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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테라스의 두 사람

Author: 정로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2 00:12:58

"지금...무슨 말을..."

엘레노어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손이 떨려 포크를 떨어뜨릴지 접시 위에 내려놓은 채

식탁 밑에 숨겨 애써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래요...폐하. 후궁을...정치적인 이유로 들이곤 하죠."

"내가 말하는 건 그런 게 아닌 걸 알잖아?

황태자비도 다 봤으면서...모르는 척할 필요 없어."

아드리안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는 엘레노어를 비웃듯 키득거렸다.

황태자의 위엄보다는 시정잡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어차피 다 아는 사이에 솔직하게 말하지. 마음에 둔 사람이 있네."

"..."

엘레노어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문 채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떤...사람입니까?"

"흠..."

잠시 뜸을 들이며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아드리안은 한참 말이 없었다.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걸 보면 곤란한 신분의 사람인 걸까?

대체 어떤 여자길래 하룻밤 사이에

그의 입에서 애첩으로 삼겠다는 말이 나온 걸까?

엘레노어와 아드리안의 침묵으로 차오른 긴장을 가르고

드디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숙부의 아내. 로제린 대공비."

엘레노어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남편이 있는 여자를 정부로 삼는 경우는 종종 있어 왔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숨겨진 여자일 뿐이다. 대놓고 애첩으로 삼겠다고

황태자가 공언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지위가 너무 낮아

적당한 귀족과 결혼을 시켜 신분을 만들어주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숙부의 아내라니.

북부를 수호하는 대공이자 제국에서 강한 남자

테오도르 드 발렌시아의 아내라니.

"전하,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어느덧 엘레노어의 얼굴은 파랗게 질리다 못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로젤린 대공비가 맞습니까?

어찌 숙부의...다른 황족의 대공비를...!!"

목소리가 높아지자, 아드리안의 표정이 찡그러졌다.

"다 생각이 있소. 큰소리 내지 마시오!"

"전하! 생각이라니.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 정말 시끄럽게 구는군!"

그는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리 아시오.

애첩을 두는 일에 그대의 허락이 필요한 건 아니니,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하고 받아들이시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허흠!!!"

엘레노어의 말이 길어지자, 아드리안은 귀찮다는 듯

크게 헛기침하며 사라져갔다. 

그대로 남겨진 그녀는 평소 입도 대지 않던

와인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식도를 달구는 낯선 감각에 화가 더 솟구쳤다.

"대체...무슨 생각인 건지. 큰일이 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

며칠 뒤, 황궁에서는 예정된 연회가 시작되었다.

먹고 마시는 걸 좋아하는 아드리안이 때문에 별다른 이유 없이

크고 작은 연회가 자주 열리곤 했는데 그 때문에 황실의 금고가

바닥을 낼 지경이었다.

황제가 몸져누운 지 오래인 지금, 많은 권한이 그에게 위임되었고

황후의 자리가 비어 있는 지금 그에 대한 관리는

황태자비인 엘레노어의 몫이었다.

어떻게든 알뜰하게 진행하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항상 마지막에

아드리안이 통 크게 계획을 수정하는 통에 골머리를 앓는 게 일상이었다.

오늘도 그랬다.

두 사람은 상석에 앉아 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있는 걸 싫어하는 아드리안은 좋게 말하면 호탕하고,

나쁘게 말하면 체통도 없이 홀에 내려가 귀족들과 섞여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때, 입구의 문이 열리며 늦은 참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슴을 담아내기 천이 부족한 타이트한 머메이드라인의 드레스는

반짝이는 비즈로 뒤덮여 육감적인 몸매를 더 과장되어 보이게 했고,

한발짝씩 걸을 때마다 실룩이는 엉덩이는 홀의 귀족들의 시선이

그녀의 뒤태에 머무르게 했다.

길게 굽이치는 분홍빛 머리카락은 드레스와 비슷한 스타일의

머리 장식으로 고정되어 있었는데 분명 이 모든 것들은

값비싼 것들이나 천박해 보이는 점이 특이했다.

홀 안으로 몇 발짝 들어서자,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지루함을 숨기지 않던 아드리안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로젤린 대공비 드십니다."

뒤늦게 그녀의 이름이 불리며 입장을 알리는 소리에, 그는 맨발로 뛰어나갈 기세였다.

그를 발견한 로젤린은 엉덩이를 과장되게 흔들며 다가가 예를 갖추었다.

"강녕하셨습니까? 전하"

로제린은 가슴에 손을 올려 애써 가려 보였지만 흘러내리는

두 개의 살덩어리의 반도 가리지 못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오히려 무게 때문에 가슴 안쪽이

더 깊숙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잘 지냈소? 로젤린...할 이야기가 많은데."

이제는 행동거지를 조심할 생각조차 않는 아드리안.

그 모습을 본 귀족들이 눈치를 보며 수군대기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테오도르 대공님은 오늘도 참석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매번 저런 차림으로 참석하시는데...한 마디도 안하시는 걸까요? 참."

귀부인들은 부채로 입을 가리고 그 자리를 피했다.

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부인이라면 로젤린과 어울리지 않는 건 당연했다.

그런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로젤린과 아드리안은

서로의 몸을 밀착한 채 귓속말로 밀어를 속삭이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엘레노어는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본 귀족들이 그녀의 눈치까지 보기 시작한 것이다.

황태자와 황태자비 사이가 예전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돌았으나

대놓고 다른 여인과 함께 귓속말을 하다니.

이건 루머가 현실이 된 것과 다름이 었었다.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느끼자 손에 쥔 부채를 부러뜨릴 듯 세게 쥔

그녀는 우아하게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다.

- 찬 바람을 쐬면 조금 기분이 나아지겠지?

테라스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았다.

외부의 웅성거림이 차단되고 그녀만의 세상이 되었다.

그 때문에 홀에서 뒤늦게 방문한 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지 못했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 목덜미를 스치자

달아오른 그녀의 분노도 조금 사그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머릿속의 복잡함까지 해결이 되진 않았다.

두 사람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따라가 볼까?

아니야, 그랬다 못 볼 꼴을 보기라도 하면.

그것보다 숙부님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생각에 잠긴 탓에 테라스에 누가 들어서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한숨만 푹푹 쉬던 그녀의 등 뒤로 누군가 다가섰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꺅!!!"

엘레노어는 체통도 잊은 채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런, 놀라셨군요. 인기척이라도 할 걸 그랬습니다."

그는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

아니 오늘 이 장소에 오지 않아야 했을 북부의 수호자 테오도르 대공이었다.

황제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동생으로 어제가 그렇듯 황권을 위협하지.

못 하게 하려고 북부나 변방으로 보내지는 그런 대공 중 하나였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도 않는 데다 다른 황족 중 유독 능력이 뛰어나

아드리안이 어려서부터 열등감을 느꼈던 존재이기도 하다.

"하, 제가 실례를 너무 놀라서 그만."

"아닙니다. 제 불찰입니다. 그보다...

혹시 로젤린이 어디 있는지 보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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