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장 검안관의 정체를 대군만 모른 척한다

남장 검안관의 정체를 대군만 모른 척한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By:  JinoOngoi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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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 검안관의 딸. 아버지는 그렇게 불리며 섬에서 죽었다. 강은설은 아버지가 쓴 마지막 검안서를 되찾기 위해, 상투를 틀고 «강은석»이 되어 운경 검안소의 조수가 된다. 가짜 멍, 가짜 부목, 위조 문서 — 은설의 손끝은 거짓말하는 상처를 놓치지 않는다. 그런데 새로 온 검안소 제조, 의강대군이 첫날부터 이상하다. 조수들 옷을 전부 목까지 올라오는 것으로 바꾸고, 은석만 서고 다락에서 재우고, 목욕간이 비는 시각을 혼잣말처럼 흘린다. “내 눈엔 검안 조수다.” 그는 다 알면서, 모른 척한다. (80화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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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가짜 멍을 지우는 날

3월 5일 아침, 은설은 운경 검안소 앞마당에 선 서른한 명의 줄 끝에 섰다.

상투 아래로 망건을 단단히 묶었다. 목에는 무명 띠를 두르고 깃을 턱 밑까지 세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천이 목을 스쳤다. 은설은 엄지로 오른손 검지 끝의 작은 흉을 문질렀다.

앞마당 한쪽에는 검안 평상이 두 개 놓여 있었다. 그 옆에 물동이와 무명천, 붓과 먹이 가지런했다. 식초 냄새가 옅게 났다.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은 평상과 대청 사이에 줄을 맞춰 섰다. 다들 손에 붓을 들었거나 종이를 안고 있었다.

검안소는 형조의 일을 돕는 곳이었다. 산 사람의 상처와 죽은 이의 흔적, 사건에 딸린 문서를 살펴 검안서를 썼다. 검안 조수는 검안관 곁에서 상처를 재고 기록을 옮겼다. 오늘은 그 조수를 뽑는 시험이었다.

은설은 발끝을 내려다봤다. 신발 앞코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집을 나설 때 어머니가 털어 주었는데, 길을 걸어오는 동안 다시 묻은 모양이었다.

“강은석 맞지?”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은설이 돌아보자 둥근 얼굴의 젊은 사내가 볶은 콩 주머니를 내밀었다. 허리춤에 주머니 하나를 더 매달고 있었다.

“양차돌이야. 나도 지원했어.”

“강은석입니다.”

차돌은 은설의 깃을 한번 보고는 주머니 입구를 벌렸다.

“긴장하면 배고프잖아. 하나 먹어.”

은설은 주머니에서 콩 한 알을 집었다. 손가락 끝에 볶은 콩의 따뜻한 기운이 남았다.

“고마워요.”

“나도 긴장돼. 아까부터 한 자리를 밟고 있거든.”

차돌은 제 발밑을 내려다봤다. 흙바닥에 신발 자국이 겹쳐 있었다. 은설은 콩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고소한 냄새가 입안에 퍼졌다. 긴장한 탓에 바짝 말랐던 입술이 조금 풀렸다.

대청 앞에는 검안관 셋이 앉아 있었다. 맨 가운데의 늙은 검안관은 불을 붙이지 않은 담뱃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 옆의 마른 검안관은 흰 토시를 걷어 올리고 종이를 살폈다. 마지막으로 인장을 닦는 마른 사내가 앉아 있었다. 비단 헝겊이 인장 위를 몇 번이고 오갔다.

그보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검은 철릭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키가 컸고, 상투에 옥관자를 꽂았다. 왼쪽 눈썹 끝에 작은 흉이 보였다. 그의 왼손에는 뿔 활깍지가 끼워져 있었다.

사람들 사이로 낮은 말이 오갔다.

“오늘부터 제조를 맡으신 의강대군마마라더군.”

“대군마마가 시험을 보러 나오셨다고?”

“검안소 제조는 감독하는 자리라지만, 직접 나오시는 건 드문 일이지.”

은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검은 철릭의 자락이 시야에 들어왔다가 멈췄다. 대군의 시선이 지원자들을 차례로 훑었다. 은설의 목깃에도 잠깐 머물렀지만, 곧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대청 앞의 검안관이 종이를 접었다.

“시험은 산 사람을 살펴보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쓰고, 근거를 대라. 남의 말을 옮기지 말고, 네가 본 것을 적어라.”

지원자들 사이에서 붓을 쥔 손이 움직였다.

“사람을 다치게 한 일이 있었는지 살피는 시험이다. 다친 이의 말도 듣되, 말만으로 판정하지 마라.”

맨 가운데의 늙은 검안관이 담뱃대를 탁자에 두 번 두드렸다.

“앞으로 나오게.”

마당 한쪽에서 사내 하나가 걸어 나왔다. 소매를 걷은 팔에 보랏빛 멍이 셋 있었다. 사내는 검안관들 앞에 서서 어깨를 움츠렸다.

“이웃 사내에게 맞았습니다. 어제 저녁, 길에서 시비가 붙었습니다. 팔을 맞고 등을 걷어차였습니다.”

사내의 말은 급하지 않았다. 양손을 모은 채 눈을 내리깔았다. 팔에는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멍이 두 개, 그보다 조금 작은 멍이 하나 있었다. 소매가 내려오지 않도록 옷깃을 눌렀다.

“등도 보이게.”

사내는 잠시 망설이다가 옷을 벗어 어깨에 걸쳤다. 등에 멍 하나가 드러났다. 팔에 난 자국 셋과 색이 같았다.

검안관들은 지원자들을 바라봤다.

“차례대로 살펴라. 한 사람씩 나와 손을 대고, 본 것을 기록해라. 서두르지 말게.”

첫 지원자가 평상 앞으로 나갔다. 사내의 팔을 훑어보고 등을 확인했다. 손끝으로 멍 가장자리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이내 종이에 붓을 댔다.

은설은 그가 적은 글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지원자도 팔과 등을 차례로 살핀 뒤, 붓을 들어 종이를 채웠다. 사내는 팔을 내주고 등을 보였다. 지원자들은 멍을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은설은 줄이 조금씩 줄어드는 동안 손바닥에 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콩 주머니를 쥔 차돌이 옆에서 속삭였다.

“저 멍, 다친 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지?”

“아직 모르겠어요.”

차돌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다물었다. 은설은 그 말이 편했다. 아직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할 이유는 없었다.

앞에 선 지원자가 팔을 한 번 누르고 물러났다. 사내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몸을 피하지 않았다. 지원자는 종이에 몇 줄을 적었다.

은설의 차례가 왔다.

평상 앞에 선 사내는 은설을 내려다봤다. 은설은 숨을 고른 뒤 허리를 숙였다.

“팔을 가까이서 보겠습니다.”

사내가 팔을 내밀었다. 은설은 손을 대기 전에 먼저 눈으로 살폈다. 멍 셋은 모두 보랏빛이었다. 가장자리가 또렷했고, 번진 흔적이 없었다. 크기는 조금씩 달랐지만 색과 모양에는 차이가 없었다. 팔의 멍 셋과 등의 멍 하나는 모두 보랏빛이었다.

은설은 몸을 낮춰 팔과 등을 번갈아 살폈다. 사내의 등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살갗에서는 식초 냄새나 술 냄새 대신 씻지 않은 천 냄새가 났다.

‘멍이 아니라면.’

은설은 사내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어제 저녁에 맞았다고 했다. 정말 그랬다면 팔의 멍과 등의 멍이 모두 한 색으로 올라오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은설은 엄지로 멍 하나를 눌렀다. 사내의 어깨가 굳었다. 피부는 따뜻했다. 손끝에는 단단한 부기나 열이 느껴지지 않았다. 눌린 자리의 색도 달라지지 않았다.

은설은 무명천을 꺼내 식초를 묻혔다.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잠시 닦아 보겠습니다.”

사내가 팔을 당기려 했지만, 은설은 손을 거두고 눈을 들었다. 사내는 팔을 다시 내밀었다.

은설이 천으로 멍 가장자리를 문지르자 보랏빛이 천에 묻어났다. 손끝으로 천을 살짝 펼쳤다. 보라색 자국은 멍의 윤곽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린 멍이다.’

은설은 천을 놓고 검안관들을 바라봤다.

“꼭두서니 물이에요.”

사내가 급히 팔을 내렸다. 대청 아래의 사내가 눈을 치켜떴다.

“무슨 소리야? 맞아서 생긴 멍이라고 했잖아.”

은설은 식초 묻은 천을 들어 보였다.

“살갗을 누를 때 색이 빠지지 않았어요. 멍은 피부 아래에 생기니까 천에 묻어나지 않습니다. 보랏빛이 천에 묻었습니다. 바른 물감입니다.”

마른 검안관이 흰 토시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그는 사내의 팔을 살폈다. 멍 세 곳을 차례로 눌렀고, 등에 난 자국도 확인했다. 손끝이 멈췄다가 떨어졌다.

“팔과 등의 자국은 색이 일치하는군. 가장자리도 지나치게 또렷하고.”

사내는 옷을 끌어당겨 어깨를 덮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맞은 건 맞은 겁니다.”

“그렇다면 몸에 남은 흔적을 다시 살피면 되겠지.”

은설은 사내의 팔을 가리켰다. “제가 본 것은 멍이 아닙니다. 맞았다고 하셨지만, 이 자국으로는 그 말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앞마당 가장자리로 발을 옮기려는 순간, 마당을 지키던 사령 둘이 길을 막았다. 사내는 한쪽으로 몸을 틀었지만, 한 사령이 팔을 잡았다.

“놓으시오.”

“시험장 안에서 거짓 고발을 하려 했으니 확인이 끝날 때까지 가야 합니다.”

사내는 팔을 뿌리치지 못했다.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검안관이 식초 묻은 천을 받아 살폈다.

은설은 종이를 받아 붓을 들었다. 손가락 끝에 천의 축축함이 남아 있었다. 그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 글자를 천천히 적었다.

『검안 쪽지 — 팔에 보랏빛 자국 셋, 등에 하나. 색과 가장자리 같음. 눌러도 변색 없음. 식초 묻힌 천에 보라색 묻어남. 꼭두서니 물로 그린 자국.』

은설이 붓을 내려놓자, 마른 검안관이 종이를 받아 읽었다. 늙은 검안관은 처음 지원자의 기록부터 차례로 살폈다. 그의 담뱃대가 탁자 위에 놓였다.

“다른 이들은 모두 맞아서 생긴 멍이라고 적었군.”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한 지원자가 손에 든 종이를 내려다봤다. 다른 지원자는 붓끝을 닦았다.

“강은석.”

늙은 검안관이 은설의 이름을 불렀다.

“무엇을 근거로 거짓이라 했나?”

“색만으로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눌렀을 때 색이 그대로였고, 식초 묻힌 천에 자국이 옮겨갔습니다.”

“사내가 맞았다는 말은?”

“그 말만으로는 맞았다고 판정할 수 없습니다.”

검안관은 은설이 쓴 종이를 다시 내려다봤다. 말없이 한 줄을 따라가던 눈이 마지막 글자에서 멈췄다.

“좋다. 다음.”

다음 지원자가 앞으로 나왔다. 사내가 사령들과 마당 밖으로 옮겨진 뒤에도 시험은 이어졌다. 은설은 줄 옆에서 차돌의 차례를 기다렸다. 차돌은 볶은 콩 주머니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손을 바꿔 쥐었다.

“너무 세게 쥐면 콩이 부서져요.”

“안 쥐면 손이 떨려서.”

차돌은 주머니를 열어 손바닥을 폈다. 콩 하나가 손금 사이에 끼어 있었다. 은설은 그 콩을 집어 차돌의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그럼 손을 펴요. 붓을 잡아야 하잖아요.”

차돌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맞는 말이네.”

그때 검은 철릭을 입은 사내가 대청에서 내려왔다. 시험을 지켜보던 의강대군이었다. 그는 지원자들 앞을 지나 대청의 늙은 검안관에게 짧게 말을 건넸다. 목소리는 가까운 사람만 들을 정도로 낮았다. 대군이 손에 낀 활깍지를 한 번 돌렸다.

은설은 고개를 숙인 채 차돌의 손을 보았다. 차돌은 손바닥을 옷에 문지르고 있었다. 대군의 그림자가 두 사람 앞에서 멈췄다가 지나갔다.

차돌의 차례가 되자 그는 숨을 들이마시고 평상 앞으로 나갔다. 차돌은 사내의 팔을 먼저 살피고, 손끝으로 가장자리와 가운데를 나눠 짚었다. 등을 볼 때는 사내의 옷이 걸리지 않게 한쪽에 접어 두었다. 확인을 마친 뒤 차돌은 종이에 적었다.

“왼팔 바깥쪽의 자국은 색이 옅고 가장자리가 흐립니다. 등을 먼저 맞았다는 말과 맞지 않습니다. 다만 팔을 부딪친 흔적일 수 있습니다.”

검안관은 기록을 읽고 차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돌이 은설 옆으로 돌아왔을 때, 차돌의 어깨가 천천히 내려갔다.

“끝났어?”

“끝난 것 같아요.”

“콩은 남았어?”

차돌은 주머니를 털어 보였다. 빈 주머니 안에서 콩 부스러기 두 알이 나왔다. 은설은 부스러기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시험을 마치면 국밥을 먹어요.”

“내가 사?”

“붙으면요.”

차돌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대청 기둥을 넘은 뒤, 마지막 지원자가 종이를 냈다. 검안관 셋은 기록을 차례로 살폈다. 지원자들은 마당을 떠나지 못하고 평상 앞에 모여 있었다. 은설은 손에 남은 식초 냄새를 맡았다. 무명천을 빨아 두었지만 손가락 끝에서 냄새가 빠지지 않았다.

대군은 대청 옆에 서서 지원자들을 바라봤다. 은설과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대신 은설이 손을 내려 소매에 감추는 순간, 대군의 시선이 목깃에 잠깐 머물렀다. 은설은 엄지로 검지 끝의 흉을 눌렀다.

늙은 검안관이 명단을 펼쳤다.

“오늘 뽑힌 사람은 두 명이다.”

지원자들 사이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차돌은 숨을 삼켰다. 은설은 발끝을 모았다.

“강은석.”

은설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양차돌.”

차돌이 은설 옆에 섰다. 차돌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검안관이 두 사람의 종이를 각각 내밀었다.

“기록은 보관하겠다. 검안은 눈으로 본 것을 적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 네가 확인하지 않은 것은 쓰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은설이 고개를 숙였다. 차돌도 곧 따라 고개를 숙였다.

검안관들은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앞마당에 남은 지원자들은 하나둘 흩어졌다. 차돌은 빈 콩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가 은설을 돌아봤다.

“국밥, 꼭 먹자.”

은설이 대답하기 전에 검은 철릭의 사내가 가까이 왔다. 앞마당에 남은 사람들의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대군은 은설의 식초 묻은 손을 보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흰 손수건을 내밀었다. 손은 닿지 않았다.

은설은 손수건을 받았다. 천에 닿은 손끝이 축축했다. 대군의 시선이 은설의 높은 깃에 잠깐 머물렀다.

“이름.”

“강은석입니다.”

“강은석. 내일부터 나와.”

(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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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가짜 멍을 지우는 날
3월 5일 아침, 은설은 운경 검안소 앞마당에 선 서른한 명의 줄 끝에 섰다.상투 아래로 망건을 단단히 묶었다. 목에는 무명 띠를 두르고 깃을 턱 밑까지 세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천이 목을 스쳤다. 은설은 엄지로 오른손 검지 끝의 작은 흉을 문질렀다.앞마당 한쪽에는 검안 평상이 두 개 놓여 있었다. 그 옆에 물동이와 무명천, 붓과 먹이 가지런했다. 식초 냄새가 옅게 났다.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은 평상과 대청 사이에 줄을 맞춰 섰다. 다들 손에 붓을 들었거나 종이를 안고 있었다.검안소는 형조의 일을 돕는 곳이었다. 산 사람의 상처와 죽은 이의 흔적, 사건에 딸린 문서를 살펴 검안서를 썼다. 검안 조수는 검안관 곁에서 상처를 재고 기록을 옮겼다. 오늘은 그 조수를 뽑는 시험이었다.은설은 발끝을 내려다봤다. 신발 앞코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집을 나설 때 어머니가 털어 주었는데, 길을 걸어오는 동안 다시 묻은 모양이었다.“강은석 맞지?”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은설이 돌아보자 둥근 얼굴의 젊은 사내가 볶은 콩 주머니를 내밀었다. 허리춤에 주머니 하나를 더 매달고 있었다.“양차돌이야. 나도 지원했어.”“강은석입니다.”차돌은 은설의 깃을 한번 보고는 주머니 입구를 벌렸다.“긴장하면 배고프잖아. 하나 먹어.”은설은 주머니에서 콩 한 알을 집었다. 손가락 끝에 볶은 콩의 따뜻한 기운이 남았다.“고마워요.”“나도 긴장돼. 아까부터 한 자리를 밟고 있거든.”차돌은 제 발밑을 내려다봤다. 흙바닥에 신발 자국이 겹쳐 있었다. 은설은 콩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고소한 냄새가 입안에 퍼졌다. 긴장한 탓에 바짝 말랐던 입술이 조금 풀렸다.대청 앞에는 검안관 셋이 앉아 있었다. 맨 가운데의 늙은 검안관은 불을 붙이지 않은 담뱃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 옆의 마른 검안관은 흰 토시를 걷어 올리고 종이를 살폈다. 마지막으로 인장을 닦는 마른 사내가 앉아 있었다. 비단 헝겊이 인장 위를 몇 번이고 오갔다.그보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검은 철릭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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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서고에서 잠드는 날
다른 지원자들이 마당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차돌이 빈 콩 주머니를 허리춤에 넣고 곁으로 왔다.“진짜 뽑혔네. 형, 우리 이제 검안소 조수야.”“그러게요.”은설은 손수건을 펴 보았다. 천 한쪽에 흐린 얼룩이 번졌다. 빌린 물건을 돌려줘야 할지, 따로 빨아야 할지 잠깐 생각하다 조심히 접었다.“저녁 먹고 집에 가야 해요.”“국밥은?”“내일부터 먹어요.”차돌은 빈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럼 내일은 내가 살게. 오늘은 집에 가서 밥부터 먹어야겠다.”은설은 대답 대신 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안 상자를 멘 어깨가 뻐근했다. 앞마당을 나설 때 식초 냄새가 코끝에 남아 있었다.◑우물목 골목의 대문을 열자 부엌에서 바느질 바늘이 천을 드나드는 소리가 들렸다. 은설의 어머니 오씨는 방바닥에 저고리를 펴 놓고 있었다. 골무 낀 손이 목깃을 접었다 펴며 옷감을 눌렀다.“왔니?”“네.”은설은 검안 상자를 방 한쪽에 내려놓았다. 어머니는 대답보다 먼저 은설의 목깃을 살폈다. 앞마당에서 입었던 옷은 먼지가 묻고 깃 끝이 조금 눌려 있었다.“시험은 어땠어?”“붙었어요.”어머니의 손이 멈췄다. 바늘이 천에 박힌 채 흔들리지 않았다.“둘이 뽑혔어요. 양차돌이라는 조수도 같이 붙었고요.”어머니는 바늘을 빼고 저고리를 무릎 위에 올렸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은설의 소매 끝을 집어 먼지를 털었다.“밥은 먹었니?”“아직요.”“시험을 보고도 밥을 안 먹었어?”“끝나고 바로 왔어요.”어머니는 부엌에 가서 밥상을 차렸다. 국은 남은 것을 데웠고, 밥은 작은 공기에 담았다. 은설은 손을 씻고 어머니 맞은편에 앉았다. 시험 내내 굳게 다물었던 턱이 풀리자 밥이 목에 걸리지 않고 넘어갔다.어머니는 은설이 밥을 먹는 동안 목깃을 다시 손봤다. 깃을 여며 주던 손끝이 목 아래 무명 띠에 닿았다.“이 띠는 오래 조이면 숨이 막혀.”“알아요.”“아는 아이가 하루 종일 이러고 다니니.”은설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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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부목을 푸는 날
차돌은 밝은방 문턱에 걸터앉아 은설의 소매를 살폈다. 새로 받은 옷은 목깃이 턱 밑까지 올라왔고, 소매 끝도 손목을 넉넉히 덮었다. 차돌은 제 깃을 잡아당기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이 옷은 편하긴 한데, 목이 답답하지 않아?”“처음엔 그랬어요. 이제는 괜찮아요.”“나는 아직도 걸을 때마다 깃이 턱에 닿아. 네 옷은 더 높은데 어떻게 괜찮아?”은설은 대답 대신 검안 상자에서 무명천을 꺼냈다. 식초 냄새가 천에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차돌은 소매를 내려다보다가 은설의 얼굴을 살폈다.“다락은 어때? 혼자 자니까 조용하지?”“조용해요.”“창문이 하나라며. 거기서 밤하늘도 보여?”“창가에 서면 보여요. 책장이 가리지 않는 쪽으로 보면 별이 몇 개 떠요.”차돌의 눈이 커졌다.“정말? 나는 숙소에서 누우면 천장만 보이는데.”“다락 창이 작아서 많이 보이진 않아요. 그래도 날이 맑으면 별이 보여요.”“거기서 잠들면 별 보다가 목이 아프겠다.”“고개를 오래 들고 있으면 아파요.”“그럼 누워서 보면 되잖아.”“창이 높아서 누우면 안 보여요.”차돌은 아쉬운 기색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은설은 무명천을 가지런히 접어 상자에 넣었다. 차돌이 다시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밝은방 바깥에서 사령의 목소리가 들렸다.“검안관님, 다친 사람이 왔습니다.”은설은 검안 상자 뚜껑을 닫았다. 방 안에는 넓은 창으로 아침 빛이 들어왔다. 벽 쪽 평상과 낮은 탁자에는 붓과 먹, 종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검안관 도필승이 담뱃대를 입에 문 채 문 쪽을 향했다.“들여보내.”두 사령 사이로 사내가 들어왔다. 한쪽 다리에 나무 부목을 대고 무명천으로 묶은 채였다. 사내의 걸음이 짧았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뒤따라온 이는 잘 다린 옷을 입은 중년 사내였다. 허리에 찬 패와 옷차림으로 보아 머슴의 주인으로 보였다.은설은 탁자 옆으로 물러섰다. 차돌도 문턱에서 일어났다.“소에 받혀 다리가 부러졌다고 합니다.”사령이 말했다. 부목을 한 사내가 두 손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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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목욕간을 피하는 날
은설은 백이겸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먼 친척입니다.”“강치헌 검안관의 먼 친척?”“네.”백이겸은 은설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흰 토시를 걷어 올린 손이 종이 모서리를 눌렀다.“그럼 그분에게 검안을 배웠나?”“집에서 배웠습니다.”은설은 더 말하지 않았다. 백이겸도 질문을 거두지는 않았지만, 검안서 끝에 먹을 찍고 종이를 덮었다.◑3월 12일, 서고 아래층에서 서책을 옮기던 은설에게 사령이 왔다.“찬방으로 가야 합니다. 혼자 살던 노인이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은설은 옮기던 책을 책장에 밀어 넣고 검안 상자를 챙겼다. 서고 문을 나서자 도필승이 기다리고 있었다. 담뱃대는 입에 물려 있었지만 불은 붙지 않았다.“첫 찬방 일이네. 내 곁에서 보고 적게.”“네.”차돌도 상자 옆에 섰다. 은설은 차돌의 허리춤에서 콩 주머니가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차돌은 입을 열었다가 도필승의 눈을 보고는 검안 상자 손잡이만 붙잡았다.세 사람은 서쪽 찬방으로 갔다. 문을 여니 얼음 창고 쪽에서 찬 기운이 밀려왔다. 식초와 젖은 천 냄새가 섞여 있었다. 평상 위에는 흰 천이 덮여 있었고, 곁에는 사령이 서 있었다.도필승이 천을 걷었다. 누운 이는 나이가 든 사내였다. 얼굴빛은 창백했고, 손은 배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피가 보이거나 옷이 흐트러진 곳은 없었다.“집에서 발견됐다고 했지?”도필승이 사령에게 물었다.“네. 이웃이 아침에 찾아갔다가 발견했습니다. 사내와 자주 다퉜다는 이유로 이웃을 의심하고 있습니다.”“다툰 일은 누가 봤나?”“이웃들이 들었다고 합니다. 사내가 돈을 빌렸고, 갚지 못해 말다툼을 했답니다.”도필승은 사령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은설 쪽으로 몸을 돌렸다.“먼저 네가 살펴봐.”은설은 검안 상자를 열었다. 천 아래에서 먹과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났다. 붓과 종이를 꺼내 탁자 위에 놓고, 식초 묻힌 무명천을 옆에 두었다.‘눈으로 보고, 손으로 확인하자.’은설은 시신의 얼굴부터 살폈다. 입술은 닫혀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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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도장을 견주는 날
형조 마당에 낮은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한쪽에는 땅문서 두 장과 관청 인장이 찍힌 장부가 나란히 놓였고, 그 앞에 과부와 시동생이 마주 서 있었다. 과부의 어린 딸은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은 채 문서만 바라봤다.은설은 검안 상자를 탁자 아래에 내려놓았다. 대나무 검안척의 깨진 모서리가 상자 안쪽에 닿았다. 오늘은 사람의 상처 대신 종이와 도장을 살필 차례였다.“먼저 양쪽에서 내신 문서를 따로 보겠습니다.”은설이 말했다. 탁자 곁에 선 형조 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시동생이 낸 문서에는 형님이 땅을 넘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과부 쪽 문서에는 남편이 땅을 물려준 것으로 되어 있고요. 어느 문서가 맞는지 확인해 주세요.”“제 문서가 맞습니다.”시동생은 곧바로 자기 쪽 종이를 내밀었다. 손톱 가장자리에 흙이 묻어 있었고, 손에는 종이를 세게 쥔 자국이 남아 있었다.“형님이 생전에 제게 땅을 맡겼습니다. 아들이 없으니 집안 땅을 제가 관리하는 게 맞습니다. 문서에도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남편은 땅을 넘긴 적이 없습니다.”과부는 낡은 종이를 두 손으로 받쳤다. 종이 모서리가 여러 번 접혀 부드러워져 있었다.“남편이 죽기 전에 제게 준 문서입니다. 제가 땅을 지켜 왔고, 시동생이 가져간 적도 없습니다.”“문서가 오래됐다고 다 진짜는 아니죠.”시동생이 말했다.과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의 손이 치맛자락을 더 단단히 잡았다.은설은 먼저 과부가 낸 문서를 펼쳤다. 종이 표면에 잔주름이 많았고, 손끝에 오래 접었다 편 결이 걸렸다. 먹은 군데군데 흐릿했지만, 글자 아래 번진 흔적은 없었다. 붉은 도장은 한쪽이 옅어져 있었다.은설은 문서를 들어 빛이 드는 쪽으로 기울였다. 종이 속의 결은 고르게 이어졌다. 가장자리에 묵은 먼지가 붙어 있었지만, 새로 잘라 붙인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이 문서는 오래 보관하셨습니까?”은설이 물었다.“남편이 준 뒤로 장롱 안에 넣어 두었습니다. 땅에 관한 일이 생길까 봐 늘 가지고 다니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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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등잔을 하나 더 켜는 날
은설은 붓을 쥔 채 승휘를 바라봤다. 그의 말은 서고 안에 남아 있었고, 장부 위 먹은 번지지 않은 채 말라 갔다.“장부나 보라고 했잖아요.”은설은 다시 붓을 움직였다. 장부의 칸마다 물품 이름과 수량이 적혀 있었다. 한 줄을 옮겨 적고 나면 다음 줄이 이어졌다. 손끝에 종이의 결이 걸렸지만, 눈은 활자 사이에서 자꾸만 길을 벗어났다.승휘는 아래층 책장에서 장부를 꺼내 다락으로 올렸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은설은 그 줄을 다시 읽고 나서야 적어야 할 글자를 찾았다.“강 조수.”“네.”“그 줄은 이미 적었어.”은설은 붓을 멈췄다. 막 옮겨 쓴 줄을 내려다보니 앞서 적은 글자와 겹쳤다. 손끝에 묻은 먹이 종이 가장자리에 찍혀 있었다.“제가 놓쳤습니다.”“눈은 장부에 있는데 생각은 다른 데 있군.”은설은 붓을 내려놓았다. 승휘는 장부를 쌓아 둔 채 그녀 쪽을 보고 있었다. 눈썹 끝의 작은 흉은 등잔불에 잘 드러나지 않았다.“밤에 장부를 읽으면 글씨가 겹쳐 보여요.”“등잔이 하나라서?”은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등잔 심지가 낮아지면서 다락 한쪽이 어두워졌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없었지만, 묵은 책 냄새가 한데 눌려 코끝에 닿았다.승휘는 다락 계단을 내려갔다. 은설은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장부를 덮었다. 무언가를 찾는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장부 정리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잠시 뒤 승휘가 등잔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은설 맞은편에 등을 놓았다. 불을 붙인 뒤 심지를 조절하고, 한 번 주변을 살폈다. 두 등잔의 빛이 장부 위에 나란히 놓였다.“이제 글씨가 덜 겹치겠네.”“감사합니다.”승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은설은 잠깐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무엇을 찾느냐고 묻지 않았다. 눈에 띄게 자리를 살피면서도, 장부를 덮어 보려 하지 않았다.은설은 새로 밝힌 등잔 쪽으로 장부를 당겼다. 빛이 종이 위에 고르게 닿았다. 겹쳐 보이던 글씨는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바깥에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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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잠만 자는 노인을 깨우는 날
“검안소에서 오신 분들입니까?”객주 문 앞에 선 사내가 은설의 옷깃부터 얼굴까지 훑었다. 손에는 접힌 고발장이 들려 있었다. 종이 모서리가 여러 번 눌린 듯 부드러웠다.“강 조수입니다. 이쪽은 다모 막례고요.”은설이 대답하자 사내는 막례를 한 번 보고 문 안으로 비켜섰다. 다모는 관청에서 여자 몸을 살피고 여자 증인을 맡는 사람이었다. 막례는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말없이 객주 안쪽을 둘러봤다.“아버지가 몇 달째 잠만 주무십니다. 형님은 나이가 들어 정신이 흐려진 거라고 하면서 재산 문서까지 가져갔어요.”사내 뒤에 서 있던 여자가 말했다. 객주 주인의 딸이었다. 눈가가 붉었지만 목소리는 흐트러지지 않았다.“아버지가 깨어 계실 때도 있습니까?”“밥을 드실 때 잠깐 눈을 뜨세요. 그때도 사람을 알아보시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말을 걸면 다시 눈을 감으세요.”“차는 누가 드립니까?”여자가 대답하기 전에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객주에서 늘 내던 차입니다. 아버지는 원래 몸이 약해서 낮에도 자주 주무셨습니다. 나이가 들면 잠이 많아지는 것 아닙니까?”“잠이 많아지는 것과 눈을 뜨기 어려운 건 다르죠.”은설이 말하자 사내는 고발장을 손에 쥐었다.“그걸 여기서 살펴보겠다는 겁니까?”“먼저 아버님을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은설은 오동나무 검안 상자를 안쪽으로 옮겼다. 객주 주인의 딸이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누운 노인과 낮은 탁자, 비어 있는 찻잔이 있었다. 젖은 흙 냄새가 방문 틈으로 들어왔고, 탁자에서는 식은 차 냄새가 났다.노인은 이불을 배까지 덮고 누워 있었다. 은설은 얼굴을 가까이 대지 않고 먼저 숨소리를 들었다. 숨은 일정했다. 얼굴빛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눈꺼풀이 아래로 처져 있었다.“아버님, 제 목소리 들리세요?”딸이 물었다. 노인의 눈꺼풀이 조금 떨렸지만 뜨이지 않았다.“아버지는 며칠째 이랬어요?”“잠깐 눈을 뜨셨다가도 금세 감으세요. 물을 드릴 때는 삼키시지만, 말을 하지는 못하세요.”“오늘 아침에도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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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아버지 도포를 줄이는 날
바늘이 도포 안섶을 뚫고 나왔다. 오씨는 실을 잡아당긴 뒤, 손바닥으로 옷감을 펴 보았다.“여기까지 줄이면 되겠니?”은설은 어머니 앞에 서서 소매 끝을 내려다봤다. 아버지가 입던 도포는 어깨가 넓고 소매가 길었다. 어머니는 몸에 맞게 줄이면서도 안쪽 솔기는 쉽게 뜯지 않았다. 옷감에 밴 묵은 먹 냄새가 가까이에서 났다.“조금만 더 줄여 주세요. 손목을 덮지 않게요.”“그러면 팔을 들었을 때 소매가 올라가.”“검안할 때 거슬리지만 않으면 돼요.”오씨는 대답 대신 도포를 은설의 어깨에 걸쳤다. 은설은 팔을 앞으로 뻗고, 다시 옆으로 들었다. 소매 끝이 손등을 스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천을 접어 핀으로 고정하고 손가락으로 길이를 짚었다.“검안소에서 입을 옷은 따로 있잖니.”“이건 집에서 입을 거예요.”“집에서도 네가 그 옷을 입고 다니면 내가 모를 줄 아니?”은설은 소매를 내려다봤다. 아버지가 입던 옷을 줄여 입는다고 해서 아버지의 자리가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옷을 버릴 수는 없었다. 어머니도 그걸 알면서 한쪽 옷자락을 반듯하게 펴고 있었다.“오늘 장터에 입고 나갈 거니?”“아니요. 조수 옷을 입고 나갈게요.”“쉬는 날에도 관청 옷을 입고 다니고.”“사람들이 알아보면 편하니까요. 물건도 사고, 바로 돌아오면 돼요.”“편한 건 네 쪽 이야기지.”오씨는 바늘을 내려놓고 도포의 어깨선을 살폈다. 오래 입어 해진 곳은 있었지만, 실밥은 단단했다. 은설은 옷감의 접힌 자리를 손끝으로 눌러 보았다. 어깨의 천은 여러 번 세탁해 부드러워졌고, 겨드랑이 안쪽은 땀에 닿은 자리가 조금 뻣뻣했다. 낡은 정도가 부위마다 달랐다.“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입으신 게 언제였을까요.”“네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전이야. 섬으로 가시기 전에도 이 옷은 장롱에 넣어 뒀어.”오씨는 바늘귀에 실을 다시 꿰었다. 엄지에 낀 골무가 바늘을 밀 때마다 짧은 소리를 냈다.“그러니까 그만하자.”은설은 어머니를 바라봤다.“무엇을요?”“검안소 일. 남자 옷을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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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묵 장수를 쫓는 날
곱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설의 소매에 남은 묵 가루를 털어 주는 대신, 좌판 아래에 놓인 보자기를 끌어당겼다.“여기서 말할 일은 아니에요.”곱단이 낮게 말했다. 은설은 더 묻지 않고 장바구니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좌판 사이로 손님들이 오갔다. 묵을 자르던 칼이 나무판에 닿는 소리가 났고, 아이는 보자기 귀퉁이를 접어 놓았다.곱단은 칼을 내려놓고 장터 입구 쪽을 바라봤다. 형조 사령 둘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오고 있었다. 한 사람은 허리춤에 찬 패를 만지작거렸고, 다른 사람은 좌판에 앉은 이들을 훑어봤다. 곱단의 손이 보자기 위에서 멈췄다.“어머니.”아이가 작게 불렀다.곱단은 은설에게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굳어 있던 얼굴이 한층 더 굳었다.“묵은 다 팔았어요.”“아직 남아 있잖아요.”“오늘은 여기까지예요.”사령 하나가 묵 좌판 앞을 지나가며 고개를 돌렸다. 곱단은 말을 끊고 몸을 숙여 판 아래에 놓인 바구니를 끌어냈다. 은설은 사령들이 다른 좌판 쪽으로 지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이 곱단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다만 곱단은 묵판을 천으로 덮고, 칼을 보자기 안에 넣었다.은설은 장바구니를 내려놓았다.“묵 1모 더 주세요.”곱단의 손이 보자기 위에서 멎었다.“아까 사셨잖아요.”“집에서 더 먹을 사람이 있어요.”은설은 일부러 좌판에 적힌 값을 다시 보았다. 묵 1모에 3푼. 앞서 산 것과 다른 묵을 고르는 손님도 있었다. 곱단은 잠시 은설을 보다가 남은 묵을 잘라 보자기에 담았다.“3푼이에요.”은설은 동전을 꺼내 나무판 위에 놓았다. 곱단은 돈을 받지 않고 묵을 밀었다.“아까도 샀는데, 오늘은 그만 사세요.”“이건 제가 사는 거예요.”“사람들 눈에 띄지 말라는 뜻이에요.”곱단의 말은 작았지만 또렷했다. 은설은 동전을 거두지 않았다. 곱단은 입술을 눌렀다가 돈을 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그럼 가져가세요.”은설은 묵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곱단은 다시 좌판 아래를 살폈다. 사령들이 장터 건너편으로 멀어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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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손목을 잡히는 날
은설은 창고 뒤쪽을 돌아 개울가에 섰다. 오동나무 검안 상자의 끈이 어깨를 눌렀다. 소금 창고 세 동은 나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나란히 서 있었다. 문틈마다 흰 가루가 끼어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짠 냄새가 났다.은설은 가장 가까운 창고부터 눈으로 살폈다. 문짝 아래에 소금 자루가 끌린 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개울 쪽 벽에는 젖은 흙이 튀어 말라붙었다. 창고의 뒤편은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날 만큼 좁았다.그녀는 그 길을 천천히 지나 개울 쪽으로 향했다. 발밑 흙은 나루 쪽보다 질었다. 물가로 가까이 갈수록 신발 바닥이 조금씩 잠겼다. 은설은 가장자리의 흙을 발끝으로 건드리지 않고 살폈다. 물에 가까운 곳은 무너져 있었지만, 그 위쪽은 단단했다.개울 폭은 맞은편 둑까지 눈으로 재기 어려울 만큼 넓지는 않았다. 은설은 양쪽 물가를 번갈아 보며 몇 걸음 옮겼다. 한쪽 둑은 완만했고, 다른 쪽은 중간부터 기울기가 급했다. 사람이 물에 빠졌다면 어느 쪽에서 밀려왔을까. 둑 아래까지 스스로 내려갈 수 있었을까.‘여기서 보고서만으로는 모자라.’은설은 검안 상자를 내려놓지 않은 채 개울가를 따라 움직였다. 물이 얕은 곳에는 자갈이 드러나 있었고, 조금 더 안쪽은 흙탕물이 흘렀다. 물가에는 최근에 발을 디딘 흔적이 없었다. 바람에 마른 갈대가 기울어 있었고, 물에 잠긴 뿌리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은설은 손가락으로 뿌리 가까운 흙을 살짝 눌렀다. 겉은 마르고 안쪽은 축축했다. 물이 오르내린 자국인지, 사람이 밟아 눌렀던 흔적인지 단정할 수 없었다. 손끝에 차가운 흙이 묻었다.그녀는 창고 쪽으로 돌아가 문 아래의 끌린 자국을 다시 살폈다. 자국은 1줄이 아니었다. 바닥에 닿은 자루의 모서리가 쓸고 간 자리에 끊긴 흔적이 있었고, 자국 사이사이에는 소금 알갱이가 박혀 있었다. 자루가 나루에서 들어왔는지 창고에서 나갔는지, 흔적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은설은 허리를 굽혀 바닥 가까이 코를 댔다. 짠 냄새가 강했고, 젖은 흙 냄새가 그 아래에 섞여 있었다. 식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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