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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좀처럼 보기 드문 취향

Author: 노블다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7 15:24:45

나는 그 감각을 확인하듯 한 번 더 숨을 고르고,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골목 끝에 작은 자판기가 하나 보였다. 희미한 불빛이 켜져 있었다. 주변은 어두운데, 그 부분만 또렷했다. 방향을 살짝 틀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유리 너머를 바라봤다. 음료 캔들이 일정하게 줄을 맞추고 있었다. 손을 넣어 버튼을 누르면, 정해진 하나가 떨어진다. 선택은 있지만, 결과는 단순하다. 그런 구조였다. 동전을 꺼내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서 있었다.

유리창에 비친 얼굴이 또 한 번 겹쳐졌다. 아까보다 어둡고, 조금 더 흐릿했다. 표정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으니까. 나는 한 번 눈을 깜빡였다. 그 순간, 아까 그 남자의 시선이 아주 짧게 겹쳤다. 붙잡지 않았다. 그대로 흘려보냈다..그러고 나서야, 나는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까보다 훨씬 조용한 리듬으로.

한 블록을 더 걸었다. 발걸음이 일정해지자, 소리도 다시 익숙한 간격으로 돌아왔다. 아까까지 남아 있던 묘한 감각도, 그 리듬에 맞춰 조금씩 옅어졌다. 코너를 돌아 나오자, 불빛이 다시 많아졌다. 유리창이 넓게 이어진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낮에는 평범하게 지나쳤을 건물이었다. 지금은 안쪽 조명이 그대로 바깥으로 새어 나와, 주변보다 또렷하게 떠 있었다.

나는 잠깐 멈췄다. 이유를 굳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멈추고 싶어서 멈춘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됐다. 시선이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로비였다. 소파와 테이블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고, 몇 명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소음은 거의 없었다. 유리 너머로도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리고 문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가서는, 바로 밀고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아주 작게 났다. 바깥의 공기가 한 겹 잘려 나간 느낌이었다. 발밑의 감촉이 바뀌었다. 딱딱한 아스팔트 대신, 부드러운 카펫이 발걸음을 받았다. 하이힐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나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로비를 한 번 훑듯이 보고, 바로 시선을 거뒀다. 굳이 어디에 앉을지 고민하지 않았다. 공간을 확인하는 건, 그 다음이었다. 먼저, 이 안의 공기가 몸에 맞는지부터.

나는 소파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때였다. 시선이 아주 짧게 멈췄다. 아까, 가로등 아래에 서 있던 남자였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맞은편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나이가 더 있어 보였다. 자세가 단정했고, 손의 움직임이 느렸다. 대화는 길지 않은 듯 보였다. 말이 오가는 사이의 간격이 일정했다. 불필요한 부분이 거의 없는, 그런 종류의 대화.

...그리고 난 그걸 한 번에 파악했다. 일부러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나는 아직 이쪽에 있었고, 시선이 정면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놓인 거리도, 적당했다.

아무것도 다르지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얼굴. 필요 이상으로 움직이지 않는 시선. 나는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기울였다. 그 순간,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정확히 나를 향한 건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시야가 넓어지듯이. 그런데 그 끝에, 내가 걸렸다. 멈췄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였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몇 초. 그가 먼저 알아봤다.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 놀랐다기보다는, 기억을 맞춰보는 쪽에 가까웠다. 그 짧은 과정이 그대로 보였다.

“…아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입꼬리를 아주 조금만 올렸다. 아까와 같은 각도는 아니었다. 조금 더 짧게, 덜 의식적으로.

“길, 제대로 찾으셨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에." 거기까지였다.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더 다가가지도, 물러나지도 않았다. 그는 잠깐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먼저 올라가 있겠다.”

낮은 목소리였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짧고 정확하게.

“네, 아버지.”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시선을 아주 조금 옆으로 흘렸다. 다시 그를 봤을 때, 그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로비의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바뀌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거리 계산이 정확했다. 필요 이상으로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다.

“…여기, 자주 오세요?” 그 질문은 예상과 조금 달랐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변을 한 번 훑었다. 로비, 소파, 조명. 그리고 다시 그를 봤다.

“아니요.” 짧게 답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나는 그걸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숨을 아주 얕게 내쉬었다.

“그쪽은요.”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그는 잠깐 생각하듯 눈을 움직였다. “오늘이 처음입니다.”

말투는 여전히 같았다. 정중했지만 과하지 않았다. 거기에도, 그 이상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그래 보여요.”

그는 그 말에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미세하게 웃었다. 짧게.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걸 보고 나서야, 나는 시선을 잠깐 떼었다가 다시 마주쳤다. 이번에는 일부러였다. 몇 초.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상태가 그대로 이어졌다. 나는 그걸 끊지 않고 소파 쪽으로 한 걸음 움직이고는,

“앉으실 거예요?” 뒤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네.”

짧게. 나는 그제야 아주 조금 웃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자연스럽게.

나는 소파에 먼저 앉았다. 등받이에 등을 붙이지는 않았다. 허리를 세운 채,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자세였다. 그가 맞은편이 아니라, 옆에 앉았다. 거리는 가까웠지만, 닿지 않을 만큼 남겨뒀다. 그 정도의 간격이 더 오래 유지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지 않고, 정면에 놓인 낮은 테이블을 한 번 훑었다. 유리 표면에 조명이 부드럽게 번져 있었다. 그 위에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은 게 오히려 눈에 들어왔다.

“조용하네요.” 그가 먼저 말했다.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밖보다요.”

대답은 거기까지였다. 나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어갈 수 있는 말은 여러 개 있었지만, 굳이 고르지 않았다. 선택하지 않으면, 흐름은 상대 쪽으로 넘어간다. 나는 그걸 확인하듯이 시선을 아주 조금만 움직였다. 그는 잠깐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로비를 한 번 둘러봤다. 시선이 움직이는 방향이 단순했다. 필요 없는 곳에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다시 정면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여전히 같은 자세였다.

“아까는.”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시선을 그쪽으로 옮겼다. “감사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미 들었어요.”

그는 잠깐 멈췄다. 그 다음 말을 고르려는 듯, 아주 짧게 숨을 고른다. 나는 그걸 가만히 봤다.

“그래도, 다시.”

나는 입꼬리를 아주 조금만 올렸다. “예의 바르네요.”

그는 웃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편해서요.”

나는 그 말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편해서. 그 단어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시선을 테이블 위로 떨어뜨렸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그를 직접 보지 않았다. 시선이 닿을 듯 말 듯한 위치에서 멈췄다.

“편한 건, 오래 못 가요.” 내가 먼저 말했다.

그는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의미를 확인하는 쪽의 움직임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 질문을 듣고서야 시선을 마주쳤다. 몇 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가만히 봤다. 아까 길 위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감각이, 아주 약하게 다시 올라왔다. 안 따라오는 사람. 그걸 굳이 끌어당길 필요는 없었다. 나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부분, 금방 지루해하거든요.”

그는 이번에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아주 조금만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그 짧은 움직임이, 생각보다 분명했다.

“저는.” 그가 말을 꺼냈다. 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지루한 쪽이 더 편합니다.”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주 짧게 웃었다. “그건, 좀처럼 보기 드문 취향이네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괜찮은 편입니다.”

나는 그 말이 끝나는 타이밍을 확인하듯, 시선을 한 번 더 옮겼다. 로비의 조명이 그대로 내려와, 그의 얼굴 윤곽을 또렷하게 만들고 있었다. 과하지 않은 빛이었다.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 상태로 몇 초.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걸 일부러 끊지 않았다.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손을 무릎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다시 멈췄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이름, 안 물어보시네요.” 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필요하십니까.”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시선을 한 번 더 마주쳤다.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그리고 나서야 말했다.

“글쎄요.” 짧게. “필요한 쪽이, 먼저 묻는 거 아닌가요.”

그는 그 말을 듣고 잠깐 멈췄다. 아주 짧게,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 다음을 기다렸다. “후지와라 요시노리입니다.”

나는 그 이름을 그대로 들었다. 한 번 더 되새기지는 않았다. 그 대신, 고개를 아주 조금만 끄덕였다.

“미야모토 아스카에요.”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이름을 주고받은 뒤에도, 공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또렷해졌다. 서로를 부를 수 있는 말이 생겼는데도, 굳이 쓰지 않는 쪽이 더 자연스러웠다. 나는 등을 소파에 아주 살짝 기대었다. 아까보다 힘이 조금 빠졌다. 손은 그대로 무릎 위에 두었다.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지만, 의식은 옆쪽에 남아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자세도, 시선도, 말투도. 아까부터 이어지던 상태 그대로였다. 변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다. 나는 같은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보통은, 이쯤에서 조금은 달라진다. 이름을 알게 되면, 거리도, 말도, 시선도. 아주 미세하게라도. 그 변화를 타고, 흐름이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다음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아주 조금만 옆으로 움직였다.

“요시노리 씨.” 이름을 한 번 불러봤다.

그는 바로 반응했다. “네.”

짧고 정확했다. 그 이상의 감정은 실려 있지 않았다. 나는 그걸 가만히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기울였다.

“아까부터.” 말을 꺼내 놓고, 잠깐 멈췄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이쪽에서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상태였다. “같은 표정이네요.”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짧게 눈을 깜빡였다. 그 정도의 변화. 그걸로 충분했다. “그렇습니까.”

나는 입꼬리를 아주 조금만 올렸다. “네.” 짧게. “재미없어요.”

그는 그 말에 잠깐 멈췄다. 하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시선을 그대로 유지했다. "아스카 씨가 생각하시는 재미있는 표정은 어떤 겁니까.”

나는 그 질문을 그대로 받았다. 몇 초. 대답을 바로 고르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아주 미세하게 아래로 떨어뜨렸다가 다시 올렸다. 타이밍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 아까처럼. 그리고, 입꼬리를 조금 더 올렸다.

“지금처럼은 아니죠.” 그는 그걸 가만히 봤다.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그 상태를 유지했다. 보통은 여기서 반응이 온다. 시선이 조금 더 붙거나, 말이 이어지거나, 아니면 웃음이 늦게 따라온다. 그런데. 그는 그대로였다. 같은 거리. 같은 시선. 나는 그걸 그대로 확인했다. 그리고,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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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것도 이어지지 않은 채로 이어져 있었다. 그 사이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상태는 이미 정리된 쪽에 가까웠다. 나는 그걸 따로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는 순간, 그건 과정이 된다. 과정이 되면, 흐름이 생긴다. 그건 필요 없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다미 위에 무릎을 가지런히 두고, 허리를 세우고, 시선은 정면에 두고 있었다.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그 자세는 무너지지 않았다. 손끝의 위치도, 숨을 고르는 간격도, 이미 몸에 익은 범위 안에 있었다.익숙해졌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건 맞추려는 쪽에서 나오는 말에 가까웠다. 지금은, 그보다 조금 더 자연스러운 쪽이었다. 그렇게 되어 있었다. 나는 시선을 아주 조금만 아래로 내렸다. 무릎 위에 놓인 손이 보였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 상태를 굳이 바꾸지 않았다.…문득, 떠오르는 건 있었다. 로비의 조명, 유리문 너머의 공기, 손에 들고 있던 얇은 종이의 감촉.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 정도의 기억은, 붙잡지 않으면 흐려진다. 굳이 남겨둘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두었다. 사라지지 않는 쪽으로. 나는 시선을 다시 올렸다. 정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상태가,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나도, 굳이 이어가지 않았다. 그 상태가 그대로 이어졌다. 말이 없는 쪽이 더 안정적이었다. 굳이 하나를 덧붙이지 않아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그대로 두었다. 정면, 아무것도 없는 쪽. 그 상태를 유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익숙하네. 짧게 생각이 스쳤다. 나는 그걸 바로 지우지 않았다. 굳이 지울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으니까. 손을 무릎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멈췄다. 그 정도의 조정이면 충분했다.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조용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거의 없었다.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 그 사이를 채우는 건 별로 없었다. 그게 더 나았다.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 동작이 끝난 뒤에도, 공기는 그대로였다.…여기서는, 변하

  • 미완성의 페르소나   008#. 언젠가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상태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처음에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굳이 바뀔 이유가 없었으니까. 말이 길어지지도 않았고, 시선이 늦어지지도 않았고, 거리도 그대로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렇게 두는 쪽이 더 편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보통은 이쯤에서 하나쯤은 어긋난다. 이유 없이 말이 끊기거나, 타이밍이 조금 늦어지거나. 그런 종류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끼어든다.그런데 이번에는 그게 없었다. 나는 그걸 그대로 두고 있었다.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상태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미세하게. 어딘가 하나가 비어 있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나는 그 빈 자리를 굳이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확인하는 순간, 거기에 이름이 붙는다. 이름이 붙으면, 그쪽으로 기울어진다. 그건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대로 두었다. 손을 무릎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멈췄다. 시선은 정면에 둔 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것처럼. 그 상태를 유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미 익숙해진 범위 안에 있었으니까.그런데. 아주 짧게, 그가 떠올랐다. 말이 이어지지 않던 간격, 굳이 덧붙이지 않던 태도.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 정도의 기억은, 붙잡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건드리지 않았다. 그대로 두는 쪽이, 아직은 더 편했다.그 상태가 계속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보통은, 오래 가지 않는다. 나는 시선을 아주 조금만 옆으로 흘렸다. 거기에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하는 쪽이 더 자연스러웠다. 몇 초. 그보다 조금 더 긴 시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오늘도, 갈까.나는 그 생각을 바로 붙잡지 않았다. 붙잡는 순간, 의미가 생긴다. 의미가 생기면, 선택이 된다. 선택이 되면, 이유가 따라온다. 그건 필요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흘려보냈다. 손을 한 번 더 정리하듯 움직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 미완성의 페르소나   005#. 이어지지 않는 쪽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는데, 어제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눈을 떴을 때, 몸이 먼저 반응하지 않았다. 잠이 덜 깬 것도 아니고, 피곤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기까지 아주 짧은 공백이 생겼다. 그 몇 초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없던 것도 아니었다.나는 그대로 누워 있었다. 천장을 보고, 눈을 한 번 더 깜빡였다. 다시 감지는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의미도 없었다. 그런데도 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미 움직였을 타이밍이었다. 생각이 먼저 따라오지 않는 쪽이 더 편하다는

  • 미완성의 페르소나   004#. 가능성

    "진짜네.”그가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나는 시선을 한 번 더 마주쳤다. “안 바뀌는 거요.”그는 잠깐 생각하듯 시선을 움직였다. 아주 미세하게. 그 다음에야 말했다.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요.”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왜요.”그는 잠깐 멈췄다. 그리고, 나를 봤다. 이번에는, 아주 조금 더 정확하게. “지금도 충분히 대화가 되고 있으니까요.”나는 그 말을 그대로 들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천천히 따라갔다. 대화. 지금 이 상태가. 나는 시선을 아주 미세하게 떼었다가, 다시

  • 미완성의 페르소나   002#. 수상한 남자

    하이힐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다.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미끄러지듯 퍼졌다가, 다시 또렷해졌다. 발끝에 힘을 주는 정도만으로도 리듬이 달라졌다. 나는 일부러 속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대로 두는 편이 더 자연스러웠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정리되고 있었다. 말투, 시선, 거리. 어느 순간에 무엇을 했는지, 순서대로 떠올랐다가 금방 사라졌다. 오래 붙잡아 둘 필요는 없었다. 이미 끝난 일이었으니까.네온이 점점 줄어들었다. 가게 간판 사이의 간격이 넓어지고, 빛의 색도 옅어졌다. 대신 가로등 불빛이 길

  • 미완성의 페르소나   001#. 익숙해졌다는 것

    다리를 모으고 앉는 자세가 생각보다 오래 버티기 힘들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허리를 조금 더 세워주세요.”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몸은 이미 굳어 있었다. 무릎 아래로 감각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다다미의 감촉이 느껴졌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졌다. 정갈하게 접힌 자신의 손. 그리고 그 위에 얹힌, 낯선 옷감. 기모노였다.“…익숙해지실 거예요.”그 말이 위로인지 확인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잠깐 도쿄의 밤을 떠올렸다.***네온이 번진 유리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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