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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빼앗긴 밤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9 22:59:36

“왜 왕실에서 백 년 전에 없애 버린 몽처의 명패에 네 이름이 적혀 있지?”

채연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는 세자빈의 대역으로 궁에 들어온 평범한 삯바느질꾼이었다. 그런데 불과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왕세자의 꿈속에서 그가 살해당하는 광경을 보았고, 죽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아니라 세자와 똑같이 생긴 또 다른 남자가 현실의 침전에 나타나는 것까지 목격했다.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지경인데, 이제는 백 년 전에 사라진 무언가의 명패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단다.

연우는 눈앞의 명패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모른다?”

“예. 정말 모릅니다. 저는 몽처라는 말도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그런데 네 이름이 새겨져 있어.”

“그러니까 저도 이상하다는 겁니다.”

이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세자의 얼굴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기억한 연우가 황급히 시선을 내리자, 그의 입가에서 낮은 숨이 흘러나왔다.

“내 앞에서 이렇게 말대꾸하는 여자는 처음 보는군.”

“거짓말을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거짓말은 이미 여러 번 했지.”

“그건…….”

“내 아내인 척했고, 이름도 숨겼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으니까.”

연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마지막 말만큼은 억울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현이 명패를 내려놓았다.

작은 나무 조각이 탁자에 닿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연우의 머릿속에 다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린 남자아이였다.

열이 올라 붉어진 뺨, 마른 손목, 잠결에도 누나의 소매를 놓지 않으려던 작은 손.

연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동생.’

집에 두고 온 동생이 있었다.

그런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히 아침까지만 해도 불렀다. 약을 먹이고, 이불을 덮어 주고, 궁에 다녀올 동안 옆집 아주머니 말씀을 잘 들으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그때도 이름을 불렀을 텐데.

어째서.

어째서 이름만 기억나지 않는 걸까.

“……저하.”

연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 동생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뭐?”

“저를 궁으로 데려온 사람들이 제 가족을 조사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분명히 알고 있을 겁니다. 제 동생 이름이 무엇인지…….”

연우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현의 표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연우를 바라보다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밖에 누구 있느냐.”

곧바로 대답이 들렸다.

“예, 저하.”

“내관을 들이라. 그리고 오늘 밤 이 여자를 동궁으로 데려온 자들의 명단을 가져오라.”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연우는 그제야 자신이 세자에게 무슨 부탁을 했는지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서…….”

“사과는 나중에 해.”

이현이 말을 끊었다.

“우선 앉아.”

“괜찮습니다.”

“네 다리가 떨리고 있어.”

연우가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정말이었다.

붉은 치맛자락 아래로 무릎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오히려 힘이 풀렸다. 몸이 기울자 이현이 재빨리 팔을 뻗었다.

단단한 손이 그녀의 팔꿈치를 받쳤다.

“고집도 정도껏 부려.”

연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손이 닿은 자리에 온기가 번졌다. 조금 전 어둠 속에서 허리를 감싸던 팔과 같은 체온이었다. 꿈에서 수없이 죽는 사람의 몸이 이렇게 따뜻하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현은 연우를 침상 옆 낮은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 앞에 무릎을 굽혔다.

“저, 저하?”

연우가 기겁했다.

왕세자가 자신 앞에 몸을 낮추다니.

“움직이지 마.”

“아니, 저하께서 이러시면…….”

“손목.”

그가 짧게 말했다.

“보여 줘.”

연우는 반사적으로 손을 감췄다.

그러자 이현이 움직임을 멈췄다.

“싫으면 억지로 보지 않겠다.”

연우는 그를 내려다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참 뒤, 조심스럽게 소매를 걷었다.

붉은 자국이 있었다.

꿈속에서 한소명이 붙잡았던 자리였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랐다.

다섯 손가락 모양의 자국 사이로 아주 가느다란 검은 선이 생겨 있었다. 마치 피부 아래에 검은 실을 집어넣은 것처럼.

이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언제 생겼지?”

“꿈에서…… 세자빈 마마께서 붙잡으셨습니다.”

“소명이?”

“예.”

그는 잠시 침묵했다.

“소명은 지금 꿈속에 있지 않아.”

연우가 고개를 들 뻔했다.

“……예?”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하지만 분명히 보았습니다.”

“어떤 모습이었지?”

연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창백한 얼굴, 젖은 머리카락, 떨리는 손. 그리고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두려워하던 눈빛.

“저를 보시고 놀라셨습니다. 제가 그곳에 오면 안 된다고 하셨고요.”

“그 외에는?”

“누군가 저를 불렀다고…….”

연우는 말을 멈췄다.

소명은 분명히 말했다.

자신이 부른 것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저하.”

연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저를 궁으로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겠습니다.”

이현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왜?”

“그 사람이 저를 저하의 꿈속으로 들어가게 만든 것 같습니다.”

“무슨 근거로?”

연우는 치맛단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붉은 비단을 뒤집었다.

“이것 때문입니다.”

금실 사이에 숨겨진 작은 글씨가 드러났다.

채연우.

그 아래에 수놓인 경고.

나 대신 그의 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현의 손이 멈췄다.

그는 한동안 그 글씨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물었다.

“이걸 언제 발견했지?”

“침전에 들어오기 전입니다.”

“왜 말하지 않았어?”

“말씀드릴 틈이 없었습니다.”

“내가 여러 번 물었을 텐데.”

“저하께서는 제 이름부터 물으셨습니다.”

“…….”

“그리고 면사를 걷으려고 하셨고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현이 짧게 웃었다.

“내 잘못이라는 건가?”

“전부는 아닙니다.”

“일부는?”

“……조금은요.”

그는 어이없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 다시 글씨를 살폈다.

“이건 소명의 글씨가 아니야.”

연우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급히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아십니까?”

“소명은 자수를 놓지 못해.”

“전혀요?”

“바늘을 잡으면 손부터 다치는 사람이지.”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수놓았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이현은 치맛단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하지만 소명은 자신의 옷에 다른 사람이 손대는 걸 싫어했어. 특히 이 예복은 혼례 이후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았지.”

연우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런데 이 옷에 제 이름이 있습니다.”

“그래.”

“저를 만나지도 않은 분의 옷에요.”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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