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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임서아
오지은이 돌아온 것 때문에 밀당하는 척 다른 방법으로 유혹하려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허아연이 정말 호적 등본을 가져오고 비밀 유지 계약서까지 준비하며 최근 새로 나온 이혼 정책까지 신경 쓰고 있을 줄 몰랐다.

주현우는 왠지 점점 흥미로워졌다.

허아연이 이혼을 핑계로 얼마나 뜯어내려 할지 보고 싶었다.

그 말에 허아연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현우를 바라보았다.

주현우 마음속에서 허아연이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주현우는 절대 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허아연에 대한 주현우의 편견은 평생 바뀌지 않을 것이다.

'됐어.'

'다 필요 없어.'

결국 허아연은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시간 될 때 말해줘요. 같이 가서 절차 밟아요."

순순히 인정하는 허아연의 태도에 주현우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허아연을 쳐다보기만 했다.

주현우가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허아연이 입을 열었다.

"쉬어요. 나중에 시간 될 때 나한테 알리면 돼요."

말을 마친 허아연은 돌아서서 문으로 걸어갔다.

방문을 열려던 그때, 주현우가 갑자기 손목을 낚아챘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주현우는 허아연을 끌어당겨 앞에 내동댕이쳤다.

허아연은 비틀거리다 겨우 중심을 잡고 주현우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끌려와서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불길 속에서 자신을 안고 나오던 광경이 떠오른 허아연은 다시 화가 누그러들었다.

허아연은 빨개진 손목을 문지르며 물었다.

"다른 볼일 있어요?"

오랫동안, 아주 많이 생각했었다.

두 사람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주현우가 왜 이토록 허아연을 싫어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허아연의 덤덤한 말에 주현우는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고개를 돌리고 코웃음을 쳤다.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리고 허아연을 내려다보았다.

"허아연, 대체 어떤 잘난 놈이 감히 나를 모욕해?"

이런 식이면 지금까지 허아연은 얼마나 많은 모욕을 당한 걸까?

허아연은 말이 없었다.

주현우는 테이블 앞으로 다가와 담배와 라이터를 들어 담뱃불을 붙였다.

그리고 통유리창 앞에 섰다.

담배 연기가 주변에 뭉게뭉게 번졌다.

반듯한 등과 늘씬한 다리, 주현우는 뒤통수까지도 다른 사람들보다 잘생겨 보였다.

그런 주현우에게 허아연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허아연은 주현우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누구도 감히 현우 씨 건드리지 못하는 거 알잖아요. 방금 한 말은 그냥 현우 씨 말에 순응한 거니까 다른 생각하지 마요. 시간 괜찮을 때 가서 절차 밟아요. 아니면 어머니가 매일 지켜볼 텐데 현우 씨도 부담되잖아요."

분명 배신 당한 사람은 허아연이고, 억울한 것도 허아연인데 오히려 주현우를 위로해야 한다니.

역시 먼저 마음을 준 사람이 지는 법이다.

다시 절차 밟으러 가자는 허아연의 말에 주현우는 싸늘한 뒷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주현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허아연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없이 방문을 여는데 유서희가 마침 문을 두드리려던 참이었다.

"어머니."

허아연이 놀라며 외쳤다.

유서희는 방안을 슬쩍 들여다보고 다시 허아연에게 물었다.

"아연아, 현우가 너랑 싸운 거지? 현우가 너 괴롭혔어?"

허아연은 웃으며 답했다.

"저희 안 싸웠어요, 어머니."

유서희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싸우지도 않았는데 왜 문을 열고 나와?"

"내려가서 물 떠오려고 했어요."

"그래, 얼른 다녀와."

유서희의 허락을 받은 허아연은 방에서 나와 바로 오른쪽으로 돌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유서희는 굳은 얼굴로 방안에 들어섰다.

어느새 돌아선 주현우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유서희에게 말했다.

"엄마, 24시간 내내 우리 감시할 거면 차라리 이 방에서 주무세요."

유서희가 주현우의 팔을 꼬집으며 말했다.

"주현우, 너도 적당히 해. 아연이 이미 충분히 참아주고 너한테 맞춰주고 있어. 너무 선 넘지 말고 고마운 줄도 알아야지."

"아연이도 사람이고 생각이 있으니 슬퍼할 거야. 네가 매일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냉대하면 어떻게 살라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아연이를 어떻게 보겠어? 너 정말 아연이 쫓아버리면 나중에 꼭 후회할 거야."

주현우는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며 유서희의 손을 쳐냈다.

"유여사, 사람 꼬집는 버릇 아직도 못 고쳤어요? 엄마 살이 아니라서 아프지 않다는 거예요?"

"아프라고 꼬집는 거지. 경고하는데 너, 오지은과 다시 어정쩡하게 엮이지 마. 너 다시 아연이 난처하게 만들면 오씨 가문 길거리에 나앉게 할 거야."

주현우는 고개를 숙여 유서희를 내려다보았다.

"허아연이 도대체 엄마를 어떻게 홀린 거예요?"

"오지은은 도대체 너를 어떻게 홀린 거야? 이렇게 좋은 아내를 마다하고 매일 밖에서 걔랑 어울리고 너 제대로 미쳤지?"

유서희는 욕하며 손가락으로 주현우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

주현우가 다시 유서희의 손을 떼어낼 때, 허아연이 물컵을 들고 올라왔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유서희는 바로 언제 그랬냐는 듯 배시시 웃으며 돌아섰다.

"아연아, 물 떠왔으면 빨리 방에 들어와서 자. 내일 또 출근해야 되잖아."

허아연이 방에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서야 유서희는 방문을 닫았다.

순간,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주현우는 아직도 꼬집힌 팔뚝을 문지르고 있었다.

유서희의 심한 감시에 허아연은 어쩔 수 없이 물었다.

"내가 소파에서 자는 거 괜찮죠?"

주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잠옷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허아연은 지친 기색으로 주현우를 바라보았다.

분명 두 사람이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주현우는 항상 남 일 보듯 했다.

주현우가 씻고 나오자 허아연도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친 뒤에는 욕실 소독까지 마치고 나왔다.

혹시나 주현우가 밤에 화장실을 쓸 때 불쾌해할까 봐였다.

청소까지 마치고 침실로 돌아온 허아연은 귀마개와 안대를 챙겨 소파에서 얇은 담요를 덮고 잠을 잤다.

하루 종일 지쳤던 탓에 이미 주현우와 싸울 힘도 없었다.

책상 앞에서 일하던 주현우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소리 없이 소파에 웅크린 허아연을 바라보았다.

-현우 씨, 오늘 집에 와서 밥 먹어요? 국 끓여놨어요.

-현우 씨, 오늘 노을이 진짜 예뻐요.

-현우 씨, 나 좋아해요?

허아연의 뒷모습을 보던 주현우는 수많은 예전 일들이 떠올랐다.

만약 할아버지가 했던 말만 아니었다면, 허아연의 비밀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허아연의 일기장을 보지 못했다면 주현우는 어쩌면 허아연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

이어지는 며칠 동안 유서희는 정말 아레아 베이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주현우도 부담되고 허아연도 멘붕이 올 것 같았다.

허아연은 매일 밤 몇 번씩 소파에서 떨어지곤 했다.

대부분 주현우도 깨어 있어서 허아연이 떨어지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현우는 그저 방관하기만 할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허아연도 주현우가 자는 척하는 걸 알면서도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

부부 사이가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것도 참 답답한 일이었다.

주민경이 출장에서 돌아와 같이 밥 먹자고 불러줄 때에야 허아연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주현우와의 상황을 얘기하자 주민경은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애초에 현우 오빠는 아니라고, 만나면 안된다고 했잖아. 기어이 말을 안 듣더니 이제 와서 왜 이런 고생을 해."

"그때 우리 큰오빠 만났으면 얼마나 좋아."

주민경의 말에 허아연은 담담하게 웃었다.

"직접 부딪혀서 다쳐봐야 아픈 줄 아는 법이지."

전에 주현우는 목숨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길 속에서 허아연을 안고 뛰쳐나왔다.

또 허아연을 데리고 몰래 수업도 빼먹고, 함께 담도 넘고, 콘서트 구경하러 데려가고, 당구 치러도 데려갔었다.

주현우는 허아연 혼자서는 절대 상상도 못 할 많은 일들을 함께 했었다.

어린 날의 아름답고 기억에 남는 추억 모두 주현우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런 주현우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허아연은…… 주현우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했었다.

그래서 어르신이 주진우를 좋아하는지, 주현우를 좋아하는지 물었을 때 망설임 없이 주현우를 선택했었다.

그때를 떠올리던 허아연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난 너희 큰 오빠를 어릴 때부터 무서워했어. 우리 아빠보다 더 엄격해서 볼 때마다 도망 다니기 바빴어."

힘 빠진 허아연을 보던 주민경이 말했다.

"현우 오빠도 정말 뻔뻔해. 자기는 밖에서 실컷 놀아대면서 네가 딴 남자가 있다고 의심하다니. 역시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다 자기 같은 줄 알아."

"현우 오빠가 뭐가 그렇게 좋았어? 결혼하고 갑자기 변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한 우물만 팠어?"

허아연은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였지만 결국 웃음으로 무마하며 말했다.

"너무 어리고 순진했지. 내가 한 남자를 바꿀 수 있을 줄 알았어."

"이제 알겠지? 현실의 벽에 세게 부딪혔지?"

허아연은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사실 주현우가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었다. 결혼하고 나서 바뀐 게 더 컸다.

어쩌면 허아연이 주현우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행복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어서일지도 몰랐다

허아연은 씁쓸하게 미소만 지었다.

주민경이 위로하며 말했다.

"됐어. 너도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이따가 같이 바람 쐬러 가자."

……

식사를 마치고 주민경은 허아연을 데리고 바로 향했다.

친구들과 신나서 인사를 나누는 주민경을 보던 허아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민경아, 이게 네가 말한 바람 쐬는 거야?"

주민경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 현우 오빠도 맨날 나가 놀면서 집에 돌아가지 않잖아? 그럼 너도 놀아, 집에 돌아가지 않는 거야. 오빠가 얼마나 참는지 보는 거야."

허아연은 말문이 막혔다.

"네 오빠 마음속의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야."

주민경은 허아연을 옆에 끌어앉히고 과일주스를 따라주었다.

"그런 생각하지 말고 현우 오빠는 잊어버려. 계속 이러다가 너 우울증 걸릴까 봐 걱정돼."

허아연은 말없이 주민경이 건네는 주스를 받았다.

주민경이 일부러 기분 전환 시켜준다고 데리고 온 건데 분위기를 깰 수도 없었다.

허아연은 익숙하지 않아도 최대한 분위기를 맞추려 했다.

주민경이 남자 대학생들과 가위바위보 놀이를 하자 허아연도 한 번 시도해 보았다.

그런데 정말 머리 아픈 일들이 잠시나마 잊혀진 듯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창 신나게 놀던 사람들 중, 누군가 허아연을 보며 말했다.

"저기 허아연과 주민경 아냐?"

그 말에 바로 누군가 고개를 돌렸다.

"정말 허아연이네. 허아연도 바에 놀러 와? 현모양처 포기한 거야?"

"주민경이 데리고 온 거겠지."

"야야야, 먼저 인사하러 가지 마. 사진이랑 영상 좀 찍게."

남자가 말하며 휴대폰을 꺼내어 허아연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주현우의 모든 걸 다 참아주던 여자가 이제 반란이라도 일으키려는 거야?"

"주현우한테 보여줘야겠어."

사진과 영상을 찍은 사람은 바로 망설임 없이 주현우에게 전송했다.

……

아레아 베이.

유서희의 감시에 주현우는 7시에 집으로 돌아왔다.

서재 책상 앞에서 한창 야근 중이던 주현우의 휴대폰이 연달아 울려댔다.

주현우는 바로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상대가 보낸 십여 통의 메시지 중 사진을 열어보던 주현우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

'하, 난 날이 어두워지기 전부터 집에 와 있는데 감히 밖에서 신나게 놀다니.'

상대는 사진이 선명하게 찍히지 않았을까 봐 친절하게 영상까지 찍어 보냈다.

허아연이 남자 대학생들과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는 영상이었다.

게임이 어설프고 어색하지만 환하게 웃으며 즐기려는 허아연을 본 주현우의 표정은 불 보듯 뻔했다.

'남대생들과 같이 놀다니, 허아연 정말 대단하네.'

주현우는 바로 허아연의 번호를 눌렀다.

전화기 너머에서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지금 거신 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습니다. 잠시 후 다시 연락해 주세요."

이어 다시 두세 번 걸었지만 여전히 똑같은 안내음이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거신 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습니다. 잠시 후……"

안내음이 끝나기도 전에 주현우는 탁하고 휴대폰을 던져버렸다.

순간 화가 치밀어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창문 앞으로 걸어가 봤지만 마당 밖에는 돌아오는 차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주현우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한 대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를 세게 한 모금 빨아들이고 후-하고 담배 연기를 세게 뱉어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서 있었을까. 저 멀리서 흰색 차량이 마당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야 주현우는 돌아섰다.

아래층.

차에서 내린 허아연은 옷 냄새부터 확인했다. 술냄새가 나는 것을 확인하고 옷을 툭툭 털고 난 뒤에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일찍 돌아오고 싶었지만 신나게 노는 주민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더 머무른 것이었다.

집 안에 들어서자 다들 자는지 아주 고요했다.

허아연이 살금살금 위층으로 올라와 게스트룸 방문을 여는데 주현우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갔었어? 전화는 왜 안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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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전화가 오면 주진우는 밖에 나가 통화를 했다. 허아연은 병상 앞에서 허민수의 손을 꼭 잡은 채 문밖에서 통화 중인 주진우를 바라보았다. 주진우에게 고마운 마음이 너무 컸다. 그날 밤. 주민경과 유서희도 오고 주석진까지 다 찾아왔다. 허씨 가문에는 식구도 적고 허아연도 친구가 많지 않았기에 주씨 가문 사람들 말고는 병문안 오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 다 도착했는데도 주현우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9시가 넘어서도 계속 머물러있는 주진우에게 허아연이 말했다. "진우 오빠, 여긴 제가 있을 테니 돌아가서 쉬어요." 허아연의 말에 주진우는 허민수도 잠이 든 걸 확인하고 말했다. "알았어. 그럼 먼저 갈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네." 허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한 허아연이 함께 내려가려 하자 주진우가 말리며 말했다. "여기까지만 배웅하고 돌아가. 어르신 큰 문제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너도 좀 쉬어." "네." 허아연은 여전히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주진우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허아연은 병실로 돌아갔다. 병실은 아주 조용했다. 조금 전 정아 이모도 쉬라고 돌려보낸 뒤였다. 허아연은 병상 옆에 앉아 깊이 잠든 허민수의 손을 꼭 잡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절대 무슨 일 생기면 안 돼요." 부모님도 떠나고 이제 남은 가족은 할아버지 한 사람뿐이었다. 허아연은 할아버지가 옆에 몇 년이라도 더 있어 주기를 바랐다. 침대 끝에 앉아 있던 허아연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중원 그룹 장도원의 전화였다. 허민수가 깰까 걱정된 허아연은 밖으로 나갔다. "장도원 대표님." 전화를 받자마자 허아연은 바로 프로답고 똑 부러진 허아연 부대표님으로 변신했다. 마치 집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통화 소리가 병실 안 환자들을 방해할까 걱정된 허아연은 전화를 받으며 복도 끝에 있는 박을 베란다로 걸어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26화

    허아연은 주현우를 등진 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잠시 침묵하던 허아연이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그냥 한 말이라는 거 알아요." 분명 욕먹은 것도, 난처해진 것도 다 허아연인데 되려 주현우를 위로해야 했다. 답을 들은 주현우는 허아연의 귀마개를 다시 꽂아주었다. 이어지는 며칠 동안은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주현우가 매일 집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둘 사이 대화는 여전히 많지 않았다. ……그날 오후,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허아연에게 정아 이모의 전화가 걸려 왔다. "아연 씨, 어르신께서 입원하셨어요. 방금 검사 다 마쳤으니까 퇴근하면 보러 오세요." 전화를 받던 허아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할아버지가 입원했는데 왜 일찍 알리지 않았어요?"요즘 허아연은 할아버지와 관련된 일에만 이토록 큰 반응을 보였다. "어르신께서 일하는데 방해된다고 알리지 말라고 하셨어요."허아연은 말문이 막혔다. 일이 아무리 중요해도 할아버지보다 중요할 수는 없었다. 정아 이모의 말을 더 들을 새도 없이 전화를 끊고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허민수는 이미 여러 가지 검사를 다 마친 상태였다. 컨디션도 괜찮아 보였다. 허아연은 병상 옆에 앉아 허민수의 손을 꼭 잡고 일부러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할아버지, 이렇게 큰일을 저한테 숨겼다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나 평생 후회하면서 살게 하려고 그랬어요?" 허민수는 허아연의 손등을 토닥이며 껄껄 웃었다. "그냥 사소한 심혈관 질병이야. 나이 들면 다 있는 거야. 너한테 알려도 결국은 의사가 치료해야 하는 거잖아." 허아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쓰러졌는데도 사소한 문제예요? 다시는 이러지 마요. 앞으로는 무슨 일이든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요." 허아연의 걱정에 허민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알았어. 앞으로는 뭐든 제일 먼저 너한테 알릴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정아 이모는 옆에서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25화

    입으로는 알겠다고 했지만 본가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허아연은 전혀 기운이 없었다. 힘없이 시트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머리를 받침대에 기댄 채 초점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눈에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너무 힘들어. 마음이 너무 힘들어.' 이따금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확인하던 주현우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허아연을 보며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조금 전에는 정말 그냥 튀어나온 말이었다. 운전석에서 주현우의 휴대폰이 몇 번이나 울리고 통화를 몇 통이나 했지만 허아연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창밖만 바라보았다. 차가 집 마당에 도착해 주현우가 차 문을 열어주었을 때에야 허아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아연은 급히 짐을 챙겨 내리며 깍듯하게 말했다. "고마워요."인사를 하고 다시 나긋나긋하게 이어 말했다. "또 일 봐야 하죠? 먼저 들어갈게요." 주현우가 답하기도 전에 허아연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주현우는 손잡이를 잡은 채 허아연이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운전석으로 돌아가 바로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위층 침실로 돌아온 허아연은 주현우가 들어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문을 닫았다. 방문에 기댄 허아연은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마당을 멍하니 바라보는 허아연의 머릿속에는 온통 주현우가 한 말이었다. 말실수인 건 허아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현우의 속심말이기도 했다. 허아연의 기분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에 쉽게 튀어나올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허아연의 기분을 신경 썼다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감정 변화 하나 없는 눈빛으로 아주 오랫동안 마당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답답하고 괴로웠다. 또 한참 마당을 지켜보던 허아연은 그제야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직접 운전해서 할아버지를 뵈러 본가로 돌아갔다. ……저녁 10시, 본가에서 돌아온 허아연이 침실에 들어오자 주현우가 머리를 닦으며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허아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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