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고여진의 추진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행여나 아들 심성빈이 마음을 바꿀까 봐 맞선을 다음 날 오전으로 잡아버렸다.같은 날, 차설아는 송하나와 쇼핑을 하기로 약속했다.심성빈이 차를 몰아 시내 중심가에 있는 백화점까지 데려다주었다.차가 막 멈추자 최로운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고 차설아가 안에서 내렸다.심성빈은 안전벨트를 풀고 손을 뻗어 송하나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가봐. 설아랑 재밌게 놀다 와.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다 사. 일 끝나는 대로 바로 데리러 올게.”송하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차에서 내린 그녀는 차설아에게 달려가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백화점으로 들어갔다.한편 최로운은 차설아를 보내고 돌아서서 심성빈 차 옆에 기대서며 흥미진진한 눈길로 물었다.“마음 정했어? 진짜 선보러 갈 거야? 대충 핑계 둘러대고 안 갈 줄 알았는데.”심성빈의 시선은 송하나가 사라진 방향에 머물러 있었고 말투는 한없이 담담했다.“한 번은 피할 수 있어도 평생 피할 순 없어. 지금 안 가면 끝도 없이 자리를 만드실 분들이야.”최로운은 단번에 그의 깊은 속내를 꿰뚫으며 핵심을 짚었다.“너 혹시 부모님이 네 사생활을 캐다가 결국 송하나 씨 존재까지 알아낼까 봐 겁나는 거지?”심성빈은 부정하지 않았다.시선을 거두고 최로운을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오늘 일은 절대 하나한테 말하지 마.”“걱정 마.”최로운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대답했다.“나만 믿어, 친구야.”최로운과 헤어진 뒤, 심성빈은 방향을 틀어 맞선 약속 장소인 카페로 향했다.가는 도중에 고여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목소리엔 당부가 가득했다.“성빈아, 출발했어? 백지유 그 아이 내가 직접 만나봤는데 교양 있고 참해. 외모며 분위기까지 얼마나 출중한지 몰라. 이따 만나면 얘기 잘 나누고 좀 적극적으로 다가가. 내내 무뚝뚝한 얼굴만 하지 말고, 알겠지?”심성빈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무표정하게 알겠다며 대답했다.잠시 후 차가 목적지에 도착
심용군과 심성빈, 두 부자지간의 분위기가 점점 더 팽팽해지자 고여진이 급히 끼어들었다.“됐어요. 다들 그만해! 성빈이가 모처럼 돌아왔는데 온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야지 보자마자 싸우는 게 어디 있어요? 맞선 얘기는 나중에 해요. 당장 급한 것도 아니니까.”심용군은 얼굴을 굳힌 채 콧방귀를 뀌더니 바둑 둘 흥미를 완전히 잃고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거실은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심성빈의 어머니 고여진이 옆에 앉아 아들의 차갑고 냉랭한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말을 꺼내려다 삼키길 반복했고 마침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성빈아, 엄마는 다 알아. 네가 그때 고집스럽게 해외로 나간 거 말로는 사업 확장이라고 해도 실은 그 여자애 원인이 더 컸잖아. 그 애를 완전히 잊으려고 떠난 거 아니야.”심성빈의 등줄기가 미세하게 뻣뻣해졌다. 그는 시선을 내리고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다.“이제 시간도 꽤 지났으니 아무리 깊은 미련이라도 내려놓을 때가 됐어. 앞을 보고 살아가야지. 평생 과거에 얽매여 살 순 없잖니.”고여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솔직히 그때 네가 그 아이랑 맺어지지 못한 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라. 너희 아빠는 워낙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분이라 집안 체면이랑 격식, 이런 걸 목숨처럼 여기실 게 뻔해. 이혼한 여자는 절대 우리 집안 문턱도 못 넘게 할 거다.”“게다가... 그 아이는 네 소꿉친구 강우랑 결혼까지 했었어. 얽힌 게 너무 많아서 구설에 오르기 십상이야. 너희 두 사람은 안 어울리는 것 같아, 성빈아. 이 일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널 어떻게 보겠니? 우리 집안을 뭐라 평가하겠어?”고여진은 이 말들을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다가 오늘에서야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한마디 한마디가 현실적이고 가혹할 따름이었다.심성빈은 여전히 시선을 내리깔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와 송하나는 애초에 정식으로 함께한 적도 없었다. 예전 같으면 심성빈은 이런 시시콜콜한 세상의 잣대나 집안의 차별, 남들이 수군거림 따위 신경을 쓰지
차가 심씨 저택 입구에 부드럽게 멈춰 서자 가정부가 곧장 달려와 능숙하게 차 키를 건네받았다.“오셨어요, 도련님.”심성빈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침착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섰다.그의 어머니 고여진이 인기척을 듣고 방에서 나왔다. 아들 얼굴에 시선이 닿자마자 말투에는 걱정과 애틋함이 가득했다.“또 살이 빠졌구나. 해외에서 매일 일만 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거 아니니?”“저 잘 지내요, 어머니.”심성빈은 낮은 목소리로 짧게 답하며 어머니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심용군이 한창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손엔 자사 찻잔이 들려 있었고 표정은 차분하면서도 가장의 무게감과 위엄이 자연스레 풍겼다.아들이 들어오는 걸 보자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왔어? 이리 와서 바둑 한판 두렴.”“네, 아버지.”심성빈은 순순히 맞은편에 앉아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를 마주했다.몇 수를 둔 뒤에야 심용군이 입을 열었다.“해외 사업이 꽤 잘 풀린다던데 까다롭던 프로젝트 몇 개가 올해 무난히 착공됐더구나.”심성빈은 멈추지 않고 바둑을 두면서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그럭저럭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별다른 차질 없이 넘어간 정도라 내세울 만큼 대단한 건 아닙니다.”이때 고여진이 과일 접시를 들고 오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눈가에는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너희 아빠 종일 국제 뉴스만 챙겨 보셔. 네 회사에 새로운 사업을 벌이거나 프로젝트를 따냈다는 소식만 뜨면 어린애처럼 좋아하시는 거 있지. 뒤에서 항상 ‘젊은 시절의 나보다 배짱도 실력도 낫다’라고 칭찬하느라 입이 마를 지경이야.”심용군은 여전히 무게 잡힌 표정이었으나 눈구석엔 숨기지 못한 흐뭇함이 번졌다.잠깐의 스몰 토크가 오간 뒤, 고여진이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그녀는 아들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말투로 권했다.“성빈아, 해외 사업도 이제 안정됐으니 결혼도 슬슬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가 되지 않았어?”심성빈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는 건성으로 넘겼다.“요즘 손에
최로운은 누구보다 잘 안다. 심성빈이 오늘 일부러 이강우를 부른 이유는 분명 중요한 일이 있을 터였다.자신이 아이를 데리고 여기 있으면 결국 거치적거리기만 할 것 같았다.최로운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었다.“둘이 천천히 먹어. 난 이솔이 데리고 나가서 잠깐 돌아다녀야겠어. 애가 룸에 오래 있으니까 자꾸 떼쓰네.”말을 마친 후 그는 이내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방 안이 다시 조용해지자 심성빈은 아까의 여유로운 태도를 거두고 이강우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요즘 해외에서 대대적으로 판을 짜고 있다면서? 손대는 분야마다 빅토르의 핵심 사업과 상하류 공급망이더라.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이는 거 하나를 위해 복수하려는 거지?”이강우는 전혀 숨기거나 부인하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맞아.”“나도 최근에 계속 빅토르의 범죄 증거를 모아 왔어. 한 번에 치명타를 날려서 완전히 무너뜨리려던 참이야.”심성빈의 눈빛이 가라앉으며 먼저 협력을 제안했다.“빅토르 그 자식은 교활하고 의심이 많아. 게다가 자기 영역에서 뿌리가 아주 깊은 인물이라 혼자 덤비기엔 손실이 너무 커. 우리 이참에 손잡는 게 어때?”이강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답했다.“좋아.”이 대답을 끝으로 두 남자의 협력이 확정됐다.심성빈은 그가 여전히 송하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그게 아니면 이토록 막대한 자금과 인맥, 에너지를 쏟아붓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신의 사업이 큰 타격을 입는 것도 감수하며 빅토르를 무너뜨리려 하지 않았을 테니까.심성빈은 그가 이번 만남을 계기로 송하나의 근황을 묻거나 심지어 만나자고 할 줄 알았다.만약 이강우가 진짜 입을 연다면 심성빈 또한 그녀를 대신해서 거절할 자격 같은 건 없다.이강우는 그녀의 전남편이니까.반면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된 명분조차 가진 적이 없었다.그러나 대화 내내 이강우는 극도로 절제하며 송하나에 관한 말은 단 한 글자도 꺼내지 않았다.최로운이 최이솔을 데리고 바깥
송하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숙여 그릇에 담긴 음식을 한 입 맛보았다.차설아의 요리 실력은 그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송하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놀란 듯 칭찬을 남발했다.“설아야, 너 요리 실력 언제 이렇게 늘었대? 완전 맛있어!”차설아는 거침없고 진솔한 그녀의 칭찬에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고 눈가에도 자신감이 차 넘쳤다.“내가 누구야? 꽤 오래 배웠어. 우리 하나 간만에 돌아왔는데 실컷 먹어.”그녀는 말하면서 쉴 새 없이 송하나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 한 상 가득 차린 음식은 전부 차설아의 시그니처 음식이었다.그 시각, 소란스러운 강현 도시 한복판에서 고요함을 찾아낼 수 있는 최상급 프라이빗 라운지에서 심성빈과 이강우가 만나기로 약속했다.심성빈은 최로운과 함께 먼저 도착해 찻잔을 들고 담담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분한 표정만으론 그의 속내를 좀처럼 가늠하기 어려웠다.최로운은 딸 최이솔을 안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꼬맹이는 아빠 품에 꼭 안겨 오물오물 과자를 먹었다. 볼이 빵빵해지고 입 주변에 과자 부스러기가 잔뜩 묻은 아기의 모습은 말랑말랑하고 귀여울 따름이었다.잠시 뒤, 웨이터가 가볍게 문을 열자 이강우가 안으로 들어섰다.그는 깔끔하게 재단된 짙은 색 양복을 입고 훤칠한 몸매를 뽐냈으며 주변에 차가운 기운을 풍겼다.최로운이 그를 보자 재빨리 아이를 안고 일어나며 웃는 얼굴로 아이스 브레이킹에 나섰다.“강우 드디어 왔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우리 이솔이가 과자 한 접시를 다 먹어버릴 판이야. 빨리 앉아!”최이솔은 여전히 과자를 반 조각 물어서 볼이 빵빵했다. 아빠의 말을 듣자마자 아이는 커다란 두 눈을 반짝이며 어눌한 발음으로 나긋하게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본래 차갑고 딱딱한 표정을 지니던 이강우는 아이의 부드럽고 순수한 모습 앞에서 미간이 풀리기 시작했다.“그래, 이솔아.”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다정하게 대답했다.말투에 평소와 다른 은근한 온기가 묻어났다.인기척 소리에
차설아와 송하나가 현관으로 들어서자 가정부가 곧바로 마중 나왔다.“사모님, 말씀하신 식자재들 전부 준비해 두었습니다.”“네, 알겠어요. 거기 두세요.”차설아가 주방으로 향하려 하자 송하나가 돕겠다며 뒤를 따랐다. 다만 차설아는 손사래 치며 얼른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하나야, 넌 여기 앉아서 쉬어. 나 혼자면 충분하니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기대해, 음식 무조건 맛있을 거야!”차설아가 자신만만하게 윙크까지 날리자 송하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가정부가 내온 다과와 과일을 곁에 두고 송하나는 소파 쿠션에 몸을 기댔다.거실은 고요했고 통유리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유난히 따스했다.노곤함이 몰려온 송하나는 푹신한 쿠션에 몸을 기대고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그 시각, 주방에서는 차설아가 전쟁이라도 치르듯 요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칼질 소리와 도마 소리, 프라이팬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잠시 후, 완성된 요리를 식탁에 차려내고 송하나를 부르려던 참인데 거실 쪽을 본 순간, 손에 든 접시를 떨어뜨릴 뻔했다.소파에서 깊이 잠든 송하나의 손목 위로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솜사탕처럼 하얗고 몽글몽글한 토끼가 깡충깡충 뛰어와 킁킁거리며 그녀의 손을 핥고 있었으니까.차설아는 정말이지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뭉치야!’이 토끼는 차정원이 송하나에게 선물한 거라 그녀가 세상 무엇보다 아끼던 반려동물이었다.차정원이 출국하기 전, 특별히 차설아에게 부탁하며 맡겨두었던 녀석 뭉치였다.그동안 차설아는 뭉치를 애지중지 돌봐왔다.하지만 송하나가 이 토끼를 보는 순간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고통스러워할까 봐 미리 가정부에게 단단히 일러두었었다. 뭉치를 방에 가두고 관련된 물건도 전부 치우라고 말이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틈이 생겼단 말인가.차설아는 서둘러 접시를 옆에 있던 가정부에게 떠넘기고는 낮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쏘아붙였다.“내가 잘 단속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또 나왔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