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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화

Author: 진해랑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2 08:00:51

결혼 후 우리는 이 펜트하우스로 들어왔다.

사랑 없는 결혼에도 생활은 생겼다. 각방을 쓰는 하우스메이트에 가까운 관계라는 점을 제외하면.

아침에는 함께 식사를 했지만, 저녁에는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갔다

나는 이 관계가 꽤 마음에 들었다.

도영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출근 잘하세요.”

“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요.”

우리의 아침 인사를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며 나는 생각했다.

이 결혼,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때의 나는 그 평온이 오래갈 거라고 믿었다. 평온도, 때로는 가장 정교한 함정이 된다는 걸 모르고.

***

그랬던 그가 바뀌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돌이켜보면 그 변화는 아주 사소한 곳에서 시작됐다.

차도영은 늘 바빴다.

밤을 새우는 날도 잦았고, 해외 출장은 일정표에 빼곡했다.

나는 그런 그를 조용히 서포트했다.

시댁인 SLP그룹의 대소사를 챙기고, 필요할 때는 언론 인터뷰를 대신 소화했다. 공식 석상에서는 언제나 이상적인 아내 역할을 수행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경영권을 위협하던 숙부가 언론을 이용해 압박해왔을 때, 그는 가진 인맥과 지분을 총동원해 방패가 되어 주었다. 계산 빠른 대응이었고 효과는 확실했다.

언론 앞에서 그는 다정한 남편의 얼굴을 잊지 않았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우리는 다시 한 번 워너비 부부로 회자됐다.

서로의 목적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배우자.

문제는, 그 완벽함이 너무 오래 지속됐다는 점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깨닫기 시작했다.

이 결혼에는 ‘대화’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필요한 말만 했고, 중요한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그날도 그랬다.

집안 행사에 함께 가기 위해 차도영의 회사로 찾아갔던 날이었다.

“아직 마무리가 안 돼서. 미안한데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을까요?”

“내가 일찍 온걸요. 천천히 해요.”

나는 사무실 소파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는 그를 기다렸다.

원래도 잘생긴 외모였지만 업무에 집중하며 미간을 찌푸린 모습은 더욱 근사했다.

홀린 듯 그의 외모를 감상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연지원이 들어왔다.

그녀가 내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내 시선은 커피가 아닌 아직 그녀의 손에 남아있는 다른 잔에 머물렀다.

노란빛으로 우러난 찻물이 찰랑였다.

그녀는 내 시선을 의식한 듯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짓고는 차도영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커피를 너무 많이 드신 것 같아서, 본부장님은 허브차로 준비했어요.”

연지원의 말에 차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업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부드러운 말투. 묘하게 친근한 눈빛.

그들은 나를 의식하지도,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의 일정과 컨디션, 취향을 챙기는 연지원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차도영도, 너무 자연스러웠다.

나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내가 느낀 감정이 과한 건 아닐지 스스로를 검열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나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낮에 보았던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차도영의 옆에 서 있던 연지원. 그의 컨디션을 살뜰히 챙기던 목소리.

‘비서로서 그 정도는 당연한 거지.’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설득했다.

차도영은 감정을 일에 섞는 사람이 아니었다.

연지원은 그런 그가 고른, 능력 있고 효율적인 비서일 뿐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불안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또 다른 날이었다.

그날 나는 예상보다 늦게 퇴근했다.

회의가 길어졌고, 불필요한 말들이 오갔다.

모든 업무를 마치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 열한 시를 훌쩍 넘긴 뒤였다.

현관 불이 켜졌다.

신발을 벗기 위해 고개를 숙이던 나는 그대로 멈춰 섰다.

차도영의 구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늘 같은 자리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검은 구두.

그리고 그 옆에.

낯선 구두 한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검은색 애나멜 하이힐.

광택이 있는 가느다란 굽, 앞코가 날렵하게 빠진 디자인.

이건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절대 내 것이 될 수 없는 구두였다.

나는 하이힐을 거의 신지 않는다.

업무가 많은 날에는 단화를 선호했고, 공식석당에서도 굳이 불편한 디자인을 고집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구두는 달랐다.

날렵했고, 화려했고, 그리고 지나치게 여성적이었다.

차도영의 구두 옆에 너무 자연스럽게 놓여있었다,

마치 이 집에 익숙한 사람의 것처럼,

‘처음 온 게 아닌가?’

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쿵.

바깥으로 소리가 들릴 것처럼 크게 뛰었다.

그리고 아주 또렷하게, 계약서의 마지막 조항이 떠올랐다.

‘외도는 명백한 계약 위반으로 간주한다.’

나는 한동안 그 구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차도영의 구두 옆에 놓인 검은색 애나멜 하이힐.

그 구두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시간을 신고, 내가 모르는 그의 곁에 서 있던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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