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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화

작가: 진해랑
last update 게시일: 2026-05-21 15:58:34

“몇 번이나 맞선을 주선했지만 모두 거절했지.”

“...”

“그래서 더 궁금하더군요. 무슨 이유로 이런 결정을 했는지.”

나는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려 그린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업적 판단이었습니다.”

그녀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업이라.”

“네.”

나는 찻잔을 들며 조근조근 말했다.

“이 결혼에서 도영 씨가 손해 볼 일은 없습니다.”

“확신이 있나 보네요.”

“있습니다.”

그녀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도영이에게는 원래 생각해 둔 사람이 있었어요.”

“...”

“아주 오랫동안 지켜본 아이였죠.”

그녀의 말투가 나를 대할 때와 달리 조금 부드러워졌다.

“집안도 좋고, 교육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도영이를 이해하는 아이예요.”

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자존심을 건드리려는 의도가 빤히 보이는데 원하는 반응을 해줄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님, 결혼은 도영 씨가 하는 겁니다.”

그녀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리곤 탁, 소리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난 신 대표 같은 사람을 아주 잘 알아요. 뭐든 계산기부터 두드리고, 손익 따져 움직이죠.”

“도영 씨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신 대표, 참... 재미있는 사람이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하나만 기억해 두세요. SLP의 며느리는 아무나 되는 자리가 아닙니다.”

나는 잠깐 숨을 고르며 그녀를 바라봤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온 겁니다. 아무나 앉을 수 없는 자리라면, 아무나 밀어낼 수도 없는 자리일 테니까요.”

나는 보란 듯이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런 나를 보는 한정숙 여사의 이마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실망시키는 일, 없을 거예요”

그게 대화의 끝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식 날이 밝았다.

***

결혼식은 예상했던 대로 성대하게 열렸다.

재계 인사들이 대부분 참석했고, 언론도 빠지지 않았다.

호텔 로비에는 아침부터 취재진이 가득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웨딩드레스를 정리했다.

신부대기실에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스타일리스트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표님, 긴장되세요?”

누군가 물었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흔히 하는 진한 신부화장을 한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평소보다는 진했다. 선분홍 립스틱에 긴 속눈썹, 길게 뻗은 아이라인과 복숭아빛 블러셔.

거울 속 내가 낯설었다.

“아니요.”

솔직히 긴장되지는 않았다. 남들에게는 특별하고 소중한 이벤트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그저 하나의 프로젝트에 불과했으니까.

결혼식은 사랑의 증명이 아니라, 가장 공개적인 계약 발표였다.

하객은 증인이었고, 카메라는 공증인이었다.

그때 식이 시작된다는 신호가 들어왔다.

드레스 단장을 도와주던 이들이 뒤로 물러났다.

나는 전투에 나서듯 표정을 가다듬었다. 입꼬리를 올리고 눈웃음을 지었다. 어느 누가 봐도 설레어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도록.

문이 열리고 버진로드가 길게 이어졌다.

양옆에는 양가 가족들을 비롯해 재계 주요 인사들이 앉아 있었다.

게 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모두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혼주석에 앉은 숙부가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멀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에 겨워하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를 보고 있자니 꾸며내지 않아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버진로드 끝에 서있는 차도영을 봤다.

검은 턱시도를 입은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잘생겼고 멋있었다.

어느새 그의 앞에 다다르자 차도영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맞잡은 두 손에 열기란 없었다.

주례가 결혼 서약을 읽기 시작했다.

“인생의 긴 여정 속에서 때로는 흔들릴 수도 있겠지만, 결코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서로에게 확신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형식적인 문장들이 이어졌다.

“신랑에게 묻겠습니다. 아내의 성취와 기쁨을 나의 것처럼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남편이 되겠습니까.”

“네.”

“이번에는 신부에게 묻겠습니다. 남편의 슬픔과 고난에 기꺼이 쉼터가 되어 주고 헌신하는 아내가 되겠습니까.”

“예.”

우리는 준비된 대로 대답했다.

“이로써 두 사람은 부부라는 소중하고 특별한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두 사람의 앞날에 축복만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반지를 교환하는 순간, 플래시가 한꺼번에 터졌다.

***

결혼식의 모든 절차를 마치고 나오는 길,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일제히 달려왔다.

“차도영 대표님, 한 말씀만 해주시죠.”

나를 에스코트하던 도영이 걸음을 멈추고 기자들을 보았다.

“오랜 연인 관계였다는 게 정말입니까?”

기자의 질문에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도영이 팔짱을 풀더니 내 손을 잡았다. 아주 자연스럽고 퍽 다정해 보이는 동작이었다.

“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사탕을 물고 있는 것처럼 달콤했다.

“첫사랑이었습니다. 끝사랑이기도 할테고.”

그 순간,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다.

나는 반짝이는 플래시에 눈조차 뜨지 못한 채 작게 웃었다.

‘연기 잘하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거짓말은 너무 그럴듯해서 잠깐 숨이 막혔다.

도영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내 볼에 입술이 닿을락 말락했다. 아마도 기자들의 눈에는 입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대표님.”

그가 작게 속삭였다. 그의 뜨거운 입김이 볼에 닿자 뒷목을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어색해도 참으세요. 이 정도는 해야 믿을 테니까.”

맞잡은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도영은 빙긋 웃으며 내게서 떨어졌다.

“계약서에 없는 서비스네요.”

“추가 비용은 청구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어울리지 않는 능청에 나는 푸스스, 웃어버렸다.

정말이지 완벽한 결혼식이었다.

완벽한 드레스.

완벽한 서약.

완벽한 미소.

그리고 완벽한 거짓말.

그때의 나는 몰랐다.

사람은 가끔, 너무 오래 연기한 감정을 진짜라고 착각하게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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