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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or: 눈빛 속의 약속
“기특하기도 하지. 어서 이리 와서 앉으렴.”

한씨는 웃으며 강유영을 향해 손짓하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밖에서 강유영에게 잘해주는 것은 인자한 진국공 부인의 명성을 위해서였다.

강유영은 약상자를 장 의원에게 건네고는 고분고분 그쪽으로 다가갔다.

장 의원은 그녀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강유영의 처지를 잘 알기에, 그녀의 거짓말을 까발리지 않았다.

장 의원은 손을 뻗어 한씨의 손목에 대고 진맥을 시작했다.

한씨의 옆에 앉은 강유영은 불안하게 병풍 뒤쪽을 힐끔거렸다.

조원철은 탁자 앞에 마주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무심하게 보이지만, 여전히 고귀함과 절제된 품위를 뽐내고 있었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창밖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맞은편에 앉은 처자를 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강유영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온 지도 모르는 듯했다. 강유영은 그제야 바짝 긴장해서 꽉 쥐었던 주먹을 폈다.

탁자의 맞은편에 앉은 왕씨 가문의 셋째 아씨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날 세자께서 개선하실 때, 구경 나갔다가 누각 위에서 위풍당당한 모습을 직접 뵈었답니다. 다들 세자께서는 나라를 구한 구국영웅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더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청아하고 발랄했다. 고양이처럼 살짝 치켜올린 눈매에 복숭아꽃처럼 분홍빛으로 물든 볼, 눈처럼 하얀 피부, 과연 듣던 대로 미인이었다. 얼굴에는 소녀 특유의 수줍음이 배어 있었고 반짝거리는 눈빛에는 눈앞의 사내를 향한 설렘이 담겨 있었다.

조원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한 칭찬입니다, 소저.”

강유영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보아하니 왕 소저는 그가 개선하던 날부터 그를 마음에 둔 듯했다.

어울리는 집안에 장차 그에게 도움이 되는 집안의 딸이니 조원철도 분명 허락할 것이다.

어쩌면 얼마 안 있으면 혼례를 준비할지도 모른다.

“연령이 이 아이는 그렇게 소설 속 영웅을 숭배하더니, 드디어 오늘 만났네요.”

태사 부인인 교씨는 딸의 옆에 앉아 만면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성함이 연령이었구나.’

옷자락을 꼭 잡은 강유영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보니 교씨도 이 혼사가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외간사내가 있는 자리에서 쉽게 딸의 이름을 언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약간의 가슴 답답함이나 두근거리는 증세가 있긴 하지만, 과로로 인한 것이니 잘 요양만 하신다면 금세 좋아질 것입니다. 이 알약은 가슴이 갑갑하실 때 한 알씩 드십시오.”

진단을 마친 장 의원이 품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한씨에게 건넸다.

정신을 차린 강유영은 서둘러 약병을 받았다.

“제가 시중을 들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얼른 약병을 열어 알약 하나를 꺼내 한씨의 손에 쥐여주고 물을 따르러 갔다.

한씨의 심복인 풍씨 어멈이 이미 따른 찻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강유영은 아무런 의심 없이 손을 뻗어 찻잔을 받았다. 그러자 뜨거운 온도가 손끝을 덮쳤다.

그녀는 그제야 풍씨 어멈이 끓는 물을 따른 찻잔을 건넸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가락 끝에서 극심한 통증이 전해지자, 마음 같아서는 당장 찻잔을 바닥에 집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이걸 집어던진다면 필히 병풍 뒤에서 맞선을 보고 있는 두 사람을 방해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탁자로 다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뜨거운 물이 찰랑이며 손등에 떨어졌다.

“앗!”

그녀는 가쁜 숨을 들이켰지만 이미 신음은 잇몸 사이로 새어 나오고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다행히 빨리 대처한 덕에 큰 부상은 면할 수 있었다.

“아씨, 괜찮으십니까? 이런, 소인이 정신이 없어서 그만 금방 끓인 물인 줄도 몰랐네요!”

풍씨 어멈이 다가와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세자께서 돌아오시자마자 고자질을 해서 비싼 옷이랑 패물을 뜯어가더니 부용원까지 차지해 버리다니! 참으로 간사한 것!’

한씨는 담담한 눈으로 강유영을 힐끗 보고는 무심한 어투로 물었다.

“괜찮니? 어멈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란다.”

강유영은 시선을 아래에 두고 고개를 저었다.

풍씨 어멈은 한씨의 심복이고 평소 한씨가 귀부인으로서 하지 못할 일을 대신하는 역할이었다. 그런 사람이 상전인 한씨에게 끓는 물을 대접할 리가 없었다. 고의가 아닐 리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반발하지 않을 것을 알고 한 일이다.

한씨가 약을 먹은 후, 강유영이 이만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보드라운 두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이쪽이 연화 아씨겠군요?”

왕연령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강유영이 손을 빼고 해명하려던 찰나, 옆에 있던 한씨가 웃으며 말했다.

“이 아이는 우리 집안 양녀인 강유영이란다. 연화는 오늘 이곳에 오지 않았단다.”

얘기를 들은 왕연령은 즉시 손을 놓더니 재수 없다고 작게 속삭이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강유영은 오만하고 버릇없는 자태를 보고 있자니 조연화가 떠올랐다. 둘 다 집안에서 사랑만 받고 자란 티가 물씬 났다.

이런 두 사람이 만약 시누이와 올케가 된다면 장차 집안이 조용할 날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풍 뒤에서 걸어 나온 조원철은 가장 먼저 빨갛게 데인 강유영의 손등에 시선을 주더니 눈빛이 싸늘해졌다.

“이쯤에서 신물을 교환하고 비녀를 꽂아줘야지?”

한씨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맞선을 본 남녀는 서로 마음에 든다면 신물을 교환하고 남자쪽에서 여자에게 비녀를 꽂아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는 이 혼사가 정해졌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절차이기도 했다.

만약 이 상황에서 떠난다는 얘기를 한다면 분명히 눈치 없다고 핀잔을 들을 것이다. 강유영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구석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든 존재감을 낮출 생각이었다.

손등에서는 여전히 알싸한 통증이 전해졌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마음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조원철의 혼사가 곧 정해질 테니, 이제 그와는 완전히 연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앞으로 들킬까 조마조마할 일은 없겠지.’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왕연령은 한씨의 말을 듣고 수줍게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조원철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로 싸늘히 한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한씨의 말은 안 들리는 듯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하게 식었다.

눈치 빠른 교씨가 먼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요즘은 젊은이들끼리 서로 알아갈 시간을 좀 더 가지고 혼사를 정한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조원철이 덜컥 거절의 말을 꺼낼까 봐 두려웠다. 아침에 외출하기 전, 조원철은 전도가 유망한 인재이니 필히 혼사를 성사시키라던 부군의 말이 귓가에 생생했다.

“그것도 좋겠군요.”

한씨는 이때다 싶어 열정적으로 권했다.

“곧 점심 때도 되었으니 같이 주루로 가서 식사라도 하시지요.”

교씨는 흔쾌히 초대에 응했다.

강유영은 기회를 봐서 한씨에게 작별을 고하고는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화방을 나서는데 갑자기 뒤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소리를 들은 강유영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무슨 연유인지, 풍씨 어멈이 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몇몇 선원들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 어멈을 건져올렸다.

간신히 갑판으로 올라온 어멈은 누가 밀었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하지만 범인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강유영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악행을 저질렀으니 하늘이 벌을 내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손등에서는 여전히 따끔한 통증이 전해졌다. 그녀는 약방으로 가서 약을 바를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아씨!”

이때, 뒤에서 청류가 쫓아오며 그녀를 불렀다.

그는 조원철의 또 다른 측근으로, 침착하고 과묵한 청운과는 다르게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소년처럼 발랄한 성격이었다.

강유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세자께서 이걸 꼭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청류는 곧바로 손에 든 물건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줄행랑을 놓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손에 들린 것을 바라보았다.

화상을 치료하는 연고였다.

강유영의 눈빛에 약간의 동요가 일었다.

분명히 병풍 뒤에서 왕연령과 이야기 중이었는데 그녀가 다친 건 또 언제 보았을까?

약방으로 돌아간 강유영은 바쁘게 일하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진국공부로 돌아갔다.

부용원으로 돌아오니 아직 정리하지 못한 짐들이 군데군데 널려 있었다.

강유영은 얼른 소매를 걷어붙이고 단비를 도와 정리하기 시작했다.

몸을 바쁘게 굴려야지 잡생각을 떨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월아 아씨가 오늘 다녀가셨어요. 연화 아씨가 아씨께서 부용원으로 처소를 옮겼다는 얘기를 듣고 벼르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하시더군요.”

단비가 옷을 개며 말했다.

강유영은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진국공부에서 그나마 그녀에게 진심으로 대해준 사람이 있다면 아마 다섯째 아씨인 조월아일 것이다.

단비는 창밖을 내다보더니 투덜거렸다.

“서유 이 계집애는 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네요.”

“신경 쓸 것 없어. 우리끼리 정리하자꾸나.”

강유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다행히 반 시진 후에 서유가 돌아왔다.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정리한 끝에 마침내 저녁때가 되어 정리를 마칠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강유영은 오씨 어멈의 저녁을 챙기고 내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문을 연 순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내실 중앙에 조원철이 그녀를 등진 채로 뒷짐을 지고 떡하니 서 있었다.

기분이 안 좋은 건지, 등 뒤에서 무거운 압박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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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ntario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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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a Kyung
재밌네요.. 1화부터 확 빨려드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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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7화

    "그것이 네가 말하는 해결책이냐."조원철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방우겸을 응시했다."주 대감 댁 혼사를 허락해 주면 화재민들의 집도 고쳐줄 것이고 백성들의 원성도 잦아들 것입니다. 흉흉한 소문도 저절로 가라앉을 터이니, 이보다 완벽한 해결책이 어디 있겠습니까."방우겸은 조원철이 웃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앞에서는 원칙을 운운하며 깐깐하게 굴었지만, 결국 이 자도 관원들 사회가 돌아가는 생리를 잘 아는 듯했다.오랜 세월 관직에 몸담은 자가 홀로 고고한 척 유난을 떨 리 없었다. 강직하다는 소문은 그저 그럴싸한 허울에 불과한 것이다."이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법을 어기란 소리 아니냐."강유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차갑게 대꾸했다."그건 지나친 비약입니다. 어찌 사리사욕을 채운다 하십니까."방우겸은 여유롭게 고개를 저었다."조 대인께서는 대의를 위해 병주 백성들을 굽어살피려는 것입니다. 민심을 수습하는 일보다 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조원철이 타협했다고 굳게 믿은 방우겸은 한결 편안해진 태도로 평소 즐겨 쓰던 입바른 소리를 늘어놓았다."주 대감이 사유 재산을 털어 백성들의 집을 고쳐주겠다고 했다는 뜻이냐?"조원철은 시선을 돌려 주유재를 바라보았다.방우겸 역시 주유재를 보며 눈짓을 보냈다."그렇습니다."주유재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제 손으로 불태운 집을 제 돈으로 다시 짓게 생겼으니 생돈을 날리는 격이었다.하지만 방우겸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방우겸은 앞으로 몇 년은 더 병주 지부 자리에 앉아 있을 자였다.일단 장단을 맞춰준 후에, 손해본 돈은 훗날 백성들을 쥐어짜 메우면 될 일이었다."이번 화재는 주 대감과 연관이 없을 텐데, 어찌하여 거금을 내놓으려는 것이냐."조원철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주유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스스로 거금을 내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켕기는 구석이 있음을 인정하는 격이었다."대인께서 아직 이 지역 사정을 잘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 대감은 평소 어려운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6화

    조원철은 그의 말을 다시 자르며 인상을 썼다.차가운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났다."아닙니다, 잘못된 일이지요. 어찌 되었든 산 사람을 생매장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방우겸은 재빨리 태도를 바꿨다."대인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병주의 영혼 혼례를 막으러 오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소관 역시 평소 이 악습을 탐탁지 않게 여겨 왔습니다. 이런 미신은 진작에 뿌리 뽑았어야 마땅합니다."그는 뚜렷한 소신이 없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갈대처럼, 힘 있는 자의 편에 설 뿐이었다.강유영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방우겸의 솜씨는 과연 미꾸라지 같다는 소문에 걸맞았다."그래서, 이 일은 어찌 해결할 생각이냐."조원철이 방우겸에게 물었다.방우겸은 눈동자를 굴리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대인, 지금 밖에서는 두 분이 영혼 혼례를 막은 탓에 불이 났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는 대인께 불리한 상황입니다. 물론 소관은 이번 화재가 그저 사고일 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지한 백성들은 뜬소문에 쉽게 휩쓸립니다. 이들을 억지로 누르려 했다가는 자칫 민란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리되면 애먼 자들이 다칠 텐데, 백성을 헤아리시는 대인께서 어찌 그런 참상을 원하시겠습니까."조원철은 아무 말 없이 서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소관에게 한 가지 방도가 있는데, 대인의 뜻은 어떠신지요."방우겸은 잠시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는 조원철의 속내를 알 수 없었지만, 영혼 혼례를 강제로 막으려다 민란이라도 일어난다면 조원철 역시 경성으로 돌아가 문책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 계산했다."말해보아라."조원철이 담담하게 물었다.방우겸은 조원철에게 몇 걸음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불이 난 것은 하늘의 뜻이나, 집을 잃은 백성들은 가엾습니다. 하여 관아에서 돈을 조금 내어 백성들의 집을 다시 지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관아에서 얼마나 지원할 수 있느냐."조원철이 되물었다."관아의 힘만으로는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5화

    주유재는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소리쳤다.방우겸을 따라 무릎을 꿇으려던 백성들은 주유재의 선동에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맞소! 당장 우리 집을 물어내시오!""고위 관원은 무슨, 재앙을 부르는 재앙신이야!""우린 당장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소. 관원이든 뭐든 책임부터 지시오!"백성들은 순식간에 흥분하여 여기저기서 고함을 질러댔다."모두 입 다물지 못할까!"방우겸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호통을 쳤다."방 대인……."주유재가 입을 열려 했다."주유재! 죽고 싶으면 계속 사람들을 선동하거라!"방우겸은 매섭게 쏘아붙였다.방우겸은 두루두루 잘 지내며 살아온 자였다. 평생 이토록 분노를 드러낸 적이 드물었다. 주유재 저 미련한 놈은 필시 진국공부 세자의 명성을 들어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저 예전에 병주에 파견되었던 만만한 관원쯤으로 착각하는 모양이었다.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삐끗했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판이었다.주유재는 방우겸의 호통에 기가 죽어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당장 무릎 꿇지 못할까!"주회안도 거들며 주유재에게 몰래 눈치를 주었다.그제야 주유재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 방우겸 일행이 여전히 제 편임을 깨달은 그는 지체 없이 옷자락을 걷어 올리며 무릎을 꿇었다.주유재가 무릎을 꿇자 기세등등하던 백성들도 더는 소란을 피우지 못하고 엎드렸다."조 대인, 필시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관아로 자리를 옮기시면 소관이 상세히 말씀 올리겠습니다."방우겸은 조원철을 향해 굽실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는 기대와 공손함이 묻어났다."필요 없다. 백성들 앞에서 못할 얘기라도 있느냐? 여기서 다 말해 보아라."조원철은 차가운 목소리로 단칼에 거절했다."그게……."방우겸은 난감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속내를 털어놓기는 곤란했다."주 대감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밖으로 나가 대기하시오."주회안이 즉각 지시를 내렸다.주유재도 손을 저으며 거들었다."다들 밖에서 기다리시오. 저들이 뭐라 변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4화

    방우겸도 시선을 돌렸다. 나란히 밖으로 나오는 두 남녀를 보고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청류와 임소아도 뒤따라 나와 두 사람 뒤에 섰다."대인, 저자들입니다. 임씨 집안 계집애를 붙잡아 두고 주 대감 댁 영혼 혼례를 막았습니다. 관아의 뜻이라며 앞으로 병주에서 영혼 혼례를 올리지 못하게 될 거라 떠벌렸습니다. 저들이 원귀를 노하게 해 우리 집을 태워버린 것입니다!""지부 대인께서 부디 저들을 엄벌해 주십시오.""병주의 풍습에 저들이 무슨 자격으로 참견한단 말입니까!"백성들은 앞다투어 강유영과 조원철을 가리키며 고자질했다.방우겸은 강유영과 조원철을 유심히 살피며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얼마 전 관아로 그를 찾아온 자는 청류였다.그때도 분위기가 범상치 않아 경성에서 파견된 관원이 신분을 위장한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그런데 지금 그 청류는 젊은 사내의 뒤에 서 있었다. 사내는 묵직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아무리 봐도 청류는 사내의 수하로 보였다.앞에 선 젊은 남녀는 귀티가 흐르고 기품이 남달랐다. 예사로운 신분이 아닐 것이다.방우겸은 처세에 밝은 자였다. 이리저리 비위를 맞추며 병주 지부 자리까지 꿰찬 그였다. 마음속에 의구심이 생긴 이상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철칙이었다.그는 강유영과 조원철을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했다.상대의 정체를 확실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섣불리 적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대인, 저들은 경성에서 왔다고 합니다. 혹 누군지 아십니까?"주유재가 다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방우겸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는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먼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감히 여쭙건대……."그는 조원철의 허리춤에 매달린 금인을 발견했다. 어떤 글자가 새겨져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하지만 심상치 않은 신분임은 확신했다. 어찌 됐든 예를 갖추는 편이 나았다."방우겸, 네 죄를 아느냐."조원철은 차가운 목소리로 꾸짖었다.방우겸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눈동자를 굴리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누구신지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3화

    문가에 있던 임소아가 청류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청류는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두 사람에게 예를 갖췄다."주군, 아씨.""무슨 일이냐."조원철이 물었다."간밤에 병주성 동남쪽에서 큰불이 나 민가 대여섯 채가 잿더미로 변했답니다. 주유재는 주군과 아씨께서 영혼 혼례를 막아 원혼들이 노한 탓이라며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집을 잃은 백성들이 죗값을 치르라며 몰려와 난동을 부리는 중입니다."청류는 고개를 숙인 채 차분히 보고했다."넌 어찌 생각하느냐."조원철은 강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어처구니없는 소리네요."강유영은 콧방귀를 뀌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녀는 맑은 눈을 반짝이며 조원철을 올려다보았다."주유재가 지어낸 헛소리입니다. 전혀 믿을 수가 없어요. 저 불도 주유재의 자작극일 겁니다. 어쩜 그리 시기가 딱 맞아떨어질 수 있겠어요?"마침 주유재가 두 사람에게 누명을 씌울 구실이 필요했던 차에 화재가 났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미심쩍었다.주유재가 고의로 불을 지른 것이 분명했다.그는 몹시도 흉악한 자였다. 아들에게 영혼 혼례를 치러주고, 앞으로도 그 악습으로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 그 많은 사람의 집을 불태운 것이다."음."조원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마침, 간밤에 밖을 살피던 청란 일행이 쓸만한 자를 하나 데려왔습니다."청류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어떤 자인데?"강유영이 물었다.청류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소곤소곤 귓속말을 전했다.잔뜩 구겼던 강유영의 미간이 활짝 펴졌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조원철을 보았다."그럼 당장 관아에 알려서 지부를 이리로 부르는 건 어때요?"주유재의 악행은 이미 명백히 드러났다. 방우겸을 이 자리에 불러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밝힐 때였다."주유재가 이미 부관을 관아로 보냈다고 합니다."청류가 대답했다."참으로 뻔뻔하군요."강유영은 차갑게 비웃었다."그럼 우린 지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가면 되겠네요."조원철은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2화

    강유영이 입을 열려는 찰나, 바깥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녀는 곧바로 창밖을 내다보았다.명적이었다.아마 청류가 쏘아올린 듯했다..몰려온 인파가 너무 많아 혼자 감당하기 벅차 수하들을 소환한 모양이었다.마당은 일순간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하늘을 쳐다보았다."놈이 원군을 불렀다! 그자들이 오기 전에 당장 들어가서 그 남녀를 끌어내라!"사태를 파악한 주유재가 다급히 소리쳤다.그는 강유영 일행이 고작 넷뿐이라 만만하게 생각했지 숨겨둔 수하들이 더 있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주평, 넌 당장 관아로 달려가서 사람을 물러 오너라."주유재는 잠시 머리를 굴리더니 주평에게 지시했다.오늘 일은 지난번과 달리 명분이 뚜렷했다. 백성들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이 있으니 관아의 힘을 빌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일만 잘 풀리면 백성들을 구원한 의인이라는 칭송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예."주평은 대답과 함께 재빠르게 자리를 떴다."멈춰라."청류는 평소의 장난기를 거두고 검을 빼 든 채 대문 앞을 막아섰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무리를 쏘아보며 살기를 뿜었다.몰려온 자들은 그저 평범한 백성이었다. 그들은 주유재의 선동에 속아 사람 수가 많으니 믿는 구석이 있어 날뛰었을 뿐이다.청류의 살기 어린 눈빛과 서늘한 검광을 마주하자, 백성들은 금세 기가 꺾였다.자칫 잘못했다간 단칼에 목이 달아날 것만 같았다.겁에 질린 사람들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더는 다가가지 못했다."무엇이 두려운 게야! 우리 집을 태운 원흉이 저 방 안에 있다. 어서 쳐들어가!"주유재는 무리 뒤에 숨어 사람들을 부추겼다."저놈은 혼자다. 제아무리 간이 커도 함부로 사람을 죽이진 못할 것이다."그의 선동에 사람들은 다시 동요했다.하지만 누구도 섣불리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분노 어린 눈으로 청류를 노려볼 뿐, 선뜻 발을 내딛지 못했다."나와! 당장 나오지 못할까!"누군가 바닥에서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그는 차마 청류를 맞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7화

    강유영은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돌아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다리가 바닥에 꽁꽁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들어오거라.”조원철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령했다.강유영은 누가 보기라도 할까 두려워,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내실로 들어갔다.“언제 오셨나요?”잠깐 오씨 어멈의 저녁을 챙기러 나갔다 온 사이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지금쯤이면 밖에서 왕 소저와 저녁 식사를 해야 하지 않나?’조원철이 다가오더니 문을 닫았다.강유영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서 그와 거리를 벌리고 고개를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5화

    “유영아? 얘네가 다 어디로 갔지?”한씨가 병풍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어머니, 오지 마세요. 제가 부주의로 우유차를 옷에 쏟아서 닦고 있었습니다.”다급한 마음에 강유영은 아무 핑계나 둘러댔다.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한씨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네 오라비는?”강유영은 고개를 돌리고 애원에 찬 눈길로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당황하고 조급한 나머지 맑은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조원철은 그날 밤 그만하자고 애원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는 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겨 단단히 품에 안았다.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4화

    한씨가 고개를 돌려 강유영을 바라봤다.곁눈질로 보니, 조원철도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는 듯했다.강유영은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떡을 다시 집어 조심스럽게 입안에 넣었다.마치 돌을 씹는 것처럼 입안이 쓰고 껄끄러웠다.‘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거지? 뭘 알고 일부러 저러시는 걸까?’이유야 어찌 됐건 한씨가 이에 대해 굉장히 불쾌해하고 있음은 분명해졌다.조원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한씨는 손을 뻗어 아들의 목에 난 자국을 어루만지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곱게 자란 처자라면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3화

    조원철을 따라 밖으로 나갔더니, 밖은 어느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차가운 습기가 얼굴에 닿자,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목을 움츠렸다.“세자.”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원철의 측근 청운이 다가와서 우산을 건넸다.조원철은 우산을 펼치고는 강유영에게 따라오라는 듯, 눈짓했다.강유영은 난색을 띠며 주저했다.“아씨, 세자께서 처소까지 모셔다드린답니다.”청운이 웃으며 말했다.“배려 감사해요, 오라버니.”강유영은 어차피 그와 따로 할 말도 있고 해서 공손히 예를 행하고는 그를 따라나섰다.청운은 빗속을 나란히 걷고 있는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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