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11화. 작은 잔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6 18:51:41

가을 첫 보름은 맑았다.

루엔은 해 뜨기 전에 깼다. 깨운 사람은 없었다. 밤새 몇 번 깼는지는 세지 않았다. 세기 시작하면 더 못 잘 것 같았다.

마당에 내려가니 수레가 벌써 나와 있었다.

가렛이 말 옆에 서 있었다. 엘리나도 있었다. 숄을 두르고, 손에 작은 바구니를 들었다.

“어머니도 가십니까.”

“영주도 오라고 했다며. 영주 부인은 오지 말라는 말은 없었잖니.”

그 말은 맞았다. 쪽지에는 그런 줄이 없었다.

코넬은 마구간 문간에 기대 있었다. 가겠다는 말도, 안 가겠다는 말도 없었다. 수레가 움직이자 목검을 허리에 끼고 뒤를 따라 걸었다. 펠릭스는 노새를 끌고 맨 뒤에 섰다.

*

마을 길을 지났다.

세금 날이 나흘 전이었다. 곡식 창고 앞에 아직 되가 쌓여 있었다. 몰튼이 그 옆에서 셈판을 두드리다 영주 일행을 보고 허리를 숙였다.

우물가에서는 두 아낙이 물동이를 들고 서 있었다.

“마흔한 번째가 먼저지.”

“집 세는 순서가 물 긷는 순서야? 도련님이 개울 위쪽부터 세셨을 뿐이라던데.”

두 사람이 동시에 루엔을 보았다. 루엔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어느 쪽 편을 들어도 오늘 안에 끝날 다툼이 아니었다.

방앗간 아래를 지날 때, 겔트가 빈 수레를 끌고 오는 게 보였다. 올해 세금으로 낸 보리는 서른여덟 되였다고 몰튼이 말했었다. 지난해보다 아홉 되 적었다. 나머지는 빚부터 갚았다고 했다.

겔트는 영주에게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루엔은 그 등을 눈으로 따라갔다.

누가 빌려주었는지는 아직 몰랐다.

*

오스윈은 오두막 앞 텃밭 가에 넓고 얕은 나무 대야를 내놓고 있었다. 물이 반쯤 차 있었다.

대야 가장자리에 곧은 막대 하나가 꽂혀 있었다. 막대에 금이 촘촘히 그어져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마다 한 금.

“마님까지 오셨군.” 오스윈이 말했다.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앉으시게. 오래 걸리지는 않네.”

그는 루엔을 대야 앞에 세웠다.

“두 손을 가장자리에 얹게. 내가 짧은 말을 하나 가르쳐 주지. 물을 들어 올리는 말일세. 일곱 마디.”

“선생님 것은 스물아홉 마디였습니다.”

“그건 물을 곱게 드는 말이고. 이건 있는 대로 쏟아서 드는 말일세. 그릇을 재려면 곱게 들면 안 되네. 전부 부어야 바닥이 보이지.”

루엔은 막대의 금을 보았다.

“물이 올라간 높이가 그릇입니까.”

“그렇네. 막대 금으로 몇 마디 올랐는지를 그릇이라 부르지. 영창의 마디와는 다른, 손가락 마디일세. 청색탑에선 다 이렇게 재. 세 번 재서 가운데 값을 쓰지. 한 번은 손이 떨리고, 한 번은 욕심을 내거든.”

세 번 재서 가운데를 쓴다. 루엔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법을 만든 사람은 한 번 잰 값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여섯 살 아이는 보통 몇 마디입니까.”

“열다섯 안팎.”

“안팎은 얼마만큼입니까.”

오스윈이 루엔을 내려다보았다. 가렛이 수레 옆에서 헛기침을 했다.

“탑에 있을 때 스무 해 동안 아이들을 쟀네. 천백서른네 명. 가장 낮은 아이가 여섯 마디, 가장 높은 아이가 스물여섯. 열셋에서 열일곱 사이가 절반을 넘었지.”

펠릭스가 구석에서 밀랍판에 받아 적는 소리가 났다.

루엔은 입을 다물었다. 안팎이 얼마만큼인지, 이 사람은 이미 세어 두었다.

*

일곱 마디를 배웠다. 두 번 따라 하고 세 번째에 오스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엔은 대야 가장자리에 손을 얹었다. 나무가 차가웠다.

말했다.

가슴 한가운데서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손목을 지나 손끝으로. 물이 가운데서 불룩 솟았다. 한 줄기로 모이며 올라갔다.

떨렸다. 물기둥 끝이 부르르 떨었고, 거기서 희미한 빛이 번쩍였다. 윙, 하는 소리가 귀 옆을 스쳤다.

그리고 멈췄다.

물이 대야로 떨어졌다. 물방울이 루엔의 얼굴에 튀었다.

오스윈은 막대를 보고 있었다.

“아홉.”

두 번째. 아홉 하고 반.

세 번째. 아홉.

오스윈이 막대에서 눈을 뗐다.

“아홉일세.”

“한 번 더 재면 안 됩니까.”

루엔의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이었다. 말하고 나서야 알았다.

“세 번 재기로 했으면 세 번일세.” 오스윈이 말했다. “네 번째를 재는 건, 마음에 드는 값이 나올 때까지 재겠다는 뜻이네.”

루엔은 입을 다물었다. 옳은 말이었다. 지난여름 망루 아래에서 석공에게 자기가 한 말과 같은 말이었다. 답을 알고 나서 고친 값은 잰 값이 아니다.

“… 맞습니다. 아홉입니다.”

*

텃밭에 바람이 지나갔다. 콩잎이 흔들렸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코넬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작았다.

“… 아홉이면, 작은 거야?”

“작네.” 오스윈이 말했다. 돌려 말하지 않았다. “천백서른넷 가운데 아홉 아래는 일흔 명이 조금 넘었지.”

엘리나의 손이 숄 끝을 쥐었다. 가렛은 수레 옆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지 않게 하는 얼굴이었다.

“그릇은 자랍니까.” 루엔이 물었다.

“몸이 크는 만큼은 크지. 다른 아이들도 같이 크고.”

“그러면 차이는 그대로입니까.”

“대개는.”

오스윈은 대야의 물을 텃밭 고랑에 부었다. 천천히. 물이 고랑을 따라 흘러갔다.

“탑에서는 이 그릇이면 셋째 고리를 넘기 어렵다고 말하네. 거짓말은 하지 않겠네, 영주.”

가렛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고맙소.”

그 한마디뿐이었다.

*

돌아오는 수레에서 루엔은 앞만 보았다.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건 아니었다. 가슴 어딘가가 조금 무거웠다. 여섯 살 몸이 그걸 먼저 알았다.

그래도 머리는 따로 돌았다. 늘 그랬다.

물기둥이 떨렸다. 번쩍였다. 윙 소리가 났다.

루엔은 전부 부었다. 부은 게 다 물을 드는 데 갔다면 떨릴 까닭이 없었다. 번쩍일 까닭도 없었다. 오스윈이 스물아홉 마디로 물을 들 때는 거의 번쩍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은 것 가운데 일부는 물로 가지 않았다.

어딘가로 샜다.

얼마나 샜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샌 만큼을 막으면, 아홉을 부어도 아홉보다 더 들 수 있다. 그릇이 작으면, 덜 흘리면 된다.

“아버지.”

가렛이 고삐를 쥔 채 「음」 했다.

“그릇이 작으면 덜 흘리면 됩니다.”

가렛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레가 덜컹거렸다. 엘리나가 루엔의 등을 가만히 쓸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뒤에서 걷던 코넬이 발로 돌멩이를 찼다. 돌멩이는 길가 풀숲으로 들어갔다.

*

저녁 식탁은 조용했다.

엘리나가 평소보다 말을 많이 했다. 베르타가 올해 사과를 너무 일찍 땄다는 이야기, 마르타 손녀가 이를 갈았다는 이야기. 웃음이 짧게 끝났다.

베르타가 사과 파이를 내왔다. 작은 것 하나.

코넬이 칼을 들었다. 이번엔 재지 않았다. 칼끝을 대자마자 내리그었다.

한쪽이 눈에 띄게 컸다.

루엔은 두 조각을 보았다. 형을 보았다. 코넬은 식탁 모서리를 보고 있었다.

자르는 쪽이 나중에 고른다. 대충 자르면 큰 쪽은 동생이 가져간다.

형은 그걸 알았다. 지난여름 반 시간을 들여 배운 사람이었다.

루엔은 작은 쪽을 집었다.

코넬이 고개를 홱 들었다.

“야. 너 왜—”

“형이 고르는 차례를 저한테 줬습니다. 그러면 저도 드려야 셈이 맞습니다.”

코넬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큰 조각을 쥐고 한 입에 절반을 먹었다. 귀가 조금 붉었다.

가렛이 그걸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밤이 깊었다.

루엔은 누워서 서까래를 셌다. 스물셋. 소수를 셌다. 백서른일곱까지 갔을 때 소리가 들렸다.

쇠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루엔은 일어나 창가로 갔다. 성 아래 대장간에 불이 켜져 있었다. 지난여름 펠릭스가 말했던, 불 꺼진 대장간이었다. 오늘은 풀무 불빛이 문틈으로 붉게 새어 나왔다.

땅, 땅, 땅. 쉬었다가, 땅.

대장장이는 저녁 무렵 일찍 집으로 보내졌다고, 낮에 하인들이 수군거렸었다.

루엔은 망치 소리를 셌다. 셈이 자꾸 끊겼다. 두드리는 사람이 자주 멈췄다. 멈췄다가 다시 두드렸다. 손에 익은 사람의 박자가 아니었다.

마흔 번쯤에서 루엔은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루엔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누가 옮겼는지는 몰랐다.

책상 위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잔이었다. 쇠로 만든 작은 잔. 루엔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크기였다. 겉은 망치 자국으로 우툴두툴했다. 안쪽은 매끈하게 갈려 있었다. 테두리는 고르게 둥글었다. 손잡이는 없었다.

루엔은 그걸 들고 아침 식탁으로 내려갔다.

가렛은 먼저 와서 빵을 뜯고 있었다. 오른손 엄지에 천이 감겨 있었다.

루엔은 잔을 식탁 위에 놓았다.

가렛이 잔을 보았다. 루엔을 보았다. 빵을 한 입 먹었다. 다 씹고 나서 말했다.

“작은 잔은 흘리지 않게 들면 된다.”

그게 전부였다.

엘리나가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웃음을 참는 어깨가 아니었다.

루엔은 잔을 두 손으로 쥐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셈이 나오지 않았다. 셈이 나오지 않는 건 드문 일이었다.

“… 예.”

그게 루엔이 찾은 답의 전부였다.

*

그날 오후, 루엔은 부엌에 갔다.

베르타가 국자를 들기 전에 먼저 말했다.

“한 줌 그릇을 잠깐 빌리겠습니다. 물만 담겠습니다.”

베르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 선반에서 손잡이 없는 나무 잔을 내려 주었다.

루엔은 쇠잔에 물을 가득 떠서 한 줌 그릇에 부었다. 한 번. 두 번.

두 번째에 한 줌 그릇이 가장자리까지 찼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루엔은 몸을 숙여 옆에서 보았다. 물 표면이 테두리와 나란했다.

딱 반이었다.

쯤이 아니었다.

“나리가 어젯밤에 그거 빌려 가셨어요.” 베르타가 냄비를 저으며 말했다. 루엔 쪽은 보지 않았다. “밤중에 부엌까지 오셔서요. 물을 몇 번이나 부었다 쏟았다 하시더니. 새벽에 돌려놓으셨더라고요.”

루엔은 쇠잔을 내려다보았다.

망치 자국이 고르지 않았다. 두드리는 박자도 고르지 않았다. 그런데 담기는 물은 정확히 반이었다.

아버지는 대장장이가 아니다. 그래서 여러 번 부었다 쏟았을 것이다. 맞을 때까지.

*

밤에 루엔은 수첩을 폈다.

다섯. 그릇은 타고난다. — 마로 선생님. 여섯 살 가을.

적고 나서 한참 보았다. 오스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천백서른네 명을 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루엔은 그 줄 아래에 작게 덧붙였다.

그릇은 타고난다. 새는 곳은 타고나지 않는다.

그리고 쇠잔을 책상 모서리에 놓았다. 손을 뻗으면 닿는 자리에.

잔을 보다가 문득 대야의 물기둥이 떠올랐다. 떨리던 끝. 번쩍이던 빛.

오스윈은 원을 가르치다 말았다. 세 배가 아니라고 하자 조금 넘는다고 했다. 탑에서도 다 알지만, 그 조금을 아무도 못 잡았다고.

샌 것이 어디서 새는지. 루엔은 거기서부터 짚어 보기로 했다.

조금은 얼마만큼인가.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무색탑의 수학자   87화. 점과 선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 무색탑의 수학자   86화. 열 가운데 하나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 무색탑의 수학자   85화. 무는 금화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 무색탑의 수학자   84화. 여섯째 서클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 무색탑의 수학자   83화. 열일곱과 일흔하나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 무색탑의 수학자   82화. 사흘째 오후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