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말해.”
“비가 내렸습니다.” 이현의 손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연우는 놓치지 않았다. “무너진 동궁전이 있었고요.” 이번에는 그의 손가락이 완전히 굳었다. “저하께서는 피를 흘리고 계셨습니다.” 침묵. “그리고 누군가에게 쫓기고 계셨습니다.” “그만.” 낮은 목소리였다. 연우가 말을 멈췄다. 처음이었다. 이현에게서 명확한 동요를 느낀 것은. “그 꿈.” 그가 천천히 물었다. “끝까지 봤나?” 연우의 머릿속에 검이 떠올랐다. 가슴을 꿰뚫던 칼날. “……예.” “내가 죽었겠군.” 연우의 눈이 커졌다. 놀란 그녀에게 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항상 그러니까.” “항상……이라고요?” “석 달째다.” 연우는 숨을 삼켰다. “매일 밤입니까?” “잠들 때마다.” “그러면 지금까지 계속…….” “죽었지.” 너무 태연해서 오히려 섬뜩했다. “칼에 찔린 적도 있고 목이 졸린 적도 있다. 독을 마신 날도 있었고 물에 빠진 날도 있었어.” 연우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이현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꿈에서 베인 자리에 현실에서도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지.” 연우의 시선이 그의 손으로 향했다. 조금 전 검은 피가 흘렀던 손. 지금은 깨끗했다. “세자빈 마마께서도 알고 계셨습니까?” 그 질문이 나오자 이현이 조용해졌다. “알았다.” “그래서…….” 연우는 치맛단 안쪽의 문장을 떠올렸다. 나 대신 그의 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마마께서 저하의 꿈에 들어가신 겁니까?”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연우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다시 시선을 내렸다. “역시 무언가 알고 있군.” “아닙니다.” “거짓말.” 또 들켰다. “너는 거짓말을 못하는군.” “저하께서 너무 잘 찾으시는 겁니다.” “그런가?” 그가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이번에는 연우가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현이 멈췄다. “오늘은 왜 나를 무서워하지 않지?” 연우는 그 말에 잠시 생각했다. 무섭다. 왕세자라는 신분도,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눈도, 조금 전 꿈에서 보았던 죽음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처음보다 덜 무서웠다. 이유를 생각하다가 연우가 말했다. “죽는 걸 봤으니까요.” 이현의 움직임이 멎었다. “……뭐?” “사람이 죽는 걸 보고 나니 살아 있는 사람이 조금 덜 무서워졌습니다.” 아무 말도 없었다. 연우는 자신이 또 너무 솔직했나 싶었다. 그러다 아주 낮은 웃음소리를 들었다. 이번에는 비웃음이 아니었다. 짧지만 분명한 웃음이었다. “이상한 여자군.” “많이 듣습니다.” “내 아내는 아니고.” “…….” “궁인도 아닌 것 같고.” 이현의 손이 올라왔다. 연우가 움찔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은 면사가 아니라 연우의 머리 옆을 스쳤다. 머리 장식에 걸려 있던 실 한 가닥을 떼어냈다. 붉은 실이었다. 이현이 그것을 손가락에 감았다. “손을 보니 바느질을 하는 여자고.” 연우의 심장이 철렁했다. “말투를 보면 궁에서 자란 사람도 아니다.” 한 걸음. “세자빈의 옷을 입힐 정도라면 체격이 크게 다르지 않아야 했겠지.” 한 걸음. “그런데 소명보다 조금 작아.” 연우의 등이 다시 기둥에 닿았다. 이번에는 이현이 손을 짚지 않았다. 그저 바로 앞에 섰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연우의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그건 무엇이지?” 연우의 얼굴이 굳었다. 은바늘이 든 바늘집.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몰래 챙겨 온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연우가 재빨리 손으로 가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거짓말.” “저하.” “보여 줘.” “싫습니다.” “이번에도?” “이것만큼은 안 됩니다.” 이현의 손이 뻗어왔다. 연우는 바늘집을 움켜쥔 채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아졌다. 연우의 어깨가 이현의 가슴에 닿았다. 숨이 멎었다. 두꺼운 곤룡포 너머인데도 체온이 느껴졌다. 연우가 황급히 떨어지려 했지만 옷고름 하나가 그의 허리 장식에 걸렸다. “잠깐…….” 움직일수록 매듭이 조여들었다. 연우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있어.” 이현이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움직이면 더 걸린다.” “그래도—” “연우.” 모든 것이 멈췄다. 연우의 숨도. 손도. 심장마저 한 박자 늦게 뛰었다. 방금. 그가 뭐라고 했지? 이현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연우가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현이 대답하지 않았다. “저하.” 연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 순간이었다. 허리춤의 은바늘이 뜨거워졌다. “아……!” 연우가 바늘집을 놓쳤다. 툭. 은바늘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바늘 끝에서 붉은 실 같은 빛이 피어났다. 실은 바닥을 기어갔다. 연우에게서 이현에게로. 그리고 이현의 발목을 감는 순간—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완전히 굳었다. “이건…….” 붉은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동궁전의 모든 등불이 한꺼번에 꺼졌다. 연우는 본능적으로 이현의 옷깃을 붙잡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팔이 즉시 연우의 허리를 감쌌다. “놓지 마.” 처음이었다. 그가 명령처럼 말하면서도 다급해 보인 것은. 연우의 등이 그의 팔 안으로 단단히 당겨졌다. 조금 전과 달리 피할 틈조차 없는 거리였지만, 이번에는 밀어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사박. 사박. 맨발로 걷는 듯한 소리. 침전 바깥이 아니었다. 안쪽이었다. 연우가 숨을 죽였다. “저하.” “조용히.” 사박.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침상 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우야.” 연우의 몸이 굳었다. 아는 목소리였다. 세상에서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어머니?” 죽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이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대답하지 마.”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어둠 속에서 여자가 웃었다. “찾았구나.” 순간 바닥의 붉은 실이 수십 갈래로 갈라졌다. 그리고 모든 실이 한곳을 향했다. 침전 가장 깊은 곳. 붉은 휘장 뒤. 아무도 없어야 할 그곳에 사람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이현의 옷깃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림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달빛이 얼굴을 비췄다. 연우의 눈이 커졌다. 이현이었다. 또 한 명의 이현. 꿈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웃었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꿈이 아니었다. 그가 현실의 동궁전에 서 있었다. 두 번째 이현이 연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이제야 제대로 만났네.” 연우의 등 뒤에서 진짜 이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구냐.” 두 번째 이현은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직 연우만 바라봤다. “이번에는.” 붉은 실들이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렸다. “네 이름부터 잊지 않을게.” 그 순간 연우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졌다. 연우는 숨을 들이켰다. 방금 전까지 분명히 알고 있던 것이 사라졌다. 아주 가까운 사람.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사람.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 연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그러지?” 이현이 물었다. 연우의 입술이 떨렸다. “제…… 동생.” “동생?” “이름이…….” 눈물이 맺혔다. “제 동생 이름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이현이 웃었다. “하나.” 붉은 실 하나가 끊어졌다. “이제 시작이야.” 그리고 그림자가 사라졌다. 등잔불이 일제히 되살아났다. 연우와 이현만 침전 한가운데 남았다. 바닥에는 붉은 실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연우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작은 명패가 묶여 있었다. 이현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명패 앞면에는 단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夢妻. 몽처. 꿈의 아내.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하나 더 있었다. 이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연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이라고 적혀 있습니까?” 이현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명패를 뒤집어 연우에게 보여 주었다. 뒷면에는 이름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채연우. 이번에는 이현이 물었다. “설명해.” 연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도 처음 보는 물건이었으니까. 그런데 이현이 이어서 내뱉은 말에 연우는 더 이상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왜 왕실에서 백 년 전에 없애 버린 몽처의 명패에.” 그의 시선이 연우에게 박혔다. “네 이름이 적혀 있지?”“안 됩니다.”그녀가 급히 은바늘을 움켜쥐었다.“또 기억을 가져가려는 겁니다.”이현은 이를 악물었다.“내 기억인가?”“모르겠습니다.”“그럼 확인해야겠군.”“무슨 말씀을…….”이현이 연우의 손목을 붙잡았다.이번에는 그녀가 피하지 않았다.“연우.”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내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연우는 숨을 삼켰다.“저하께서요?”“그래.”이현은 그녀의 손목을 조금 더 단단히 감쌌다.“왕세자의 이름. 동궁의 위치. 내 아버지의 얼굴. 그리고…….”그가 말을 멈췄다.연우는 기다렸다.이현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네 이름.”연우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저하.”“그것만큼은 잊지 않겠다.”그 순간.붉은 실이 다시 나타났다.이번에는 연우의 은바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이현의 손목에서였다.실은 두 사람의 손목을 천천히 감쌌다.연우가 놀라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잠깐.”“저하, 위험합니다.”“알아.”“그러니 놓으셔야…….”“네가 놓고 싶다면 놓아.”그의 손에 들어간 힘이 느슨해졌다.연우는 손을 뺄 수 있었다.그런데 그러지 않았다.자신의 손목을 감싼 붉은 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이번에는 연우가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놓지 않겠습니다.”이현의 눈빛이 흔들렸다.“정말?”“예.”연우는 떨리는 숨을 들이마셨다.“저하께서 저를 기억하시겠다고 하셨으니까요.”그녀는 은바늘을 들어 올렸다.“저도 저하를 잊지 않겠습니다.”붉은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순간 동궁의 등불이 모두 꺼졌다.하지만 이번에는 어둠이 찾아오지 않았다.대신 붉은 달이 떠올랐다.침전의 천장이 사라졌다.벽이 무너지고 바닥이 물결처럼 흔들렸다.연우는 비명을 삼켰다.또다시 꿈이 시작되고 있었다.그때 이현이 그녀를 끌어당겼다.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쌌다.연우의 몸이 그의 가슴에 부딪혔다.“저하……!”“움직이지 마.”이현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서고에 정적이 내려앉았다.이현은 천천히 장부를 덮었다.“사람의 이름이 지워지고 있군.”“저하…….”“이름만 지워지는 것이 아니야.”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그 사람이 존재했다는 기억까지.”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채연준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은?”“채씨 집안의 거처이옵니다. 나흘 전 약방에서 약을 지어 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사옵니다.”“그 약방 주인은?”“아이의 얼굴은 기억하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옵니다.”이현의 손이 책상 위에서 굳었다.연우가 했던 말과 같았다.얼굴은 기억한다.하지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이현은 천천히 일어났다.“연우에게는 아직 말하지 마라.”최상선이 고개를 들었다.“하오나 저하…….”“아이의 흔적을 더 찾아.”그가 장부를 내관에게 돌려주었다.“그리고 이 기록은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마라. 대비전에도.”최상선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였다.“명을 받들겠사옵니다.”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연우는 다시 동궁전 침전으로 불려 갔다.붉은 예복을 입으라는 명령은 없었다.대신 짙은 남색 치마와 연한 상아색 저고리를 입었다. 머리에는 화려한 장식 대신 작은 비녀 하나만 꽂았다.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가려져 있었다.연우는 면사 끝을 만지작거리며 침전으로 들어갔다.이현은 창가에 서 있었다.검은 곤룡포가 아닌 짙은 먹색의 평상복 차림이었다. 허리에 매달린 장식도 없었고, 머리에는 간소한 관만 쓰고 있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더 위압적으로 느껴졌다.화려한 장식이 사라지자 그의 체격과 움직임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연우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저하를 뵙습니다.”“왔군.”이현이 돌아섰다.“옷은 마음에 드나?”연우는 당황했다.“……예?”“불편한 곳은 없는지 물었다.”“없습니다.”“다행이군.”그는 탁자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앉아.”연우는 조심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이현은 차를 따라 그녀 앞에 놓았다.연우는 차를 바라보다가 손을 멈췄다.“저
이현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당시 왕세자가 하룻밤 사이에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다음 날, 죽은 왕세자가 다시 나타났어.”연우의 손에서 바늘이 미끄러졌다.“……다시 나타났다고요?”“살아 돌아온 왕세자는 자신이 죽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신하들도 그를 왕세자로 인정했고, 왕 역시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지.”“그게 어떻게…….”“하지만 왕세자의 침소를 지키던 궁인 하나가 이상한 말을 남겼다더군.”이현이 천천히 연우에게 몸을 기울였다.“죽은 왕세자와 돌아온 왕세자는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연우는 숨을 멈췄다.꿈속에서 본 두 번째 이현이 떠올랐다.피투성이가 되어 도망치던 남자.그리고 멀쩡한 모습으로 웃고 있던 남자.그들은 분명히 같은 얼굴이었다.하지만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그 궁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사흘 뒤 죽었다.”“…….”“그 직후 몽침사에 관한 기록이 사라졌고, 왕실에서는 몽처라는 말을 금기로 삼았다.”연우는 손목의 검은 선을 바라보았다.그것이 조금 전보다 짙어진 것 같았다.“저하.”“말해.”“혹시 백 년 전에도…… 왕세자가 두 명이었습니까?”이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그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지?”연우는 잠시 망설였다.그러나 더 이상 숨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젯밤 꿈속에서 본 두 번째 저하가…… 현실에도 나타났습니다.”“알고 있다.”“저하께서도 보셨습니까?”“보았지.”연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그럼 정말 환영이 아니었군요.”“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이현이 탁자 위에 놓인 몽처의 명패를 바라보았다.“그놈이 사라진 뒤에도 이 물건은 남았으니까.”연우는 명패로 손을 뻗었다.그 순간 이현이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붙잡았다.“건드리지 마.”“왜요?”“아직 무엇인지 모르니까.”“저하께서는 만지셨잖습니까.”“그래서 더 위험한지 알 수 있지.”연우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이현은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손을 놓았다.“미안하군.”너무 자연스
왕세자의 침전에 여자를 들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적어도 그 여자가 세자빈의 옷을 입고 있다면.그러나 그 여자가 진짜 세자빈이 아니라는 사실을 왕세자가 알고 있고, 그럼에도 직접 자신의 침전에 머무르도록 명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저하,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옵소서.”동궁의 수석 내관인 최상선은 이미 세 번째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새벽이 밝아 오는 시각, 침전 앞에 선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세자빈 마마의 존체를 대신하는 일만으로도 궁법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그런데 정체조차 확인되지 않은 여인을 저하의 침전에 계속 머무르게 하신다면…….”“정체를 확인하면 되는 것 아닌가.”이현은 태연하게 답했다.“그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옵니다.”“그럼 복잡하게 만들지 마라.”“저하.”“그 여자를 데려온 것은 동궁이 아니다. 그렇지?”최상선의 입이 다물렸다.이현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대비전에서 데려왔고, 세자빈의 예복을 입혔으며, 내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침전으로 들여보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동궁의 법도를 논하겠다는 것이냐.”“소신은 다만 저하의 안위를 염려하여…….”“내 안위를 염려했다면 석 달 동안 내가 잠들 때마다 죽는 이유부터 알아냈어야지.”차갑게 떨어진 말에 최상선의 얼굴이 굳었다.동궁이 고요해졌다.이현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동쪽 하늘 끝에서 희미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밤새 불어온 바람에 처마 끝 풍경이 가볍게 흔들렸지만, 그의 눈에는 그조차 거슬리는 것처럼 보였다.“오늘부터 그 여자는 내 명이 없으면 동궁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다만 본인이 떠나겠다고 한다면 막지 마라.”“하오나…….”“그리고 누구도 그 여자에게 함부로 손대지 못한다.”그 말에는 더 이상의 설명이 없었다.최상선은 오래도록 엎드려 있다가 마침내 고개를 숙였다.“명을 받들겠사옵니다.”내관이 물러가자 이현은 천천히 침전으로 돌아섰다.문 앞에 이르렀을 때, 안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사각.사
연우는 움찔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연우의 어깨에 닿았다. “찾아 주겠다.” 연우의 눈이 커졌다. “……예?” “네 동생.” 그가 낮게 말했다. “내가 찾아 주겠어.” 연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려다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째서…….” “그 아이가 정말 있다면 찾아야지.” “저하께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상관이 생겼어.” 이현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네가 내 꿈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덧붙였다. “네 기억을 가져간 것이 내 얼굴을 한 놈이라면 더더욱.” 연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현의 손이 어깨에서 떨어졌다. 그가 한 걸음 물러났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무엇입니까?” “오늘 밤부터 내 곁에 있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예?” “네가 기억을 잃는 순간을 확인해야겠어. 그놈이 다시 나타나는지도 봐야 하고.” “하지만 저는 일곱 밤만…….” “일곱 밤.” 이현이 말을 받았다. “그동안 내가 네 동생을 찾겠다.” 연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찾지 못하시면요?” “그때는 네가 떠나도 돼.” “정말입니까?” “왕세자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연우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좋아.” 그는 돌아서려다가 문득 멈췄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예?” “앞으로 내 앞에서 울지 마.” 연우의 얼굴이 굳었다. “……제가 울고 싶어서 우는 줄 아십니까?” 이현이 낮게 웃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 그가 다시 다가왔다. 손가락이 연우의 얼굴 가까이 올라왔다가 멈췄다. 면사 너머로 눈물이 흐른 자리를 바라보던 그는 잠시 망설인 뒤 손을 내렸다. “네가 울면.”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톱으로 실 끝을 건드렸다. 순간.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연우야.’ 어머니였다. 연우는 숨을 멈췄다. ‘누군가 네 이름을 부르거든…….’ 목소리가 끊겼다. 연우는 황급히 바늘을 움켜쥐었다. “어머니?” 아무 대답도 없었다. “어머니!” 그 순간 문이 열렸다. 연우가 화들짝 돌아봤다. 이현이었다. 그는 연우가 움켜쥔 바늘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연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해야 할까. 또다시 죽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이현이 다가왔다. “손을 펴 봐.” 연우가 망설였다. “이번에는 왜요?” “피가 나.” 그제야 연우는 손바닥이 따끔거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은바늘 끝이 살을 찌르고 있었다. 붉은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이현이 손수건을 꺼냈다. “놓아.” 연우는 천천히 바늘을 내려놓았다. 그가 손수건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감쌌다. 연우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검은 비단 위에 금실로 작은 용이 수놓아진 손수건이었다. 왕세자의 물건이었다. “이런 걸 제게 쓰시면…….” “피를 흘리고 있는데.” “그래도 아깝지 않으십니까?” 이현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손수건이?” “예.” “네 손보다?” 연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상처가 깊지 않은지 확인하고 천천히 손수건을 묶었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연우의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 손을 잡으면 꿈속으로 떨어질까 두려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손을 놓는 순간이 더 신경 쓰였다. 연우는 황급히 다른 생각을 했다. ‘정신 차리자.’ 이 사람은 세자다. 자신은 대역이다. 그리고 진짜 세자빈은 어딘가에서 잠들어 있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었다. “저하.” “왜.” “세자빈 마마께서는 어디에 계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