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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or: 눈빛 속의 약속
강유영은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돌아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다리가 바닥에 꽁꽁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들어오거라.”

조원철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령했다.

강유영은 누가 보기라도 할까 두려워,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내실로 들어갔다.

“언제 오셨나요?”

잠깐 오씨 어멈의 저녁을 챙기러 나갔다 온 사이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지금쯤이면 밖에서 왕 소저와 저녁 식사를 해야 하지 않나?’

조원철이 다가오더니 문을 닫았다.

강유영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서 그와 거리를 벌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무심한 듯 물었다.

“손은 좀 괜찮아졌느냐?”

“예, 다 나았습니다.”

강유영은 짤막하게 답했다.

심한 화상도 아니었고 화상 연고를 바로 발랐기에 아무런 흉터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나았다.

조원철은 말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강유영은 그 시선에 불안감을 느끼며 조심스레 용건을 물었다.

“손수건 돌려주러 왔다.”

조원철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기다란 손가락 위에 어울리지 않는 연분홍색 손수건이 걸쳐져 있었다. 선이 깔끔하고 유려한 손가락에 손등에는 옅은 청색 핏줄이 선명하게 비쳐 보였다. 참으로 보기 좋은 손이었다. 마치 저 손에 무한한 힘이 담긴 듯, 모든 것을 손에 장악하고 있는 듯했다.

이 손이 그날 자신의 손에 깍지를 끼고 자신을 벽으로 밀치던 것을 생각하면,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재빨리 손을 뻗어 그날 밤 비밀의 장소에 같이 있었던 손수건을 가로챘다.

하지만 조원철은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강유영은 흠칫하다가 힘껏 잡아당겼다.

마침내 손수건이 그녀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려 당장이라도 이걸 어딘가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결국 종종걸음으로 다가가서 장롱을 열고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다.

장롱을 닫은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조원철을 힐끗 보고는 조용히 말했다.

“오라버니, 이만 돌아가셔야죠.”

단비가 주방에 밥을 가지러 갔는데 그가 이곳에 계속 버티고 있다가는 이따가 돌아온 단비에게 들킬지도 모른다.

“약 발라야지.”

그가 다가오더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에는 여전히 백옥병이 들려 있었다.

강유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거절하지 않고 약병을 받아 병풍 뒤로 들어갔다.

거절한다면 스스로 한다고 손을 뻗어올지 모른다.

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게다가 약효가 좋아서 통증이 많이 가라앉은 터라, 이번에 한번 바른 후에는 더 이상 필요 없을 듯했다.

그녀는 재빨리 약을 바른 후에 병풍 밖으로 나와 약병을 조원철에게 돌려주었다.

이제 볼 일이 끝났겠지?

조원철은 감정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오늘은 이만 쉬고 싶네요.”

강유영은 용기를 내어 축객령을 내렸다.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마음이 착잡했다.

낮에는 왕연령과 맞선을 보더니 밤중에 찾아오다니. 설마 몰래 자신을 외실로 두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말 괜찮은 게냐?”

그가 또 물었다.

“예, 다 나았습니다. 앞으로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강유영은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용기를 내어 선을 긋기로 했다.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서는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다정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속으로 그런 느낌을 부정해 버렸다.

조원철에게 다정을 기대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강유영, 착각하지 마!’

“연화 아씨, 사예 아씨, 저희 아씨는 지금 막 쉬시려고 누우셨어요.”

밖에서 단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유영은 화들짝 놀라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조연화와 조사예가 지금 둘이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어찌 해명한단 말인가?

“이쪽으로 오십시오.”

위기의 순간, 다른 것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조원철의 손을 확 잡아당겨 장롱 쪽으로 데려갔다.

손에 부드럽고 말캉한 감촉이 닿았다. 가녀린 손가락이 안쓰러워 힘을 주기에도 아까웠다.

그녀가 이렇게 먼저 다가와 손을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원철은 흠칫하더니 마치 굳어버린 것처럼 멍하니 움직일 수 없었다.

“어서 들어가세요.”

강유영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장롱 안으로 밀쳤다.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예법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장롱에 쑤셔 넣기에는 그의 키가 너무 컸다.

허둥대는 사이, 그의 이마가 장롱 모서리에 부딪치고 말았다.

조원철은 겁내지 말라는 말을 조용히 삼키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몸을 낮춰 장롱 안으로 들어갔다.

“괜찮으세요?”

강유영은 당황한 마음에 그의 이마를 문질렀다.

지금의 그녀는 이미 깊게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고 오직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 두려우냐?”

조원철은 장롱 안에서 검고 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두렵죠. 전 오라버니와는 처지가 다르니까요.”

강유영은 허둥지둥 장롱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갔다.

조원철이라면 당연히 두려울 이유가 없었다. 진국공의 장남이자 집안의 세자, 삼군 원수인데다 이제는 어전 지휘사의 자리까지 오른 몸이고 온 가문의 영광이었다.

사태가 벌어지면 진국공부는 분명히 그의 명성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이 일을 덮겠지만, 그 과정에서 제거되는 것은 힘없는 그녀가 될 것이다.

장롱 문이 닫히자, 조원철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이마를 살짝 만져보았다.

한편 강유영이 나가서 문을 열자, 문을 밀치고 들어오려는 조연화와 조사예가 보였다.

“강유영, 이 뻔뻐한 것! 오라버니가 좀 불쌍하게 여겨준다고 고새를 못 참고 부용원에 옮겨달라고 요구하다니! 너 따위가 이런 좋은 곳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진국공부 넷째인 조사예는 서출이었다. 평소 조연화에게 붙어서 아부하며 그녀의 수족 노릇을 했다.

강유영을 보자마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비아냥거렸다.

조사예는 풍만한 몸매에 볼에 젖살이 덜 빠져서 순박한 인상이지만,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강유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막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사예 아씨는 부용원이 무척이나 욕심나나 봅니다. 그럴 거면 차라리 국공 부인께 가서 거처를 옮겨달라고 간청하지 그러셨나요?”

언제 돌아온 건지, 서유가 다가와서 조사예를 반박했다.

강유영과 단비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는 한 번도 대놓고 강유영의 편을 들어준 적이 없는 서유였다.

요즘따라 뭔가 이상했다.

조사예는 흠칫하더니 서유를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네년이 정녕 미쳤구나! 내 이것을 그냥….”

예전에 강유영을 비꼴 때도 늘 투명 인간처럼 존재감이 없었던 시녀였다.

오늘은 뭘 잘못 먹었길래 감히 이런 식으로 반발하는 걸까?

“닥치지 못해?”

조연화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대화를 끊더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강유영을 바라보며 다가와서 냄새까지 맡았다.

맑은 고양이상 눈매에 굉장히 사랑스러운 외모의 소유자였지만 한씨가 너무 애지중지 키운 탓인지 성격은 굉장히 괴팍했다.

조사예는 억울했지만 감히 언니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 서유를 힘껏 노려보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강유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왜 이러는 거지?

“네 몸에서 왜 회춘고의 냄새가 나지?”

조연화는 매서운 눈초리로 강유영의 반응을 관찰했다. 그녀는 회춘고의 향기를 너무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열두 살 나던 해, 나들이를 나갔다가 부주의로 넘어져 얼굴을 다쳐 흉터가 생긴 적이 있었다. 온 집안이 이에 안달이 났지만 완전히 흉터를 제거할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어머니 한씨가 황후께 부탁하여 겨우 회춘고를 하사받아 세 번을 발랐는데 흉터도 사라지고 전보다 더 매끄러운 피부가 되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회춘고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황실의 하사품인 회춘고를 강유영이 어떻게 가지고 있었을까?

강유영도 그 말을 듣고 표정이 굳었다.

조원철이 준 연고가 최상급 연고인 줄은 알고 있었다. 통증이 신속히 완화되고 몇 번 안 발랐는데 상처가 거의 다 나을 정도로 효과가 빨랐다. 그런데 그게 그 귀하다는 회춘고일 줄이야!

“이년이 무슨 수로 황실 연고를 구했겠어요?”

조사예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지난달에 쪽문으로 어딜 다녀오는 걸 봤는데 내가 보기엔 저 요망한 얼굴로 어디 귀한 분을 홀려서 얻어낸 거겠죠. 생긴 게 딱 여우처럼 생겼잖아요.”

그녀는 증오에 찬 눈으로 강유영을 바라보았다. 조사예는 예전부터 외모가 자신보다 빼어난 강유영을 질투했다.

“사예 아씨도 첩실의 자식 아닌가요? 호박만한 얼굴이 그리 마음에 안 드셨나 보죠? 그래서 저희 아씨를 질투하시는군요.”

강유영이 뭐라 하기 전에 서유가 비아냥거렸다.

정곡을 찌르는 서유의 말에 조사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그녀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서유에게 달려들었다.

“조용히 좀 있어!”

조연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호통쳤다.

조사예는 진심으로 짜증이 난 조연화의 눈치를 보고 분노를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내 처소 바로 옆으로 이사 온 거, 굉장히 기분 나빠. 원래는 쫓아버릴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네? 네가 하는 거 봐서 결정해야겠어.”

조연화는 의자로 다가가서 앉더니 교만하게 강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회춘고 말이야. 네가 스스로 내놓을래? 아니면 내가 수색할까?”

마치 회춘고는 당연히 자신의 소유여야 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강유영은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제멋대로이고 의심이 많은 조연화이니 없다고 해도 쉽사리 믿지 않을 것이다.

조연화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탁자를 치며 일어섰다.

“여봐라, 당장 안을 수색해서 연고 같은 것들은 모조리 꺼내서 가져오거라!”

그녀의 한마디에 수십 명의 시녀와 어멈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몰려들어 이곳저곳 뒤지기 시작했다.

“그만해!”

서유가 다급히 그들을 막아섰다.

단비도 굳은 표정으로 조연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연화 아씨, 이러시면 저희가 세자께 알릴 수밖에 없어요. 그 뒷감당을 어찌 하시려고 이러십니까?”

조연화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큰 오라버니를 들먹여도 소용없어. 오라버니께서 강유영을 감싸는 건 그저 진국공부의 평판을 위해서야. 친동생은 나라고! 내실도 뒤지거라!”

강유영은 장롱 속에 숨긴 조원철을 떠올리고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녀는 급하게 달려가서 문고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아 금세 밀려서 문이 열리고 말았다.

단비와 서유도 어멈들에게 제압당했다.

시녀들이 몰려가서 저녁에 금방 정리한 방을 엉망진창으로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강유영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달려가서 장롱 문을 열려는 시녀를 밀쳐내고 두 팔을 벌려 장농 앞을 가로막았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이 이상 무례를 부리신다면 저도 큰 오라버니를 찾아가 사실을 알릴 수밖에 없습니다. 큰 오라버니 성격은 아씨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그분은 가족의 정보다 공정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강유영은 당황한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겉보기에는 침착해 보이지만, 사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한씨는 지나칠 정도로 조연화를 편애했고 진국공은 집안일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무법천지인 조연화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존재는 조원철뿐이었다.

강유영은 그를 내세워 겁을 줘서 이 소란을 그만두게 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조연화는 강유영의 뒤에 있는 장롱을 노려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러더니 마침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계속 뒤지거라! 고작 사흘 정도 사당에 갇히는 것밖에 더하겠어? 누가 두려워할 줄 알고?”

사흘 정도 사당에 갇히는 대가로 회춘고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것도 이득이었다.

시녀들이 몰려와 좌우에서 강유영을 붙잡았다.

조연화가 장롱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

강유영은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자신의 장롱 안에 숨어 있는 조원철 생각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해도 오해를 사기 십상이었다.

하물며 그들은 완전히 결백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장롱 문이 열리는 순간, 강유영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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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ntarios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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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Coffman
이틀 전에 $119.99결제했는데 그 크레딧이 전부 어디로 사라졌는지 계속 lock이 걸려 광고를 보고 오라니 빡치는 중이네요....
goodnovel comment avatar
신진영
조마조마 콩닥콩닥 설렘설렘
goodnovel comment avatar
장은지
재밌네요 ㅎ 원래 소설 잘 안보는데 설레구 조마조마하기도하구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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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74화

    임소아는 용모도 반반하고 부지런했다. 어디로든 시집을 보내면 은자 몇 푼은 거뜬히 챙길 수 있었다. 영혼 혼례만큼 큰 돈은 아니더라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이대로 경성 사람들을 따라가게 두면 동전 한 닢 건질 수 없었다.임소아는 눈물을 흘리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으니 임대산 부부가 어떤 부류인지 잘 알았다.그녀는 두 사람이 개과천선하리라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이렇게 하지요. 내가 당신들에게 은자를 조금 줄 테니……."강유영은 임소아가 가엾기도 했고, 임대산 부부의 속셈이 돈이라는 것도 대강 짐작했다.더 이상 저들과 옥신각신하고 싶지 않았다."아씨께서 우리 소아를 몹시 아끼시는 모양입니다. 저희가 돈을 바라고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아씨께서 은자를 내주시면 훗날 소아에게 잘해주시지 않겠나 싶어서……."임대산은 머쓱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건 오직 은자였다. 은자가 아니었다면 굳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소아를 천민으로 신분을 바꿔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도망칠 염려도 없으실 테지요."유씨도 재빨리 거들며 아부를 떨었다.임소아는 그 말을 듣고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녀는 두 사람이 돈을 노리고 찾아왔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양민인 신분을 천민으로 바꾸겠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노비로 팔아넘기겠다는 뜻이었다."아씨, 저 사람들에게 은자를 주지 마십시오."임소아는 입술을 꽉 깨물고 다부지게 말했다."전 어릴 적부터 동네 사람들의 적선으로 자랐습니다. 저들은 제게 밥 몇 술 제대로 챙겨준 적이 없습니다. 저들이 절 키웠다고 할 수 없으니 떠나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그녀는 강유영에게 은자가 넉넉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금수만도 못한 자들에게 단 한 푼도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강유영은 은표를 꺼내려던 손을 멈추고 임소아를 바라보았다."이 망할 년이……!"유씨는 참지 못하고 험한 말을 내뱉었다."입 다물어!"임대산이 아내를 다그쳤다. 경성에서 온 대인들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73화

    영혼 혼례의 악습을 근절한다는 공시가 붙었고 조원철의 상처도 거의 다 아물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병주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경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저희가 다 잘못했습니다. 대인, 제발 자비를 베푸시어 누이 얼굴이라도 보게 해주십시오…….""그렇습니다. 소아는 우리 동생 아닙니까. 동생을 집에 데려가려는 것뿐입니다……."문밖에서 임대산 부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라버니와 형님이 왔어요."옷을 개던 임소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옷가지가 침상 위로 떨어뜨렸다.그들은 또다시 임소아를 잡아가러 온 것이다."임소아는 자발적으로 우리 아씨의 시녀가 되기로 했다. 이제 너희와는 상관없는 몸이니 당장 돌아가거라."청류는 성가신 얼굴로 차갑게 대꾸했다."그게 무슨 소립니까. 우리 소아는 버젓한 양민인데 어찌 남의 집 시녀로 들어간단 말입니까?"임대산은 불복하면서도 감히 목청 높여 반발하지는 못했다."시녀가 되든 말든 오라버니인 서방님의 허락이 있어야 이치에 맞는 것 아닙니까? 경성에서 오신 귀한 분들이라면서 앞뒤가 이리 꽉 막히셨습니까……."유씨 역시 주눅이 들었지만 끝내 굽히지 않았다.주유재에게 받은 은자는 이미 관아에 빼앗긴 뒤였다.공들여 키운 임소아를 이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오늘 기필코 임소아를 데려가든가, 아니면 돈이라도 뜯어낼 심산이었다. "소아야, 따라 나오렴."강유영은 짐을 내려놓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임소아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불안한 걸음으로 그녀를 뒤따랐다.조원철은 밖으로 나서진 않았으나, 공문을 내려놓고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우리 아씨 곁에 있는 자들은 모두 양민이다. 임소아는 이미 열다섯이 넘어 성인이 되었으니, 제 의지로 아씨 곁을 모시겠다는 너희가 무슨 상관이냐."청류는 방문 앞을 굳건히 지키며 부부의 진입을 막았다."청류."강유영이 그를 불렀다."예, 아씨."청류는 강유영을 보자 싱긋 웃으며 옆으로 비켜섰다."마침 나오셨군요, 아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72화

    강유영은 조원철의 곁에 서서 올곧은 그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단호하고 당당한 음성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강유영은 마음 깊이 그에게 감복했다.과거 사람들에게 조원철이 강직하고 공명정대한 관리라는 말을 익히 들었다.오늘은 그 소문이 사실임을 직접 확인한 셈이었다.백성들은 조원철의 말을 듣고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나직하게 수군거렸다."영혼 혼례는 죽은 이를 위로한다는 명분일 뿐, 실상은 산 자의 미련이자 탐욕의 도구에 불과하다."조원철은 목소리를 높였다."혼례를 치르겠다고 무덤을 파헤치거나 힘없는 여인을 납치하는 자들도 있다. 주유재처럼 사리사욕을 위해 남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며 집에 불까지 지르는 자마저 나타났다. 저기 저 잿더미와 억울한 화재민들을 보아라. 죽은 자식 장가보내겠다고 재산을 탕진하고 집안이 풍비박산 난 이들이 얼마나 많았느냐. 살아생전 혼인도 못 해본 여인들이 죽어서도 억지로 혼례를 치러야 했다. 심지어 산 채로 순장되는 비극마저 벌어지고 있었지. 이것이 정녕 망자의 평안을 비는 길이더냐!"백성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조원철의 말에 깊이 공감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분노와 원통함이 서렸다.조원철은 주위를 둘러보며 동요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굳건한 어조로 말했다."오늘 주유재의 끔찍한 악행이 낱낱이 밝혀졌다. 이 황당한 영혼 혼례도 마땅히 여기서 멈춰야 한다! 죽은 자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산 자는 삶을 소중히 여기며 바른 도리를 행해야지, 귀신에 기대어 스스로 무덤을 파서는 안 될 것이다!"강유영은 조원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는 거대한 산처럼 굳건하고 위엄이 넘쳤다.무수히 많은 백성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참된 관원이었다."대인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영혼 혼례는 사람 잡는 악습입니다!""우리 옆집도 아들 혼례 치러주겠다고 멀쩡한 딸을 팔아넘겼소!""이 끔찍한 악습을 당장 뿌리 뽑아야 합니다!"조원철의 말에 수많은 백성들이 깨달음을 얻었다. 감복한 백성들은 영혼 혼례를 향해 혐오와 통탄을 쏟아냈다.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71화

    주유재는 크게 놀라 고함을 지르며 주 부관을 압박했다."잡아라."조원철은 단호히 지시를 내렸다.청류가 손짓하자, 수하 두 명이 다가가 주유재의 양팔을 붙잡아 바닥에 꿇렸다. 그들은 곧바로 주유재의 입을 틀어막았다.주유재는 읍읍거리며 반항했지만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주 부관은 바닥에 꿇어앉은 채 진실을 털어놓았다.그는 주유재가 조원철 일행을 눈엣가시로 여긴 일부터, 방화를 지시한 과정, 그리고 주태복을 살해해 입막음하려 한 사실까지 숨김없이 고했다.방우겸은 창백해진 얼굴로 바들바들 떨었다.그는 병주로 부임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주유재에게 푼돈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관할 지역에서 이렇게 큰 사고가 일어났으니 분명 그에게도 불똥이 튈 것이다."방 지부는 어찌 생각하느냐."조원철의 시선이 다시 방우겸에게 향했다.방우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조금 전 내뱉었던 사고라느니 대의라느니 하던 변명들이 숨통을 조이는 듯했다. 그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여기서 또다시 상황을 무마하려 든다면, 그것은 방화를 묵인한 공범이 되어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주유재! 이 천하의 몹쓸 놈! 이토록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도 끝까지 발뺌을 하다니. 여봐라! 주유재는 살인 및 민가에 방화를 저지르는 등, 죄질이 결코 가볍지 않다. 당장 포박해라! 주씨 집안 사람들도 모조리 하옥시켜라! 판결은 며칠 후에 다시 내리겠다!"방우겸은 평소와 다르게 단호하게 호통치며 재빨리 지시를 내렸다.포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주유재와 주 부관을 묶어 끌고 갔다."저놈은 목을 베어야 해! 천하의 몹쓸 놈!""집안 재산을 다 몰수해라!""우리 집을 물어내라!"분노한 백성들은 목청껏 소리쳤다.방우겸은 조원철을 보며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대인, 소관이 잠시 눈이 멀어 간악한 놈에게 속을 뻔했습니다. 조 대인께서 나서주시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진실을 밝히지 못했을 겁니다. 염려 마십시오. 이 방화 사건은 소관이 철저히 파헤쳐 엄벌에 처하겠습니다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70화

    죽다 살아난 주태복은 오직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고 목숨을 부지하고픈 마음뿐이었다. 그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단숨에 자초지종을 진술했다."난 그런 적이……."주 부관은 변명하려 했지만, 이미 하얗게 질린 얼굴이 당황한 그의 내면을 폭로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주 부관!"주유재는 고함을 내지르며 주 부관의 말을 끊었다.주 부관은 갑작스러운 호통에 놀라 얼빠진 표정으로 주유재를 쳐다보았다."이 천하의 몹쓸 놈! 아들의 영혼 혼례를 조용히 치를 방도를 찾아보라 했거늘, 감히 불을 질러 수많은 백성을 길거리에 나앉게 만들어? 대체 누구 지시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냐!"주유재는 턱을 치켜들고 거세게 몰아붙였다. 마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백성들을 위해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듯 굴었다.강유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주유재의 뻔뻔함에 기가 찼다.이 모든 불행의 원흉인 주제에 이제 와서 꼬리를 자르고 주 부관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대감, 어찌 이러십니까! 전부 대감께서 시키신 일이 아닙니까! 전 그저 대감의 지시를 따랐을 뿐인데……!"그제야 주 부관도 상황을 파악했다. 주유재는 가문과 자신의 안위를 위해 모든 책임을 그에게 떠넘기려 하고 있었다.그는 이대로 혼자 죄를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다."내가 언제 그런 짓을 시켰단 말이냐! 오랜 시간 내 곁에 일한 놈이라 충직하다고 믿었거늘, 뒤로 이런 흉악한 짓을 벌일 줄이야! 네 안위도 안중에 없다면 네 부모와 처자식의 덕이라도 쌓아야 할 것 아니냐. 어찌 이리 악독한 짓을 저질렀단 말이냐. 작은 잘못이라면 내 어떻게든 무마해 주었겠지만, 이토록 끔찍한 죄는 나도 덮어줄 수 없다!"주유재는 짐짓 근엄하고 통탄스러운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예, 제가 미쳤습니다! 제가 돌았나 봅니다! 태복이를 시켜 집에 불을 지르게 한 것은 다 제 짓입니다……."주유재의 말을 들은 주 부관은 제 뺨을 세차게 후려치며 호소했다.부모와 처자식을 위험에 빠지게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9화

    "태복아?"주유재의 뒤에 서 있던 주 부관이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그는 바로 주 부관에게 의지하러 온 먼 친척 조카였다.주 부관은 주태복을 시켜 밤에 불을 지르게 했다. 다른 일들도 주유재의 뜻대로 배해 두었다. 주태복을 처리하러 보낸 자들이 어설프게 일을 처리했을 리 없었다.이치대로라면 주태복은 이미 목숨을 잃었어야 했다. 헌데 어찌 살아서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주유재는 주 부관의 외침을 듣고 표정이 굳었다.그는 주태복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주 부관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부관 저 멍청한 놈, 이럴 때 놈의 이름을 부르면 어쩌자는 것인가. 모른 척 잡아떼면 발뺌하기 쉬웠을 것을.'하지만 주유재도 처음에 잠시 당황했을 뿐,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주 부관이 주태복을 아는 것이지, 자신은 그와 일면식도 없었다. 그러니 이 일은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두 사람, 아는 사이요?"방우겸이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물었다.그는 대강 짐작한 바가 있었다.이 일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선수를 친 것이었다.강유영은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모든 것이 탄로 날 위기에 처했으니, 이제 서로 물어뜯을 것이다."모르는 자입니다."주유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직접 만난 적이 없으니 그의 대답은 당당했다.주 부관은 우물쭈물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자신이 말실수를 하여 주태복의 이름을 불렀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이제 와서 모른다고 한들 아무도 믿지 않을 터였다."숙부님! 숙부님이 제게 불을 지르라 시키지 않았습니까! 불을 지르면 은자 백 냥을 주겠다며 선금 오십 냥까지 주셨으면서, 일이 끝나자마자 절 죽이려 사람을 보내다니요!"주태복은 주 부관을 보자마자 분통을 터뜨리며 고래고래 소리쳤다.그가 고개를 들자 목덜미에 선명한 붉은 자국이 보였다. 누군가 목을 졸라 기절시킨 뒤 물에 던진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운이 좋아서 조원철의 수하들에게 구출된 것이다."무슨 헛소리냐! 네가 내 친척이긴 하나, 난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3화

    조원철을 따라 밖으로 나갔더니, 밖은 어느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차가운 습기가 얼굴에 닿자,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목을 움츠렸다.“세자.”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원철의 측근 청운이 다가와서 우산을 건넸다.조원철은 우산을 펼치고는 강유영에게 따라오라는 듯, 눈짓했다.강유영은 난색을 띠며 주저했다.“아씨, 세자께서 처소까지 모셔다드린답니다.”청운이 웃으며 말했다.“배려 감사해요, 오라버니.”강유영은 어차피 그와 따로 할 말도 있고 해서 공손히 예를 행하고는 그를 따라나섰다.청운은 빗속을 나란히 걷고 있는 두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2화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꾸나.”한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유영은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정신은 아찔해져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오직 문이 열리면 둘 다 끝장이라는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 온몸은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어 조원철의 어깨를 밀었다.그녀는 안간힘을 쓴 것이었지만, 조원철에게는 그저 간지러울 정도였다.투명한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길게 말린 속눈썹에는 눈물방울이 맺혀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축 처진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화

    초여름의 이른 아침.경성 진국공부의 사당 주변은 아침부터 자옥한 안개로 휩싸였다.조용한 사당 안에서는 승려가 경을 읊는 소리가 이따금씩 흘러나오고, 정원 내 청동로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당을 지키는 시녀와 하인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강유영은 치맛자락을 들고서 처마 길을 따라 뒤뜰을 나오고 있었다. 온몸에 퍼진 근육통 때문에 걸음걸이가 다소 어색했다.좌측 쪽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커다란 손이 뻗어 나와 가늘고 여린 그녀의 허리를 가로챘다. 상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녀를 끌고 뒤뜰에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6화

    “기특하기도 하지. 어서 이리 와서 앉으렴.”한씨는 웃으며 강유영을 향해 손짓하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밖에서 강유영에게 잘해주는 것은 인자한 진국공 부인의 명성을 위해서였다.강유영은 약상자를 장 의원에게 건네고는 고분고분 그쪽으로 다가갔다.장 의원은 그녀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유영의 처지를 잘 알기에, 그녀의 거짓말을 까발리지 않았다. 장 의원은 손을 뻗어 한씨의 손목에 대고 진맥을 시작했다.한씨의 옆에 앉은 강유영은 불안하게 병풍 뒤쪽을 힐끔거렸다.조원철은 탁자 앞에 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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