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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

Author: 진해랑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19 20:55:45

3년 전, 차도영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던 날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아침부터 회색 구름이 서울 위를 짓누르고 있었고,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하루 종일 이어졌다.

당시 나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로 인한 백화점 그랑 팔레(Grand Palais)의 경영권 분쟁에 휘말린 상태였다.

아버지가 쓰러진 건 예고도 없이 찾아온 심근경색 때문이었다.

어제까지 멀쩡히 회사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 다음 날 영안실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에 경영권 싸움이 시작됐다.

숙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노골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주주들을 하나씩 찾아다니며 설득했고, 언론이는 익명으로 제보가 쏟아지며 나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경영 경험 없는 20대 대표>

<부친 후광으로 앉은 낙하산 경영>

<그랑 팔레 경영권 분쟁 조짐>

기사 제목을 읽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무능한 대표라는 프레임은 아주 빠르게 퍼졌고 여론은 회복이 안 될 정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나는 회의실에서 그 기사들을 스크린으로 보며 웃고 싶었다.

그 기사들이 얼마나 정교하게 짜여 있는지 알아서.

누군가 돈을 썼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분명 우리 집안 사람 중 하나였다.

“주주 세 명이 이미 전무님 쪽으로 붙었습니다.”

비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어두웠다.

“은행에서도 담보 재검토 요청이 왔습니다.”

나는 웃었다.

전부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숙부가 짠 판은 노골적이었다.

“채은아.”

주주 총회 전날, 그가 말했다.

“경영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야.”

“그래서요?”

“지금이라도 전문 경영인을 세우는 게 회사에도 좋고, 너한테도 좋아.”

전문 경영인.

그 말의 뜻은 간단했다.

네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소리였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숙부가 말하는 전문 경영인이 누구죠?”

“주주들이 결정하겠지.”

이미 정해진 대답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수백억 원대의 상속세가 발목을 잡았다.

그 숫자는 단순한 금액이 아니었다.

지분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랑 팔레는 그대로 숙부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지분 구조 자료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감정에 매달릴 상황이 아니었다.

이건 전쟁이었다.

그리고 전쟁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차도영.

노드 리테일(node Retail) 본부장.

국내 최대 유통 체인을 사실상 운영하는 남자.

그는 SLP그룹 차남이라는 배경을 가졌지만, 그룹 타이틀 없이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재벌가 차남. 하지만 누구보다 냉정한 사업가.

언론은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SLP그룹에서 가장 계산이 빠른 남자.’

냉정하고 계산적이며 무엇보다 스캔들이 없었다.

그는 ‘결혼’이라는 리스크를 가장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남자였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그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채은입니다. 차 대표님과 미팅 가능할까요?”

“...용건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개인적인 제안입니다. 아마도 차 대표님이 요즘 가장 고민하고 있는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날 저녁, 나는 비서가 아닌 차도영 본인에게 직접 연락을 받았다.

***

SLP 본사 최상층.

차승구 회장의 집무실은 지나치게 넓었다.

벽면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어 서울의 빌딩 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 풍경을 등지고 차승구 회장이 앉아 있었다.

차도영은 마치 벌을 서듯이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의자에 앉으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

차승구 회장은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네 결혼을 진행하려 한다.”

차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차승구 회장은 서류 하나를 밀었다.

“진성그룹 장녀다.”

도영의 시선이 잠깐 서류로 향했다.

사진 속 여자는 단정하게 웃고 있었다.

차승구 회장이 말했다.

“지금 SLP가 해외 사업 확장하려면 진성물류가 필요해.”

잠깐 침묵이 흘렀다.

“너도 이제 그룹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지.”

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차승구 회장의 눈이 한껏 올라갔다.

“싫다는 뜻이냐.”

역시나 답은 없었다.

“여전히 우유부단하군.”

실망감이 어린 목소리에 도영의 표정이 굳었다.

“넌 아직도 모른다.”

차승구 회장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결혼은 감정으로 하는 게 아니다.”

잠깐 눈이 마주쳤다. 차승구 회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거래다.”

도영은 잠깐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거래라면 더더욱 제가 고르겠습니다. 팔리는 쪽이 아니라, 사는 쪽에 서고 싶어서요.”

차승구 회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건방지군.”

잠깐 정적이 흘렀다. 차승구 회장이 서류를 덮었다.

“네가 고르는 결혼이라고 해서, 네 결혼이 되는 건 아니다.”

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승구 회장은 그런 그를 잠깐 노려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나가봐.”

도영은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그런데 문을 나오는 순간 뒤에서 차승구 회장의 말이 따라왔다.

“그래도 결국 결혼은 하게 될 거다.”

걸음이 잠깐 멈췄다.

“넌 혼자서 판을 뒤집을 만큼 강하지 않거든.”

도영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문이 닫혔다.

분명 실내인데도 복도 공기가 차가웠다.

도영은 잠깐 멈춰 섰다. 유리창 밖으로 서울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결혼은 거래다.’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도영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결혼은 대부분 거래였다.

다만, 그 거래를 누가 결정하느냐의 문제일 뿐.

“대표님.”

비서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도영이 고개를 돌렸다.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말해요.”

비서는 잠깐 망설였다.

“조금 전 연락이 왔습니다.”

“누구죠.”

“그랑 팔레 신채은 대표님입니다.”

도영의 눈이 잠깐 멈췄다.

“신채은?”

그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최근들어 재계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였던 탓이다.

“용건은?”

“직접 만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본부장님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도영이 웃었다. 아주 짧게.

“재미있군.”

그는 잠깐 생각했다.

“연락처 줘요.”

“직접 연락하실 생각이십니까?”

도영은 은근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비서는 곧바로 연락처를 넘겼다.

도영은 잠깐 그 번호를 내려다봤다. 아주 잠깐.

그리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렸다.

“신채은입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궁지에 몰려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차도영입니다.”

예기치 못했던 모양인지 상대방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빨리 연락 주셨네요.”

“미적지근한 성격이 못되어서.”

“네.”

“그나저나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하셨던데요.”

“맞아요.”

“그래서 언제 시간 됩니까?”

수화기 너머로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오늘 저녁은요?”

도영은 잠깐 웃었다.

궁지에 몰린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빠른 대답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좋습니다.”

그는 유리창 너머의 서울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는 감옥처럼 보이던 도시가, 이상하게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

“장소는 제가 정하죠.”

“그러세요.”

차분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대신 조건은 제가 정할게요.”

도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순간 그는 알았다.

신채은은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거래를 하러 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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