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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해각
“안 돼요!”

겁에 질린 유시연이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전하, 이 아이는 전하의 혈육입니다!”

봉현욱의 칼끝이 그녀의 아랫배 위에서 멈추더니, 별안간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본왕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인데, 그깟 자식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유시연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숨조차 멎을 것만 같았다.

“누가 보냈느냐?”

칼끝이 살갗에 스치자 붉은 피 한 방울이 맺혀 흘러내렸다.

유시연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듯했다. 그녀는 다급히 그의 날카로운 비수를 움켜잡았다. 새하얀 손 위로 선홍빛 피가 한 방울씩 떨어져, 그 모습이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봉현욱의 손이 멈췄다. 그녀가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이 아이를 다치게 하지 마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유시연의 목소리는 빗물에 젖은 새끼 고양이처럼 애처로웠다.

“이 아이는 제게 남은 마지막 혈육입니다. 부디 이 아이만은 살려 주십시오!”

칼을 쥔 유시연의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아픈 줄도 모르는 사람처럼 악착같이 칼날을 부여잡은 그녀의 처연한 눈동자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아무도, 아무도 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 아이가 저를 따라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워서일 뿐입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이 아이를 해치지 말아 주십시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처량하고 가련한 모습이었다.

“쯧, 보기에는 참으로 애처롭구나.”

봉현욱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며 새끼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훔쳐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칼을 거칠게 빼내며 말했다.

“안됐지만, 본왕이 알 바 아니다!”

날카로운 칼날이 그 여리고 고운 손을 스치며 더 깊은 상처를 냈다. 유시연은 밀려오는 통증에 식은땀을 흘렸다.

냉혹하기 짝이 없는 봉현욱에게 미인계가 통할 것이었다면 그는 이미 수백 번은 죽었을 것이었다.

이런 얕은 수작으로 그를 상대하기에는 유시연의 수는 아직 한참 부족했다.

유시연의 마음은 마치 얼음 구덩이에 빠진 듯 차갑게 식어 버렸다.

봉현욱의 냉혹함을 너무 얕보았던 모양이었다. 이런 미친 자라면 서태후의 명령조차 안중에 두지 않을 것이고, 하물며 제 뱃속의 혈육 따위 신경 쓸 리 만무했다.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본왕이 향기로운 꽃을 아끼고 어여삐 여길 사람으로 보이느냐?”

봉현욱이 유시연의 턱을 들어 올려 억지로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봉현욱은 황후의 빼어난 용모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홀릴 듯 수려한 얼굴은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할 만큼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서늘한 기운을 풍겨 쉽게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토록 아름다운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언제나 얼음장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어서 말해라, 그러지 않으면……”

거친 손이 그녀의 턱을 살짝 힘주어 붙잡자, 유시연의 여린 살결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 음산한 눈동자를 마주한 유시연은 긴장한 채 피 묻은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마치 무언가 결심한 듯 막 입을 열려던 그때, 문밖에서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소칠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봉현욱이 손을 놓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소칠, 급한 일이겠지?”

유시연은 황급히 흐트러진 옷깃을 여몄다.

“전하, 폐하께서 입궁하십니다!”

소칠은 유시연을 한 번 흘긋 보고는, 죽음을 각오한 듯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유 아씨도 함께 부르셨습니다.”

봉현욱이 비웃듯 냉소를 흘렸다.

“허, 성지가 참으로 빨리도 내려오는구나!”

유시연 역시 다소 놀란 눈치였다. 봉현욱과 함께 돌아온 지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았으니, 아무리 서태후의 마차가 빨랐다 한들 그 사이 황궁에 다다랐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신속하게 부름이 내려왔다는 사실은 그녀로서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시연은 봉현욱을 슬쩍 훔쳐보았다.

폐하께서 봉현욱의 곁에 눈과 귀를 심어 두신 것일까? 하지만 이런 배움도 없고 방탕하기만 한 자를 감시해서 무엇을 얻는단 말인가?

아니면…… 유시연은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감시당하고 있는 것이 혹시 자신일까?

봉현욱이 귀찮은 듯 몸을 일으키며 유시연을 힐끗 보았다.

“옷이나 한 벌 가져다줘라!”

마차 안에서 봉현욱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유시연을 응시했다. 유시연은 내내 눈을 내리깐 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최대한 존재감을 죽이려 애썼다.

“너희 유씨 가문에는 대체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이냐?”

봉현욱이 불쑥 물었다.

“저도 모릅니다.”

유시연이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들께서 보물 지도 같은 것을 언급하시는 걸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이 소문은 이미 도성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으니, 봉현욱도 필시 들었을 터였다. 굳이 숨길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보물 지도라.”

봉현욱이 낮게 웃으며 비웃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본왕이 그 어리석은 자들처럼, 너희 가문에 그런 게 있다고 곧이곧대로 믿을 줄 아느냐?”

유시연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애당초 보물 지도 같은 것은 없었고, 설령 무슨 비밀이 있다 한들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바람이 불어와 마차 휘장 한쪽 자락을 젖히자, 밖으로 웅장한 붉은 궁궐 담이 드러났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입궁했던 것은 여덟 살 때, 태후의 생신 연회 자리였다. 그때 예상무(霓裳舞: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추는 고전 궁중무로, 선녀가 춤추는 듯 우아하고 화려한 춤)를 한 곡 추었는데, 그 춤 하나로 도성에 이름을 크게 떨쳤다. 하지만 너무 눈에 띄었던 탓이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만 도적 떼를 만나 바다로 끌려갔고, 노예 시장으로 팔려 가던 도중 사부에게 구출되어 그를 따라 산으로 들어가 무예를 배우게 되었다.

반년 뒤, 사부는 사람을 보내 부모님께 그녀의 소식을 전했다. 그 후 그녀는 모습을 감추고, 종종 병을 핑계 삼아 집에 틀어박혀 있는 척했다. 하지만 사실은 사부와 사형들을 따라 산속에서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좋은 신랑감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화청회에서 그리 재주를 뽐낼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오늘 같은 처지가 되리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그런 헛수고를 할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신에게 좋은 신랑감을 찾아 주려고 두툼한 참고 기록까지 써 가며 승상부 공자와 장군부 세자 사이에서 얼굴을 붉혀 가며 다투시던 일이 떠오르자, 유시연의 마음은 애틋하면서도 씁쓸해졌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들어 봉현욱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녀가 늠름하고 용맹한 젊은 장군에게도, 온화하고 다정한 승상부 공자에게도 시집가지 못하고, 다들 마주치기만 해도 길을 돌아가던 저 저승사자를 택하게 되리라고는.

하늘이 어찌 이리도 사람의 운명을 농락할 줄 알았겠는가. 둘째 오라버니는 늘 그녀를 한 송이 여린 꽃과 같다 하며, 반드시 성품이 온화하고 그녀를 아껴 줄 이를 만나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 마를 날이 없을 것이라며 걱정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게 그런 복이 어디 있으랴. 성품이 좋고 다정한 낭군은커녕, 가족들과 함께 저승길로 보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

대전 위, 위엄 있게 자리한 경양제는 봉현욱과 얼굴이 제법 닮아 있었다. 봉현욱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그는 대뜸 낯빛이 험악해졌다.

“이 망나니 같은 놈!”

“제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러십니까?”

봉현욱은 건들거리는 태도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유시연도 황급히 그 곁에 무릎을 꿇었다.

“소녀, 폐하를 뵙습니다!”

경양제는 유시연을 한 번 훑어보고는 다시 시선을 그 못난 아들에게 돌렸다.

“네가 저지른 짓을 보아라. 멀쩡한 규수를 어찌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이냐!”

봉현욱이 냉소를 흘렸다.

“폐하께서는 후궁에 삼천 궁녀를 두시고도 손대지 않은 이가 없으시면서, 저는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

“닥치지 못할까!”

경양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손에 잡히는 대로 벼루를 들어 그의 머리를 향해 던지려 했다. 그때 곁에 서 있던 늙은 내관 서복이 황급히 말렸다.

“아이고, 폐하, 그것만은 안 됩니다!”

얼굴이라도 상하면 혼례는 어찌 치른단 말인가!

경양제는 하는 수 없이 벼루를 도로 내려놓으며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

“이왕 아이까지 생겼으니, 날을 잡아 혼인을 하도록 해라. 유국공부가 그래도 공을 세운 무장 가문 아니냐, 말년에 죄를 지었다 한들 그 집 규수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양제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유시연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복잡한 눈빛을 띠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서를 내려라. 유씨 가문 규수를 현왕의 정실부인으로 봉하노라.”

정실부인?

유시연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죄인의 딸인 자신이 어찌 정실부인으로 봉해질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경양제는 어찌 태의를 시켜 맥조차 짚어 보지 않고 자신의 말을 그대로 믿는단 말인가?

경양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가문에 황제조차 꺼리면서도 탐내는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

봉현욱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서늘하게 치켜 올라간 눈매가 가늘게 좁혀지며 위험한 기운을 드러냈다.

계산도 빠르시지. 이 골칫덩이를 자신에게 떠넘기려는 속셈이었다.

“소녀, 은혜에 감사드립……”

유시연이 감사 인사를 미처 마치기도 전에, 봉현욱이 불쑥 말을 끊었다.

“저 여인을 아내로 들이라고요?”

봉현욱이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제가 만약 싫다고 하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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