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우선 내 이름으로 남길 유산부터 만들어야 해.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방법 말이야.”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발아래로 도시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그 여자와 제인을 계속 감시해. 한시도 눈을 떼지 마. 내가 알아야 할 건 전부 알아내.”“사진은 어떻게 할까요?”“보관해 둬. 그건 내 보험이지, 무기가 아니야. 적어도 아직은.”그는 전화를 끊었다.창턱에는 난초가 놓여 있었다. 밴스는 손끝으로 꽃잎을 살짝 건드렸다. 여전히 살아 있었다.3년.그는 속으로 되뇌었다.앞으로 3년만 버티면 돼.밴스는 노트북 앞으로 돌아왔다. 프로젝트 호라이즌, 마을, 그리고 자신을 자유롭게 해 줄 일.그것이 지금 그가 해야 할 전부였다.---3년 후, 블랙우드 저택쌍둥이의 세 번째 생일 케이크는 성 모양이었다. 세 겹으로 쌓아 올린 케이크에는 분홍색과 파란색 탑이 솟아 있었고, 성벽 위에는 작은 플라스틱 용들이 올라앉아 있었다. 용은 오스틴이 고집했고, 분홍색은 셀레나가 원했다. 나머지 모든 것은 조비가 결정했다.블랙우드 저택의 연회장은 상류층 인사들로 가득했다. 이사회 임원들과 유서 깊은 부유층 가문 사람들, 정치인들, 그리고 꽃 장식에 대해서만 기사를 쓰겠다고 약속한 라이프스타일 전문 기자들까지 참석했다. 수정 샹들리에가 천장 아래에서 빛났고, 싱가포르에서 공수해 온 싱싱한 난초들이 곳곳을 장식했다. 현악 사중주는 듣기 좋지만 딱히 기억에 남지는 않을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조비는 사람들 사이를 우아하게 누볐다. 얼굴에는 눈부신 미소가 걸려 있었고, 샴페인 잔을 든 손목의 각도마저 완벽했다. 그녀가 입은 크림색 실크 드레스는 엉덩이선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리며 몸매를 감쌌다.마지막 스캔들이 터진 뒤 3년.밴스가 저택을 떠난 뒤 3년.그녀는 그동안 버림받고도 품위를 잃지 않는 아내, 남편에게 헌신하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여자의 역할을 완벽하게 연기해 왔다.“오늘 정말 아름답구나, 얘야.”어머니가 어느새 다가와 조비의 팔꿈치
조비가 몸을 더 기울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거의 맞닿을 뻔했다.하지만 그 순간, 밴스가 멈춰 세웠다.그의 엄지손가락이 자신의 입술을 누르며 조비의 입술을 가로막았다. 차가운 피부가 닿았고,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단단했다.조비는 천천히 몸을 물렸다.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내가 당신이 이런 식으로 나를 만지게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했어?”밴스의 목소리는 낮고 무미건조했다.“설마 몸을 이용하고 달콤한 말 몇 마디만 건네면 모든 남자가 당신 앞에 무릎 꿇을 거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조비의 턱이 굳어졌다.“당신을 유혹하려던 게 아니야.”“아.”밴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그럼 그냥 나랑 잠자리를 가진 다음, 뒤로는 애인과 행복한 가정이라도 꾸리고 싶었던 건가? 참으로 고결한 생각이군.”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조비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다 의자에 몸을 기댔다. 밴스가 매일 밤 그곳에 앉아 책을 읽으며 자신을 외면하던 바로 그 의자였다.“나는 당신이 나를 만지도록 내버려 뒀어, 조비. 남편으로서 해야 할 역할도 했지. 당신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으면서 남편의 의무를 다했어. 가면을 쓰고, 당신과 함께 연극을 했다고. 그게 우리 결혼 생활에 필요한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질서, 평화, 안정. 그 세 가지만 지키면 된다고 믿었어.”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하지만 나는 적어도 내 존엄을 지킬 줄 아는 남자야. 그런 남자가 어떻게 자기 가장 친한 친구의 남편과 한 침대에 올랐던 여자와 기꺼이 잠자리를 함께할 수 있겠어?”밴스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뒤돌아보지 않았다.조비는 서재에 홀로 남았다.책상 위에는 와인 잔이 놓여 있었다. 이제는 텅 빈 잔이었다. 밴스는 와인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셨지만, 그녀가 내민 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얼마 후, 아파트 저편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문이 닫혔고, 잠금장치가 걸렸다.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밴스가 남긴 침묵은 문이 요란하게 닫히는 소리보다 더 크게
그 남자는 몸을 숙였다. 책상 한쪽, 서류 더미 근처에서 머리카락 한 올을 발견했다. 가늘고 금빛을 띤 금발이었다. 그는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집어 올린 뒤 비닐봉지에 밀봉했다. 의자도 확인했다. 같은 색의 머리카락이 한 올 더 나왔다. 그것 역시 챙겼다.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는 책장 위에 놓인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네리사와 함께 찍은 제인, 레오와 셋이 나란히 선 모습, 그리고 혼자 있는 제인.그는 사진 속 얼굴들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잠시 후, 제인이 돌아왔다.“찾으시던 건 찾으셨습니까?”남자가 물었다.“네, 찾았습니다.”제인은 서류철을 들어 보였다.“요청하신 자료입니다.”남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훌륭하군요. 오늘 밤에 검토해 보겠습니다.”두 사람은 악수를 나눴고, 남자는 사무실을 떠났다.제인은 홀로 남은 사무실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머리카락 몇 올이 작은 비닐봉지에 담겨 어느 실험실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그 머리카락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사실 역시.---남자가 떠난 뒤, 저녁은 어느새 깊은 밤으로 바뀌었다.도시 건너편 펜트하우스의 개인 서재에서 밴스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방 안은 어두웠고, 커다란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이 반짝였다. 그의 앞에는 호라이즌 관련 서류와 진행 상황 보고서, 자금 승인 문서가 펼쳐져 있었다.일만이 그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것이었다.휴대전화가 진동했다.밴스는 전화를 집어 들었다.샘플 확보했습니다. 제인의 머리카락과 쌍둥이의 볼 안쪽 면봉 샘플을 실험실로 보냈습니다. 사흘 후면 결과가 나옵니다.그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수고했어.휴대전화를 내려놓자 화면이 잠시 빛나다가 이내 어두워졌다.밴스는 검사 결과를 생각했다. 무엇이 확인될지, 그리고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그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그때 문이 열렸다.밴스
아침 우편물 사이로 평범한 갈색 봉투 하나가 도착했다.발신인 주소도, 보낸 사람의 이름도 없었다. 두툼한 봉투가 청구서와 광고 전단지 사이에 섞여 있었을 뿐이었다.조비엔의 아버지는 서재에 앉아 있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맞은편에 앉은 아내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는 칼로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었다.사진들이 책상 위로 쏟아졌다.선명하고 윤기가 도는 사진들.그리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공원. 연못. 유모차.남자아이를 안고 있는 제인.여자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제인.제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조비엔.두 사람 사이에 놓인 쌍둥이.한 가족처럼 보이는 모습.하지만 그 모든 것은 거짓이었다.아내가 고개를 들었다.“무슨 일이에요?”남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사진들을 아내 쪽으로 밀어 놓았다.아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누가 보낸 거죠?”“이름이 없어.”그는 봉투를 뒤집어 보았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두 사람은 사진을 사이에 둔 채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마침내 아내가 입을 열었다.“조비엔에게 가봐야겠어요.”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들을 다시 봉투에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조비엔과 밴스가 함께 사는 펜트하우스 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조비엔의 부모는 노크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소파에 앉아 있던 조비엔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양팔에 쌍둥이를 하나씩 안고 젖을 먹이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배가 고팠는지 열심히 젖을 빨았고, 여자아이는 조금 느긋하게 먹으며 천장을 향해 검은 눈을 깜빡였다.“어머니? 아버지?”조비엔이 미소 지었다.“쌍둥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부모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뒤에서 문을 닫았다.“아이들부터 다 먹여라.”아버지가 낮게 말했다.“그다음 유모에게 맡겨.”조비엔의
사흘 후, 조비엔은 유모에게 쌍둥이를 데리고 바람을 쐬러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적한 사유지 공원이었다. 탁 트인 공간에 오래된 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아기들이 산책하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띌 일도 없을 터였다.“남편이나 부모님께는 절대 말하지 마세요.”조비엔이 단호하게 말했다.“혹시라도 입을 열면 일자리를 잃게 될 거예요.”유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묻지 않았다.공원은 외진 곳에 있었다. 넓은 잔디밭과 오래된 나무들, 작은 연못이 전부였다. 사람도 없었고, 카메라도 보이지 않았다.제인이 먼저 도착했다.그는 연못가에 서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창백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오늘 이 순간을 머릿속으로 수없이 그려 보았기 때문이다.자갈길 위로 유모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제인이 고개를 돌렸다.조비엔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쌍둥이는 나란히 놓인 이인용 유모차에 타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잠들어 있었고, 여자아이는 깨어난 채 하늘을 향해 검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제인은 그들에게 다가갔다.다리가 힘없이 떨렸다.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조비엔은 먼저 남자아이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아기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자 잠깐 얼굴을 찡그렸던 아이가 이내 다시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그녀가 아기를 제인에게 내밀었다.“자. 네 아들을 안아 봐.”제인은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받아 들었다.따뜻하고 가벼웠다. 작은 두 주먹은 가슴 앞에 오므려져 있었고, 고른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제인은 아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조비엔을 닮은 금빛 머리카락과 작은 코, 그리고 앙증맞은 입술.“눈은 너를 닮았네.”그가 속삭였다.조비엔은 여자아이를 들어 품에 안았다.“딸은 당신을 닮았어. 얼굴 윤곽도 그렇고, 무언가를 바라볼 때 표정도 그래.”제인은 아들을 팔 안쪽으로 조금 더 편안하게 옮겼다. 손끝으로 아기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아기가 입을 벌리며 무언가를 찾듯 고개를
다음 날 아침.밴스는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창밖으로 보이는 도시는 잿빛이었다. 책상 위에는 호라이즌 관련 서류들이 펼쳐져 있었다. 진행 보고서, 자금 승인 문서, 그리고 마을의 수력 발전 시스템이 완공되었다는 보고서까지.세 곳의 새로운 지역도 프로젝트 참여를 결정했다.애슈워스는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지만, 이사회는 여전히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문이 열렸지만 밴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윌리엄이 들어왔다.노크는 없었다.그는 원래부터 노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윌리엄은 잡지를 밴스의 책상 위로 내던졌다.종이가 팔랑거리며 펼쳐졌다.표지에는 마을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새로 설치된 수력 발전 시스템과 그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그리고 큼지막한 헤드라인.「블랙우드 후계자, 가문 대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선택하다」밴스는 표지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손을 대지는 않았다.“이 프로젝트를 그만둬야 한다.”윌리엄이 말했다.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네가 그 멍청한 꿈을 가지고 놀도록 충분히 내버려 뒀다. 하지만 이제 넌 아버지가 됐어. 쌍둥이가 태어났고, 책임져야 할 가족도 생겼다.”윌리엄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이제 현실로 돌아올 때다.”“이 프로젝트는 수익성이 있습니다.”밴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충분하지 않아.”윌리엄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애슈워스의 지원이 무슨 의미가 있지? 그 사람은 한 명일 뿐이야. 이사회는 지켜보고 있다. 왜 블랙우드의 후계자가 회사를 키우는 대신 시골 마을이나 돌아다니며 시간을 낭비하는지 묻고 있어.”밴스는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회사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문제가 없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윌리엄이 한 걸음 다가왔다.“내가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이 제국을 만들었다. 그런데 네가 감상적인 환상 하나 때문에 내가 만든 것을 무너뜨리는 꼴은 두고 볼 수 없어.”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프로젝트를 끝내. 당장.”“싫습니다.”짧고 담담한 대답이었다.윌리엄의 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