 식당이 보였다. 창문에 손으로 쓴 메뉴판이 붙어 있고 glass 너머로 플라스틱 테이블 몇 개가 보이는 소박한 곳이었다. 계란과 커피 냄새가 길거리까지 은은하게 풍겨 나왔다.

수트케이스를 끌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문이 열리며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손님은 다섯 명, 혹은 여섯 명 정도. 나지막한 대화 소리, 접시 달그락거리는 소리, 라디오에서 흐르는 낯선 음악 소리. 카운터 뒤에서는 머리를 묶은 여성이 숙련된 손길로 쟁반을 닦고 있었다. 수년 동안 이 일을 해온 사람 특유의 노련함이 느껴졌다.

구두 소리를 들었는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곧장 그녀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가다듬었다. "일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서빙이든, 청소든, 주방 일이든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내 수트케이스를.

그리고 찬물을 아무리 끼얹어도 어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내 얼굴을.

"사람 안 구해요."

그녀는 내 말을 더 듣지도 않고 뒤돌아 걸어가 버렸다.

잠시 카운터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식당 바로 앞 낮은 담장에 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연락처를 하나하나 훑어내려 갔다. 에이든을 만나기 전 알던 사람들. 옛 친구들, 지인들, 수년 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척까지.

모두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 사정을 설명하자 말없이 침묵하는 사람도 있었다.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 주면서도 끝내 도움은 줄 수 없다고 거절하는 이도 있었다. 다시 연락주겠다던 한 사람은 끝내 전화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해가 완전히 떠올라 벌써부터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사람들은 멈춰 서지 않고 지나쳤다.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학생 무리 중 그 누구도 길가에 앉아 있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노력했다.

몸을 씻고, 식당에 들어가 고개를 숙이고, 아는 모든 이들에게 전화까지 걸었지만 내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자리도, 돈도, 오늘 밤 누울 방 한 칸도. 그리고 갈비뼈 뒤편에서는 단순한 거북함을 넘어 어지럽고 날카로운 허기가 비틀대고 있었다.

다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참으려 애쓰지도 않았다. 그냥 담장 위에 앉아 손을 무릎에 얹은 채 눈물을 흘려보냈다. 어차피 바라보는 이도, 신경 써 줄 이도 없었으니까.

한참이 지난 후 얼굴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가방을 들었다.

다시 걸었다.

얼마나 더 걸었는지 모르겠다. 햇살은 지독하게 찌들었고 시야 가장자리가 자꾸 흐려졌다.

걸음걸이는 불규칙해지고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 심장 소리가 귀전에서 쿵쿵 울렸다.

시야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무언가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를 깨웠다.

삐- 삐- 거리는 기계음. 낮게 겹쳐 들리는 목소리들.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움직임.

천천히 눈을 떴다.

하얀 천장. 커튼. 손등에 꽂힌 링거 줄과 침대 옆에서 맥박을 측정하는 모니터.

병원이었다.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손길이 내 팔을 즉시 잡았다.

누군가 옆에 있는 줄도 몰랐다.

놀란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 침대 반대편 난간에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세 남자가 내 옆에 서 있었다.

큰 키. 넓은 어깨. 맞춤 옷임이 한눈에 느껴지는 기품 있는 수트.

빛을 받는 고급 시계. 방 안에 들어서는 순간 굳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분위기를 압도하는 그런 부류의 남자들이었다.

그들이 들어오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누구세요?"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왜 여기 있죠? 어떻게 온 거예요?"

"쉬, 괜찮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던 남자가 양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목소리는 따뜻하고 여유가 넘쳤다. "해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당신을 데려왔어요. 길거리에서 쓰러지셨거든요."

"적이 오지 마세요!" 난간 쪽으로 몸을 더 바짝 밀어붙였다. "모르는 사람들이잖아요. 당신들 전부 다 처음 본다고요!"

내 목소리에 끌린 간호사가 문가에 나타났다. 그녀는 서둘러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요, 환자분." 간호사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이분들이 모셔온 거예요. 오신 순간부터 계속 곁을 지키셨고요." 그녀가 내 어깨를 토닥였다. "안심하세요."

간호사의 너머로 세 남자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나를 알아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뒤에 서 있던 세 번째 남자는, 조각 같은 얼굴에 눈을 뜬 순간부터 단 한 번도 표정이나 자세를 바꾸지 않고 있었다.

그 남자가 다른 두 사람보다 훨씬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대화 나누시게 자리를 비켜드릴게요." 간호사가 말했다.

"잠시만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제 아이는요? 우리 아기는 괜찮나요?"

간호사가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기는 아주 건강하고 잘 있습니다, 환자분."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틔어 나왔다. 베개 위로 다시 몸을 누이며 배 위에 손을 가만히 얹었다.

간호사가 나갔다.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침대 반대편에 서 있는 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들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오랫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사람 특유의 담담함과 인내심이 담겨 있어, 솜털이 바짝 서는 듯한 소름이 돋았다.

나를 일으켜 주려 했던 남자가 침대가로 다가왔다. 그는 정중한 거리를 유지하며 조심스럽게 앉더니, 어떤 감정인지 읽어낼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리나 모리슨 씨인가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건 내 결혼 성이 아니었다.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름의 앞부분은 분명 내 것이었고, 성씨인 '모리슨'이라는 단어는 결코 맞아떨어질 리 없는 열쇠가 자물쇠에 딱 들어맞듯 내 가슴 깊은 곳에 울려 퍼졌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걸…… 왜 물어보시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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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나의 시점제이드는 여전히 지시를 기다리며 내 곁에 서 있었다.주변 로비는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행사를 정리하는 직원들, 카메라 장비를 챙기는 취재진, 특유의 따뜻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언론 홍보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헨리 오빠, 그리고 어떤 공간에 있든 특유의 정교하고 완벽한 일 처리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클레어까지. 그 모든 풍경은 불과 30초 전과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 모든 장면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그 사람, 어디 있지?" 내가 물었다."메인 로비 입구입니다." 제이드가 답했다. "보안팀이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아주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단어를 신중하게 고를 때 나오는 그 특유의 침묵. 제이드가 이처럼 말을 아낀다는 건 다음에 이어질 내용에 상당한 주의가 필요함을 의미했다. "목소리가 아주 큽니다.""얼마나?""상당히요." 그녀가 말했다. "자신의 계약을 파기한 책임자를 만나겠다고 요구하는 중입니다. 대략 20분 전부터 같은 말을 반복하며 갈수록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보안팀이 입구에서 막아서고는 있지만, 제 발로 돌아갈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혼자 왔어?""네, 대표님. 변호사나 동행인은 없습니다.""위협적인 언행도 있었나?""직접적인 위협은 없었습니다." 제이드가 말했다. "분통을 터뜨리며 항의하는 수준입니다. 아직 법적으로 문제 삼을 만한 선을 넘지는 않았습니다." 그녀가 다시 말을 멈추었다. "대표님이 여기 계시다는 건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담당자를 나오라고 소리치고 있을 뿐, 그 책임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그 사실을 가만히 반추해 보았다.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계약서 맨 위에 내 가문의 이름이 박힌 모리슨 코퍼레이션 본사 로비에 서서, 이 일을 저지른 책임자를 당장 내놓으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으면서도, 그 책임자가 자신이 임신한 채 빗속으로 쫓아냈던 바로 그 여자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로비 건너편에 서 있는 데미안 오빠를 바라보

  • 모리슨 가문의 잃어버린 상속녀   제10장

    리나의 시점그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정확히 3분 동안 시체처럼 가만히 누워 있었다.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걸어가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보며 크게 읊조렸다. "절대 안 돼."오늘 하루 전체를 두고 한 말이었다.기자회견. 사방에서 터져 나올 카메라 플래시. 쏟아질 질문 세례.불과 6주 전만 해도 버스 정류장 벤치에서 잠을 청하던 내가,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거대 기업의 대표이사(CEO)로서 수많은 기자들 앞에 서서 취임 선언을 한다니.절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그럼에도 양치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벨은 이미 식탁에 앉아 프린트된 목록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앉아." 그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해 주면 어디가 부러지나 보네.""앉기나 해. 소피아가 오기 전까지 40분 남았어. 머리를 만지기 전에 이 답변들부터 달달 외워둬야 할 테니까."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가 식탁 너머로 목록을 스르륵 밀어주었다. 종이를 내려다보았다.열두 개의 질문. 기자들이 물어볼 확률이 가장 높은 문항들이었다. 각 질문 옆에는 아벨의 글씨체로 답변의 가이드라인이 딱 한 줄씩 적혀 있었다. 대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방향성이었다. *비전 강조할 것. 회사 이야기로 돌릴 것.**에이든에 대해 언급하지 말 것.*마지막 문장에는 밑줄이 두 줄이나 그어져 있었다."에이든에 대해 언급하지 말 것." 소리 내어 읽었다."어떤 상황에서든 절대로.""만약 그쪽에서 직설적으로 물어보면?""직설적으로 물어볼 거다." 아벨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넌 미소를 지으며 사생활은 말 그대로 개인적인 일일 뿐이며,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모리슨 코퍼레이션의 미래를 논하기 위함이라고 답하면 돼." 그가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할 수 있겠어?"솔직하게 스스로에게 물었다."응." 내가 답했다."좋아."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못 하겠다면 지금 당장 말해야 다른 답변을 준비할 테니까.""할 수 있다고

  • 모리슨 가문의 잃어버린 상속녀   제9장

    리나의 시점금요일 아침, 아벨이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내 교육 장소로 들어섰다. 자신이 무언가를 단단히 즐기기 직전에나 지어 보이던 바로 그 특유의 표정을 띤 채였다.그가 내 앞 테이블 위로 서류 봉투를 던지듯 내려놓았다."에이든 노먼." 그가 말했다. "현재 상황이다."서류 봉투를 한번, 그리고 그를 한번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군요.""전문가적 관점에서만 말이지." 그가 의자에 앉으며 팔짱을 꼈다. "열어봐."사진 속에 담긴 모습은 차마 눈 두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첫째 주에만 계약 다섯 건이 날아갔다. 그다음 며칠 동안은 세 건이 추가로 재계약 불가를 통보받았다. 기존 계약을 파기당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재계약이 불발된 것이었는데, 그게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잔혹했다. 에이든이 반발하거나 손쓸 명분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더 이상 열리지 않는 문을 향해 주먹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가 하틀리 그룹에 걸어댄 전화는 9일째 먹통이었다. 중개인을 거쳐 어떻게든 연결을 시도해 보았으나, 중개인 중 두 명은 에이든과의 접촉 사실을 곧바로 모리슨 코퍼레이션 측에 직접 밀고해 왔다. 그 업계의 충성심이 현재 누구를 향해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그는 미친 듯이 뒤를 파헤치는 중이었다. 아벨의 정보통에 따르면,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이 무너져 내리는 그 경계마다 왜 자꾸 '모리슨'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는지 조사할 흥신소를 고용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비즈니스상의 라이벌이나 수작을 부리는 경쟁업체의 소행쯤으로 여길 뿐이었다. 그 일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비 오는 날 거리로 쫓아낸 여자가, 자신의 전화기를 먹통으로 만든 원인이라는 사실을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서류 한 장을 넘겼다."몇 년 동안 연락도 끊고 살던 사람들한테까지 전화를 돌리고 있더군." 아벨이 말했다. "옛 인맥들, 전 직장 동료들, 상황을 파악해 줄 만한 선이 닿는 자라면 누구에게든 붙잡고 늘어지는 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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