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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Penulis: 눈빛 속의 약속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꾸나.”

한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강유영은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정신은 아찔해져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오직 문이 열리면 둘 다 끝장이라는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 온몸은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어 조원철의 어깨를 밀었다.

그녀는 안간힘을 쓴 것이었지만, 조원철에게는 그저 간지러울 정도였다.

투명한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길게 말린 속눈썹에는 눈물방울이 맺혀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축 처진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조원철은 고개도 들지 않고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투만 들어서는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알겠다. 어서 정돈하고 나오거라.”

한씨의 말과 함께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강유영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손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등은 이미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위기가 사라진 것을 직감한 후에야 허벅지에서 청량한 느낌이 퍼지며 통증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이… 이제 괜찮습니다….”

그녀는 다시금 조원철을 밀쳐내려 했지만, 그의 손에 손목을 잡혔다.

아득한 기다림 끝에 마침내 그가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재빨리 허리를 숙여 허둥지둥 치마를 여몄다. 그러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스르륵 아래로 주저앉았다.

단단한 팔이 뻗어나와 그녀를 단번에 품에 안았다.

얼굴이 단단한 가슴에 닿자, 청량한 감송향이 그녀를 감쌌다.

그녀는 바둥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온몸에 힘이 풀린 상태라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조원철은 몸을 굽혀 느릿느릿 그녀의 허리띠를 다시 매주고 꼼꼼하게 치맛자락을 정리해 주었다.

강유영은 그제야 힘껏 그를 밀쳐내고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조원철은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백옥병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담담히 말했다.

“나중에 시녀를 시켜 따뜻한 물수건으로 아랫배를 찜질하거라.”

강유영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젯밤 투정 부리듯 배가 아프다고 한 것 같은데 그것까지 기억할 줄이야.

그녀는 뒤돌아서려는 그를 불러세웠다.

“오라버니.”

조원철은 흠칫하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어젯밤 일은… 너무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어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거로 해요, 우리.”

강유영은 재빨리 백옥병을 그의 손에 쥐여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원철처럼 좋은 집안에 뛰어난 재능, 공적까지 세운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에 맞는 귀한 집 처자와 혼인할 것이다.

‘나 같은 것과는 너무 다른 세상 사람이지.’

어젯밤은 그저 사고였던 것이다. 비록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머리가 어지럽지만, 강유영은 제 주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내 것이 아닌 걸 탐내서는 안 돼.’

“그래, 알겠다.”

조원철은 백옥병을 꽉 잡더니 감정을 알 수 없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강유영은 담벽에 기댄 채로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탁하고 문이 닫히는 순간,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이 나왔다.

사람들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그녀는 충분히 기다렸다가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별당을 나왔다.

사당 안에는 온 집안 식구들이 이미 미리 와서 모여 있었다.

강유영은 사람들이 안 보는 틈을 타서 맨 마지막 끝자락으로 가서 섰다.

조원철은 늠름한 자태로 상석에 자리했다. 여의옥 허리띠가 건장하면서 군살 없는 그의 탄탄한 허리선을 강조하고 청남색 두루마기 자락은 무심하게 흘러내려 그 안의 정교한 비단 바지가 살짝 보였다. 옥패와 향낭이 허리춤에 단정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고귀하고 금욕적인 기품이 흐르는 가운데, 혈기왕성한 소년의 당당함이 물씬 풍겼다.

흐트러짐 없이 고고한 그 모습은 지난밤 그녀의 정신을 쏙 빼놓던 음란한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강유영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제사 의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강유영도 조용히 사람들 틈에 섞여 자리를 뜰 참이었다.

“유영아, 이쪽으로 와보거라.”

조원철의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강유영은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몰라 몸을 흠칫 떨다가 인파를 거슬러 앞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가고 사당 안에는 조원철과 진국공 부인 한씨만 남았다.

귀부인 한씨는 사십이 넘은 나이에도 관리를 잘한 탓에 우아하고 귀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강유영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아들을 바라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원철아, 목에 상처는 어떻게 된 것이니?”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의 기다란 목선 위에는 선명한 이빨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어젯밤에 깨문 자국이었다.

살짝 풀어진 옷깃 사이로 검붉은 흔적이 반쯤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피부가 하얀 탓에 더욱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모기에 물렸나 봅니다.”

조원철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한씨는 당연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네 나이 벌써 스물여섯이니 신변에 여자를 두는 것쯤이야 이상할 게 없지. 전장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장가들어 아이까지 봤을 터이니. 동생들 혼사도 너 때문에 미뤄지지 않았느냐. 요즘 내가 괜찮은 혼처를 알아보고 있으니 좀 자중하거라. 바깥에 둔 여인은 잠시 곁에 두지 않는 게 좋겠다.”

강유영은 그 말을 듣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씁쓸한 감정이 솟구쳤다가 다시 가라앉혔다.

한씨의 말이 맞았다. 경성의 귀족 자제들은 빠르면 열여섯, 늦어도 스무 살 전에는 장가를 간다. 조원철 또래라면 벌써 아이를 여럿 보았을 나이였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조원철은 한씨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강유영을 바라보며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어머니, 유영이의 차림새가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강유영은 연청색의 저고리에 은은한 미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시중에서 흔히 보는 재질이지만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유행도 이미 지나서 삼 년 전에나 자주 입던 양식이었다. 머리에는 수수한 은비녀 외에는 아무런 장신구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워낙 가녀린 몸매를 지닌 탓에 더욱 앳되고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씨는 그제야 강유영의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조원철을 향해 웃어 보였다.

“녀석, 설마 내가 유영이를 박대한다고 의심하는 것이냐? 비록 친딸은 아니더라도 아기 때부터 내 손으로 키운 아이인데, 내가 뭐 하러 푸대접을 하겠느냐? 실은 유영이 이 아이가 꾸미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단다. 유영아, 네 오라비한테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을 해줘야지?”

그녀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강유영을 바라보았다. 강유영을 쥐락펴락하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는 강유영 본인이 잘 알 것이다.

강유영은 타인의 손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살포시 손을 빼내며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이렇게 입기를 좋아해서요.”

한씨는 귀족가 안주인으로서 대놓고 그녀를 박대한 적은 없었다.

다만 그녀가 수수하게 입고 나오면 꾸밈없이 소박한 게 보기 좋다며 역시나 온 집안의 모범이라고 치하했을 뿐이다.

하지만 강유영은 그 말에 담긴 한씨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남의 집에 신세 지는 몸으로, 어찌 안주인의 뜻을 거역하겠는가? 애초에 그녀 역시 비녀며 고운 치마 따위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고, 매일 몸을 단장하는 것도 여러모로 불편했다.

다만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분명히 여덟 살이 되어서야 신분이 밝혀졌음에도, 한씨는 어릴 적부터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사람들 앞에서만 인자한 미소를 지어줬을 뿐, 사람들 없을 때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 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다정하고 살갑게 대해준 사람은 유모 오씨뿐이었다.

조원철은 한씨의 말에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서늘한 어투로 말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어머니. 집안 살림은 어머니께서 맡고 계시니, 어찌 대처해야 할지는 굳이 제가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지요.”

표정은 평온했으나, 말투는 날이 서 있었다.

한씨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강유영도 그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았다.

그녀는 어쨌거나 진국공부의 양녀인 신분이다. 차림새가 추레하면 사람들은 진국공부가 그녀를 박대했을 거라 오해하기 십상이고 이는 집안의 체면에도 손상이 가는 일이었다.

“네 말이 맞다.”

한씨의 얼굴은 금세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녀는 늘 그랬듯,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내 생각이 짧았어. 유영아, 나중에 내 사람을 시켜 패물들을 처소로 보낼 테니, 복장점 사람도 불러서 옷도 몇 벌 새로 마련하거라.”

한씨는 아들의 성격을 잘 알았다. 강직하고 올곧으며 이상한 곳에서 고집이 있었다. 굳이 이 시점에 아들의 뜻을 거슬러 기분을 상하게 할 이유가 없었다.

조원철은 강유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거처는 부용원으로 옮기거라.”

강유영은 놀란듯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러나 담담하고 서늘하기까지 한 그 시선은, 마치 어젯밤에 나눴던 다정한 행위는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씁쓸해져, 재빨리 시선을 내리며 작게 말했다.

“오라버니의 뜻은 감사하지만, 저는 소은원이 편합니다. 번거롭게 옮길 필요는 없어요.”

그녀의 거처인 소은원은 진국공부의 가장 소북쪽 모퉁이에 있는 외딴곳이었다.

그녀는 조원철이 자신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리라고는 바라지 않았다. 단지 어젯밤 일에 대한 보상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굳이 이럴 필요는 없었다. 그건 그저 사고였을 뿐이고, 그에게 무언가를 얻어낼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부용원은 연화의 처소와 가까운 곳이라, 아마 그 애가 알면 난리가 날 텐데….”

한씨가 반대하고 나섰다. 그녀에게는 따로 계획이 있었다.

딸 조연화는 강유영 때문에 어린 시절 밖에서 고생했다는 선입견 때문에 줄곧 강유영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일개 양녀일 뿐이다. 진국공부가 그녀에게 살 곳을 마련해 준 것만으로 이미 인의를 다한 셈인데 여기서 무얼 더 바란단 말인가?

물론 이런 말들을 아들에게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이의가 있으면 날 찾아오라 하십시오.”

조원철은 뒷짐을 지고 서서 단호하게 말하더니 강유영을 힐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넌 나를 따라오거라.”

강유영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그와 단둘이 있는 것은 불편했다.

그러나 지금 거절한다면 한씨가 뭔가 눈치챌까 두려워, 하는 수없이 그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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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무슨 옷감입니까? 전에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강유영은 옷을 펼쳐보며 신기해했다.위는 치마, 아래는 바지의 형태였다. 소매폭이 좁고 바짓단에 줄이 달려 발목에 묶을 수 있게 되어 있어 물속에서 움직이기 편해 보였다.새하얀 색감에 은은한 광택이 도는 부드러운 옷감은 손에 닿는 감촉이 마치 봄날의 물결을 쓰다듬는 듯했다. 가볍고 보드라우면서도 차분하게 가라앉는 태가 났다. 짜임새가 워낙 촘촘하여 밝은 곳에 비추어 보아도 빛만 통과할 뿐 속살은 비치지 않았다."탁청초(濯清绡)다."조원철은 찬합을 열고 음식들을 하나씩 꺼내놓았다."탁청초…."강유영은 여전히 옷을 들여다보며 작게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그에게 물었다."이게 본래 수영할 때 입는 옷을 짓는 옷감입니까?"여태껏 들어본 적조차 없는 이름이었다.조원철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아씨, 식사…."단비가 찬합을 들고 웃으며 방으로 들어오다가 조원철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더니 이내 무릎을 굽혀 예를 올렸다."세자를 뵙습니다."조원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너희들끼리 나누어 먹거라."강유영은 손에 든 옷을 내려놓으며 단비에게 일렀다."감사합니다, 아씨."단비는 찬합을 챙겨 들고 환하게 웃으며 물러났다."이리 와서 밥 먹거라."조원철이 그녀를 불렀다.강유영은 다가가 그가 건네는 수저를 받아 들고는, 맑은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온천 산장에는 언제 가는 겁니까?"꿀에 절인 앵두를 한 입 베어 문 그녀의 눈망울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예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는 그가 무언가를 가르치려 할 때마다 질색을 했고, 늘 억지로 감시하듯 가르쳐야만 했다.헌데 지금은 무엇이든 배우려 들며 의욕이 넘쳤다."그리 마음이 급하냐."조원철은 밥을 한 젓가락 떠 입에 넣고는 천천히 씹어 삼켰다."날이 하루가 다르게 쌀쌀해지지 않습니까…."강유영은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스스로 생각해도 좀 궁색한 핑계이긴 했다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525화

    서준은 책상에 기대어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제법 괜찮은 제안이군. 내가 준비하도록 하마."조연화는 그가 당장 거절하지는 않더라도 즉시 수락하지는 않고 고심할 줄 알았다. 그런데 단박에 승낙하고는 몸소 준비하겠다고까지 하니 너무 놀라웠다.그녀는 뛸 듯이 기뻤으나 애써 벅찬 마음을 억눌렀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리며 아까처럼 다소곳하고 조신한 태도를 유지했다."그럼 소녀는 이만 부저로 돌아가 전하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겠사옵니다.""그전에 너와 내가 자주 왕래해야겠어. 강유영 그 아이가 후회하는 꼴을 봐야 하니까."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문밖까지 배웅했다.조연화는 두 뺨이 붉게 달아오른 채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소녀는 모두 전하의 뜻에 따르겠사옵니다."서준은 자신을 이용해 강유영의 질투를 유발할 작정인 듯했다. 그녀는 그 사실이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앞으로 서준이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텐데 강유영도 더 이상 미쳐 날뛸 수는 없을 것이다.훗날 서왕부에 시집가면 그녀는 정실 왕비이고, 강유영은 일개 첩실에 불과했다. 그때가 되면 강유영을 철저히 짓밟고 그간의 수모를 말끔히 씻어낼 것이다.서준은 문틀에 비스듬히 기댄 채 뜰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강 소저를 핑계 삼아 서왕부에 발을 들이려는 속셈이옵니다. 전하, 정말로 수락하신 겁니까?"어둠 속에서 나타난 남풍이 다가와 물었다.서준은 조연화가 사라진 곳을 바라볼 뿐, 남풍의 물음에는 대답 대신 실소를 흘렸다."조원철의 누이라. 제법 재미있군."요월원."아씨, 반나절 내내 서책만 들여다보시면 눈이 상합니다. 바람 좀 쐬시지요."서유가 강유영을 방 밖으로 이끌었다.강유영은 회랑 아래에 서서 기지개를 켰다.반나절을 내리 앉아 있었으니 눈을 좀 쉬게 해줄 때가 된 것 같았다"단비는 어딜 갔느냐?""점심을 가지러 갔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3화

    조원철을 따라 밖으로 나갔더니, 밖은 어느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차가운 습기가 얼굴에 닿자,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목을 움츠렸다.“세자.”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원철의 측근 청운이 다가와서 우산을 건넸다.조원철은 우산을 펼치고는 강유영에게 따라오라는 듯, 눈짓했다.강유영은 난색을 띠며 주저했다.“아씨, 세자께서 처소까지 모셔다드린답니다.”청운이 웃으며 말했다.“배려 감사해요, 오라버니.”강유영은 어차피 그와 따로 할 말도 있고 해서 공손히 예를 행하고는 그를 따라나섰다.청운은 빗속을 나란히 걷고 있는 두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화

    초여름의 이른 아침.경성 진국공부의 사당 주변은 아침부터 자옥한 안개로 휩싸였다.조용한 사당 안에서는 승려가 경을 읊는 소리가 이따금씩 흘러나오고, 정원 내 청동로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당을 지키는 시녀와 하인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강유영은 치맛자락을 들고서 처마 길을 따라 뒤뜰을 나오고 있었다. 온몸에 퍼진 근육통 때문에 걸음걸이가 다소 어색했다.좌측 쪽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커다란 손이 뻗어 나와 가늘고 여린 그녀의 허리를 가로챘다. 상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녀를 끌고 뒤뜰에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7화

    강유영은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돌아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다리가 바닥에 꽁꽁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들어오거라.”조원철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령했다.강유영은 누가 보기라도 할까 두려워,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내실로 들어갔다.“언제 오셨나요?”잠깐 오씨 어멈의 저녁을 챙기러 나갔다 온 사이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지금쯤이면 밖에서 왕 소저와 저녁 식사를 해야 하지 않나?’조원철이 다가오더니 문을 닫았다.강유영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서 그와 거리를 벌리고 고개를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6화

    “기특하기도 하지. 어서 이리 와서 앉으렴.”한씨는 웃으며 강유영을 향해 손짓하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밖에서 강유영에게 잘해주는 것은 인자한 진국공 부인의 명성을 위해서였다.강유영은 약상자를 장 의원에게 건네고는 고분고분 그쪽으로 다가갔다.장 의원은 그녀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유영의 처지를 잘 알기에, 그녀의 거짓말을 까발리지 않았다. 장 의원은 손을 뻗어 한씨의 손목에 대고 진맥을 시작했다.한씨의 옆에 앉은 강유영은 불안하게 병풍 뒤쪽을 힐끔거렸다.조원철은 탁자 앞에 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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