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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눈빛 속의 약속
강유영은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돌아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다리가 바닥에 꽁꽁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들어오거라.”

조원철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령했다.

강유영은 누가 보기라도 할까 두려워,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내실로 들어갔다.

“언제 오셨나요?”

잠깐 오씨 어멈의 저녁을 챙기러 나갔다 온 사이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지금쯤이면 밖에서 왕 소저와 저녁 식사를 해야 하지 않나?’

조원철이 다가오더니 문을 닫았다.

강유영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서 그와 거리를 벌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무심한 듯 물었다.

“손은 좀 괜찮아졌느냐?”

“예, 다 나았습니다.”

강유영은 짤막하게 답했다.

심한 화상도 아니었고 화상 연고를 바로 발랐기에 아무런 흉터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나았다.

조원철은 말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강유영은 그 시선에 불안감을 느끼며 조심스레 용건을 물었다.

“손수건 돌려주러 왔다.”

조원철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기다란 손가락 위에 어울리지 않는 연분홍색 손수건이 걸쳐져 있었다. 선이 깔끔하고 유려한 손가락에 손등에는 옅은 청색 핏줄이 선명하게 비쳐 보였다. 참으로 보기 좋은 손이었다. 마치 저 손에 무한한 힘이 담긴 듯, 모든 것을 손에 장악하고 있는 듯했다.

이 손이 그날 자신의 손에 깍지를 끼고 자신을 벽으로 밀치던 것을 생각하면,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재빨리 손을 뻗어 그날 밤 비밀의 장소에 같이 있었던 손수건을 가로챘다.

하지만 조원철은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강유영은 흠칫하다가 힘껏 잡아당겼다.

마침내 손수건이 그녀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려 당장이라도 이걸 어딘가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결국 종종걸음으로 다가가서 장롱을 열고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다.

장롱을 닫은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조원철을 힐끗 보고는 조용히 말했다.

“오라버니, 이만 돌아가셔야죠.”

단비가 주방에 밥을 가지러 갔는데 그가 이곳에 계속 버티고 있다가는 이따가 돌아온 단비에게 들킬지도 모른다.

“약 발라야지.”

그가 다가오더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에는 여전히 백옥병이 들려 있었다.

강유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거절하지 않고 약병을 받아 병풍 뒤로 들어갔다.

거절한다면 스스로 한다고 손을 뻗어올지 모른다.

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게다가 약효가 좋아서 통증이 많이 가라앉은 터라, 이번에 한번 바른 후에는 더 이상 필요 없을 듯했다.

그녀는 재빨리 약을 바른 후에 병풍 밖으로 나와 약병을 조원철에게 돌려주었다.

이제 볼 일이 끝났겠지?

조원철은 감정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오늘은 이만 쉬고 싶네요.”

강유영은 용기를 내어 축객령을 내렸다.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마음이 착잡했다.

낮에는 왕연령과 맞선을 보더니 밤중에 찾아오다니. 설마 몰래 자신을 외실로 두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말 괜찮은 게냐?”

그가 또 물었다.

“예, 다 나았습니다. 앞으로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강유영은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용기를 내어 선을 긋기로 했다.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서는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다정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속으로 그런 느낌을 부정해 버렸다.

조원철에게 다정을 기대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강유영, 착각하지 마!’

“연화 아씨, 사예 아씨, 저희 아씨는 지금 막 쉬시려고 누우셨어요.”

밖에서 단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유영은 화들짝 놀라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조연화와 조사예가 지금 둘이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어찌 해명한단 말인가?

“이쪽으로 오십시오.”

위기의 순간, 다른 것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조원철의 손을 확 잡아당겨 장롱 쪽으로 데려갔다.

손에 부드럽고 말캉한 감촉이 닿았다. 가녀린 손가락이 안쓰러워 힘을 주기에도 아까웠다.

그녀가 이렇게 먼저 다가와 손을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원철은 흠칫하더니 마치 굳어버린 것처럼 멍하니 움직일 수 없었다.

“어서 들어가세요.”

강유영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장롱 안으로 밀쳤다.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예법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장롱에 쑤셔 넣기에는 그의 키가 너무 컸다.

허둥대는 사이, 그의 이마가 장롱 모서리에 부딪치고 말았다.

조원철은 겁내지 말라는 말을 조용히 삼키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몸을 낮춰 장롱 안으로 들어갔다.

“괜찮으세요?”

강유영은 당황한 마음에 그의 이마를 문질렀다.

지금의 그녀는 이미 깊게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고 오직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 두려우냐?”

조원철은 장롱 안에서 검고 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두렵죠. 전 오라버니와는 처지가 다르니까요.”

강유영은 허둥지둥 장롱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갔다.

조원철이라면 당연히 두려울 이유가 없었다. 진국공의 장남이자 집안의 세자, 삼군 원수인데다 이제는 어전 지휘사의 자리까지 오른 몸이고 온 가문의 영광이었다.

사태가 벌어지면 진국공부는 분명히 그의 명성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이 일을 덮겠지만, 그 과정에서 제거되는 것은 힘없는 그녀가 될 것이다.

장롱 문이 닫히자, 조원철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이마를 살짝 만져보았다.

한편 강유영이 나가서 문을 열자, 문을 밀치고 들어오려는 조연화와 조사예가 보였다.

“강유영, 이 뻔뻐한 것! 오라버니가 좀 불쌍하게 여겨준다고 고새를 못 참고 부용원에 옮겨달라고 요구하다니! 너 따위가 이런 좋은 곳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진국공부 넷째인 조사예는 서출이었다. 평소 조연화에게 붙어서 아부하며 그녀의 수족 노릇을 했다.

강유영을 보자마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비아냥거렸다.

조사예는 풍만한 몸매에 볼에 젖살이 덜 빠져서 순박한 인상이지만,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강유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막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사예 아씨는 부용원이 무척이나 욕심나나 봅니다. 그럴 거면 차라리 국공 부인께 가서 거처를 옮겨달라고 간청하지 그러셨나요?”

언제 돌아온 건지, 서유가 다가와서 조사예를 반박했다.

강유영과 단비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는 한 번도 대놓고 강유영의 편을 들어준 적이 없는 서유였다.

요즘따라 뭔가 이상했다.

조사예는 흠칫하더니 서유를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네년이 정녕 미쳤구나! 내 이것을 그냥….”

예전에 강유영을 비꼴 때도 늘 투명 인간처럼 존재감이 없었던 시녀였다.

오늘은 뭘 잘못 먹었길래 감히 이런 식으로 반발하는 걸까?

“닥치지 못해?”

조연화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대화를 끊더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강유영을 바라보며 다가와서 냄새까지 맡았다.

맑은 고양이상 눈매에 굉장히 사랑스러운 외모의 소유자였지만 한씨가 너무 애지중지 키운 탓인지 성격은 굉장히 괴팍했다.

조사예는 억울했지만 감히 언니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 서유를 힘껏 노려보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강유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왜 이러는 거지?

“네 몸에서 왜 회춘고의 냄새가 나지?”

조연화는 매서운 눈초리로 강유영의 반응을 관찰했다. 그녀는 회춘고의 향기를 너무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열두 살 나던 해, 나들이를 나갔다가 부주의로 넘어져 얼굴을 다쳐 흉터가 생긴 적이 있었다. 온 집안이 이에 안달이 났지만 완전히 흉터를 제거할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어머니 한씨가 황후께 부탁하여 겨우 회춘고를 하사받아 세 번을 발랐는데 흉터도 사라지고 전보다 더 매끄러운 피부가 되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회춘고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황실의 하사품인 회춘고를 강유영이 어떻게 가지고 있었을까?

강유영도 그 말을 듣고 표정이 굳었다.

조원철이 준 연고가 최상급 연고인 줄은 알고 있었다. 통증이 신속히 완화되고 몇 번 안 발랐는데 상처가 거의 다 나을 정도로 효과가 빨랐다. 그런데 그게 그 귀하다는 회춘고일 줄이야!

“이년이 무슨 수로 황실 연고를 구했겠어요?”

조사예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지난달에 쪽문으로 어딜 다녀오는 걸 봤는데 내가 보기엔 저 요망한 얼굴로 어디 귀한 분을 홀려서 얻어낸 거겠죠. 생긴 게 딱 여우처럼 생겼잖아요.”

그녀는 증오에 찬 눈으로 강유영을 바라보았다. 조사예는 예전부터 외모가 자신보다 빼어난 강유영을 질투했다.

“사예 아씨도 첩실의 자식 아닌가요? 호박만한 얼굴이 그리 마음에 안 드셨나 보죠? 그래서 저희 아씨를 질투하시는군요.”

강유영이 뭐라 하기 전에 서유가 비아냥거렸다.

정곡을 찌르는 서유의 말에 조사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그녀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서유에게 달려들었다.

“조용히 좀 있어!”

조연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호통쳤다.

조사예는 진심으로 짜증이 난 조연화의 눈치를 보고 분노를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내 처소 바로 옆으로 이사 온 거, 굉장히 기분 나빠. 원래는 쫓아버릴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네? 네가 하는 거 봐서 결정해야겠어.”

조연화는 의자로 다가가서 앉더니 교만하게 강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회춘고 말이야. 네가 스스로 내놓을래? 아니면 내가 수색할까?”

마치 회춘고는 당연히 자신의 소유여야 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강유영은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제멋대로이고 의심이 많은 조연화이니 없다고 해도 쉽사리 믿지 않을 것이다.

조연화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탁자를 치며 일어섰다.

“여봐라, 당장 안을 수색해서 연고 같은 것들은 모조리 꺼내서 가져오거라!”

그녀의 한마디에 수십 명의 시녀와 어멈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몰려들어 이곳저곳 뒤지기 시작했다.

“그만해!”

서유가 다급히 그들을 막아섰다.

단비도 굳은 표정으로 조연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연화 아씨, 이러시면 저희가 세자께 알릴 수밖에 없어요. 그 뒷감당을 어찌 하시려고 이러십니까?”

조연화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큰 오라버니를 들먹여도 소용없어. 오라버니께서 강유영을 감싸는 건 그저 진국공부의 평판을 위해서야. 친동생은 나라고! 내실도 뒤지거라!”

강유영은 장롱 속에 숨긴 조원철을 떠올리고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녀는 급하게 달려가서 문고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아 금세 밀려서 문이 열리고 말았다.

단비와 서유도 어멈들에게 제압당했다.

시녀들이 몰려가서 저녁에 금방 정리한 방을 엉망진창으로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강유영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달려가서 장롱 문을 열려는 시녀를 밀쳐내고 두 팔을 벌려 장농 앞을 가로막았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이 이상 무례를 부리신다면 저도 큰 오라버니를 찾아가 사실을 알릴 수밖에 없습니다. 큰 오라버니 성격은 아씨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그분은 가족의 정보다 공정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강유영은 당황한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겉보기에는 침착해 보이지만, 사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한씨는 지나칠 정도로 조연화를 편애했고 진국공은 집안일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무법천지인 조연화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존재는 조원철뿐이었다.

강유영은 그를 내세워 겁을 줘서 이 소란을 그만두게 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조연화는 강유영의 뒤에 있는 장롱을 노려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러더니 마침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계속 뒤지거라! 고작 사흘 정도 사당에 갇히는 것밖에 더하겠어? 누가 두려워할 줄 알고?”

사흘 정도 사당에 갇히는 대가로 회춘고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것도 이득이었다.

시녀들이 몰려와 좌우에서 강유영을 붙잡았다.

조연화가 장롱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

강유영은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자신의 장롱 안에 숨어 있는 조원철 생각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해도 오해를 사기 십상이었다.

하물며 그들은 완전히 결백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장롱 문이 열리는 순간, 강유영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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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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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지
재밌네요 ㅎ 원래 소설 잘 안보는데 설레구 조마조마하기도하구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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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희
책 잘 안읽는데 너무 재미있어요 청소도 접고 이거 보고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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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주
우와 ~몇년만에 느끼는 설렘의 소설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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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걸어가거라. 무서워할 것 없다. 예전에 놀란 적이 있으니, 먼저 담력부터 길러야 한다."조원철이 한쪽으로 비켜서며 그녀를 이끌었다.강유영은 그의 부축이 사라지자, 경화 공주에게 떠밀려 물에 빠져 하마터면 익사할 뻔했던 끔찍한 기억이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고개를 저어 그 기억들을 떨쳐냈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 앞으로 걸어갔다.발밑의 옥석은 공들여 다듬은 듯, 밟았을 때 거칠면서도 발이 배기지 않고 미끄러지지도 않았다.흔들림 없이 한참을 걷다 보니 점차 긴장이 풀렸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조원철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까지 걸어갔다.과연 그의 말대로 가장 깊은 곳이라 해봐야 겨우 그녀의 쇄골 언저리에 닿을 뿐이었다.걷다 보니 담력이 꽤 붙은 그녀는 가장 깊은 곳을 이리저리 오갔다. 따스한 온천수가 온몸을 감싸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다."오라버니, 저 이제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이제 수영하는 법을 가르쳐 주실 겁니까?"마음에 기쁨이 차오른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생기가 넘치는 얼굴이었다.조원철은 옥석 벽에 기댄 채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이리 오거라."강유영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한 걸음씩 그를 향해 걸어갔다.물이 점점 얕아지며 어느덧 수면이 그녀의 허리 아래로 내려갔다.그녀는 어느새 그의 눈앞에 다다랐다."어떻게 시작합니까?"온천 열기에 두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고, 젖은 머리끝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물에 씻은 듯 맑고 투명한 눈망울로 고개를 기웃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조원철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칠흑 같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짙은 감정이 요동쳤다.강유영은 그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그를 살피던 그녀는 이내 그의 시선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몸에 걸친 탁청초가 물에 젖자 거의 투명해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533화

    강유영은 깜짝 놀라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침상에 가서 자거라."조원철은 시선을 내리깔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맑고 부드러웠건만, 강유영은 오히려 잠이 확 달아났다. 침상에 눕자마자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돌돌 만 그녀는 안쪽으로 데굴 굴러갔다. 그러고는 바깥쪽을 등진 채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그가 뭘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아주 미세한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녀는 이불을 꼭 끌어안은 채 불안감에 휩싸였다."머리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중이니, 너 먼저 자거라."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유영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했다.자신이 아직 잠들지 않고 잔뜩 긴장해 있다는 것을 그가 어찌 알았단 말인가.하지만 낮에 노부인을 상대하느라 진을 뺀 탓에 노곤함이 몰려왔다.그녀는 오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다음 날.그녀는 지저귀는 새 울음소리에 눈을 떴다.낯선 침상 휘장을 마주한 그녀는 잠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깼느냐? 옷을 갈아입거라. 내려가서 수영을 가르쳐 주마."곁에서 조원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떠올랐다."알겠습니다."강유영은 바로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그가 미리 준비해 둔 탁청초 옷을 챙겨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그녀가 밖으로 나왔다.조원철은 여전히 침상에 앉아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녀가 먼저 그를 불렀다."가실까요?"조원철이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새하얀 치마와 저고리를 입은 소녀의 허리춤까지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티 없이 맑고 뽀얀 얼굴에 앳된 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산다화처럼 은은한 안개에 휩싸인 듯 주변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왜 그러십니까? 어디 이상한 데라도 있습니까?"강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532화

    "정말 으리으리하네요."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돌려 그에게 물었다."이곳은 다른 이가 운영하는 상점인가요?"이런 곳은 교외의 격구장처럼 외부에 빌려주고 돈을 받을 터였다. 진국공부에도 격구장이 하나 있었지만 온천 산장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느 고관대작 가문에서 소유한 곳인지 궁금했다."내 것이다."조원철은 짧게 대답했다.강유영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가 교외에 저택을 하나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오씨 어멈이 머물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하지만 온천 산장까지 소유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거라."조원철은 시선을 내려 그녀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당부했다."알겠습니다."강유영은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이 쿵쾅거렸다.그가 자신과 비밀을 공유하고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걷잡을 수 없는 은밀한 기쁨을 피어오르게 했다.마차가 산장 안으로 들어서더니 어느 거처 앞에 멈추어 섰다."내리거라."조원철은 먼저 마차에서 내려 강유영을 부축하려 손을 내밀었다.강유영은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누각의 화려한 계단 위에는 얇은 주단이 펼쳐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새어 나오는 은은한 불빛이 달빛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조원철은 그녀의 손을 이끌고 이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안은 침실이었다.세밀하게 조각된 널찍한 침상 위로는 안개 낀 푸른빛을 띠는 비단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화장대의 구리 거울은 윤이 났고, 화장 상자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금사남목으로 짠 탁자와 의자, 그리고 곁에 둔 작은 탁자 위 화병에는 만개한 추해당이 꽂혀 있었다.창가에는 푹신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 서면 뜰 안의 산천에서 뽀얗게 피어오르는 온천 안개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그야말로 인간 세상의 선경이 따로 없었다."씻고 쉬거라. 내일 수영을 가르쳐 주마."조원철이 맞잡았던 손을 놓으며 말했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6화

    “기특하기도 하지. 어서 이리 와서 앉으렴.”한씨는 웃으며 강유영을 향해 손짓하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밖에서 강유영에게 잘해주는 것은 인자한 진국공 부인의 명성을 위해서였다.강유영은 약상자를 장 의원에게 건네고는 고분고분 그쪽으로 다가갔다.장 의원은 그녀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유영의 처지를 잘 알기에, 그녀의 거짓말을 까발리지 않았다. 장 의원은 손을 뻗어 한씨의 손목에 대고 진맥을 시작했다.한씨의 옆에 앉은 강유영은 불안하게 병풍 뒤쪽을 힐끔거렸다.조원철은 탁자 앞에 마주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5화

    “유영아? 얘네가 다 어디로 갔지?”한씨가 병풍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어머니, 오지 마세요. 제가 부주의로 우유차를 옷에 쏟아서 닦고 있었습니다.”다급한 마음에 강유영은 아무 핑계나 둘러댔다.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한씨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네 오라비는?”강유영은 고개를 돌리고 애원에 찬 눈길로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당황하고 조급한 나머지 맑은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조원철은 그날 밤 그만하자고 애원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는 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겨 단단히 품에 안았다.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4화

    한씨가 고개를 돌려 강유영을 바라봤다.곁눈질로 보니, 조원철도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는 듯했다.강유영은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떡을 다시 집어 조심스럽게 입안에 넣었다.마치 돌을 씹는 것처럼 입안이 쓰고 껄끄러웠다.‘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거지? 뭘 알고 일부러 저러시는 걸까?’이유야 어찌 됐건 한씨가 이에 대해 굉장히 불쾌해하고 있음은 분명해졌다.조원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한씨는 손을 뻗어 아들의 목에 난 자국을 어루만지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곱게 자란 처자라면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3화

    조원철을 따라 밖으로 나갔더니, 밖은 어느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차가운 습기가 얼굴에 닿자,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목을 움츠렸다.“세자.”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원철의 측근 청운이 다가와서 우산을 건넸다.조원철은 우산을 펼치고는 강유영에게 따라오라는 듯, 눈짓했다.강유영은 난색을 띠며 주저했다.“아씨, 세자께서 처소까지 모셔다드린답니다.”청운이 웃으며 말했다.“배려 감사해요, 오라버니.”강유영은 어차피 그와 따로 할 말도 있고 해서 공손히 예를 행하고는 그를 따라나섰다.청운은 빗속을 나란히 걷고 있는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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