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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화

Author: 진해랑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1 08:00:33

재계 탑으로 꼽히는 SLP그룹답게 본가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이미 그 규모는 짐작됐다.

높은 담벼락이 사방을 길게 둘러싸고 있었고, 정문에는 검은 철문으로 된 거대한 대문이 버티고 서 있었다.

대문을 지키고 선 경호원들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정제되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차 안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차가 안으로 들어서자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온 것 같았다.

정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단순히 ‘넓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잘 다듬어진 나무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사계절 내내 관리되는 듯한 잔디가 부드러운 융단처럼 펼쳐져 있었다. 조경은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소박하지도 않았다. 계산된 균형 속에서 조용한 위압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정원 한가운데에는 큰 분수대가 있었다.

하얀 석조 분수에서 물줄기가 부드럽게 떨어지고 있었고, 그 뒤쪽으로는 석조 가제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짙은 초록 덩굴이 기둥을 타고 올라가 있어 마치 오래된 영화 세트장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는 그 정원을 가로질러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 후 본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3층짜리 저택이었다.

외관은 화려하기보다는 묵직한 인상이었다. 밝은 석재로 지어진 건물은 세월이 쌓일수록 더 단단해질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본채를 중심으로 양옆에는 별도의 건물이 각각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머무는 건물과 경호원들이 상주하는 건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정한 별채 같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이 집이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되는지 알 수 있었다.

차가 현관 앞에 멈췄다.

문이 열리자 내부의 공기가 느껴졌다.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내가 살고있는 그랑 팔레 본가도 규모가 작지 않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완벽히 압도되는 것만 같았다.

현관을 들어서자 높은 천장이 시야를 압도했다. 대리석 바닥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넓은 홀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응접실과 접견실이 이어져 있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공간들로 채워진 1층이었다.

사용인이 조용히 설명했다.

“사모님께서는 3층에 계십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인의 설명에 따르면, 3층은 SLP그룹 회장 부부가, 2층은 차도영과 그의 형인 차윤영이 사용한다고 했다.

설명을 듣는 동안에도 나는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

벽에는 오래된 그림들이 걸려있었고, 가구는 하나같이 묵직했다. 유행을 타는 장식은 거의 없었다. 대신 오래 두고 써도 가치가 변하지 않을 것들만 놓여 있었다.

‘이 집… 진짜 재벌은 다르다 이건가.’

사용인은 나를 응접실 문 앞까지 안내했다.

문이 열리자 소문의 응접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문턱을 넘으며 잠시 걸음을 늦췄다.

응접실은 넓었다. 단순히 넓은 수준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사람을 작아 보이게 만드는 크기였다.

천장은 유난히 높았고, 창문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시킬 만큼 길게 위로 뻗어 있었다. 낮인데도 커튼이 절반쯤 드리워져 있어 실내에는 부드러운 황금빛 조명이 깔려 있었다.

천장 중앙에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수백 개의 크리스털 조각이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장식이 과할 정도로 화려했지만, 그렇다고 촌스럽지는 않았다. 돈을 들인 티가 노골적으로 나는 종류의 화려함이었다.

바닥에는 두툼한 페르시아 카펫이 깔려 있었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물건이었다. 색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고, 문양은 정교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부드럽게 가라앉는 감촉이 느껴졌다.

벽에는 커다란 유화들이 걸려있었다. 작가 이름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값비싼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풍경화와 초상화가 번갈아 걸려있었는데, 전부 크기가 지나치게 컸다. 마치 이 집의 주인들이 수집한 역사와 권력을 과시하는 것 같았다.

가구 배치 역시 계산되어 있었다.

응접실 한가운데에는 길게 뻗은 소파 세트가 놓여 있었고, 맞은편에는 단정한 싱글 소파 하나가 따로 놓여 있었다. 마치 자리를 구분해 둔 것처럼 보였다.

주인이 앉는 자리와 손님이 앉는 자리를 명확하게.

소파 뒤편에는 낮은 콘솔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고풍스러운 도자기 화병과 은으로 만든 장식품이 놓여 있었다. 장식 하나하나가 절묘하게 눈에 띄었다.

모든 것이 같은 메시지를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정도로 대단하다. 그러니 콧대 높일 생각말고 처신 잘해라.

나는 조용히 둘러봤다.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앉았을 것이다. 사업가, 정치인, 투자자. 아마 처음 이 방에 들어오는 순간 대부분이 긴장했을 것이다.

이 집은 손님을 환대하는 공간조차 권력의 무대로 만들어 놓았다.

기를 죽이려는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라, 오히려 긴장이 풀렸다.

권력은 숨길 때 더 무섭다. 이렇게 과시되는 권력은 읽기 쉬웠다.

하지만 내게는 그다지 큰 타격이 없었다.

우리나라 유일의 6성급 호텔을 보유한 그랑 팔레에서 나고 자랐다. 이보다 더 화려한 곳을 마치 놀이터처럼 휩쓸고 다녔던 나였다.

그때 사용인이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사모님께서 내려오실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 앉았다.

사용인이 내준 차를 마시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의 안주인, 한정숙 여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오래 기다리게 했나요?”

“아닙니다. 집이 아주 인상적이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앉아요.”

그녀는 우아한 손길로 소파를 가리켰다. 그리곤 직접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맞은편에 앉았다.

“신 대표.”

한정숙 여사는 한 번도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만의 불만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눈빛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숨기지 않았으니까.

“네, 어머님.”

그럼에도 나는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다. 솔직히 그녀가 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이 없었다. 물론 나를 마음에 들어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차피 사랑 없이 오로지 계약으로만 이뤄진 관계였으니까,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잔이 채워지기만을 기다렸다. 찻물이 찰랑이며 잔을 채우는 소리가 조용한 응접실에 울렸다.

“도영이는 원래 결혼을 서두르는 아이가 아니었어요.”

한정숙 여사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나를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맞선을 주선했지만 모두 거절했지.”

나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더 궁금하더군요.”

그녀의 시선이 나를 천천히 훑었다.

값을 매기듯이.

쓸모를 따지듯이.

“무슨 이유로 이런 결정을 했는지.”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 자리는 인사가 아니었다.

차도영이 고른 여자가, SLP에 들일 만한 물건인지 확인하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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