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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or: 눈빛 속의 약속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꾸나.”

한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강유영은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정신은 아찔해져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오직 문이 열리면 둘 다 끝장이라는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 온몸은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어 조원철의 어깨를 밀었다.

그녀는 안간힘을 쓴 것이었지만, 조원철에게는 그저 간지러울 정도였다.

투명한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길게 말린 속눈썹에는 눈물방울이 맺혀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축 처진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조원철은 고개도 들지 않고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투만 들어서는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알겠다. 어서 정돈하고 나오거라.”

한씨의 말과 함께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강유영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손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등은 이미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위기가 사라진 것을 직감한 후에야 허벅지에서 청량한 느낌이 퍼지며 통증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이… 이제 괜찮습니다….”

그녀는 다시금 조원철을 밀쳐내려 했지만, 그의 손에 손목을 잡혔다.

아득한 기다림 끝에 마침내 그가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재빨리 허리를 숙여 허둥지둥 치마를 여몄다. 그러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스르륵 아래로 주저앉았다.

단단한 팔이 뻗어나와 그녀를 단번에 품에 안았다.

얼굴이 단단한 가슴에 닿자, 청량한 감송향이 그녀를 감쌌다.

그녀는 바둥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온몸에 힘이 풀린 상태라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조원철은 몸을 굽혀 느릿느릿 그녀의 허리띠를 다시 매주고 꼼꼼하게 치맛자락을 정리해 주었다.

강유영은 그제야 힘껏 그를 밀쳐내고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조원철은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백옥병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담담히 말했다.

“나중에 시녀를 시켜 따뜻한 물수건으로 아랫배를 찜질하거라.”

강유영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젯밤 투정 부리듯 배가 아프다고 한 것 같은데 그것까지 기억할 줄이야.

그녀는 뒤돌아서려는 그를 불러세웠다.

“오라버니.”

조원철은 흠칫하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어젯밤 일은… 너무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어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거로 해요, 우리.”

강유영은 재빨리 백옥병을 그의 손에 쥐여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원철처럼 좋은 집안에 뛰어난 재능, 공적까지 세운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에 맞는 귀한 집 처자와 혼인할 것이다.

‘나 같은 것과는 너무 다른 세상 사람이지.’

어젯밤은 그저 사고였던 것이다. 비록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머리가 어지럽지만, 강유영은 제 주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내 것이 아닌 걸 탐내서는 안 돼.’

“그래, 알겠다.”

조원철은 백옥병을 꽉 잡더니 감정을 알 수 없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강유영은 담벽에 기댄 채로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탁하고 문이 닫히는 순간,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이 나왔다.

사람들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그녀는 충분히 기다렸다가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별당을 나왔다.

사당 안에는 온 집안 식구들이 이미 미리 와서 모여 있었다.

강유영은 사람들이 안 보는 틈을 타서 맨 마지막 끝자락으로 가서 섰다.

조원철은 늠름한 자태로 상석에 자리했다. 여의옥 허리띠가 건장하면서 군살 없는 그의 탄탄한 허리선을 강조하고 청남색 두루마기 자락은 무심하게 흘러내려 그 안의 정교한 비단 바지가 살짝 보였다. 옥패와 향낭이 허리춤에 단정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고귀하고 금욕적인 기품이 흐르는 가운데, 혈기왕성한 소년의 당당함이 물씬 풍겼다.

흐트러짐 없이 고고한 그 모습은 지난밤 그녀의 정신을 쏙 빼놓던 음란한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강유영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제사 의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강유영도 조용히 사람들 틈에 섞여 자리를 뜰 참이었다.

“유영아, 이쪽으로 와보거라.”

조원철의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강유영은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몰라 몸을 흠칫 떨다가 인파를 거슬러 앞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가고 사당 안에는 조원철과 진국공 부인 한씨만 남았다.

귀부인 한씨는 사십이 넘은 나이에도 관리를 잘한 탓에 우아하고 귀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강유영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아들을 바라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원철아, 목에 상처는 어떻게 된 것이니?”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의 기다란 목선 위에는 선명한 이빨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어젯밤에 깨문 자국이었다.

살짝 풀어진 옷깃 사이로 검붉은 흔적이 반쯤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피부가 하얀 탓에 더욱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모기에 물렸나 봅니다.”

조원철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한씨는 당연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네 나이 벌써 스물여섯이니 신변에 여자를 두는 것쯤이야 이상할 게 없지. 전장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장가들어 아이까지 봤을 터이니. 동생들 혼사도 너 때문에 미뤄지지 않았느냐. 요즘 내가 괜찮은 혼처를 알아보고 있으니 좀 자중하거라. 바깥에 둔 여인은 잠시 곁에 두지 않는 게 좋겠다.”

강유영은 그 말을 듣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씁쓸한 감정이 솟구쳤다가 다시 가라앉혔다.

한씨의 말이 맞았다. 경성의 귀족 자제들은 빠르면 열여섯, 늦어도 스무 살 전에는 장가를 간다. 조원철 또래라면 벌써 아이를 여럿 보았을 나이였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조원철은 한씨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강유영을 바라보며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어머니, 유영이의 차림새가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강유영은 연청색의 저고리에 은은한 미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시중에서 흔히 보는 재질이지만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유행도 이미 지나서 삼 년 전에나 자주 입던 양식이었다. 머리에는 수수한 은비녀 외에는 아무런 장신구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워낙 가녀린 몸매를 지닌 탓에 더욱 앳되고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씨는 그제야 강유영의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조원철을 향해 웃어 보였다.

“녀석, 설마 내가 유영이를 박대한다고 의심하는 것이냐? 비록 친딸은 아니더라도 아기 때부터 내 손으로 키운 아이인데, 내가 뭐 하러 푸대접을 하겠느냐? 실은 유영이 이 아이가 꾸미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단다. 유영아, 네 오라비한테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을 해줘야지?”

그녀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강유영을 바라보았다. 강유영을 쥐락펴락하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는 강유영 본인이 잘 알 것이다.

강유영은 타인의 손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살포시 손을 빼내며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이렇게 입기를 좋아해서요.”

한씨는 귀족가 안주인으로서 대놓고 그녀를 박대한 적은 없었다.

다만 그녀가 수수하게 입고 나오면 꾸밈없이 소박한 게 보기 좋다며 역시나 온 집안의 모범이라고 치하했을 뿐이다.

하지만 강유영은 그 말에 담긴 한씨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남의 집에 신세 지는 몸으로, 어찌 안주인의 뜻을 거역하겠는가? 애초에 그녀 역시 비녀며 고운 치마 따위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고, 매일 몸을 단장하는 것도 여러모로 불편했다.

다만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분명히 여덟 살이 되어서야 신분이 밝혀졌음에도, 한씨는 어릴 적부터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사람들 앞에서만 인자한 미소를 지어줬을 뿐, 사람들 없을 때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 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다정하고 살갑게 대해준 사람은 유모 오씨뿐이었다.

조원철은 한씨의 말에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서늘한 어투로 말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어머니. 집안 살림은 어머니께서 맡고 계시니, 어찌 대처해야 할지는 굳이 제가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지요.”

표정은 평온했으나, 말투는 날이 서 있었다.

한씨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강유영도 그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았다.

그녀는 어쨌거나 진국공부의 양녀인 신분이다. 차림새가 추레하면 사람들은 진국공부가 그녀를 박대했을 거라 오해하기 십상이고 이는 집안의 체면에도 손상이 가는 일이었다.

“네 말이 맞다.”

한씨의 얼굴은 금세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녀는 늘 그랬듯,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내 생각이 짧았어. 유영아, 나중에 내 사람을 시켜 패물들을 처소로 보낼 테니, 복장점 사람도 불러서 옷도 몇 벌 새로 마련하거라.”

한씨는 아들의 성격을 잘 알았다. 강직하고 올곧으며 이상한 곳에서 고집이 있었다. 굳이 이 시점에 아들의 뜻을 거슬러 기분을 상하게 할 이유가 없었다.

조원철은 강유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거처는 부용원으로 옮기거라.”

강유영은 놀란듯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러나 담담하고 서늘하기까지 한 그 시선은, 마치 어젯밤에 나눴던 다정한 행위는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씁쓸해져, 재빨리 시선을 내리며 작게 말했다.

“오라버니의 뜻은 감사하지만, 저는 소은원이 편합니다. 번거롭게 옮길 필요는 없어요.”

그녀의 거처인 소은원은 진국공부의 가장 소북쪽 모퉁이에 있는 외딴곳이었다.

그녀는 조원철이 자신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리라고는 바라지 않았다. 단지 어젯밤 일에 대한 보상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굳이 이럴 필요는 없었다. 그건 그저 사고였을 뿐이고, 그에게 무언가를 얻어낼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부용원은 연화의 처소와 가까운 곳이라, 아마 그 애가 알면 난리가 날 텐데….”

한씨가 반대하고 나섰다. 그녀에게는 따로 계획이 있었다.

딸 조연화는 강유영 때문에 어린 시절 밖에서 고생했다는 선입견 때문에 줄곧 강유영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일개 양녀일 뿐이다. 진국공부가 그녀에게 살 곳을 마련해 준 것만으로 이미 인의를 다한 셈인데 여기서 무얼 더 바란단 말인가?

물론 이런 말들을 아들에게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이의가 있으면 날 찾아오라 하십시오.”

조원철은 뒷짐을 지고 서서 단호하게 말하더니 강유영을 힐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넌 나를 따라오거라.”

강유영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그와 단둘이 있는 것은 불편했다.

그러나 지금 거절한다면 한씨가 뭔가 눈치챌까 두려워, 하는 수없이 그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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Último capítulo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7화

    "그것이 네가 말하는 해결책이냐."조원철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방우겸을 응시했다."주 대감 댁 혼사를 허락해 주면 화재민들의 집도 고쳐줄 것이고 백성들의 원성도 잦아들 것입니다. 흉흉한 소문도 저절로 가라앉을 터이니, 이보다 완벽한 해결책이 어디 있겠습니까."방우겸은 조원철이 웃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앞에서는 원칙을 운운하며 깐깐하게 굴었지만, 결국 이 자도 관원들 사회가 돌아가는 생리를 잘 아는 듯했다.오랜 세월 관직에 몸담은 자가 홀로 고고한 척 유난을 떨 리 없었다. 강직하다는 소문은 그저 그럴싸한 허울에 불과한 것이다."이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법을 어기란 소리 아니냐."강유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차갑게 대꾸했다."그건 지나친 비약입니다. 어찌 사리사욕을 채운다 하십니까."방우겸은 여유롭게 고개를 저었다."조 대인께서는 대의를 위해 병주 백성들을 굽어살피려는 것입니다. 민심을 수습하는 일보다 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조원철이 타협했다고 굳게 믿은 방우겸은 한결 편안해진 태도로 평소 즐겨 쓰던 입바른 소리를 늘어놓았다."주 대감이 사유 재산을 털어 백성들의 집을 고쳐주겠다고 했다는 뜻이냐?"조원철은 시선을 돌려 주유재를 바라보았다.방우겸 역시 주유재를 보며 눈짓을 보냈다."그렇습니다."주유재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제 손으로 불태운 집을 제 돈으로 다시 짓게 생겼으니 생돈을 날리는 격이었다.하지만 방우겸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방우겸은 앞으로 몇 년은 더 병주 지부 자리에 앉아 있을 자였다.일단 장단을 맞춰준 후에, 손해본 돈은 훗날 백성들을 쥐어짜 메우면 될 일이었다."이번 화재는 주 대감과 연관이 없을 텐데, 어찌하여 거금을 내놓으려는 것이냐."조원철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주유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스스로 거금을 내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켕기는 구석이 있음을 인정하는 격이었다."대인께서 아직 이 지역 사정을 잘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 대감은 평소 어려운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6화

    조원철은 그의 말을 다시 자르며 인상을 썼다.차가운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났다."아닙니다, 잘못된 일이지요. 어찌 되었든 산 사람을 생매장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방우겸은 재빨리 태도를 바꿨다."대인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병주의 영혼 혼례를 막으러 오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소관 역시 평소 이 악습을 탐탁지 않게 여겨 왔습니다. 이런 미신은 진작에 뿌리 뽑았어야 마땅합니다."그는 뚜렷한 소신이 없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갈대처럼, 힘 있는 자의 편에 설 뿐이었다.강유영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방우겸의 솜씨는 과연 미꾸라지 같다는 소문에 걸맞았다."그래서, 이 일은 어찌 해결할 생각이냐."조원철이 방우겸에게 물었다.방우겸은 눈동자를 굴리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대인, 지금 밖에서는 두 분이 영혼 혼례를 막은 탓에 불이 났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는 대인께 불리한 상황입니다. 물론 소관은 이번 화재가 그저 사고일 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지한 백성들은 뜬소문에 쉽게 휩쓸립니다. 이들을 억지로 누르려 했다가는 자칫 민란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리되면 애먼 자들이 다칠 텐데, 백성을 헤아리시는 대인께서 어찌 그런 참상을 원하시겠습니까."조원철은 아무 말 없이 서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소관에게 한 가지 방도가 있는데, 대인의 뜻은 어떠신지요."방우겸은 잠시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는 조원철의 속내를 알 수 없었지만, 영혼 혼례를 강제로 막으려다 민란이라도 일어난다면 조원철 역시 경성으로 돌아가 문책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 계산했다."말해보아라."조원철이 담담하게 물었다.방우겸은 조원철에게 몇 걸음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불이 난 것은 하늘의 뜻이나, 집을 잃은 백성들은 가엾습니다. 하여 관아에서 돈을 조금 내어 백성들의 집을 다시 지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관아에서 얼마나 지원할 수 있느냐."조원철이 되물었다."관아의 힘만으로는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5화

    주유재는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소리쳤다.방우겸을 따라 무릎을 꿇으려던 백성들은 주유재의 선동에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맞소! 당장 우리 집을 물어내시오!""고위 관원은 무슨, 재앙을 부르는 재앙신이야!""우린 당장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소. 관원이든 뭐든 책임부터 지시오!"백성들은 순식간에 흥분하여 여기저기서 고함을 질러댔다."모두 입 다물지 못할까!"방우겸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호통을 쳤다."방 대인……."주유재가 입을 열려 했다."주유재! 죽고 싶으면 계속 사람들을 선동하거라!"방우겸은 매섭게 쏘아붙였다.방우겸은 두루두루 잘 지내며 살아온 자였다. 평생 이토록 분노를 드러낸 적이 드물었다. 주유재 저 미련한 놈은 필시 진국공부 세자의 명성을 들어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저 예전에 병주에 파견되었던 만만한 관원쯤으로 착각하는 모양이었다.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삐끗했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판이었다.주유재는 방우겸의 호통에 기가 죽어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당장 무릎 꿇지 못할까!"주회안도 거들며 주유재에게 몰래 눈치를 주었다.그제야 주유재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 방우겸 일행이 여전히 제 편임을 깨달은 그는 지체 없이 옷자락을 걷어 올리며 무릎을 꿇었다.주유재가 무릎을 꿇자 기세등등하던 백성들도 더는 소란을 피우지 못하고 엎드렸다."조 대인, 필시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관아로 자리를 옮기시면 소관이 상세히 말씀 올리겠습니다."방우겸은 조원철을 향해 굽실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는 기대와 공손함이 묻어났다."필요 없다. 백성들 앞에서 못할 얘기라도 있느냐? 여기서 다 말해 보아라."조원철은 차가운 목소리로 단칼에 거절했다."그게……."방우겸은 난감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속내를 털어놓기는 곤란했다."주 대감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밖으로 나가 대기하시오."주회안이 즉각 지시를 내렸다.주유재도 손을 저으며 거들었다."다들 밖에서 기다리시오. 저들이 뭐라 변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4화

    방우겸도 시선을 돌렸다. 나란히 밖으로 나오는 두 남녀를 보고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청류와 임소아도 뒤따라 나와 두 사람 뒤에 섰다."대인, 저자들입니다. 임씨 집안 계집애를 붙잡아 두고 주 대감 댁 영혼 혼례를 막았습니다. 관아의 뜻이라며 앞으로 병주에서 영혼 혼례를 올리지 못하게 될 거라 떠벌렸습니다. 저들이 원귀를 노하게 해 우리 집을 태워버린 것입니다!""지부 대인께서 부디 저들을 엄벌해 주십시오.""병주의 풍습에 저들이 무슨 자격으로 참견한단 말입니까!"백성들은 앞다투어 강유영과 조원철을 가리키며 고자질했다.방우겸은 강유영과 조원철을 유심히 살피며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얼마 전 관아로 그를 찾아온 자는 청류였다.그때도 분위기가 범상치 않아 경성에서 파견된 관원이 신분을 위장한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그런데 지금 그 청류는 젊은 사내의 뒤에 서 있었다. 사내는 묵직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아무리 봐도 청류는 사내의 수하로 보였다.앞에 선 젊은 남녀는 귀티가 흐르고 기품이 남달랐다. 예사로운 신분이 아닐 것이다.방우겸은 처세에 밝은 자였다. 이리저리 비위를 맞추며 병주 지부 자리까지 꿰찬 그였다. 마음속에 의구심이 생긴 이상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철칙이었다.그는 강유영과 조원철을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했다.상대의 정체를 확실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섣불리 적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대인, 저들은 경성에서 왔다고 합니다. 혹 누군지 아십니까?"주유재가 다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방우겸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는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먼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감히 여쭙건대……."그는 조원철의 허리춤에 매달린 금인을 발견했다. 어떤 글자가 새겨져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하지만 심상치 않은 신분임은 확신했다. 어찌 됐든 예를 갖추는 편이 나았다."방우겸, 네 죄를 아느냐."조원철은 차가운 목소리로 꾸짖었다.방우겸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눈동자를 굴리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누구신지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3화

    문가에 있던 임소아가 청류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청류는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두 사람에게 예를 갖췄다."주군, 아씨.""무슨 일이냐."조원철이 물었다."간밤에 병주성 동남쪽에서 큰불이 나 민가 대여섯 채가 잿더미로 변했답니다. 주유재는 주군과 아씨께서 영혼 혼례를 막아 원혼들이 노한 탓이라며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집을 잃은 백성들이 죗값을 치르라며 몰려와 난동을 부리는 중입니다."청류는 고개를 숙인 채 차분히 보고했다."넌 어찌 생각하느냐."조원철은 강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어처구니없는 소리네요."강유영은 콧방귀를 뀌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녀는 맑은 눈을 반짝이며 조원철을 올려다보았다."주유재가 지어낸 헛소리입니다. 전혀 믿을 수가 없어요. 저 불도 주유재의 자작극일 겁니다. 어쩜 그리 시기가 딱 맞아떨어질 수 있겠어요?"마침 주유재가 두 사람에게 누명을 씌울 구실이 필요했던 차에 화재가 났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미심쩍었다.주유재가 고의로 불을 지른 것이 분명했다.그는 몹시도 흉악한 자였다. 아들에게 영혼 혼례를 치러주고, 앞으로도 그 악습으로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 그 많은 사람의 집을 불태운 것이다."음."조원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마침, 간밤에 밖을 살피던 청란 일행이 쓸만한 자를 하나 데려왔습니다."청류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어떤 자인데?"강유영이 물었다.청류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소곤소곤 귓속말을 전했다.잔뜩 구겼던 강유영의 미간이 활짝 펴졌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조원철을 보았다."그럼 당장 관아에 알려서 지부를 이리로 부르는 건 어때요?"주유재의 악행은 이미 명백히 드러났다. 방우겸을 이 자리에 불러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밝힐 때였다."주유재가 이미 부관을 관아로 보냈다고 합니다."청류가 대답했다."참으로 뻔뻔하군요."강유영은 차갑게 비웃었다."그럼 우린 지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가면 되겠네요."조원철은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2화

    강유영이 입을 열려는 찰나, 바깥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녀는 곧바로 창밖을 내다보았다.명적이었다.아마 청류가 쏘아올린 듯했다..몰려온 인파가 너무 많아 혼자 감당하기 벅차 수하들을 소환한 모양이었다.마당은 일순간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하늘을 쳐다보았다."놈이 원군을 불렀다! 그자들이 오기 전에 당장 들어가서 그 남녀를 끌어내라!"사태를 파악한 주유재가 다급히 소리쳤다.그는 강유영 일행이 고작 넷뿐이라 만만하게 생각했지 숨겨둔 수하들이 더 있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주평, 넌 당장 관아로 달려가서 사람을 물러 오너라."주유재는 잠시 머리를 굴리더니 주평에게 지시했다.오늘 일은 지난번과 달리 명분이 뚜렷했다. 백성들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이 있으니 관아의 힘을 빌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일만 잘 풀리면 백성들을 구원한 의인이라는 칭송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예."주평은 대답과 함께 재빠르게 자리를 떴다."멈춰라."청류는 평소의 장난기를 거두고 검을 빼 든 채 대문 앞을 막아섰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무리를 쏘아보며 살기를 뿜었다.몰려온 자들은 그저 평범한 백성이었다. 그들은 주유재의 선동에 속아 사람 수가 많으니 믿는 구석이 있어 날뛰었을 뿐이다.청류의 살기 어린 눈빛과 서늘한 검광을 마주하자, 백성들은 금세 기가 꺾였다.자칫 잘못했다간 단칼에 목이 달아날 것만 같았다.겁에 질린 사람들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더는 다가가지 못했다."무엇이 두려운 게야! 우리 집을 태운 원흉이 저 방 안에 있다. 어서 쳐들어가!"주유재는 무리 뒤에 숨어 사람들을 부추겼다."저놈은 혼자다. 제아무리 간이 커도 함부로 사람을 죽이진 못할 것이다."그의 선동에 사람들은 다시 동요했다.하지만 누구도 섣불리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분노 어린 눈으로 청류를 노려볼 뿐, 선뜻 발을 내딛지 못했다."나와! 당장 나오지 못할까!"누군가 바닥에서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그는 차마 청류를 맞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5화

    “유영아? 얘네가 다 어디로 갔지?”한씨가 병풍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어머니, 오지 마세요. 제가 부주의로 우유차를 옷에 쏟아서 닦고 있었습니다.”다급한 마음에 강유영은 아무 핑계나 둘러댔다.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한씨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네 오라비는?”강유영은 고개를 돌리고 애원에 찬 눈길로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당황하고 조급한 나머지 맑은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조원철은 그날 밤 그만하자고 애원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는 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겨 단단히 품에 안았다.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4화

    한씨가 고개를 돌려 강유영을 바라봤다.곁눈질로 보니, 조원철도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는 듯했다.강유영은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떡을 다시 집어 조심스럽게 입안에 넣었다.마치 돌을 씹는 것처럼 입안이 쓰고 껄끄러웠다.‘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거지? 뭘 알고 일부러 저러시는 걸까?’이유야 어찌 됐건 한씨가 이에 대해 굉장히 불쾌해하고 있음은 분명해졌다.조원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한씨는 손을 뻗어 아들의 목에 난 자국을 어루만지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곱게 자란 처자라면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3화

    조원철을 따라 밖으로 나갔더니, 밖은 어느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차가운 습기가 얼굴에 닿자,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목을 움츠렸다.“세자.”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원철의 측근 청운이 다가와서 우산을 건넸다.조원철은 우산을 펼치고는 강유영에게 따라오라는 듯, 눈짓했다.강유영은 난색을 띠며 주저했다.“아씨, 세자께서 처소까지 모셔다드린답니다.”청운이 웃으며 말했다.“배려 감사해요, 오라버니.”강유영은 어차피 그와 따로 할 말도 있고 해서 공손히 예를 행하고는 그를 따라나섰다.청운은 빗속을 나란히 걷고 있는 두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화

    초여름의 이른 아침.경성 진국공부의 사당 주변은 아침부터 자옥한 안개로 휩싸였다.조용한 사당 안에서는 승려가 경을 읊는 소리가 이따금씩 흘러나오고, 정원 내 청동로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당을 지키는 시녀와 하인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강유영은 치맛자락을 들고서 처마 길을 따라 뒤뜰을 나오고 있었다. 온몸에 퍼진 근육통 때문에 걸음걸이가 다소 어색했다.좌측 쪽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커다란 손이 뻗어 나와 가늘고 여린 그녀의 허리를 가로챘다. 상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녀를 끌고 뒤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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