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이든의 소환 조사는, 온 나라의 시선 속에서 진행되었다.포토라인에 선 그는, 끝까지 담담했다.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그는 짧게 답했을 뿐이었다.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그 한마디뿐이었다. 몰락을 앞둔 사람의 얼굴이라기에는,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얼굴이었다.조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강민호의 육성 녹음과 진술 앞에서, 서이든 측 변호인단도 뾰족한 수를 내지 못했다. 구속영장이 청구될 것이라는 관측이, 기정사실처럼 흘러나왔다.한편 강민호는, 담담하게 제 몫의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자수와 협조를 인정받았다 해도,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변호사에게 선처를 구걸하지 않았다. 다만 조사실을 나서던 날, 하늘을 오래 올려다보았을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 발밑이 단단하게 느껴졌다. 난생처음, 제 발로 선 땅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강윤서는, 그 모든 소식을 갤러리에서 들었다."…볼장 다 봤네, 서이든."그녀는, 미련 없이 잔을 내려놓았다. HW의 자금은 그날로 완전히 회수 절차에 들어갔다. 애초에 서이든이라는 패는, 서지안을 흔들기 위한 오락이었을 뿐. 침몰하는 배에 정을 둘 이유는 없었다.'덕분에 재미는 충분히 봤고. 자, 그럼 이제.'강윤서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사진 한 장으로 향했다. 어느 시찰 현장에서 찍힌, 강도현의 사진이었다.'본게임을 시작해 볼까. 도현 씨.'그녀의 입가에, 새 사냥을 앞둔 사냥꾼의 미소가 번졌다. 서이든이라는 소란이 걷히고 나면, 서지안의 곁에는 빈틈이 생길 터였다. 사람은, 큰 싸움에서 이긴 직후에 가장 방심하는 법이니까.그리고 며칠 뒤. 서지안에게, 뜻밖의 면담 요청이 들어왔다.서이든이었다. 구속영장 심사를 앞둔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서지안에게 독대를 청한 것이다. 한무현은 당연히 반대했다. 궁지에 몰린 자의 마지막 발악일 수 있다고. 무슨 함정을 파 놓았을지 모른다고. 그러나 서지안은, 고개를 저었다."…아뇨. 만나야 해요."이유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다
소환 조사를 앞둔 그 밤, 서이든은 홀로 집무실에 남아 있었다.불도 켜지 않은 방 안에서, 그는 품속의 낡은 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진을 바라보는 사이, 기억은 그를 아주 먼 곳으로 데려갔다.다섯 살의 겨울이었다.그가 자란 보육원은, 언덕 위의 낡은 이층 건물이었다. 겨울이면 연탄 냄새가 복도 끝까지 배어들었고, 창틀 틈으로 새어 든 바람이 밤새 문풍지를 울렸다. 아이들은 한 방에 여섯씩 잤다. 담요는 얇았고, 늘 한 장이 모자랐다. 담요를 차지하지 못한 밤이면, 그는 무릎을 끌어안고 벽에 등을 붙인 채 잠들었다. 벽이 그나마, 바람보다는 덜 차가웠기 때문이다.보육원의 아이들은, 저마다 무언가 하나씩을 쥐고 잠들었다. 부모가 두고 갔다는 손수건, 낡은 곰 인형, 반쪽짜리 사진. 그러나 그의 손에는, 쥘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이름도, 물건도 없이 어느 새벽 보육원 문 앞에 놓여 있었다고 했다. 아이들은 그런 그를 '아무것도 없는 애'라고 불렀다.그러나 그에게도, 꼭 하나. 이름 대신 지닌 기억이 있었다.보육원에 오기 전. 아주 어렴풋한, 세 살인지 네 살인지도 모를 무렵의 기억. 따뜻한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감촉. 낮게 흥얼거리던 자장가의 몇 소절. 그리고 옷깃에서 나던, 희미하고 부드러운 향기.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 손과, 그 노래와, 그 향기만이. 그가 세상 어딘가에서 시작된 사람이라는 유일한 증거였다. 연탄 냄새가 스며든 차가운 밤마다, 그는 그 기억을 담요 대신 끌어안고 잠들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 겨울들을 건너오지 못했을 것이다.서영애를 처음 본 것은, 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값비싼 향수 냄새를 풍기는 모피 코트의 여자였다. 여자가 오는 날이면 원장은 아침부터 아이들을 씻겼고, 뒤따라온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었다. 여자는 카메라가 켜져 있을 때만 아이들을 안아 주었고, 셔터 소리가 멎으면 곧바로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아이
다음 날, 서지안 측은 준비한 모든 것을 금융 당국과 검찰에 제출했다.최과장의 녹취. 강민호가 넘긴 서이든의 육성 지시 녹음과 차명 계좌 메모. 그리고 강민호 본인의 자수와 진술. 세 개의 칼날이, 한 방향을 향해 동시에 내리꽂혔다.파장은, 즉각적이었다.주가 조작의 몸통이 외국계 투자회사 회장 서이든이라는 보도가, 저녁 뉴스를 타고 일제히 터져 나왔다. 서영애의 양자라는 사실, 그가 접수한 회사가 서영애의 해외 비자금에서 자라난 곳이라는 정황까지. 언론은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검찰의 소환 조사가 임박했다는 속보가 이어졌고, 서이든 측 회사가 손댄 종목들은 하한가로 곤두박질쳤다.서이든의 판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그를 따르던 이들이 먼저 등을 돌렸다. 어제까지 그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던 임원들은 앞다투어 변호사를 선임했고, 함께 지분을 모으던 우군들은 밤사이 연락이 끊겼다. 그가 머무는 호텔 앞에는 취재진이 진을 쳤다. 권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빨리 식는지를, 서이든은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놀랍지는 않았다. 그 자신이, 남들에게 늘 그렇게 해 왔으니까."…강민호. 결국, 그쪽으로 갔군."보고를 받은 서이든은, 의외로 담담했다. 배신감 같은 것은 없었다. 애초에 사람을 믿은 적이 없으니, 배신당할 일도 없는 것이다. 다만 계산이 하나 어긋났을 뿐이었다. 그는 강민호라는 인간이 끝까지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을 거라 보았다. 그 겁쟁이를 일으켜 세운 것이 무엇인지, 서이든으로서는 끝내 계산할 수 없었다.문제는, 당장의 방어전이었다.소환은 피할 수 없다 해도, 지분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주가가 무너진 지금이 오히려 우호 지분을 늘릴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즉시 움직일 수 있는 대규모 자금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의 금고 열쇠는, 지금 단 한 사람의 손에 들려 있었다.서이든은, 강윤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약속하신 잔금이, 오늘 안에 필요합니다. 가능하다면, 추가 집행도."전화기 너머에서, 나른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강민호가 마음을 정한 것은, 어느 새벽이었다.그날도 그는, 빈 술병 옆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었다. 창밖이 희끄무레하게 밝아 올 무렵, 그는 문득 오래된 휴대폰 하나를 꺼내 들었다. 서이든의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그가 남몰래 지녀 온 물건이었다.그 안에는, 그의 '보험'이 잠들어 있었다.서이든과 단둘이 만났던 날들의 녹음. 주가를 어떻게 움직일지, 자금을 어떤 경로로 돌릴지. 그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가 직접 지시하는 내용들이었다. 차명 계좌의 흐름을 정리해 둔 메모도 있었다. 언젠가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역설적으로 그에게 이것들을 남기게 했다. 밑바닥 인생을 살며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큰 사람들은 절대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작은 사람은, 스스로 살길을 챙겨 둬야 한다는 것이었다.강민호는, 그 휴대폰을 오래 내려다보았다.식탁 위에는, 며칠 전 우연히 발견한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이삿짐 정리 중에 상자 밑바닥에서 나온, 서아의 돌 사진이었다. 아이를 안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젊은 자신과, 그 곁에서 환하게 웃던 서지안. 그 시절의 그는, 이 초라한 행복이 부끄럽다고 생각했었다. 더 크고 번쩍이는 것들을 곁에 두면, 자신도 큰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이 사진 속의 모든 것을, 제 손으로 부수고 팔아넘겼다.'…크긴 뭐가 커. 이 사진 찍던 날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나은 게 하나라도 있나.'이것을 서이든에게 가져가면, 그는 한동안 안전할지도 몰랐다. 협박의 패로 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서영애의 곁에서, 그리고 서이든의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그런 패를 쥔 작은 인간이 어떤 최후를 맞는지를. 오태식이라는 남자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를.그리고 무엇보다. 그 새벽 그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협박도 거래도 아닌 다른 것이었다.서지안의 말이었다. 서아에게 부끄러운 아빠를 주고 싶지 않다던, 그 말.'…부끄럽지 않은 아빠라.'강민호는, 마른 웃음을 흘렸다.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는
결국, 서이든이 먼저 움직였다.강윤서의 자금이 열흘 넘게 감감무소식이 되자, 그는 더 버틸 수가 없었다. 금융 당국의 조사가 조여 오는 지금, 지분 방어에 들어갈 실탄이 말라 가고 있었다. 실무진을 통한 독촉은 번번이 흐지부지 되돌아왔다.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가, 직접 가는 것.강윤서는, 그 만남을 일부러 이틀이나 미뤘다. 선약이 있다는 핑계였지만, 서이든은 그것이 핑계라는 것을 알았고, 강윤서는 그가 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 게임의 규칙이었다.이틀 뒤, 서이든은 강윤서가 지정한 갤러리 라운지에 앉아 있었다. 강윤서는 약속 시간에서 이십 분이 지나서야, 느긋한 걸음으로 나타났다."어머, 오래 기다리셨어요? 요즘 제가 좀 바빠서.""…괜찮습니다."서이든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나 그 담담함을 유지하는 데, 그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힘을 쓰고 있었다."자금 이야기라면, 앉아서 천천히 하죠. 저 그림 어때요? 지난주에 들여온 건데."강윤서는, 한참이나 그림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서이든이 무엇 때문에 왔는지 뻔히 알면서도, 정작 그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목마른 쪽이 먼저 우물을 파게 만드는 것. 그녀는 그 순간을, 향이 좋은 차를 음미하듯 즐기고 있었다."…강윤서 씨."마침내, 서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약속하신 자금이, 열흘째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시점에 자금이 마르면, 우리 쪽 지분 방어선이 무너집니다. 그건 강윤서 씨에게도 손해일 텐데요.""어머, 그랬나요? 요즘 시장이 워낙 뒤숭숭해서, 우리 쪽 자금 집행이 다 늦어지고 있거든요."강윤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방긋 웃었다."그래도 서 회장님이 이렇게 직접 와 주셨으니, 제가 신경 써 볼게요. 일단 절반만 먼저 보내 드리죠. 나머지는, 상황 봐서."절반. 그리고 상황 봐서. 서이든은, 그 말속에 든 뜻을 정확히 읽었다. 앞으로도 이 목줄을 놓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필요한 만큼이 아니라, 그녀가 주고 싶은
서지안과의 만남 이후, 강민호는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웠다.그녀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쓰고 버릴 패.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버려질 방패.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냉정하게 돌아보면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서이든은 단 한 번도, 그를 사람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 그저 필요한 일을 시키고, 값을 치를 뿐이었다.강민호는, 서이든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그는 서이든을 찾아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조사가 심상치 않으니, 약속했던 임원 계약서를 미리 정식으로 작성해 두면 어떻겠느냐고. 만에 하나 자신이 위험해지면, 회사가 책임지고 변호를 맡아 달라고.서이든의 반응은, 서늘했다."강민호 씨. 지금은, 그런 서류를 남길 때가 아닙니다."그가, 담담하게 답했다."조사가 진행 중인데, 우리 사이의 계약서를 만들어 두는 건 오히려 위험합니다. 나중에, 그게 둘을 잇는 증거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조금만 참으세요. 이 일만 끝나면,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킬 테니."말은 그럴듯했다. 그러나 강민호는, 그 순간 확실히 깨달았다. 서이든은,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자신과 서이든을 잇는 그 어떤 증거도. 그것은 곧, 일이 틀어지면 강민호 혼자 모든 것을 떠안게 된다는 뜻이었다.'…서지안의 말이, 맞았어.'강민호의 등줄기로, 서늘한 소름이 훑고 지나갔다. 자신은, 처음부터 버려질 말이었던 것이다.그날 밤, 강민호는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지난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잘나가던 직장인이었던 시절, 서지안을 무시하며 우쭐대던 나날, 서영애의 개가 되어 딸까지 볼모로 삼았던 치욕. 그리고 이제, 서이든의 방패가 되어 벼랑 끝에 선 자신.그는, 단 한 번도 스스로의 힘으로 선 적이 없었다. 늘 누군가의 그늘에 빌붙어, 큰소리만 쳤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