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웨딩홀 문이 열렸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밝은 조명이 길게 이어진 버진로드를 비췄다. 원래라면 아버지의 팔을 잡고 걸었을 길이었다. 잠깐 가슴이 저렸다.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그 자리를 대신 맡기지 않았다. 혼자 걷기로 했다. 첫발을 내디뎠다. 양쪽 좌석에는 우리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현강홀딩스 직원들, 협력사 대표들, 정미숙 씨와 최만호 소장, 프랑스에서 온 베르트랑 이사까지. 그리고 길 끝에는 태윤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도, 카메라도 보지 않았다. 오직 나만 보고 있었다.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이상하게 긴장이 풀렸다. 내가 그의 앞에 도착하자 태윤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스스로 그 손을 잡았다. 손바닥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태윤도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자 오히려 숨이 편해졌다. 하객들입학식 전날, 다림질하는 내 곁에서 해준이가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내일 입을 옷은 아직 옷걸이에 있는데 양말만 미리 신었다. 이음이도 양쪽에 다른 양말을 신고 따라다녔다. 나는 이름표와 손수건을 확인했다. 이음이가 자기 옷에도 이름표를 달아 달라고 조르자 태윤이 딸을 안아 올렸다.“이음이는 내일 응원 담당이야.”“응원?”“오빠가 긴장하면 멋있다고 말해 줘.” 이음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윤은 딸의 귀에 “내일 오빠가 떨면 멋있다고 말해 줘” 하고 속삭였다. 해준이는 필통을 세 번째 열었다.“내일은 행사만 하는 날이라 연필이 이렇게 많이 필요하진 않아.”“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누구를 닮았는지 태윤과 눈이 마주쳤다. 그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저녁에는 해준이가 좋아하는 햄버그스테이크를 만들었다. 태윤은 아들 접시에 감자샐러드를 평소보다 조금 더 담았다.“나 내일 울면 어떡해?”“울어도 돼.” 태윤은 자신은 울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나와 해준이가 말없이 보자 이음이가 갑자기 “아빠 멋있어!”라고 외쳤다. 오빠에게 해 줄 말을 아빠에게 먼저 써 버린 것이다. 해준이는 동생에게 책가방을 메어 줬다. 너무 커서 이음이가 바닥에 주저앉았다.“나도 학교 갈래.”“넌 아직 학교 갈 나이가 아니야. 조금 더 크면 갈 수 있어.” 태윤의 설명을 다 이해하지 못한 딸은 오빠가 내일 집에 없다는 말에 울상이 됐다.“다시 올 거야.
식탁 위에 필통, 실내화, 체육복이 하나씩 늘었다. 해준이가 자기 이름을 쓰는 동안 이음이는 옆에서 크레용으로 선을 그었다. 태윤은 통학로 지도를 펼쳤다.“여기는 시야가 좁아. 이 교차로는 자전거도 많고.” 빨간 표시가 늘어났다.“차로 데려다주면 더 빠르잖아.”“해준이가 친구들이랑 같이 걷는 걸 기대해. 우선 길을 함께 걸어 보자.” 다음 날 넷이 통학로를 걸었다. 지도에서 보던 것보다 보도가 좁았다. 해준이는 횡단보도 앞에서 스스로 멈춰 이음이에게 오른쪽과 왼쪽을 보라고 했다. 태윤은 차도 쪽에 서서 두 아이가 건널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태윤이 표시 옆에 작은 글씨를 썼다.‘해준이가 스스로 멈춤.’“표시는 안 지워?”“길은 그대로잖아.” 나는 그 옆에 오늘 본 것을 적었다. 태윤이 지도를 내 쪽으로 밀어 줬다. 실제로 걸어 보니 교차로의 차 소리는 지도에서 상상한 것보다 컸다. 이음이는 오빠의 말을 따라 고개를 크게 돌렸다. 내가 쓴 메모는 태윤의 글씨와 부딪히지 않으려 작아졌고, 그는 내 쪽으로 지도를 더 밀어 주었다. 저녁에는 위치 확인 기기와 비상벨의 용도를 해준이에게 설명했다.“아빠가 이걸로 나 계속 보는 거야?”“늦게 오거나 위험할 때만 확인할게.”“정말?”“약속해.” 해준이는 생각하다 가방 안주머니에 기기를 넣었다. 태윤의 표시 옆에, 해준이가 그린 작은 빵 모양도 있었다. 학교 가는 길의 빵집이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해준이가 메고 갈 책가방을 사러 갔다. 가게에 들어서자 새 가방의 원단 냄새가 났다. 벽에 줄지어 걸린 여러 색의 가방을 올려다보느라 아들은 입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태윤의 태블릿에는 소재와 무게, 수선 조건을 비교한 표가 있었다. 읽기 시작했지만 해준이는 벌써 진열대 앞으로 가 있었다. 내가 소매를 당기자 그제야 따라왔다. 직원이 가방을 메어 주자 해준이는 거울 앞에서 몸을 틀어 뒤를 보려 했다. 가방이 흔들릴 때마다 어깨끈이 미끄러졌다. 태윤은 어깨끈과 지퍼가 튼튼한지를 따지고 있었지만, 아들은 이미 자기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를 먼저 보고 있었다. 해준이는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을 하나씩 메어 본 뒤 검은 가방 앞에 섰다. 장식이 거의 없는 평범한 모양이었다. 태윤이 눈여겨보던 것과도 달랐다.“이거.”“이쪽 가죽은…….” 해준이가 어깨끈을 꼭 쥐고 한 발 물러났다. 태윤은 말을 멈췄다.“무겁지 않아? 좀 걸어 봐. 등에 닿는 데도 봐야지.” 해준이는 가게를 한 바퀴 돌았다. 돌아와서도 벗지 않자 태윤이 어깨끈을 맞춰 주었다.“이걸로 주세요.”“아빠, 내가 고른 거 멋있어?”“잘 어울려.” 태윤은 한동안 아이의 작은 등을 보고 있었다. 저 등을 앞으로 여섯 해 동안 학교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자 나도 목이 메었다. 아직 가방이 등에 비해 커 보였다. 가방을 상자에 넣기 직전 해준이가 한 번만 더 만져 보겠다고 손을 뻗었다. 직원이 기다려 주자 검은 원단을 손끝으로 쓸고 민망한 듯 손을 거
공원에서 이음이와 모래놀이를 하다가 태윤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해준이가 그네 앞에서 다른 아이와 말다툼하고 있었다. 순서를 빼앗긴 모양이었다.“내가 가 볼게.” 태윤이 일어서자 내가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그 직후 상대 아이가 해준이를 밀었다. 아들은 바닥에 넘어졌다.“괜찮아?” 무릎에 모래가 붙었다. 태윤도 곁에 쭈그리고 앉아 일어설 수 있는지 물었다. 상대 아이 어머니가 급히 사과했다. 해준이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나도 먼저 큰 소리로 비키라고 했어.” 돌아오는 길, 이음이가 오빠의 손을 잡았다. 해준이는 이미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넘어진 순간의 얼굴을 잊지 못했다.“아까 너를 막지 말걸.” 태윤이 내 걸음에 맞췄다.“나도 망설였어. 어른이 나서면 다른 아이가 겁먹을 테니까.” 현관에서 신발을 벗자 모래가 쏟아졌다. 해준이는 세면대에서 스스로 상처를 씻었다. 물이 닿자 무릎을 빼기에, 조금만 더 씻자고 했다. 태윤은 수건을 가져와 옆에서 기다렸다. 해준이가 공룡 그림 밴드를 골랐다. 이음이가 손대려 하자 “여기 아파” 하고 말했다. 딸은 손을 멈추고 대신 오빠의 소매를 잡았다.“다음에 무서우면 아빠 부를게.”“그래. 바로 불러.” 태윤이 밴드 끝을 눌러 줬다. 나는 흙이 묻은 수건을 한참 접고 있었다. 그가 내 손까지 감쌌다. 아이들은 거실에서 다시 뛰어다녔지만 우리 둘은 아직 웃지 못했다. 해준이가 겁이 나면서도 제 힘으로 진
이음이가 두 살을 넘기자 해준이와 자주 다퉜다. 이날은 해준이가 아끼는 빨간 소방차가 원인이었다. 둘이 양쪽에서 잡아당기자 사다리가 휘었다.“내 거야!”“이음이 거!”“부러지겠다. 잠깐 놓자.” 내가 무릎을 꿇자 해준이가 손에 힘을 조금 뺐다. 태윤도 이음이에게 말했다.“오빠 거야. 빌리고 싶으면 물어봐.” 입술을 삐죽거리던 딸과 해준이는 한동안 말다툼을 했다. 그러다 해준이가 차체를 쥔 채 말했다.“같이 하면 돼. 내가 차 운전할게. 이음이는 소방관.” 이음이가 인형을 들고 달려갔다. 몇 분 전의 싸움은 없었던 듯했다. 태윤과 나는 동시에 소파에 주저앉았다. 붉은 소방차가 거실을 지나갈 때 우리는 다리를 들어 길을 비켰다. 태윤에게도 예전에 그 장난감을 빌려주지 않았다고 말하자 그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이제 두 아이가 함께 놀 때만 상자 한가운데에 놓는 차였다. 그날 저녁에는 해준이가 아빠 서재에서 만년필을 빌려 달라고 했다. 태윤은 처음엔 안 된다고 했다가 뚜껑을 잠근 채 손에 쥐여 주었다.“책상 위에서만.” 해준이는 금빛 펜촉을 보고 싶어 했지만 뚜껑을 열 수 없다는 걸 알고 돌려줬다. 태윤은 펜을 받으며 아들의 머리를 헝클었다. 소방차에도, 자기 물건에도 같은 규칙이 필요하다는 걸 둘 다 알게 된 듯했다. 다음 날에는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해준이가 유치원에서 만든 왕관의 별을 이음이가 뜯어 놓았다.“이음이 싫어!” 이음이가 울었다. 해준이는 찢어진 자리를 붙들고 입술을 깨물었다. 별 모서리를
걷기 시작한 이음이에게 서재는 새로운 놀이터였다. 어느 날 태윤이 부르는 소리에 가 보니 서류 몇 장이 바닥에 흩어져 있고, 딸 손에는 만년필이 들려 있었다.“아빠 거.”“그래. 돌려줘.”“싫어.” 태윤은 무릎을 꿇고 흰 종이와 빨간 크레용을 내려놓았다.“여기에는 마음대로 그려도 돼. 펜은 아빠한테 주고.” 이음이는 둘 다 쥐려 했다. 태윤이 크레용을 든 손을 뒤로 빼고 빈손을 내밀자 한참 바라보다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곧 종이에 빨간 선이 그어졌다. 태윤이 서류를 주워 올리는 동안 딸은 그의 소매를 놓지 않았다. 이음이는 종이에 아빠 얼굴을 그리는 듯했다. 빨간 선 하나를 긋고 태윤을 올려다본 뒤 또 그렸다. 내가 바닥의 서류를 주워 주는 동안도 그의 소매를 쥐고 있었다. 만년필보다 오래 붙잡은 건 그 소매였다. 그 뒤 낮은 서랍 하나에는 잠금장치가 달렸다. 중요한 서류와 날카로운 편지칼을 치웠다. 대신 옆 서랍은 이음이 몫이 됐다. 종이와 크레용이 든 곳을 딸은 보물 상자처럼 열고 닫았다. 해준이도 자기 상자를 달라고 했다.“서재에서 일하기 불편하지 않아?”“불편해.” 태윤은 그렇게 말하면서 딸이 그린 붉은 선을 비싼 액자에 넣어 걸었다. 내가 치울까 묻자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그건 그냥 둬.”◇ 첫 신발을 사러 온 가족이 아동화 가게에 갔다. 직원은 이음이 발을 잰 뒤 흰색, 노란색, 빨간색을 꺼냈다. 태윤은 소재를 살피며 흰색을 가리켰다. 해준이는 노란색이 빠를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