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심성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그대로 아래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가정부가 당황해 앞을 막아서려 했다.“도련님.”하지만 심성빈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내가 나서서 해결하지 않으면 저 사람들은 앞으로도 수시로 본가에 찾아와 소란을 피울 거야. 부모님은 연세도 있으신데 이런 일로 계속 시달리게 할 수는 없어.”말을 마친 심성빈은 망설임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차가운 색감의 정장은 그의 곧고 반듯한 체형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온몸에서 서늘하고 날카로운 기운이 풍겨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위압감마저 느껴졌다.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심성빈은 모든 상황을 장악한 듯한 침착하고 위엄있는 분위기를 풍겼다.심성빈이 한 계단씩 내려오자 거실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떠들썩하던 거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천경미였다.천경미도 심용군이 경영권을 내려놓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제 결정권이 없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지금 이 집안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쥔 사람은 바로 눈앞의 조카였다.천경미는 더는 심용군을 붙잡지 않고 심성빈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모두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았다.“성빈아. 숙모가 이렇게 빌게. 이번 한 번만 네 작은아버지를 봐주렴.”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비굴할 만큼 낮은 자세로 애원했다.“네 작은아버지도 이제 나이가 많아서 이런 일을 견디기 힘들어해. 한집안 식구인 걸 생각해서 한 번만 용서해 줘. 숙모가 평생 네 은혜를 잊지 않을게.”어른이 여러 사람 앞에서 조카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건 강력한 압박이었다. 심성빈이 거절할 수 없게 만들겠다는 속셈이었다.친척들은 놀라면서도 앞다퉈 설득에 나섰다.“성빈아, 숙모가 무릎까지 꿇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모질게 굴 수 있어?”“그래, 이 정도면 한 번쯤 봐줄 만도 하잖아. 다 가족인데 끝까지 몰아붙이지 말고 체면은 남겨 둬야지. 앞으로도 얼굴 보고
다음 날 이른 아침, 심씨 본가의 거실에는 따스한 햇살이 가득했다.심용군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었고, 곁에서는 고여진이 꽃병에 꽂힌 꽃가지를 다듬고 있었다. 가위가 사각사각 움직이는 소리만 들니는 평화로운 아침이었다.그때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고여진은 가위질을 멈추고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아침부터 밖이 왜 이렇게 시끄럽죠? 대체 누가 저러는 거예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정부 한 명이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회장님, 사모님. 둘째 사모님께서 오셨어요. 심씨 가문의 방계 친척들과 어른들도 잔뜩 데리고 오셨는데, 벌써 문 앞까지 와 계십니다.”두 사람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거실로 우르르 밀려들었다.맨 앞에 선 천경미는 눈이 퉁퉁 부어 있고 머리도 흐트러져 있었다. 평소 빈틈없이 꾸미고 다니던 귀부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심용군과 고여진은 안색이 굳어지며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천경미는 심용군을 발견하자 구세주라도 만난 듯 비틀거리며 달려들었다.“아주버님, 제발요. 명재 좀 살려 주세요. 제가 부탁드릴게요.”천경미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명재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아주버님의 친동생이잖아요. 정말 감옥에 가기라도 하면 저희 모자는 어떻게 살아요? 앞으로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만나겠어요?”함께 들어온 친척들도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씩 거들었다.“그러게 말이야, 용군아. 피를 나눈 가족인데 정말 제 식구를 감옥에 보내서야 되겠어?”“성빈이가 아직 젊어서 혈기가 넘치는 거야. 일을 너무 성급하게 처리하니 네가 잘 타일러 봐.”“명재가 아무리 그래도 성빈이 작은아버지잖아. 삼촌과 조카 사이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네가 집안의 맏형이고 심씨 가문에서 영향력이 제일 크잖아. 이 일은 네가 나서야 해.”친척들은 저마다 혈육의 정과 집안의 도리를 내세우며 심용군을 몰아붙였다.한가운데 둘러싸인 심용군은 사방
심성빈은 느긋하게 반찬을 집어 들며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룹 내부의 문제를 은밀히 조사 중이라 얼굴을 비추기가 마땅치 않았어요.”이에 심용군이 미간을 찌푸렸다.“그 조사 결과가 고작 네 삼촌을 경찰에 넘기는 것이었어?”“명재가 탐욕에 눈이 멀어 잘못을 저질렀고 그룹에 손해를 끼친 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네 친삼촌이야. 회사에서 해임하고 내보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겠니? 왜 굳이 이 지경까지 만든 거야?”“경찰서에 연락해서 원만하게 마무리 지으렴. 합의하는 쪽으로 해서 며칠 가두었다가 따끔하게 혼만 내고 풀어주란 말이다. 어차피 다 한 가족인데 끝까지 파고들어 남은 인생 망칠 필요가 있겠니?”심성빈은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가 분명 이런 질문과 설득을 쏟아낼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심용군은 평생 가문의 체면과 혈연의 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었다.한때 그가 회사를 이끌 때 심명재를 항상 오냐오냐하며 감쌌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바로 그 끝없는 묵인이 심명재를 더 탐욕스럽고 오만방자하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었는데 말이다.심성빈은 고개를 들어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버지, 경찰 측에는 이미 사건이 접수되었고 모든 증거도 제출했습니다. 이제 와서 철회할 수도 없고 합의할 수도 없습니다.”“제가 만약 사적인 감정에 치우쳐 작은아버지를 봐준다면 앞으로 그룹의 모든 임원과 주주들이 똑같이 행동할 겁니다. 너도나도 사리사욕을 채우려 들고 잘못을 저질러도 감정 호소만 하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것은 그룹의 미래에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을 심는 꼴입니다.”심성빈의 말은 이치에 어긋남이 없었다.심용군 역시 아들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미간을 펴지 못했다.“말은 그렇지만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야. 명재는 네 친삼촌이자 나와 한배에서 난 동생이야. 평생을 쌓아온 정이 있는데 정말로 감옥에 보내버리면 남들이 우릴 뭐라고 하겠어?”“심씨 가문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들이라며 형제끼리
“성빈아, 내가 잠시 눈이 멀어서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어. 횡령한 돈은 전부 다 채워 넣을게. 단 한 푼도 빼놓지 않고 회사에 돌려놓을 테니까 제발 한 번만 반성하고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줘...”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심명재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비굴한 태도로 자세를 낮추며 애원했고 눈동자에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득실거렸다.하지만 심성빈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미건조한 표정을 유지했다. 눈썹 사이에는 어떠한 동요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처참하게 망가진 심명재의 모습을 태연하게 훑어볼 뿐 용서의 여지는 단 한 치도 없어 보였다.경찰관 두 명이 다가와 소환 절차를 밟았고 망연자실한 심명재를 좌우에서 붙들어 회의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문이 닫히자 회의실에는 적막이 흘렀다.심성빈은 자리에 앉은 이사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에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여러분들은 심하 그룹의 근간이자 오늘날까지 그룹을 함께 지켜온 원로들이십니다. 그러나 심하 그룹은 사리사욕을 채우고 그룹의 이익을 갉아먹는 좀벌레를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오늘 같은 일이 두 번 다시 심하 그룹 안에서 벌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이전에는 많은 이사들이 연륜과 경험을 앞세우거나 심명재의 꼼수에 넘어가 어린 심성빈을 대놓고 무시하곤 했다.심성빈은 그동안 일부러 참으며 사소한 일들은 적당히 눈감아주었다.하지만 오늘은 심명재를 처단하는 것을 계기 삼아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세우기로 결심했다.말이 끝나자 오랫동안 심명재의 뒤에 붙어 호가호위하던 이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책상 아래로 덜덜 떨리는 손을 꽉 쥐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친삼촌마저 경찰에 넘기는 심성빈이 그까짓 이사진의 체면 따위를 봐줄 리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했다.지난 몇 년간 심명재 곁에서 적지 않은 이득을 챙겼고 손을 뻗은 프로젝트 중 대다수가 불투명한 뒷거래로 얼룩져 있었다.심성빈이 마음먹고 파헤치기 시작한다면 어느 하나
차가운 선고가 떨어지자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심명재가 안색이 확 돌변하여 맹렬하게 책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른 채였다.“성빈아,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어떻게 말 한마디로 내 직책을 모조리 해임해? 이게 무슨 경우냐고?”“방금 말한 그대로입니다.”심성빈은 고개를 들어 격분한 그의 눈빛을 고요하게 맞이했다.“후속 업무는 공수현 씨가 전적으로 맡아서 진행할 겁니다.”회의실에는 웅성거림이 끊이지 않았다.몇몇 연로한 이사들은 눈살을 찌푸렸다.“심 대표, 명재가 아무리 그래도 자네 작은아버지이자 그룹 원로야. 이렇게 직책을 박탈하는 건 그룹 규정에 어긋나는 처사 아니야?”“그래. 인사와 관련된 중대한 결정은 당연히 이사회 전체의 표결을 거쳐야 하는데 어떻게 심 대표 혼자 단정 짓는 거야?”심명재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목청을 높였다.“성빈아, 내가 하도 예를 갖춰서 널 심 대표라 부르는 거지. 한때 네 아버지가 회사를 이끌 때도 감히 나한테 이렇듯 함부로 굴지 못했어. 대표 자리에 앉은 지 고작 몇 해나 됐다고 거만하게 굴어? 감히 날 건드리겠다? 이거 완전 눈에 뵈는 게 없네!”심성빈은 차가운 냉소를 내뱉으며 손짓으로 공수현에게 신호를 보냈다.“증거 틀어.”프로젝터 화면이 켜지자 심명재가 저지른 추악한 행각들이 모든 이사진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심명재 씨는 직권을 남용하여 회사의 자금을 여러 차례 횡령했고 비밀리에 사리사욕을 채웠으며 자회사를 악의적으로 공매도한 막대한 금액의 범죄 혐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룹 내에서 관리직을 맡을 자격이 없습니다.”회의실에는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이사들은 스크린에 비친 증거들을 바라보며 충격에 휩싸였다.심명재가 이토록 대담하게 회사의 자산을 계속 빼돌렸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심명재는 화면 속 증거들을 보며 머릿속이 텅 빈 듯 멍해졌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모든 흔적을 철저히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
득실을 따져본 끝에 시아는 당분간 목걸이를 금고에 넣어두는 수밖에 없었다.강현.일부러 흘린 듯한 그 거액의 자금은 심명재에게 있어 달콤하고도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밤낮으로 그를 자극하는 향기로운 미끼가 되어 위험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꾸만 마음이 흔들렸다. 다만 그는 섣불리 움직일 엄두가 안 났다.심성빈은 그가 망설일 틈을 주지 않고 은밀하게 더욱 부추겼다.몰래 판을 짜서 심명재를 도박장으로 끌어들였고 결국 그곳에서 거액의 빚을 지게 되었다.빚쟁이들이 한밤중에 집 앞까지 들이닥쳐 돈을 갚으라고 재촉했고 마침내 심명재가 진퇴양난에 빠졌다.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이 남자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다시 한번 그 ‘돈’을 노리며 심성빈이 치밀하게 파놓은 덫으로 발을 들였다.“대표님, 심명재 씨와 관련된 모든 증거를 수집했습니다. 여기 있습니다.”공수현이 공손하게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넸다.심성빈은 의자에 기대앉아 봉투를 열고 눈빛에 서늘한 한기가 스쳤다.드디어 모든 밑 작업이 끝났다.이제 그물을 걷어 올릴 시간이었다.그는 서류 봉투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차 대기해. 심하 그룹 본사로 간다.”이제 둘째 삼촌과 직접 담판을 지으러 가야 한다.심하 그룹 본사 빌딩.심성빈이 로비로 들어서자 오가던 직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곳곳에서 인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대표님.”심성빈은 짧게 고개만 끄덕일 뿐 멈추지 않고 최상층으로 향했다.비서가 그를 보자마자 달려왔다.“오셨습니까, 대표님.”“한 시간 뒤에 이사회 열 거야. 모든 이사진, 빠짐없이 참석하라고 전해.”“네.”비서는 지체할 틈도 없이 바로 준비에 착수했다.소식은 삽시간에 회사 전체에 퍼져나갔다.갑작스러운 통보를 받고 달려온 심명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그는 숨을 헐떡이며 최상층으로 올라가 대표이사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안에는 심성빈이 통유리창 앞에 서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심명재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으나 곧바로 비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