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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or: 눈빛 속의 약속
조원철을 따라 밖으로 나갔더니, 밖은 어느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습기가 얼굴에 닿자,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목을 움츠렸다.

“세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원철의 측근 청운이 다가와서 우산을 건넸다.

조원철은 우산을 펼치고는 강유영에게 따라오라는 듯, 눈짓했다.

강유영은 난색을 띠며 주저했다.

“아씨, 세자께서 처소까지 모셔다드린답니다.”

청운이 웃으며 말했다.

“배려 감사해요, 오라버니.”

강유영은 어차피 그와 따로 할 말도 있고 해서 공손히 예를 행하고는 그를 따라나섰다.

청운은 빗속을 나란히 걷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라버니, 저는 소은원 생활에 이미 적응해서 부용원으로 옮기고 싶지 않습니다.”

강유영은 한참을 고민하다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녀는 걸음을 잠깐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보다는 한참 큰 키에 입은 늘 꾹 다물고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감히 바라보는 것조차 죄스러운 사람이었다.

“부용원도 살다 보면 자연히 적응될 것이다.”

조원철은 뒷짐을 지고서 담담하지만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강유영은 더 이상 무슨 핑계로 거절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부용원은 안뜰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매일 약국에 일하러 나가야 하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불편한 곳이었다.

소은원은 서북쪽 모퉁이 문으로 바로 나갈 수 있고 문을 지키는 어멈을 잘 구워삶아서 지금까지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드나들었다.

그러나 부용원으로 옮긴다면 거리가 너무 멀고 보는 눈도 많아 비밀이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녀의 유모 오씨 어멈은 삼 년 전 갑자기 큰 병으로 앓아누웠다. 병상에 누워 움직이지도 못하고 입이 돌아가 지금은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강유영은 어릴 적부터 자신을 길러준 오씨 어멈을 모른 척할 수 없고 당연히 노후를 돌봐줄 생각이었다.

어멈의 치료비를 모으기 위해 그녀는 몰래 약국에 나가 일을 돕기 시작했다. 약국의 서 의원을 따라 일 년 넘게 배운 덕에 지금은 혼자서 오씨 어멈에게 침을 놓을 수 있는 경지까지 되었다.

오씨 어멈도 처음 병들었을 때보다 훨씬 나아졌다.

생각에 잠겨 걷는 사이에 어느새 처소 앞에 당도했다.

조원철은 소은원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강유영은 살며시 옆으로 물러선 후, 그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행했다.

“저는 지금 이대로도 만족합니다, 오라버니. 앞으로는 저를 위해 더 마음 써주지 않으셔도 돼요.”

더 이상 좋은 핑곗거리도 생각나지 않았기에 그녀는 딱 잘라 거절했다.

조원철은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고서 자신에게서 선을 긋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유영이 그 시선이 불편해 이대로 돌아설까 망설이고 있을 즈음, 갑자기 그가 입을 열었다.

“내 방에 손수건을 두고 갔더구나. 언제 찾으러 올 생각이냐?”

강유영은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라 예의고 뭐고 따질 틈도 없이 도망치듯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침에 너무 급하게 그의 방을 빠져나오다가 손수건을 떨어뜨린 것이 실수였다.

그냥 버리면 될 것을, 왜 굳이 그 얘기를 꺼내 사람을 난처하게 하는 것일까?

좁은 뜰 안으로 들어섰더니 안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녀 서유가 부채를 들고 처마 밑에서 약을 달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강유영을 본 서유가 다급히 일어서며 예를 행했다.

“아씨, 돌아오셨어요?”

강유영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서유를 바라보며 물었다.

“해가 서쪽에서 떴나? 네가 일을 다 하다니, 신기한 일이구나.”

강유영의 신변에는 시녀가 둘 있었다.

오씨 어멈이 입양한 단비는 어릴 때부터 그녀와 함께 자라, 오직 그녀에게만 충성하고 평소에는 자매처럼 정이 깊었다.

반면 서유는 한씨가 보내준 시녀였다.

친딸 조연화가 집으로 돌아온 후, 진국공부에서 강유영의 입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눈치 빠른 하인들은 모조리 그녀의 처소를 떠나버리고, 남게 된 사람이 서유와 단비였다.

그러나 서유는 허드렛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강유영이 몰래 관찰한 결과, 서유는 한씨의 사람이 아니라 그저 태생이 게으를 뿐이었다. 그랬기에 강유영도 굳이 그녀를 내쫓지 않았다.

어차피 서유를 내보내면 한씨가 이때다 싶어 첩자를 보내올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부지런을 떠는 서유가 어딘가 이상했다.

“오셨어요, 아씨?”

이때 서유가 안방에서 나오며 미소를 지었다. 강유영은 서유를 힐끗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세자께서 돌아오시니 게으름병이 나았나 보네요.”

서유가 다급히 싹싹 빌었다.

“아씨, 소인이 잘못했어요. 세자께 알리지 말아주세요.”

강유영은 안방으로 들어가 겉옷을 벗으며 대꾸했다.

“난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단비가 다가와 겉옷을 건네받았다.

“어멈은 오늘 좀 어떠셨어요?”

강유영은 다가가서 어멈의 등 뒤에 부드러운 베개를 받쳐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많이 드셨어요. 쌀죽 한 그릇을 다 드셨는걸요.”

단비가 웃으며 어멈의 다리를 주물렀다.

“제가 말도 걸어봤는데 눈을 깜빡이며 응답도 해주셨어요.”

“그래? 어멈, 저 알아보시겠어요?”

강유영은 웃으며 오씨 어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멈이 힘겹게 눈을 깜빡였다.

강유영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나아지고 있네요. 어멈, 급할 것 없어요. 지금처럼만 간다면 천천히 회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아씨, 어디 다치셨어요? 몸에서 약냄새가 나네요?”

단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발을 좀 삐끗해서 약 좀 바른 것뿐이야.”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조원철이 발라준 약은 향이 좀 강했다.

“어딜 다치셨는데요? 제가 한번 볼게요.”

얘기를 들은 단비가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다그쳤다.

강유영은 당황한 어투로 거절했다.

“별것 아니야. 며칠 지나면 낫겠지.”

“그럼 제가 목욕물을 준비할 테니 씻고 일찍 쉬셔요. 어멈은 제가 돌볼게요.”

단비는 주인이 안쓰러워 어서 가서 쉬라고 재촉했다.

안 그래도 어젯밤 밤새 시달린 강유영이었기에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병풍 뒤로 온 그녀는 옷섶을 열고 고개를 숙여 자신을 바라보았다. 끈적하고 뻐근한 느낌이 온몸으로 퍼지며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쇄골 아래쪽부터 발목까지 몸 곳곳에 그가 남긴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살살 좀 하시지.’

그러나 쇄골 위쪽으로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오히려 그녀가 다급해서 한번 깨문 것이 눈에 띄는 곳에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그녀는 욕탕으로 들어가 몸을 녹이며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목욕을 마치니 피로가 더욱 몰려왔다.

침상에 누웠지만 머리가 혼란스럽고 자꾸만 어젯밤 광경이 떠올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그렇게 잠들어 버렸다.

“아씨, 풍씨 어멈이 오셨어요. 부인께서 아침을 함께 드시자고 하셨답니다.”

단비의 목소리가 잠든 그녀를 깨웠다.

강유영은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오후쯤에 잠들었는데 벌써 아침이 되었을 줄이야.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려던 그녀는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씨, 다친 발이 아직도 아프신 건가요?”

단비가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제가 나가서 풍씨 어멈께 오늘은 못 가신다고 말씀드릴까요?”

강유영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께서 간만에 부르셨는데 안 가면 기분 상해 하실 거야.”

그녀는 일어나서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풍씨 어멈을 따라 한씨의 거처로 갔다.

어멈이 문을 열고 들어가며 아뢰었다.

“부인, 유영 아씨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강유영은 치맛자락을 들고 문지방을 넘어서다가 고개를 드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훤칠한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마 조회에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주홍색의 관복을 입고서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두른 모습이었다.

안 그래도 하얗고 준수한 얼굴이 받쳐주니 주홍색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늠름한 풍채가 돋보였다.

방 안에 꺼지지 않은 촛불마저 그를 편애하는 듯, 그의 주변으로 희미한 광테를 두르고 있었다.

강유영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오라버니도 여기 계실 줄은….’

그의 표정은 단정하고 엄숙했으며 눈빛은 담담했다. 수없이 많았던 지난날처럼 그녀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뜨거웠던 그날 밤은 혼란스러운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강유영은 눈을 내리깔고 예를 행했다.

“어머니, 오라버니를 뵈옵니다.”

그 사고만 없었더라면, 그와 그녀는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그의 덕을 많이 본 것은 사실이지만, 조원철에게는 그저 집안의 체면을 위한 당연한 처사였을 뿐이다.

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조원철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한씨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유영아, 어서 이쪽으로 와서 앉으렴. 사양하지 말고 많이 먹어.”

강유영은 자리로 가서 앉아 수저를 들고 앞에 놓인 떡을 먹으며, 더 이상 조원철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한씨가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조원철에게 양녀라고 박대한 적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뿐이었다.

한씨는 아들의 목에 남은 이빨자국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만두 하나를 집어 그의 접시에 놓아주며 말했다.

“밖에 두었다는 그 여자 말이다. 점잖은 가문의 처자는 아니지?”

강유영은 그 말을 듣고 놀라 집었던 떡을 접시에 떨구고 말았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숨이 막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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Último capítulo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7화

    "그것이 네가 말하는 해결책이냐."조원철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방우겸을 응시했다."주 대감 댁 혼사를 허락해 주면 화재민들의 집도 고쳐줄 것이고 백성들의 원성도 잦아들 것입니다. 흉흉한 소문도 저절로 가라앉을 터이니, 이보다 완벽한 해결책이 어디 있겠습니까."방우겸은 조원철이 웃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앞에서는 원칙을 운운하며 깐깐하게 굴었지만, 결국 이 자도 관원들 사회가 돌아가는 생리를 잘 아는 듯했다.오랜 세월 관직에 몸담은 자가 홀로 고고한 척 유난을 떨 리 없었다. 강직하다는 소문은 그저 그럴싸한 허울에 불과한 것이다."이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법을 어기란 소리 아니냐."강유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차갑게 대꾸했다."그건 지나친 비약입니다. 어찌 사리사욕을 채운다 하십니까."방우겸은 여유롭게 고개를 저었다."조 대인께서는 대의를 위해 병주 백성들을 굽어살피려는 것입니다. 민심을 수습하는 일보다 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조원철이 타협했다고 굳게 믿은 방우겸은 한결 편안해진 태도로 평소 즐겨 쓰던 입바른 소리를 늘어놓았다."주 대감이 사유 재산을 털어 백성들의 집을 고쳐주겠다고 했다는 뜻이냐?"조원철은 시선을 돌려 주유재를 바라보았다.방우겸 역시 주유재를 보며 눈짓을 보냈다."그렇습니다."주유재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제 손으로 불태운 집을 제 돈으로 다시 짓게 생겼으니 생돈을 날리는 격이었다.하지만 방우겸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방우겸은 앞으로 몇 년은 더 병주 지부 자리에 앉아 있을 자였다.일단 장단을 맞춰준 후에, 손해본 돈은 훗날 백성들을 쥐어짜 메우면 될 일이었다."이번 화재는 주 대감과 연관이 없을 텐데, 어찌하여 거금을 내놓으려는 것이냐."조원철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주유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스스로 거금을 내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켕기는 구석이 있음을 인정하는 격이었다."대인께서 아직 이 지역 사정을 잘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 대감은 평소 어려운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6화

    조원철은 그의 말을 다시 자르며 인상을 썼다.차가운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났다."아닙니다, 잘못된 일이지요. 어찌 되었든 산 사람을 생매장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방우겸은 재빨리 태도를 바꿨다."대인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병주의 영혼 혼례를 막으러 오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소관 역시 평소 이 악습을 탐탁지 않게 여겨 왔습니다. 이런 미신은 진작에 뿌리 뽑았어야 마땅합니다."그는 뚜렷한 소신이 없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갈대처럼, 힘 있는 자의 편에 설 뿐이었다.강유영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방우겸의 솜씨는 과연 미꾸라지 같다는 소문에 걸맞았다."그래서, 이 일은 어찌 해결할 생각이냐."조원철이 방우겸에게 물었다.방우겸은 눈동자를 굴리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대인, 지금 밖에서는 두 분이 영혼 혼례를 막은 탓에 불이 났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는 대인께 불리한 상황입니다. 물론 소관은 이번 화재가 그저 사고일 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지한 백성들은 뜬소문에 쉽게 휩쓸립니다. 이들을 억지로 누르려 했다가는 자칫 민란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리되면 애먼 자들이 다칠 텐데, 백성을 헤아리시는 대인께서 어찌 그런 참상을 원하시겠습니까."조원철은 아무 말 없이 서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소관에게 한 가지 방도가 있는데, 대인의 뜻은 어떠신지요."방우겸은 잠시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는 조원철의 속내를 알 수 없었지만, 영혼 혼례를 강제로 막으려다 민란이라도 일어난다면 조원철 역시 경성으로 돌아가 문책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 계산했다."말해보아라."조원철이 담담하게 물었다.방우겸은 조원철에게 몇 걸음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불이 난 것은 하늘의 뜻이나, 집을 잃은 백성들은 가엾습니다. 하여 관아에서 돈을 조금 내어 백성들의 집을 다시 지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관아에서 얼마나 지원할 수 있느냐."조원철이 되물었다."관아의 힘만으로는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5화

    주유재는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소리쳤다.방우겸을 따라 무릎을 꿇으려던 백성들은 주유재의 선동에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맞소! 당장 우리 집을 물어내시오!""고위 관원은 무슨, 재앙을 부르는 재앙신이야!""우린 당장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소. 관원이든 뭐든 책임부터 지시오!"백성들은 순식간에 흥분하여 여기저기서 고함을 질러댔다."모두 입 다물지 못할까!"방우겸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호통을 쳤다."방 대인……."주유재가 입을 열려 했다."주유재! 죽고 싶으면 계속 사람들을 선동하거라!"방우겸은 매섭게 쏘아붙였다.방우겸은 두루두루 잘 지내며 살아온 자였다. 평생 이토록 분노를 드러낸 적이 드물었다. 주유재 저 미련한 놈은 필시 진국공부 세자의 명성을 들어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저 예전에 병주에 파견되었던 만만한 관원쯤으로 착각하는 모양이었다.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삐끗했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판이었다.주유재는 방우겸의 호통에 기가 죽어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당장 무릎 꿇지 못할까!"주회안도 거들며 주유재에게 몰래 눈치를 주었다.그제야 주유재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 방우겸 일행이 여전히 제 편임을 깨달은 그는 지체 없이 옷자락을 걷어 올리며 무릎을 꿇었다.주유재가 무릎을 꿇자 기세등등하던 백성들도 더는 소란을 피우지 못하고 엎드렸다."조 대인, 필시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관아로 자리를 옮기시면 소관이 상세히 말씀 올리겠습니다."방우겸은 조원철을 향해 굽실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는 기대와 공손함이 묻어났다."필요 없다. 백성들 앞에서 못할 얘기라도 있느냐? 여기서 다 말해 보아라."조원철은 차가운 목소리로 단칼에 거절했다."그게……."방우겸은 난감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속내를 털어놓기는 곤란했다."주 대감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밖으로 나가 대기하시오."주회안이 즉각 지시를 내렸다.주유재도 손을 저으며 거들었다."다들 밖에서 기다리시오. 저들이 뭐라 변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4화

    방우겸도 시선을 돌렸다. 나란히 밖으로 나오는 두 남녀를 보고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청류와 임소아도 뒤따라 나와 두 사람 뒤에 섰다."대인, 저자들입니다. 임씨 집안 계집애를 붙잡아 두고 주 대감 댁 영혼 혼례를 막았습니다. 관아의 뜻이라며 앞으로 병주에서 영혼 혼례를 올리지 못하게 될 거라 떠벌렸습니다. 저들이 원귀를 노하게 해 우리 집을 태워버린 것입니다!""지부 대인께서 부디 저들을 엄벌해 주십시오.""병주의 풍습에 저들이 무슨 자격으로 참견한단 말입니까!"백성들은 앞다투어 강유영과 조원철을 가리키며 고자질했다.방우겸은 강유영과 조원철을 유심히 살피며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얼마 전 관아로 그를 찾아온 자는 청류였다.그때도 분위기가 범상치 않아 경성에서 파견된 관원이 신분을 위장한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그런데 지금 그 청류는 젊은 사내의 뒤에 서 있었다. 사내는 묵직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아무리 봐도 청류는 사내의 수하로 보였다.앞에 선 젊은 남녀는 귀티가 흐르고 기품이 남달랐다. 예사로운 신분이 아닐 것이다.방우겸은 처세에 밝은 자였다. 이리저리 비위를 맞추며 병주 지부 자리까지 꿰찬 그였다. 마음속에 의구심이 생긴 이상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철칙이었다.그는 강유영과 조원철을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했다.상대의 정체를 확실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섣불리 적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대인, 저들은 경성에서 왔다고 합니다. 혹 누군지 아십니까?"주유재가 다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방우겸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는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먼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감히 여쭙건대……."그는 조원철의 허리춤에 매달린 금인을 발견했다. 어떤 글자가 새겨져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하지만 심상치 않은 신분임은 확신했다. 어찌 됐든 예를 갖추는 편이 나았다."방우겸, 네 죄를 아느냐."조원철은 차가운 목소리로 꾸짖었다.방우겸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눈동자를 굴리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누구신지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3화

    문가에 있던 임소아가 청류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청류는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두 사람에게 예를 갖췄다."주군, 아씨.""무슨 일이냐."조원철이 물었다."간밤에 병주성 동남쪽에서 큰불이 나 민가 대여섯 채가 잿더미로 변했답니다. 주유재는 주군과 아씨께서 영혼 혼례를 막아 원혼들이 노한 탓이라며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집을 잃은 백성들이 죗값을 치르라며 몰려와 난동을 부리는 중입니다."청류는 고개를 숙인 채 차분히 보고했다."넌 어찌 생각하느냐."조원철은 강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어처구니없는 소리네요."강유영은 콧방귀를 뀌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녀는 맑은 눈을 반짝이며 조원철을 올려다보았다."주유재가 지어낸 헛소리입니다. 전혀 믿을 수가 없어요. 저 불도 주유재의 자작극일 겁니다. 어쩜 그리 시기가 딱 맞아떨어질 수 있겠어요?"마침 주유재가 두 사람에게 누명을 씌울 구실이 필요했던 차에 화재가 났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미심쩍었다.주유재가 고의로 불을 지른 것이 분명했다.그는 몹시도 흉악한 자였다. 아들에게 영혼 혼례를 치러주고, 앞으로도 그 악습으로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 그 많은 사람의 집을 불태운 것이다."음."조원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마침, 간밤에 밖을 살피던 청란 일행이 쓸만한 자를 하나 데려왔습니다."청류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어떤 자인데?"강유영이 물었다.청류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소곤소곤 귓속말을 전했다.잔뜩 구겼던 강유영의 미간이 활짝 펴졌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조원철을 보았다."그럼 당장 관아에 알려서 지부를 이리로 부르는 건 어때요?"주유재의 악행은 이미 명백히 드러났다. 방우겸을 이 자리에 불러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밝힐 때였다."주유재가 이미 부관을 관아로 보냈다고 합니다."청류가 대답했다."참으로 뻔뻔하군요."강유영은 차갑게 비웃었다."그럼 우린 지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가면 되겠네요."조원철은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2화

    강유영이 입을 열려는 찰나, 바깥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녀는 곧바로 창밖을 내다보았다.명적이었다.아마 청류가 쏘아올린 듯했다..몰려온 인파가 너무 많아 혼자 감당하기 벅차 수하들을 소환한 모양이었다.마당은 일순간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하늘을 쳐다보았다."놈이 원군을 불렀다! 그자들이 오기 전에 당장 들어가서 그 남녀를 끌어내라!"사태를 파악한 주유재가 다급히 소리쳤다.그는 강유영 일행이 고작 넷뿐이라 만만하게 생각했지 숨겨둔 수하들이 더 있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주평, 넌 당장 관아로 달려가서 사람을 물러 오너라."주유재는 잠시 머리를 굴리더니 주평에게 지시했다.오늘 일은 지난번과 달리 명분이 뚜렷했다. 백성들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이 있으니 관아의 힘을 빌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일만 잘 풀리면 백성들을 구원한 의인이라는 칭송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예."주평은 대답과 함께 재빠르게 자리를 떴다."멈춰라."청류는 평소의 장난기를 거두고 검을 빼 든 채 대문 앞을 막아섰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무리를 쏘아보며 살기를 뿜었다.몰려온 자들은 그저 평범한 백성이었다. 그들은 주유재의 선동에 속아 사람 수가 많으니 믿는 구석이 있어 날뛰었을 뿐이다.청류의 살기 어린 눈빛과 서늘한 검광을 마주하자, 백성들은 금세 기가 꺾였다.자칫 잘못했다간 단칼에 목이 달아날 것만 같았다.겁에 질린 사람들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더는 다가가지 못했다."무엇이 두려운 게야! 우리 집을 태운 원흉이 저 방 안에 있다. 어서 쳐들어가!"주유재는 무리 뒤에 숨어 사람들을 부추겼다."저놈은 혼자다. 제아무리 간이 커도 함부로 사람을 죽이진 못할 것이다."그의 선동에 사람들은 다시 동요했다.하지만 누구도 섣불리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분노 어린 눈으로 청류를 노려볼 뿐, 선뜻 발을 내딛지 못했다."나와! 당장 나오지 못할까!"누군가 바닥에서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그는 차마 청류를 맞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2화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꾸나.”한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유영은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정신은 아찔해져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오직 문이 열리면 둘 다 끝장이라는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 온몸은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어 조원철의 어깨를 밀었다.그녀는 안간힘을 쓴 것이었지만, 조원철에게는 그저 간지러울 정도였다.투명한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길게 말린 속눈썹에는 눈물방울이 맺혀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축 처진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7화

    강유영은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돌아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다리가 바닥에 꽁꽁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들어오거라.”조원철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령했다.강유영은 누가 보기라도 할까 두려워,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내실로 들어갔다.“언제 오셨나요?”잠깐 오씨 어멈의 저녁을 챙기러 나갔다 온 사이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지금쯤이면 밖에서 왕 소저와 저녁 식사를 해야 하지 않나?’조원철이 다가오더니 문을 닫았다.강유영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서 그와 거리를 벌리고 고개를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6화

    “기특하기도 하지. 어서 이리 와서 앉으렴.”한씨는 웃으며 강유영을 향해 손짓하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밖에서 강유영에게 잘해주는 것은 인자한 진국공 부인의 명성을 위해서였다.강유영은 약상자를 장 의원에게 건네고는 고분고분 그쪽으로 다가갔다.장 의원은 그녀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유영의 처지를 잘 알기에, 그녀의 거짓말을 까발리지 않았다. 장 의원은 손을 뻗어 한씨의 손목에 대고 진맥을 시작했다.한씨의 옆에 앉은 강유영은 불안하게 병풍 뒤쪽을 힐끔거렸다.조원철은 탁자 앞에 마주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화

    초여름의 이른 아침.경성 진국공부의 사당 주변은 아침부터 자옥한 안개로 휩싸였다.조용한 사당 안에서는 승려가 경을 읊는 소리가 이따금씩 흘러나오고, 정원 내 청동로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당을 지키는 시녀와 하인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강유영은 치맛자락을 들고서 처마 길을 따라 뒤뜰을 나오고 있었다. 온몸에 퍼진 근육통 때문에 걸음걸이가 다소 어색했다.좌측 쪽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커다란 손이 뻗어 나와 가늘고 여린 그녀의 허리를 가로챘다. 상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녀를 끌고 뒤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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