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침실은 에어컨 때문에 서늘했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자 태윤이 내 앞에 멈춰 섰다. 나는 얇은 슬립 드레스의 어깨끈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출산 전과 몸이 달라진 뒤로, 그에게 보여 주는 게 예전보다 조금 더 어색했다.“왜.” 태윤이 바로 알아챘다.“그냥.”“싫으면 오늘 안 해도 돼.”“그건 아니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몸이 많이 바뀌었잖아.” 배에는 옅은 흔적이 남아 있었고, 예전과 같은 선은 아니었다. 태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내 앞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만져도 돼?”“응.” 손바닥이 배 위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익숙한 지도를해준이 잠든 뒤 거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나는 소파에 기대 다리를 뻗었다.“……오늘 좀 많이 부었네.” 태윤이 내 발목을 보고 말했다.“저녁만 되면 그래.”“아파?”“허리도 좀 무겁고.” 그는 곧바로 내 발치에 앉았다.“다리 올려.” 내가 눈썹을 들자 태윤이 바로 고쳤다.“다리…… 줘.”“발전했네.”“빨리.” 나는 웃으며 양발을 그의 허벅지 위에 올렸다. 큰 손이 종아리를 감싸 조심스럽게 눌렀다.“거기 조금 아파.”“여기?”“조금 아래.” 태윤은 말한 대로 손의 위치를 바꿨다.“세.” 힘이 바로 약해졌다. 한참 뒤 다리가 조금 가벼워졌다.“고마워.” 태윤은 내 발을 소파 위에 내려놓고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손이 배 가까이 왔다가 멈췄다. 나는 그 손을 잡아 배 위에 올려놓았다. 손을 올려놓자마자 배 속에서 아기가 움직였다. 태윤의 눈이 커졌다.“……지금.”“찼어.” 손바닥 아래에서 한 번 더 움직였다. 태윤은 처음 경험하는 사람처럼 말없이 배만 바라봤다.“매번 처음 보는 얼굴 한다.”“매번 다른데.”“뭐가?”“모르
몇 년 후. 늦은 오후의 햇빛이 거실 바닥을 길게 비추고 있었다. 창문을 조금 열어 둔 틈으로 봄 끝자락의 바람과 장미 향이 들어왔다. 나는 소파 깊숙이 기대 앉아 크게 불러온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배 속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또 움직였네.” 혼잣말을 하자 러그 위에서 블록을 쌓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세 살이 된 강해준이었다.“엄마, 아기?”“응. 동생이 해준이한테 인사하나 봐.” 해준의 얼굴이 밝아졌다. 블록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 배 위에 두 손을 얹었다. 작고 뜨거운 손바닥이 닿자 기다렸다는 듯 배 속에서 다시 움직임이 왔다.“엄마! 찼어!”“그러네.”“동생이 나 좋아하나 봐.”“아마 많이 좋아할 거야.”“나도 좋아할 거야.” 해준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동생이 싫다고 하면 안 할 거고, 울면 엄마 불러 줄 거야.” 나는 순간 웃음이 났다.“누가 그렇게 가르쳐 줬어?”“아빠.”“아빠가?”“응. 다른 사람이 싫다고 하면 멈춰야 한대. 가족도 똑같대.” 가슴이 묘하게 뜨거워졌다. 태윤이 아들에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몇 년 전의 그라면 가능했을까. 굳이 답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해준이 배에 귀를 대었다.“동생아. 나 형아야.”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평범한 오
침실은 에어컨 때문에 서늘했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자 태윤이 내 앞에 멈춰 섰다. 나는 얇은 슬립 드레스의 어깨끈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출산 전과 몸이 달라진 뒤로, 그에게 보여 주는 게 예전보다 조금 더 어색했다.“왜.” 태윤이 바로 알아챘다.“그냥.”“싫으면 오늘 안 해도 돼.”“그건 아니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몸이 많이 바뀌었잖아.” 배에는 옅은 흔적이 남아 있었고, 예전과 같은 선은 아니었다. 태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내 앞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만져도 돼?”“응.” 손바닥이 배 위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익숙한 지도를 다시 읽듯 조심스럽게 움직였다.“나는 이게 싫지 않아.”“위로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지?”“내가 그런 말 잘하는 사람으로 보여?”“아니.”“그럼 믿어.” 태윤의 엄지손가락이 옅은 선 가까이에서 멈췄다.“해준이 여기 있었잖아.” 그 말에 목이 잠겼다.“그리고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알아.” 그는 흔적을 지우려 하지 않았다. 예쁘다고 과장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의 내 몸을 그대로 바라봤다. 나는 그의 손등 위에 내 손을 올렸다.“나도 네 체온이 그리웠어.” 태윤이 나를 올려다봤다.“진짜?”“응.&rdqu
결혼식이 끝난 뒤 몇 달. 회사 일과 육아가 조금씩 자리를 잡자 태윤은 정말로 휴가를 만들어 냈다. 그가 고른 곳은 몰디브의 작은 리조트였다. 바다 위 빌라의 테라스에서는 검은 수면 위로 달빛이 길게 흔들렸다. 따뜻하고 습한 바람에 꽃향기와 바다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나는 난간에 기대 한동안 파도만 바라봤다. 낮에는 해준을 안고 셋이 산책했고, 얕은 물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밤만큼은 아이가 옆방에 없었다. 리조트에서 검증된 베이비시팅 서비스를 예약했고, 연결된 객실에서 돌봐 주고 있었다. 필요하면 바로 연락이 오도록 베이비 모니터도 켜 둔 상태였다. 그걸 다 알면서도 마음이 자꾸 옆방으로 갔다.“잘 자고 있으려나.” 혼잣말이 나오자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태윤이 얇은 리넨 셔츠 차림으로 다가왔다.“아까 확인했잖아.”“한 시간 전이잖아.”“방금 메시지도 왔어. 잘 자고 있대.” 그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나는 화면을 확인하고서야 어깨의 힘을 조금 뺐다.“처음 떨어져 자는 거니까 이상해.”“나도 이상해.”“먼저 맡기자고 한 건 너잖아.” 태윤은 잠깐 바다를 보다가 나를 향해 웃었다.“가끔은 우리 둘만 있는 시간도 필요할 것 같아서.”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부모가 된 뒤 우리의 대화 대부분은 수유 시간, 예방접종, 수면, 회사 일정에 관한 것이었다. 그게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오늘 밤의 파도 소리를 들으니, 그 이전의 우리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윤이 내 옆에 서서
피로연장은 밝고 따뜻했다. 화려한 꽃과 케이크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메인 테이블 가까이에 마련된 한 테이블이었다.“신부님, 오늘 정말 멋지네요!” 최만호가 잔을 들고 웃었다. 그 옆에는 정미숙 씨와 우리를 끝까지 지지해 준 협력사 대표들이 앉아 있었다. 베르트랑 이사도 서툰 한국어로 축하를 건넸다. 태윤은 내 손을 잡은 채 그들 앞에 섰다.“다들…… 감사합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예전 같으면 절대 쉽게 하지 못했을 인사였다.“우리가 버틴 건 우리 둘만 잘해서가 아닙니다. 잊지 않겠습니다.”“그럼 앞으로 납기나 좀 넉넉하게 주세요.” 누군가 농담하자 테이블에서 웃음이 터졌다. 태윤도 피식 웃었다. 나도 따라 웃으며 잔을 들었다.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은 우리가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남아 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더 소중했다. 피로연이 중반을 넘기자 태윤이 자꾸 시계를 보는 게 눈에 들어왔다.“대표님, 일정 있으세요?” 내가 일부러 회사 말투로 묻자 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놀리지 마.”“아까부터 시계만 보잖아.” 태윤이 내 귀 가까이 얼굴을 숙였다.“너무 오래 걸려.”“뭐가?”“사람들이 너 보는 거.” 목소리가 낮아졌다.“나도 알아. 유치한 거.”“알면 참아.”“참고 있잖아.” 그 말이 너무 억울하게 들려 웃음이 났다. 나는 테이블
웨딩홀 문이 열렸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밝은 조명이 길게 이어진 버진로드를 비췄다. 원래라면 아버지의 팔을 잡고 걸었을 길이었다. 잠깐 가슴이 저렸다.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그 자리를 대신 맡기지 않았다. 혼자 걷기로 했다. 첫발을 내디뎠다. 양쪽 좌석에는 우리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현강홀딩스 직원들, 협력사 대표들, 정미숙 씨와 최만호 소장, 프랑스에서 온 베르트랑 이사까지. 그리고 길 끝에는 태윤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도, 카메라도 보지 않았다. 오직 나만 보고 있었다.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이상하게 긴장이 풀렸다. 내가 그의 앞에 도착하자 태윤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스스로 그 손을 잡았다. 손바닥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태윤도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자 오히려 숨이 편해졌다. 하객들의 얼굴과 카메라 셔터 소리가 한 발 뒤로 물러난 것 같았다. 태윤의 엄지손가락이 내 손등을 한 번 쓸었다가 멈췄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정도면 됐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고 주례자를 바라봤다.“왔네.”“응.”“진짜 왔네.”“그러니까 울지 마.”“안 울어.” 눈가가 이미 붉었다. 식을 진행하는 주례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어려움이 와도 혼자 결론을 내리지 않으며, 함께 살아가겠다는 약속을 다시 확인했다.“약속합니다.” 태윤의 대답은 짧았다. 나도 똑같이 말했다.“약속합니다.” 교환할 결혼반지가 손가락에 닿았다. 사파이어 반지 옆으로 단순한 플래티넘 링이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