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봉투 끝에 손을 얹은 그의 손가락이 보였다.길고 반듯한 손가락은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했지만, 봉투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아주 잠깐의 망설임.그러나 도영은 결국 손을 거두었다.“확인해보고 문제없으면 그대로 진행해도 됩니다.”내가 원했던 대답이었다.사인해서 보내달라고 말한 사람도 나였다.두 달 동안 서명한 서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지친 것도 나였다.이제야 끝낼 수 있게 됐으니 홀가분해야 했다.그런데 가슴 한가운데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기쁘지도, 후련하지도 않았다.오래 기다렸던
메시지를 보낸 뒤에도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화면 위로 내가 보낸 문장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읽었다는 표시가 뜬 것은 오래전이었다.그러나 도영에게서는 아무런 답도 오지 않았다.다시 전화가 걸려 오지도 않았다.혹시 호텔 직원에게 연락하지는 않을까 싶어 프런트에 확인했지만, 그런 일도 없었다.로비에 남아 기다리겠다는 말도, 얼굴만 보고 돌아가겠다는 부탁도 전해지지 않았다.도영은 그대로 호텔을 떠났다.내가 만나지 않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멀리서 지배인이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도영은 자신도 모르게 굳었던 자세를 바로잡았다.내려오겠다고 했을까.아니면 잠시 기다리라고 했을까.기대하지 않으려 했지만 시선은 지배인의 뒤편을 향했다.혹시 채은이 함께 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려는 듯이.그러나 지배인은 혼자였다.조금 전과 다르지 않은 정중한 얼굴이었다.그 표정만으로도 대답을 알 수 있었다.“죄송합니다.”도영의 눈빛이 낮아졌다.“뭐라고 하던가요.”“오늘은 피곤해서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예상했던 대로 거절이었다.
해가 완전히 저문 뒤, 도영은 그랑 팔레 호텔로 향했다.그랑 팔레 호텔 1호점.채은이 결혼 전까지 머물렀던 곳이자, 한국으로 돌아온 뒤 지내고 있는 곳이었다.본사에서는 만남을 거절했지만, 이곳이라면 다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업무 공간이 아닌 곳이라면.하루 일과가 끝나 조금은 여유가 생긴 뒤라면.잠시 시간을 내어줄지 모른다고.그러나 호텔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도영은 자신이 또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로비 직원이 그를 알아보고 곧바로 지배인을 불렀다.잠시 후 다가온 지배인이 정중하게 허
자신은 채은의 영역을 존중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자신이 그어놓은 선이 이제는 채은에게 다가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대표님께 전달할 말씀이 있으시면 제가 전해드리겠습니다.”도영은 닫힌 대표실 문을 바라보았다.“전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비서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직접 해야 하는 말이라서.”전해달라고 맡길 수 있는 말은 없었다.늦었지만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고.이혼할 수 없는 이유가 계약도, 사업도, 아내라는 이름도 아니었다고.자신이 원하는 것은 결혼의 유지
그랑 팔레 본사에 도착한 도영은 곧장 대표실로 향했다.차에서 내리기 전까지도 채은에게 연락해야 하는지 고민했다.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그래도 해야 할 말만큼은 분명했다.늦었지만, 직접 말해야 했다.얼굴을 보면 입을 열 수 있을 것 같았다.채은도 자신이 직접 찾아오면 적어도 대화를 피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그동안은 언제나 그랬으니까.자신이 아무리 늦어도.몇 번이나 약속을 어겨도.채은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거울처럼 반듯한 엘리베이터 문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흐트러진 곳은 없었다.짙은 감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