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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눈빛 속의 약속
“기특하기도 하지. 어서 이리 와서 앉으렴.”

한씨는 웃으며 강유영을 향해 손짓하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밖에서 강유영에게 잘해주는 것은 인자한 진국공 부인의 명성을 위해서였다.

강유영은 약상자를 장 의원에게 건네고는 고분고분 그쪽으로 다가갔다.

장 의원은 그녀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강유영의 처지를 잘 알기에, 그녀의 거짓말을 까발리지 않았다.

장 의원은 손을 뻗어 한씨의 손목에 대고 진맥을 시작했다.

한씨의 옆에 앉은 강유영은 불안하게 병풍 뒤쪽을 힐끔거렸다.

조원철은 탁자 앞에 마주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무심하게 보이지만, 여전히 고귀함과 절제된 품위를 뽐내고 있었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창밖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맞은편에 앉은 처자를 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강유영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온 지도 모르는 듯했다. 강유영은 그제야 바짝 긴장해서 꽉 쥐었던 주먹을 폈다.

탁자의 맞은편에 앉은 왕씨 가문의 셋째 아씨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날 세자께서 개선하실 때, 구경 나갔다가 누각 위에서 위풍당당한 모습을 직접 뵈었답니다. 다들 세자께서는 나라를 구한 구국영웅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더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청아하고 발랄했다. 고양이처럼 살짝 치켜올린 눈매에 복숭아꽃처럼 분홍빛으로 물든 볼, 눈처럼 하얀 피부, 과연 듣던 대로 미인이었다. 얼굴에는 소녀 특유의 수줍음이 배어 있었고 반짝거리는 눈빛에는 눈앞의 사내를 향한 설렘이 담겨 있었다.

조원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한 칭찬입니다, 소저.”

강유영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보아하니 왕 소저는 그가 개선하던 날부터 그를 마음에 둔 듯했다.

어울리는 집안에 장차 그에게 도움이 되는 집안의 딸이니 조원철도 분명 허락할 것이다.

어쩌면 얼마 안 있으면 혼례를 준비할지도 모른다.

“연령이 이 아이는 그렇게 소설 속 영웅을 숭배하더니, 드디어 오늘 만났네요.”

태사 부인인 교씨는 딸의 옆에 앉아 만면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성함이 연령이었구나.’

옷자락을 꼭 잡은 강유영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보니 교씨도 이 혼사가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외간사내가 있는 자리에서 쉽게 딸의 이름을 언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약간의 가슴 답답함이나 두근거리는 증세가 있긴 하지만, 과로로 인한 것이니 잘 요양만 하신다면 금세 좋아질 것입니다. 이 알약은 가슴이 갑갑하실 때 한 알씩 드십시오.”

진단을 마친 장 의원이 품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한씨에게 건넸다.

정신을 차린 강유영은 서둘러 약병을 받았다.

“제가 시중을 들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얼른 약병을 열어 알약 하나를 꺼내 한씨의 손에 쥐여주고 물을 따르러 갔다.

한씨의 심복인 풍씨 어멈이 이미 따른 찻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강유영은 아무런 의심 없이 손을 뻗어 찻잔을 받았다. 그러자 뜨거운 온도가 손끝을 덮쳤다.

그녀는 그제야 풍씨 어멈이 끓는 물을 따른 찻잔을 건넸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가락 끝에서 극심한 통증이 전해지자, 마음 같아서는 당장 찻잔을 바닥에 집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이걸 집어던진다면 필히 병풍 뒤에서 맞선을 보고 있는 두 사람을 방해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탁자로 다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뜨거운 물이 찰랑이며 손등에 떨어졌다.

“앗!”

그녀는 가쁜 숨을 들이켰지만 이미 신음은 잇몸 사이로 새어 나오고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다행히 빨리 대처한 덕에 큰 부상은 면할 수 있었다.

“아씨, 괜찮으십니까? 이런, 소인이 정신이 없어서 그만 금방 끓인 물인 줄도 몰랐네요!”

풍씨 어멈이 다가와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세자께서 돌아오시자마자 고자질을 해서 비싼 옷이랑 패물을 뜯어가더니 부용원까지 차지해 버리다니! 참으로 간사한 것!’

한씨는 담담한 눈으로 강유영을 힐끗 보고는 무심한 어투로 물었다.

“괜찮니? 어멈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란다.”

강유영은 시선을 아래에 두고 고개를 저었다.

풍씨 어멈은 한씨의 심복이고 평소 한씨가 귀부인으로서 하지 못할 일을 대신하는 역할이었다. 그런 사람이 상전인 한씨에게 끓는 물을 대접할 리가 없었다. 고의가 아닐 리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반발하지 않을 것을 알고 한 일이다.

한씨가 약을 먹은 후, 강유영이 이만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보드라운 두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이쪽이 연화 아씨겠군요?”

왕연령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강유영이 손을 빼고 해명하려던 찰나, 옆에 있던 한씨가 웃으며 말했다.

“이 아이는 우리 집안 양녀인 강유영이란다. 연화는 오늘 이곳에 오지 않았단다.”

얘기를 들은 왕연령은 즉시 손을 놓더니 재수 없다고 작게 속삭이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강유영은 오만하고 버릇없는 자태를 보고 있자니 조연화가 떠올랐다. 둘 다 집안에서 사랑만 받고 자란 티가 물씬 났다.

이런 두 사람이 만약 시누이와 올케가 된다면 장차 집안이 조용할 날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풍 뒤에서 걸어 나온 조원철은 가장 먼저 빨갛게 데인 강유영의 손등에 시선을 주더니 눈빛이 싸늘해졌다.

“이쯤에서 신물을 교환하고 비녀를 꽂아줘야지?”

한씨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맞선을 본 남녀는 서로 마음에 든다면 신물을 교환하고 남자쪽에서 여자에게 비녀를 꽂아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는 이 혼사가 정해졌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절차이기도 했다.

만약 이 상황에서 떠난다는 얘기를 한다면 분명히 눈치 없다고 핀잔을 들을 것이다. 강유영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구석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든 존재감을 낮출 생각이었다.

손등에서는 여전히 알싸한 통증이 전해졌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마음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조원철의 혼사가 곧 정해질 테니, 이제 그와는 완전히 연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앞으로 들킬까 조마조마할 일은 없겠지.’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왕연령은 한씨의 말을 듣고 수줍게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조원철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로 싸늘히 한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한씨의 말은 안 들리는 듯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하게 식었다.

눈치 빠른 교씨가 먼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요즘은 젊은이들끼리 서로 알아갈 시간을 좀 더 가지고 혼사를 정한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조원철이 덜컥 거절의 말을 꺼낼까 봐 두려웠다. 아침에 외출하기 전, 조원철은 전도가 유망한 인재이니 필히 혼사를 성사시키라던 부군의 말이 귓가에 생생했다.

“그것도 좋겠군요.”

한씨는 이때다 싶어 열정적으로 권했다.

“곧 점심 때도 되었으니 같이 주루로 가서 식사라도 하시지요.”

교씨는 흔쾌히 초대에 응했다.

강유영은 기회를 봐서 한씨에게 작별을 고하고는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화방을 나서는데 갑자기 뒤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소리를 들은 강유영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무슨 연유인지, 풍씨 어멈이 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몇몇 선원들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 어멈을 건져올렸다.

간신히 갑판으로 올라온 어멈은 누가 밀었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하지만 범인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강유영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악행을 저질렀으니 하늘이 벌을 내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손등에서는 여전히 따끔한 통증이 전해졌다. 그녀는 약방으로 가서 약을 바를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아씨!”

이때, 뒤에서 청류가 쫓아오며 그녀를 불렀다.

그는 조원철의 또 다른 측근으로, 침착하고 과묵한 청운과는 다르게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소년처럼 발랄한 성격이었다.

강유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세자께서 이걸 꼭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청류는 곧바로 손에 든 물건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줄행랑을 놓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손에 들린 것을 바라보았다.

화상을 치료하는 연고였다.

강유영의 눈빛에 약간의 동요가 일었다.

분명히 병풍 뒤에서 왕연령과 이야기 중이었는데 그녀가 다친 건 또 언제 보았을까?

약방으로 돌아간 강유영은 바쁘게 일하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진국공부로 돌아갔다.

부용원으로 돌아오니 아직 정리하지 못한 짐들이 군데군데 널려 있었다.

강유영은 얼른 소매를 걷어붙이고 단비를 도와 정리하기 시작했다.

몸을 바쁘게 굴려야지 잡생각을 떨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월아 아씨가 오늘 다녀가셨어요. 연화 아씨가 아씨께서 부용원으로 처소를 옮겼다는 얘기를 듣고 벼르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하시더군요.”

단비가 옷을 개며 말했다.

강유영은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진국공부에서 그나마 그녀에게 진심으로 대해준 사람이 있다면 아마 다섯째 아씨인 조월아일 것이다.

단비는 창밖을 내다보더니 투덜거렸다.

“서유 이 계집애는 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네요.”

“신경 쓸 것 없어. 우리끼리 정리하자꾸나.”

강유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다행히 반 시진 후에 서유가 돌아왔다.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정리한 끝에 마침내 저녁때가 되어 정리를 마칠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강유영은 오씨 어멈의 저녁을 챙기고 내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문을 연 순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내실 중앙에 조원철이 그녀를 등진 채로 뒷짐을 지고 떡하니 서 있었다.

기분이 안 좋은 건지, 등 뒤에서 무거운 압박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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