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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붉은 도장

Author: 8489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1 08:27:30

"은행 업무는 잘 보셨습니까."

정명수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질문인지, 확인인지 알 수 없었다.

서하는 휴대폰을 귀에서 내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도현이 무언가 외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서하는 통화를 끊지 않은 채 휴대폰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네. 덕분에요."

"타시지요. 평창동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걸어갈게요."

"을지로에서 평창동까지 말입니까."

"실장님 차보다는 안전할 것 같아서요."

정명수의 얼굴에 표정이라 부를 만한 게 처음으로 스쳤다. 웃음에 가까웠지만, 웃음은 아니었다.

그가 차에서 내렸다. 반듯한 회색 정장, 먼지 한 톨 없는 구두. 서하보다 머리 하나가 컸다.

"상자 여섯 개."

정명수가 말했다.

"돌려주시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회장님도 그렇게 원하십니다."

"못 돌려드려요. 제 거라서요."

"강진건설 문서고에서 나온 물건입니다."

"아버지가 보낸 팩스예요. 받는 사람이 무시했을 뿐이죠."

서하는 한 걸음 다가섰다.

"결재란에 도장이 찍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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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수하려고 결혼했는데 남편이 다 알고 있었다.   제26화. 검은 우산

    그날 밤, 별채 욕실. 물을 틀어 놓은 채 서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 회장님이 다음 주에……."— 알고 있다.서하의 말이 끊겼다.— 오늘 아침에 사돈어른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더라. 정중하게, 토요일에 평창동으로 모시겠다고. 차도 보내 주겠다고.아침 식탁에서 강 회장이 초대를 입에 올린 게 8시였다. 서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군산에는 이미 전화가 가 있었던 것이다."……엄마, 안 와도 돼. 몸이 안 좋다고 할게. 가게 일이 바쁘다고 해도 되고. 내가 어떻게든 핑계 댈게."— 서하야."그 사람이 엄마를 왜 부르는지 알아? 엄마 얼굴 보려는 게 아니야. 나한테 보여 주려는 거야. 엄마까지 자기 손바닥 안에 있다고."— 서하야.어머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간다.서하는 말을 잃었다.— 7년이다. 남의 집 바짓단 줄이고 해진 소매 기우면서 7년을 버텼어. 그동안 그 양반 얼굴을 한 번도 못 봤다. 텔레비전에 나오면 채널을 돌렸지.어머니가 잠깐 숨을 골랐다.— 이제 좀 봐야겠다. 네 아빠를 그렇게 보낸 사람이 어떤 얼굴로 나한테 사돈어른 소리를 하는지."엄마……."— 그리고 너 혼자 그 집에 두는 것도 이제 싫다. 한 번은 엄마가 가서 봐야지. 우리 딸이 어떤 데서 사는지.수화기 너머에서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드르륵. 7년 동안 한 번도 멈추지 않은 소리였다.— 빈손으로 갈 수는 없고. 사돈어른 선물은 엄마가 준비할게.토요일 오전 11시. 평창동 저택 현관 앞.서하는 현관 계단 아래에서 손을 맞잡고 서 있었다.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회장이 보내겠다는 차는 정중히 사양했다.대신 도현이 새벽같이 군산으로 내려가 어머니를 모셔 오는 중이었다."긴장했어요?"등 뒤에서 유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칩거를 끝낸 듯, 연한 분홍색 원피스 차림이었다."한정숙 아주머니. 오랜만에 뵙겠네. 김밥 참 맛있었는데."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현관문이 열리고 강 회장이 걸어 나왔다. 짙은 회색 한복 차림이었다.

  • 복수하려고 결혼했는데 남편이 다 알고 있었다.   제25화. 쿠션 하나

    평창동 별채에 도착한 건 밤 11시가 넘어서였다.2층 침실 불을 켜는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침대 한가운데, 쿠션 하나가 그대로 서 있었다. 군산으로 떠나던 날 아침 모습 그대로. 반듯하게, 꼿꼿하게.서하는 그 쿠션을 한참 바라보았다.어젯밤 수선집 2층에는 이게 없었다. 이불 두 채 사이 좁은 틈으로 손을 뻗었고, 도현이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7년 만에 약 없이 잠들었다.커튼 너머에서 들은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네, 장모님. 사랑합니다."……먼저 씻을래요?"도현이 물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높았다."아, 네."서하는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보았다. 귀까지 빨갰다.'바보같이.'이 남자는 서하가 들었다는 걸 모른다. 그러니까 평소처럼 굴어야 했다. 모르는 척.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그런데 그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서하가 씻고 나왔을 때, 도현은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손에 쿠션을 든 채로.서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치우려는 걸까.도현은 쿠션을 잠깐 내려다보더니, 침대 한가운데 다시 반듯하게 세웠다. 아까보다 더 꼿꼿하게. 그리고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렸다."국경 수비, 이상 무."농담처럼 말했지만 서하를 보지 않았다.아, 하고 서하는 깨달았다. 이 남자는 선을 지키려는 거였다. 서하를 위해서. 4조가 아직 유효하다고 말한 건 서하였으니까.— 제 마음까지 얹어서 짐을 더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서하는 입술을 깨물었다."도현 씨, 저 어제……."도현이 갑자기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그리고 눈짓으로 책상 서랍을 가리켰다.만년필. 도청기.서하는 입을 다물었다. 잊고 있었다. 이 방의 모든 말은 차성훈에게, 그리고 강태식에게 들어간다.도현이 책상에서 메모지와 펜을 가져와 서하에게 내밀었다. 서하는 잠깐 망설이다가 적었다.[군산에서, 고마웠어요.]도현이 받아 읽었다. 그 아래에 적었다.[뭐가요?]서하는 펜을 받아 들고 한참

  • 복수하려고 결혼했는데 남편이 다 알고 있었다.   제24화. 커튼 너머

    "자네, 우리 서하 사랑하나?"커튼 너머가 조용해졌다.서하는 수도꼭지에 손을 얹은 채 숨을 죽였다. 물을 틀어야 했다. 듣고 있다는 걸 들키기 전에. 그런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한참 만에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하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처음부터 사랑해서 한 결혼은 아니었습니다, 장모님."재봉틀 옆에서 어머니가 가만히 기다렸다."서로 필요한 게 있어서 한 결혼이었어요. 서하 씨도 그렇게 알고 있고요.""그래서?""그런데 저는 서하 씨를 결혼 전부터 알았습니다. 오래전부터요. 멀리서만."도현이 잠깐 말을 멈췄다."장례식장에서 처음 봤어요. 비를 맞으면서, 누가 준 봉투를 찢어 버리더라고요. 울지도 않고. 그 뒤로 7년 동안 한 번도 가까이 가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어요."서하는 입을 틀어막았다."사랑인지는 몰랐습니다. 갚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같이 살아 보니까……."도현이 작게 웃었다."아침마다 식탁 밑으로 발을 툭 차면 째려보는 게 좋고, 회의실에서 숫자 말할 때 목소리가 좋고, 밤에 잠 못 자고 뒤척이는 소리를 들으면 제가 잠이 안 옵니다.""…….""네, 장모님. 사랑합니다."서하의 눈앞이 흐려졌다."그런데 서하 씨한테는 말 못 합니다.""왜?""계약서에 그러면 안 된다고 써 있어서요.""……계약서?""농담입니다."도현이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 쓸쓸한 웃음이었다."서하 씨는 지금 싸우는 중이에요. 제일 힘든 싸움을요. 제 마음까지 얹어서 짐을 더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장모님, 서하 씨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재봉틀 바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르륵, 드르륵."알았네."어머니의 목소리가 조금 젖어 있었다."대신 강 서방. 그 애 짐이 너무 무거워 보이면, 그때는 말해 줘. 비밀 같은 거 지키지 말고.""……네."서하는 그제야 수도꼭지를 틀었다. 쏴아아. 물소리 속에서, 그녀는 한참 동안 울었다

  • 복수하려고 결혼했는데 남편이 다 알고 있었다.   제23화. 수선집

    밤 10시. 군산, 불 꺼진 시장 골목.골목 끝 작은 가게 하나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유리문에 붙은 빛바랜 글씨.[한 수선]서하는 차에서 내려 그 불빛을 한참 바라보았다. 결혼하고 나서 처음이었다.결혼식에도 엄마를 부르지 못했다. 강태식과 차성훈은 한정숙의 얼굴을 안다. 엄마가 혼주석에 앉는 순간, 한서하가 윤서하라는 게 들통날 테니까.— 엄마 몸도 안 좋은데 무리하지 마. 식은 간단하게 할 거야.그렇게 둘러댔다. 하나뿐인 딸의 결혼식을, 엄마는 인터넷 기사 사진으로 봤다."떨려요?"운전석에서 내린 도현이 물었다.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부린 건 그였다."……엄마한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강진 집안에 시집간다고 했을 때도 전화로만 말했어요. 사랑해서 결혼한다고.""5조는 을이 갑한테만 적용되는 거예요. 장모님은 해당 없어요.""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유리문이 열렸다."서하야?"작은 체구의 여자가 서 있었다. 돋보기안경을 이마에 걸치고, 손목에는 바늘꽂이를 차고 있었다. 머리가 7년 전보다 훨씬 희어져 있었다."엄마."한정숙은 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딸의 어깨 너머로 도현을 보았다.도현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90도로, 오래."처음 뵙겠습니다, 장모님. 강도현입니다. 인사가 너무 늦었습니다."한정숙은 한동안 그를 말없이 보았다. 강태식의 아들. 남편을 무너뜨린 집안의 아들."……들어와요. 밖이 추워."가게 안쪽, 재봉틀 옆에 새 난로 한 대가 빨갛게 돌아가고 있었다."이게 사돈어른이 보내신 거야. 좋지?"어머니가 차를 끓이러 들어간 사이, 도현은 난로 앞에 쪼그려 앉았다. 뒷판, 전선, 받침까지 손끝으로 훑었다. 1분 뒤, 그가 서하를 올려다보고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난로였다.그게 더 소름 끼쳤다. 도청기도, 카메라도 필요 없었다. 언제든 이 가게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 그걸 알려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이었다."김밥 먹을래? 이 시간에 올 줄 알았으면 더 싸 놓을걸."어머니가 쟁

  • 복수하려고 결혼했는데 남편이 다 알고 있었다.   제22화. 붉은 도장

    "은행 업무는 잘 보셨습니까."정명수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질문인지, 확인인지 알 수 없었다.서하는 휴대폰을 귀에서 내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도현이 무언가 외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서하는 통화를 끊지 않은 채 휴대폰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네. 덕분에요.""타시지요. 평창동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걸어갈게요.""을지로에서 평창동까지 말입니까.""실장님 차보다는 안전할 것 같아서요."정명수의 얼굴에 표정이라 부를 만한 게 처음으로 스쳤다. 웃음에 가까웠지만, 웃음은 아니었다.그가 차에서 내렸다. 반듯한 회색 정장, 먼지 한 톨 없는 구두. 서하보다 머리 하나가 컸다."상자 여섯 개."정명수가 말했다."돌려주시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회장님도 그렇게 원하십니다.""못 돌려드려요. 제 거라서요.""강진건설 문서고에서 나온 물건입니다.""아버지가 보낸 팩스예요. 받는 사람이 무시했을 뿐이죠."서하는 한 걸음 다가섰다."결재란에 도장이 찍혀 있더라고요. 붉은색으로. 정명수."주차장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멀리서 차 한 대가 나가는 소리가 울렸다."'협력 업체 직원들 월급날이 모레입니다.' 그 문장 위에 '보류'라고 찍혀 있었어요. 기억하세요?""기억합니다."정명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제가 찍었습니다. 회장님 지시가 아니었습니다. 제 판단이었죠."서하의 손끝이 코트 주머니 속에서 굳었다."……왜요.""그 돈이 나가면 서하건설은 석 달을 더 버텼을 겁니다. 석 달이면 윤 회장님은 다른 은행을 찾았겠죠. 그러면 계획이 틀어집니다."그는 담담했다. 날씨를 말하듯."저는 회장님의 계획이 틀어지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7년 전에도, 지금도."서하는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증오가 치밀어 오를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이 사람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흔들리지도 않을 것이다."그럼 저도 말씀드릴게요, 실장님."서하가 정명수를 올려다보았다."그 상자, 한결은행 금

  • 복수하려고 결혼했는데 남편이 다 알고 있었다.   제21화. 미끼

    "한결은행 대여금고요."서하가 말했다."채권단 주거래 은행이에요. 오늘 아침에 그 은행이 제 유임을 조건으로 걸었고요. 회장님도 거기엔 함부로 손 못 대요."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문제는 저 차죠."블라인드 틈 너머, 검은 세단은 여전히 편의점 앞에 서 있었다.도현은 잠깐 생각하더니 피식 웃었다."오랜만에 한량 노릇 좀 해야겠네."오후 2시. 성수동 빌딩 정문.도현이 상자 두 개를 겹쳐 들고 요란하게 걸어 나왔다. 선글라스에, 셔츠 단추는 세 개나 풀려 있었다. 백 실장이 그 뒤를 따라 상자 네 개를 수레에 싣고 나왔다.상자마다 빨간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폐기."실장님, 트렁크 열어요! 빨리빨리!"도현은 빨간 스포츠카의 트렁크에 상자를 던져 넣고, 휴대폰을 귀에 댄 채 큰 소리로 떠들었다."어, 나야. 지금 간다고. 인천. 배 시간 맞춰야 돼. 응, 그 물건."엔진이 굉음을 냈다. 스포츠카가 튀어 나가듯 출발했다.2초 뒤, 검은 세단 한 대가 조용히 시동을 걸고 그 뒤를 따라붙었다.같은 시각, 빌딩 지하 2층 주차장.서하는 백 실장의 낡은 승합차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뒷좌석에는 상자 여섯 개가 담요에 덮여 있었다. 진짜 상자들이었다.도현의 트렁크에 실린 건 블루하버의 오래된 광고 전단과 파쇄 대기 종이였다. 빨간 테이프는 사무실에 굴러다니던 포장 테이프에 매직으로 '폐기'라고 쓴 것이었다.휴대폰이 울렸다.[미끼 물었어요. 올림픽대로 타는 중. 인천까지 끌고 갈게요.]서하는 짧게 답장했다.[과속하지 마요.][걱정돼요?][3조.][ㅋㅋ]백 실장이 승합차를 출발시켰다. 지하 주차장 뒤편 출구를 빠져나가 골목으로, 골목에서 다시 큰길로.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오후 3시 20분. 을지로, 한결은행 본점.여신본부장 권태준이 지하 금고실 앞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회의에서 안경을 벗던 그 사람이었다."전화로 들었습니다. 대여금고를 쓰시겠다고요."그는 담요에 덮인 상자들을 보았다."뭔지 여쭤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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