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뇌물 검안관의 딸. 아버지는 그렇게 불리며 섬에서 죽었다. 강은설은 아버지가 쓴 마지막 검안서를 되찾기 위해, 상투를 틀고 «강은석»이 되어 운경 검안소의 조수가 된다. 가짜 멍, 가짜 부목, 위조 문서 — 은설의 손끝은 거짓말하는 상처를 놓치지 않는다. 그런데 새로 온 검안소 제조, 의강대군이 첫날부터 이상하다. 조수들 옷을 전부 목까지 올라오는 것으로 바꾸고, 은석만 서고 다락에서 재우고, 목욕간이 비는 시각을 혼잣말처럼 흘린다. “내 눈엔 검안 조수다.” 그는 다 알면서, 모른 척한다. (80화 완결)
View More3월 5일 아침, 은설은 운경 검안소 앞마당에 선 서른한 명의 줄 끝에 섰다.
상투 아래로 망건을 단단히 묶었다. 목에는 무명 띠를 두르고 깃을 턱 밑까지 세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천이 목을 스쳤다. 은설은 엄지로 오른손 검지 끝의 작은 흉을 문질렀다.
앞마당 한쪽에는 검안 평상이 두 개 놓여 있었다. 그 옆에 물동이와 무명천, 붓과 먹이 가지런했다. 식초 냄새가 옅게 났다.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은 평상과 대청 사이에 줄을 맞춰 섰다. 다들 손에 붓을 들었거나 종이를 안고 있었다.
검안소는 형조의 일을 돕는 곳이었다. 산 사람의 상처와 죽은 이의 흔적, 사건에 딸린 문서를 살펴 검안서를 썼다. 검안 조수는 검안관 곁에서 상처를 재고 기록을 옮겼다. 오늘은 그 조수를 뽑는 시험이었다.
은설은 발끝을 내려다봤다. 신발 앞코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집을 나설 때 어머니가 털어 주었는데, 길을 걸어오는 동안 다시 묻은 모양이었다.
“강은석 맞지?”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은설이 돌아보자 둥근 얼굴의 젊은 사내가 볶은 콩 주머니를 내밀었다. 허리춤에 주머니 하나를 더 매달고 있었다.
“양차돌이야. 나도 지원했어.”
“강은석입니다.”
차돌은 은설의 깃을 한번 보고는 주머니 입구를 벌렸다.
“긴장하면 배고프잖아. 하나 먹어.”
은설은 주머니에서 콩 한 알을 집었다. 손가락 끝에 볶은 콩의 따뜻한 기운이 남았다.
“고마워요.”
“나도 긴장돼. 아까부터 한 자리를 밟고 있거든.”
차돌은 제 발밑을 내려다봤다. 흙바닥에 신발 자국이 겹쳐 있었다. 은설은 콩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고소한 냄새가 입안에 퍼졌다. 긴장한 탓에 바짝 말랐던 입술이 조금 풀렸다.
대청 앞에는 검안관 셋이 앉아 있었다. 맨 가운데의 늙은 검안관은 불을 붙이지 않은 담뱃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 옆의 마른 검안관은 흰 토시를 걷어 올리고 종이를 살폈다. 마지막으로 인장을 닦는 마른 사내가 앉아 있었다. 비단 헝겊이 인장 위를 몇 번이고 오갔다.
그보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검은 철릭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키가 컸고, 상투에 옥관자를 꽂았다. 왼쪽 눈썹 끝에 작은 흉이 보였다. 그의 왼손에는 뿔 활깍지가 끼워져 있었다.
사람들 사이로 낮은 말이 오갔다.
“오늘부터 제조를 맡으신 의강대군마마라더군.”
“대군마마가 시험을 보러 나오셨다고?”
“검안소 제조는 감독하는 자리라지만, 직접 나오시는 건 드문 일이지.”
은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검은 철릭의 자락이 시야에 들어왔다가 멈췄다. 대군의 시선이 지원자들을 차례로 훑었다. 은설의 목깃에도 잠깐 머물렀지만, 곧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대청 앞의 검안관이 종이를 접었다.
“시험은 산 사람을 살펴보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쓰고, 근거를 대라. 남의 말을 옮기지 말고, 네가 본 것을 적어라.”
지원자들 사이에서 붓을 쥔 손이 움직였다.
“사람을 다치게 한 일이 있었는지 살피는 시험이다. 다친 이의 말도 듣되, 말만으로 판정하지 마라.”
맨 가운데의 늙은 검안관이 담뱃대를 탁자에 두 번 두드렸다.
“앞으로 나오게.”
마당 한쪽에서 사내 하나가 걸어 나왔다. 소매를 걷은 팔에 보랏빛 멍이 셋 있었다. 사내는 검안관들 앞에 서서 어깨를 움츠렸다.
“이웃 사내에게 맞았습니다. 어제 저녁, 길에서 시비가 붙었습니다. 팔을 맞고 등을 걷어차였습니다.”
사내의 말은 급하지 않았다. 양손을 모은 채 눈을 내리깔았다. 팔에는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멍이 두 개, 그보다 조금 작은 멍이 하나 있었다. 소매가 내려오지 않도록 옷깃을 눌렀다.
“등도 보이게.”
사내는 잠시 망설이다가 옷을 벗어 어깨에 걸쳤다. 등에 멍 하나가 드러났다. 팔에 난 자국 셋과 색이 같았다.
검안관들은 지원자들을 바라봤다.
“차례대로 살펴라. 한 사람씩 나와 손을 대고, 본 것을 기록해라. 서두르지 말게.”
첫 지원자가 평상 앞으로 나갔다. 사내의 팔을 훑어보고 등을 확인했다. 손끝으로 멍 가장자리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이내 종이에 붓을 댔다.
은설은 그가 적은 글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지원자도 팔과 등을 차례로 살핀 뒤, 붓을 들어 종이를 채웠다. 사내는 팔을 내주고 등을 보였다. 지원자들은 멍을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은설은 줄이 조금씩 줄어드는 동안 손바닥에 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콩 주머니를 쥔 차돌이 옆에서 속삭였다.
“저 멍, 다친 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지?”
“아직 모르겠어요.”
차돌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다물었다. 은설은 그 말이 편했다. 아직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할 이유는 없었다.
앞에 선 지원자가 팔을 한 번 누르고 물러났다. 사내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몸을 피하지 않았다. 지원자는 종이에 몇 줄을 적었다.
은설의 차례가 왔다.
평상 앞에 선 사내는 은설을 내려다봤다. 은설은 숨을 고른 뒤 허리를 숙였다.
“팔을 가까이서 보겠습니다.”
사내가 팔을 내밀었다. 은설은 손을 대기 전에 먼저 눈으로 살폈다. 멍 셋은 모두 보랏빛이었다. 가장자리가 또렷했고, 번진 흔적이 없었다. 크기는 조금씩 달랐지만 색과 모양에는 차이가 없었다. 팔의 멍 셋과 등의 멍 하나는 모두 보랏빛이었다.
은설은 몸을 낮춰 팔과 등을 번갈아 살폈다. 사내의 등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살갗에서는 식초 냄새나 술 냄새 대신 씻지 않은 천 냄새가 났다.
‘멍이 아니라면.’
은설은 사내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어제 저녁에 맞았다고 했다. 정말 그랬다면 팔의 멍과 등의 멍이 모두 한 색으로 올라오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은설은 엄지로 멍 하나를 눌렀다. 사내의 어깨가 굳었다. 피부는 따뜻했다. 손끝에는 단단한 부기나 열이 느껴지지 않았다. 눌린 자리의 색도 달라지지 않았다.
은설은 무명천을 꺼내 식초를 묻혔다.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잠시 닦아 보겠습니다.”
사내가 팔을 당기려 했지만, 은설은 손을 거두고 눈을 들었다. 사내는 팔을 다시 내밀었다.
은설이 천으로 멍 가장자리를 문지르자 보랏빛이 천에 묻어났다. 손끝으로 천을 살짝 펼쳤다. 보라색 자국은 멍의 윤곽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린 멍이다.’
은설은 천을 놓고 검안관들을 바라봤다.
“꼭두서니 물이에요.”
사내가 급히 팔을 내렸다. 대청 아래의 사내가 눈을 치켜떴다.
“무슨 소리야? 맞아서 생긴 멍이라고 했잖아.”
은설은 식초 묻은 천을 들어 보였다.
“살갗을 누를 때 색이 빠지지 않았어요. 멍은 피부 아래에 생기니까 천에 묻어나지 않습니다. 보랏빛이 천에 묻었습니다. 바른 물감입니다.”
마른 검안관이 흰 토시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그는 사내의 팔을 살폈다. 멍 세 곳을 차례로 눌렀고, 등에 난 자국도 확인했다. 손끝이 멈췄다가 떨어졌다.
“팔과 등의 자국은 색이 일치하는군. 가장자리도 지나치게 또렷하고.”
사내는 옷을 끌어당겨 어깨를 덮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맞은 건 맞은 겁니다.”
“그렇다면 몸에 남은 흔적을 다시 살피면 되겠지.”
은설은 사내의 팔을 가리켰다. “제가 본 것은 멍이 아닙니다. 맞았다고 하셨지만, 이 자국으로는 그 말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앞마당 가장자리로 발을 옮기려는 순간, 마당을 지키던 사령 둘이 길을 막았다. 사내는 한쪽으로 몸을 틀었지만, 한 사령이 팔을 잡았다.
“놓으시오.”
“시험장 안에서 거짓 고발을 하려 했으니 확인이 끝날 때까지 가야 합니다.”
사내는 팔을 뿌리치지 못했다.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검안관이 식초 묻은 천을 받아 살폈다.
은설은 종이를 받아 붓을 들었다. 손가락 끝에 천의 축축함이 남아 있었다. 그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 글자를 천천히 적었다.
『검안 쪽지 — 팔에 보랏빛 자국 셋, 등에 하나. 색과 가장자리 같음. 눌러도 변색 없음. 식초 묻힌 천에 보라색 묻어남. 꼭두서니 물로 그린 자국.』
은설이 붓을 내려놓자, 마른 검안관이 종이를 받아 읽었다. 늙은 검안관은 처음 지원자의 기록부터 차례로 살폈다. 그의 담뱃대가 탁자 위에 놓였다.
“다른 이들은 모두 맞아서 생긴 멍이라고 적었군.”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한 지원자가 손에 든 종이를 내려다봤다. 다른 지원자는 붓끝을 닦았다.
“강은석.”
늙은 검안관이 은설의 이름을 불렀다.
“무엇을 근거로 거짓이라 했나?”
“색만으로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눌렀을 때 색이 그대로였고, 식초 묻힌 천에 자국이 옮겨갔습니다.”
“사내가 맞았다는 말은?”
“그 말만으로는 맞았다고 판정할 수 없습니다.”
검안관은 은설이 쓴 종이를 다시 내려다봤다. 말없이 한 줄을 따라가던 눈이 마지막 글자에서 멈췄다.
“좋다. 다음.”
다음 지원자가 앞으로 나왔다. 사내가 사령들과 마당 밖으로 옮겨진 뒤에도 시험은 이어졌다. 은설은 줄 옆에서 차돌의 차례를 기다렸다. 차돌은 볶은 콩 주머니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손을 바꿔 쥐었다.
“너무 세게 쥐면 콩이 부서져요.”
“안 쥐면 손이 떨려서.”
차돌은 주머니를 열어 손바닥을 폈다. 콩 하나가 손금 사이에 끼어 있었다. 은설은 그 콩을 집어 차돌의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그럼 손을 펴요. 붓을 잡아야 하잖아요.”
차돌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맞는 말이네.”
그때 검은 철릭을 입은 사내가 대청에서 내려왔다. 시험을 지켜보던 의강대군이었다. 그는 지원자들 앞을 지나 대청의 늙은 검안관에게 짧게 말을 건넸다. 목소리는 가까운 사람만 들을 정도로 낮았다. 대군이 손에 낀 활깍지를 한 번 돌렸다.
은설은 고개를 숙인 채 차돌의 손을 보았다. 차돌은 손바닥을 옷에 문지르고 있었다. 대군의 그림자가 두 사람 앞에서 멈췄다가 지나갔다.
차돌의 차례가 되자 그는 숨을 들이마시고 평상 앞으로 나갔다. 차돌은 사내의 팔을 먼저 살피고, 손끝으로 가장자리와 가운데를 나눠 짚었다. 등을 볼 때는 사내의 옷이 걸리지 않게 한쪽에 접어 두었다. 확인을 마친 뒤 차돌은 종이에 적었다.
“왼팔 바깥쪽의 자국은 색이 옅고 가장자리가 흐립니다. 등을 먼저 맞았다는 말과 맞지 않습니다. 다만 팔을 부딪친 흔적일 수 있습니다.”
검안관은 기록을 읽고 차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돌이 은설 옆으로 돌아왔을 때, 차돌의 어깨가 천천히 내려갔다.
“끝났어?”
“끝난 것 같아요.”
“콩은 남았어?”
차돌은 주머니를 털어 보였다. 빈 주머니 안에서 콩 부스러기 두 알이 나왔다. 은설은 부스러기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시험을 마치면 국밥을 먹어요.”
“내가 사?”
“붙으면요.”
차돌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대청 기둥을 넘은 뒤, 마지막 지원자가 종이를 냈다. 검안관 셋은 기록을 차례로 살폈다. 지원자들은 마당을 떠나지 못하고 평상 앞에 모여 있었다. 은설은 손에 남은 식초 냄새를 맡았다. 무명천을 빨아 두었지만 손가락 끝에서 냄새가 빠지지 않았다.
대군은 대청 옆에 서서 지원자들을 바라봤다. 은설과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대신 은설이 손을 내려 소매에 감추는 순간, 대군의 시선이 목깃에 잠깐 머물렀다. 은설은 엄지로 검지 끝의 흉을 눌렀다.
늙은 검안관이 명단을 펼쳤다.
“오늘 뽑힌 사람은 두 명이다.”
지원자들 사이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차돌은 숨을 삼켰다. 은설은 발끝을 모았다.
“강은석.”
은설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양차돌.”
차돌이 은설 옆에 섰다. 차돌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검안관이 두 사람의 종이를 각각 내밀었다.
“기록은 보관하겠다. 검안은 눈으로 본 것을 적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 네가 확인하지 않은 것은 쓰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은설이 고개를 숙였다. 차돌도 곧 따라 고개를 숙였다.
검안관들은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앞마당에 남은 지원자들은 하나둘 흩어졌다. 차돌은 빈 콩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가 은설을 돌아봤다.
“국밥, 꼭 먹자.”
은설이 대답하기 전에 검은 철릭의 사내가 가까이 왔다. 앞마당에 남은 사람들의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대군은 은설의 식초 묻은 손을 보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흰 손수건을 내밀었다. 손은 닿지 않았다.
은설은 손수건을 받았다. 천에 닿은 손끝이 축축했다. 대군의 시선이 은설의 높은 깃에 잠깐 머물렀다.
“이름.”
“강은석입니다.”
“강은석. 내일부터 나와.”
(1화 끝)
3월 5일 아침, 의강대군 궁의 마당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혼례상을 놓을 자리가 비워졌고, 군밤 화로에는 불이 꺼진 채 잿가루만 남아 있었다.은설은 마당 끝에 서서 소매 안쪽을 살폈다. 혼례복 소매에 넣어 둔 대나무 검안척이 팔 안쪽에 닿았다. 손잡이의 치헌 두 글자는 오래 만져 닳았지만, 손끝으로는 여전히 읽을 수 있었다. 끝의 깨진 귀퉁이도 그대로였다.“불편하지 않니?”어머니 오씨가 은설의 옷깃을 여미며 물었다. 골무 낀 손이 깃 끝을 한 번 눌렀다. 평소보다 화려한 옷감이 목에 닿았지만 숨이 막히지는 않았다.“괜찮아요.”“검안척까지 넣었는데?”“소매가 조금 무거운 정도예요.”어머니는 은설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눈가가 붉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은설은 어머니의 손등에 남은 바늘자국을 보았다. 옷을 지으며 생긴 자국이었다.“오늘은 검안하러 가는 날이 아니야.”“알아요.”“그래도 그걸 두고 오라고는 안 할게.”은설은 소매 안으로 손을 넣어 검안척을 짚었다. 대나무가 손바닥에 닿았다.“아버지 이름을 되찾고 나서도 계속 가지고 다녔어요. 오늘도 같이 있고 싶어요.”“그래. 네 아버지도 보고 계실 거야.”어머니는 은설의 어깨에 붙은 실밥을 떼어 냈다. 손끝이 잠시 머물렀다가 떨어졌다.“밥은 먹었니?”“조금 먹었어요.”“조금 말고.”“이따가 먹을게요.”“혼례를 올리기 전에도 먹고, 올린 뒤에도 먹어. 배고프면 어지럽다.”은설은 작게 웃었다. 어머니는 그 웃음을 보고 나서야 손을 내렸다.마당 건너편에서 차돌이 코를 훌쩍였다. 볶은 콩 주머니는 허리춤에 없었다. 혼례복을 입은 차돌은 손에 접은 천을 들고 있었지만, 눈가를 닦느라 몇 번이나 놓칠 뻔했다.“차돌 씨, 벌써 울어요?”“안 울었습니다.”차돌은 눈을 닦고 은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뺨에 남아 있었다.“그럼 눈에 뭐가 들어갔어요?”“바람이 들어갔나 봅니다.”“바람이 눈에서 나와요?”“오늘은 그런가 봐요.”백이겸이 옆에서 낮게 웃었다. 깨끗한 흰 토
서고 다락 창가에 놓인 등잔불이 종이 위를 비추고 있었다. 은설은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지 살핀 뒤, 펼쳐진 문서를 내려다봤다.의강대군 현승휘가 가져온 문서는 접힌 자국이 가지런했다. 가장자리에 손때가 묻었고, 끝에는 붉은 관인이 찍혀 있었다. 은설은 종이를 건네받지 않고 먼저 눈으로 훑었다. 전하의 허락을 받아 두었다는 승휘의 말이 문서 안에 적혀 있었다.“확인해도 돼요?”“그래.”승휘는 문서를 창가 쪽으로 조금 더 밀었다. 은설은 관인부터 살폈다. 붉은 선은 한쪽으로 번지지 않았고, 종이 결을 따라 고르게 찍혀 있었다. 글씨 사이에 먹을 덧댄 자국도 없었다. 접힌 자리에는 찢기거나 풀린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은설은 손끝으로 종이 모서리를 눌렀다. 얇은 종이 아래에 다른 종이를 붙인 흔적은 없었다. 마지막 줄의 글씨도 먹빛이 앞부분과 다르지 않았다.‘있는 그대로 적힌 문서야.’“손상은 없어요. 글씨를 덧쓴 흔적도 없고요.”“그럼 믿어도 되겠나?”“문서는요.”은설은 문서에서 눈을 들었다.“마마의 말은 직접 확인해야죠.”승휘의 왼손 엄지에 낀 뿔 활깍지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는 문서를 거두지 않았다.“전하께서 허락하셨어.”“그건 들었어요.”“내가 혼례를 청하는 일에 반대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네가 검안관으로 일하는 것도 막지 않겠다고.”“제가 아직 대답하지 않았는데요.”“알아.”그는 짧게 답했다. 은설은 문서에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승휘를 보았다.“허락을 받으셨다고 해서 제가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아니에요.”“그래.”“전하께서 괜찮다고 하셨으니 저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셨다면 곤란해요.”“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활깍지가 멈췄다. 승휘는 문서에서 손을 떼고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았다.“전하의 허락은 내 쪽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이라 받았다. 네 대답은 네가 해야 해.”은설은 종이 끝을 한 번 더 눌렀다. 확인을 마친 문서가 손끝에 걸리지 않고 평평하게 놓였다. 그녀는 문서를 승휘 쪽으로 밀어 주었다.“검안관
도필승의 발소리가 문밖에서 멀어지자, 은설은 책상 위에 놓인 담뱃대를 바라봤다.“검안관님.”차돌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은설은 고개를 들었다. 차돌은 말을 잇기 전에 볶은 콩 주머니의 매듭부터 묶었다.“오늘부터 정말 혼자 판정하는 거예요?”“혼자는 아니야. 다들 보고 들은 걸 함께 말해 주잖아.”“그래도 마지막에 이름 쓰는 건 검안관님이네요.”“그러니까 더 확인해야지.”은설은 검안 상자를 책상 위에 올렸다. 뚜껑을 열어 안에 든 물건을 살폈다. 식초 묻힌 무명천과 붓, 먹, 종이를 차례로 확인했다. 대나무 검안척은 상자 안쪽에 놓여 있었다. 손잡이 쪽에 새긴 치헌 두 글자가 닳지 않고 남아 있었다.“밝은방에 새 검안관이 있다는 소문이 벌써 난 모양입니다.”백이겸이 서고에서 돌아오며 말했다. 손에는 접힌 종이가 들려 있었다.“형조 사령이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마를 다쳤고, 아버지와 이웃이 서로 다른 말을 합니다.”은설은 검안척을 상자에서 꺼냈다.“다쳤다고 해서 바로 상처부터 볼 수는 없어요. 아이가 괜찮은지 먼저 물어봐 주세요.”백이겸은 문 쪽으로 가서 밖에 있던 사령에게 짧게 말했다. 곧 아이를 안은 사내와 중년 여인이 밝은방 안으로 들어왔다. 사령은 두 사람 뒤에 서서 문을 닫았다.사내는 아이를 품에서 내려 평상에 앉혔다. 아이의 이마에는 무명천이 대어져 있었다. 천 가장자리에 붉은 자국이 조금 번져 있었다. 아이는 울음을 멈췄지만 입술을 꽉 다문 채 아버지 소매를 잡고 있었다.“아이가 넘어졌다고 하셨습니까?”은설이 물었다.“네. 집 안에서 넘어졌습니다. 제가 옆에 있었고요.”사내는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중년 여인은 바로 대꾸하지 않고 아이를 살폈다.“저는 마당에서 들어오는 걸 봤습니다. 이마를 다친 뒤였어요. 누가 손을 댄 건 아닌지 확인해 달라고 했습니다.”“저는 아이를 때린 적 없습니다.”사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이의 어깨가 움찔했다. 은설은 사내를 보았다.“목소리를 낮춰 주세요. 아이가 놀랐습니다
2월 20일, 검안소 앞마당에는 아침부터 사람이 모여 있었다.은설은 밝은방 문턱에 서서 옷깃을 매만졌다. 남장할 때 목에 두르던 무명 띠는 하지 않았다. 머리는 단정히 묶었고, 깃은 목을 가리지 않게 여며져 있었다. 오른손 검지 끝의 작은 흉이 그대로 드러났다.검안 상자는 평상 위에 놓여 있었다. 뚜껑을 열자 식초 묻힌 무명천과 붓, 먹이 제자리에 있었다. 아버지의 대나무 검안척은 안쪽에 들어 있었다. 은설은 손잡이에 새겨진 두 글자를 손끝으로 짚고 상자 뚜껑을 닫았다.막례는 옆에서 소매를 걷고 있었다. 늘 하던 대로 아무 말 없이 앞마당을 살피다가, 모인 다모들 쪽으로 가서 자리를 정리했다. 은설이 시선을 보내자 막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긴장돼요?”막례가 다가와 물었다.“조금요.”“손이 차가워요.”은설은 제 손바닥을 펴 보았다. 차갑지는 않았다. 손끝만 굳어 있었다.“책상에 앉아 붓을 들면 괜찮아질 거예요.”“그랬으면 좋겠네요.”막례는 은설의 손가락을 한 번 바라보다가 자기 소매를 내렸다.“오늘은 제가 앞에 설게요.”“막례 씨가 앞에 서는 날이죠.”“그래도 아가씨가 먼저 서야 해요.”은설은 대답하지 않고 검안 상자 손잡이를 잡았다. 오동나무 표면은 손바닥에 익숙하게 닿았다.◑검안소 문이 열리고 형조에서 나온 관리가 들어왔다. 손에는 봉한 문서와 나무 패가 들려 있었다. 검안소 사람들이 앞마당에 모였다. 도필승은 담뱃대를 입에서 빼 손에 들었고, 백이겸은 흰 토시를 곧게 걷어 올렸다.의강대군 현승휘는 제조 방 앞에 서 있었다. 검은 철릭의 소매 끝에 왼손의 뿔 활깍지가 보였다. 은설이 그쪽을 보자 승휘는 활깍지를 한 번 돌렸다.형조 관리가 봉한 문서를 내밀었다.“전하의 명으로 검안관과 검안 다모의 임명을 전합니다.”앞마당이 조용해졌다. 은설은 문서의 붉은 봉인을 살폈다. 봉랍이 한쪽으로 번지지 않았고, 종이의 가장자리도 찢기지 않았다. 관리가 봉을 풀자 종이에서 마른 먹 냄새가 났다.은설은 문서가 펼쳐지는 동안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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