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안 오네.”
전 남자친구와 전 절친의 피로연이 시작되기까지 앞으로 십오 분. 나는 예식장 입구에서 휴대폰을 움켜쥐고 있었다. 화면은 새까맸다. 배터리가 다 닳아 버렸다. 예약해 둔 대행 남자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는지조차 더는 확인할 수 없었다. 오늘 나는 겉모습만큼은 빈틈이 없었다. 샴페인 골드빛 드레스. 새벽부터 손질한 머리. 흐트러지지 않은 화장. 구두 때문에 발이 조금 아팠지만, 그 정도는 각오한 일이었다. 그런데 내 옆에 있어야 할 남자만 없었다. 접수대로 향하는 하객들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파도처럼 밀려왔다. 저 무거운 문 너머에는 태오와 유나가 있었다. 혼자 들어가면 비웃음을 살 것이다. 남자친구는 어쨌냐고. 역시 거짓말이었냐고. 역시 아린이는 아직 나를 못 잊었구나, 하고. “최악이야…….” 목소리가 목 안으로 가라앉았다. 도망칠까? 아프다는 핑계를 댈까? 아니, 도망치면 끝이다. 두 사람 앞에서 큰소리쳤던 나까지 전부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목이 조이고 눈앞이 흐려지려던 바로 그때였다. 호텔 기둥 옆에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키가 컸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짙은 남색 정장이 몸에 꼭 맞았다. 차림새부터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무심하게 쓸어 올린 검은 머리. 길고 날렵한 눈매. 흰 셔츠 소매 아래로 보이는 시계는 분명 내 연봉보다 비쌀 터였다. 그저 서 있기만 해도 주변의 공기가 희박해지는 듯했다. 그런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의 입가에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사람이야.’ 평범한 하객이 아니다. 이런 남자가 우연히 여기에 있을 리 없다. 시간당 50만 원짜리, 완벽한 가짜 연인. 그렇게 믿어 버리기에 충분할 만큼 현실감이 없는 남자였다. 나는 곧장 그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구두 굽 소리가 입구에 높이 울렸다. “늦었잖아!”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단단했다. 정장 너머로도 다부진 팔과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남자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한쪽 눈썹을 올리고 나를 내려다봤다.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는 여자를 상대한다기보다는, 예정에 없던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발견한 표정이었다. “미안해.” 생각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였다. 귀가 아니라 가슴께로 내려앉는 목소리. “많이 기다렸지.” “그런 말로 끝날 일이 아니야. 내 인생이 걸렸다고. 연장 요금은 낼 테니까 제대로 해.” “그렇군.” “뭐가 그렇다는 거야?” 남자는 내 손을 봤다. 그러고는 문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 잠깐 뜸을 들였다. “남자친구 역할이면 되나?” “약혼자 역할이야.” 말하고 나서 나도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남자는 미소를 조금 더 짙게 지었을 뿐이었다. “이름은?” “윤아린.” “나는 민준이라고 부르면 돼.” “부르면 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은 그거면 충분하잖아.” 얄미웠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나는 그의 팔에 내 팔을 끼웠다. 그러자 민준의 손이 내 허리에 놓였다. 거칠게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빠져나갈 틈만은 말끔히 사라졌다. 가까웠다. 시트러스와 머스크가 섞인 향이 코끝을 스쳤다. “고개 들어, 아린아.” 민준이 속삭였다. “지러 온 건 아니잖아.” 가슴이 뛰었다. 연기다.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한마디에 다리의 떨림이 멎었다. “……시급 받는 만큼 제대로 일해.” “알고 있어.”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무거운 문을 바라봤다. 이 너머는 전쟁터다. 태오. 유나. 두고 봐.◇
문이 열리는 순간, 시선이 꽂혔다.
샹들리에의 빛. 하객들의 웅성거림. 잔을 든 채 동작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는 수많은 눈. 축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호기심과 동정, 조금은 상스러운 기대. 그것들이 한꺼번에 드레스의 얇은 천을 뚫고 살갗에 와 닿았다. 순간 발이 굳었다. 반사적으로 민준의 팔을 움켜쥐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고급 정장 아래로 느껴지는 단단한 팔이 생명줄 같았다. “괜찮아.”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네가 제일 예뻐.” “일이잖아.” “일이라고 해서 꼭 거짓말인 건 아니지.”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면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다. 나는 달아오른 뺨을 감추듯 허리를 곧게 폈다. 안쪽 신랑 신부 테이블에서 유나의 미소가 굳었다. 태오는 잔을 든 채 내 옆의 남자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입가만이라도 웃는 모양을 만들려다 실패한 얼굴이었다. 이겼다, 싶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가슴 밑바닥에서 어두운 희열이 솟구쳤다. 민준의 에스코트에는 빈틈이 없었다. 내 보폭에 맞춰 걸으며 드레스 자락까지 살폈다. 쏟아지는 시선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를 불청객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한 두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그저 걷는 모습만으로. 건배사가 시작됐다. 나는 고급 프랑스 요리에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 음식이 목으로 넘어갈 리 없었다. 하지만 민준은 달랐다. 나이프와 포크를 다루는 손끝까지 차분했다. 같은 테이블의 지인들에게 “아린이와는 서로 아는 분의 파티에서 만났습니다”라며 그럴듯한 거짓말을 태연히 건넸다. 지나치게 말하지도 않았다. 지나치게 침묵하지도 않았다. 거리는 가까운데 품위가 있었다. 거짓말을 하는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매력적인 걸까. “아린아, 와 줬구나.” 유나가 다가왔다. 그 옆에는 태오도 있었다. 새하얀 웨딩드레스. 행복해 보이는 미소. 하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내 드레스와 머리, 화장, 그리고 민준을 차례로 훑으며 값을 매기고 있었다. “옆에 계신 분이 그 약혼자분이세요?”라운지를 나온 나는 살롱으로 돌아갈 기력조차 없어 그대로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은 창백해서 유령처럼 보였다. 화려한 호텔 라운지에서 생활감이 짙은 지하철로. 그 낙차가 지금 내 처지를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보여 주는 것 같았다.‘……최악.’ 집 문을 열고 좁은 현관에 구두를 벗어 던졌다. 한꺼번에 진흙 같은 피로가 밀려왔다. 나는 무너진 메이크업조차 지우지 않은 채 서늘한 거실 바닥에 엎드렸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건 그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차세린과, 그녀와 대등하게 대화하던 민준. 그 공간에는 내가 끼어들 틈이 단 1밀리미터도 없었다. 샤워를 몇 번이나 해도 지워지지 않은 듯한 그 남자의 향이 아직 피부에 남아 있는 것 같아 속이 울렁거렸다. 대체 뭐야, 저 인간. 렌탈 남자친구인 줄 알았더니 갑자기 나를 고용하겠다고 하고. 그러더니 저렇게 완벽한 여자와 내가 전혀 모르는 얼굴로,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나누고.‘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같은 달콤한 말로 사람을 흔들어 놓고, 결국 나는 이 남자의 게임판 위에 놓인 말 하나일 뿐이잖아. 전부 저 남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뿐이잖아. 분하고 한심해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시야가 흐려지려던 순간이었다.“……너 뭐 하냐. 바닥에서.” 어이없다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날카로운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움찔하며 올려다보자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언니, 윤서현이 쓰레기봉투를 손에 든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언니. 왔어?”“왔어가 아니라, 너 오늘
“――민준 씨, 오랜만이에요.”‘민준 씨?’ 내 외침을 가로막은 것은 차갑고도 묘하게 달콤함을 머금은 목소리였다. 숨이 막힐 만큼 진하고 달콤한 향. 비싼 향수를 썼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들자 숨을 삼킬 만큼 완벽한 여자가 서 있었다. 어제 있는 힘껏 꾸몄던 나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유연한 몸매를 따라 흐르는 고급 실크 소재의 타이트한 수트. 빈틈없는 메이크업. 완벽하게 세련된 커리어우먼풍의 미녀. 그녀는 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민준만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그를 평가하는 듯한 빛과, 어딘가 끈적한 열기가 동시에 어른거렸다.“……차세린 씨. 우연이군요.” 민준의 얼굴에서 나를 향해 있던 웃음이 가면을 벗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공기가 단숨에 팽팽하게 조여 왔다. 라운지에 흐르던 우아한 음악까지 갑자기 멀어진 것 같았다.‘뭐야, 이 분위기…….’“우연일까요. 이 호텔 라운지에 자주 오신다는 건 잘 알고 있었거든요.”“무슨 일이시죠?”“야박하시네요. ……곧 새 드레스 라인을 발표할 예정이에요. 임페리얼 드래곤 호텔과 꼭 제휴할 수 없을까 해서요. 그 상담을 드리러 왔죠.” 여자――차세린은 그렇게 말하며 민준의 맞은편, 그러니까 내 옆자리 의자에 허락도 없이 우아하게 앉았다. 향수 냄새가 다시 짙게 퍼졌다. 곧 내가 끼어들 틈조차 없는, 전문용어가 오가는 긴장된 비즈니스 대화가 시작됐다.“……지난번 공모 건인데요.”“그건
‘……고용된다고?’ 나는 눈앞의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 내가 시간당 50만 원에 고용했다고 생각했던 남자. 나를 스위트룸에서 휘두르고 하룻밤을 함께 보낸 남자. 오늘 아침 내 직장에 찾아와 “약혼자 드레스를 고르러 왔다”고 말하며 나를 비참하게 만든 남자. 그 남자가 지금 나를 ‘약혼자 역할로 고용하고 싶다’고 한다.“……너, 이제 적당히 좀 해.”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는 걸 참으며 그를 노려봤다.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내 상식을 훌쩍 넘어선다.“어제부터 계속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남의 마음도 몸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마음과 몸을 가지고 놀았다고.” 민준은 내 말을 정정하기라도 하듯 되뇌며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목소리에는 죄책감이 한 조각도 없었다. 남은 것은 차가운 계산뿐이었다.“이건 비즈니스 얘기야. 어젯밤 일과는 별개로 생각해. 지금은 계약 조건만 보라는 뜻이야. 너한테도 이득은 있어.”“별개로…… 생각하라고?”‘……최악이야, 이 남자.’ 피가 끓는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 어젯밤의 뜨거운 입맞춤도, 맞닿았던 피부의 감촉도, 우리가 함께 나눴다고 믿었던 짧은 감정도. 이 남자는 그 모든 감정을 하룻밤 일로 접어 두고, 아무렇지 않게 계약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야? 내가 느꼈던 죄책감과 희미한 설렘이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남은 건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조용한 살롱 안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남았다.‘……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남자. 나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그게 무슨 뜻인데? 약혼자 드레스를 고르러 온 거 아니었어? 설마――‘――나를 진심으로 놀리는 거야?’ 어젯밤 그 스위트룸에서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해 놓고, 이번에는 이런 식으로 가지고 놀겠다는 거야? 프로다운 미소를 얼굴에 붙인 채 손끝이 식어 가는 걸 느끼며 굳어 있던 나를 보고, 민준은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을 문득 지웠다. 그는 지금까지의 대화가 전부 장난이었다는 듯, 나에게만 들리도록 귀찮은 투로 중얼거렸다. 어젯밤 귓가에서 들었던 뜨거운 속삭임과는 전혀 다른 차가운 목소리가 신경을 긁었다.“……농담이야. 할 얘기가 있어.”“네……?”“여긴 곤란해. 잠깐 같이 가.” 그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내 팔을 잡았다.“잠깐만요……! 고객님? 저 지금 근무 중인데……!” 뜨거웠다. 어젯밤 나를 가볍게 안아 올리고, 내 뜻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던 그 손.“상관없어.” 나는 호기심과 당혹감이 뒤섞인 후배 직원들의 시선을 등에 받으며, 어제와 똑같이 그에게 억지로 끌려 살롱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잠깐! 놓으라니까! 대체 무슨 생각이야?” 살롱에서 멀지 않은 호텔 라운지 카페. 가장 안쪽, 사람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어젯밤, 나와 하룻밤을 보낸 남자.‘왜 네가 여기에……!’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어올랐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내가 심하게 동요하는 모습을 후배 직원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것이 시야 한쪽에 들어왔다.“팀장님? 무슨 일이세요?”“……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다리가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발뒤꿈치를 바닥에 힘주어 눌렀다. 민준은 나를 보고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 눈에는 어제 침실에서 나를 원하던 열기도, 나를 몰아붙이던 냉혹함도 없었다. 처음 보는 매장 직원을 대하듯 무관심하게, 값을 매기듯 나를 살피는 차가운 시선이었다.‘……그 눈빛은 뭐야.’ 어젯밤 일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아니, 아예 나를 모른다는 것처럼. 나만 그 스위트룸에서의 일과 살갗의 온기, 굴욕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나 혼자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얼굴에 확 피가 몰렸다.“……어서 오세요. 오늘은 어떤 일로 오셨나요?” 목소리가 떨리려는 것을 어금니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참았다. 수석 웨딩 플래너로서의 자존심. 프로로서 흐트러지지 않는 미소. 지금 나를 버티게 하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내 필사적인 미소를 보고서야 민준의 입가에 그 웃음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잔인한 말을 또렷하게 내뱉었다.“아, 약혼자 드레스를 고르러 왔어.”‘……약혼자?’ 숨이 막혔다. 약혼자. 그 말이 날카로운 칼처럼 가슴에 꽂혔다. 아, 그랬구나. 이 남자에게는 진짜 ‘약혼자’가 있었구나. 지난밤의 일은 나를 갖고 논 것뿐이었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진짜 약혼자를 두고 나를…… ‘불장난’ 상대로 삼은 것이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 바보일까. 마음만 흔들린 게 아니었다. 몸도 자존심도 전부 그 남자에게 휘둘렸다. 분노와 절망으로 눈앞이 검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어제 나를 그렇게 흔들어 놓고 하룻밤을 함께 보낸 이 남자가, 오늘은 손님으로 찾아와 자기 약혼자의 드레스를 고르라고 하
멍하니 둘러본 넓은 스위트룸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어젯밤의 향이 희미하게 공기 속에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숨이 막혔다. 시트에 남았을 그의 체온은 이미 오래전에 식어 있었다. 지난밤의 모든 일이 술기운이 보여 준 나쁜 꿈 같았다. 하지만 침대 옆 테이블에는, 그 꿈이 현실이었다는 증거처럼 카드 키 한 장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오늘 보수는 너로 하지.’ 그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차갑게 식은 어젯밤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되살아났다.‘……보수.’ 그 말의 의미를 곱씹자, 이번에는 굴욕으로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 바보일까. 나는 그 남자를 시간당 50만 원짜리 복수의 도구로 고용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니 나만 남아 있었다. 그가 거둬들였던 ‘보수’라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밤에 나눈 말과 손길에 나 혼자 의미를 둔 걸까. 그에게도 같은 밤이었기를 바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나는 도망치듯 침대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벗어 놓은 어젯밤의 드레스를 거칠게 집었다. 구겨진 실크가 지금의 나처럼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때 침대 발치에 어젯밤에는 없던 새 쇼핑백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에는 나도 아는 명품 브랜드의 원피스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짤막한 메모.‘급한 일이 생겨 먼저 나간다. 이건 네게 주는 선물이야.’ 선물. 마치 일한 대가로 주는 ‘수당’처럼. 구겨진 드레스 대신 입으라는 건가? 아니면 입막음 값? 이런 거 필요 없어. 하지만 저렇게 흐트러진 드레스를 입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굴욕감에 떨리는 손으로 원피스를 입었다. 놀랄 만큼 몸에 꼭 맞았다. 그것이 또 그의 익숙한 태도를 떠올리게 해서, 나는 더 비참해졌다. 다시는 저 남자를 만나지 않을 거야. 혼란 속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아침 햇살이 눈부신 임페리얼 드래곤 호텔을 죄인처럼 몰래 빠져나왔다.◇ 도망치듯 집에 돌아와 욕실로 뛰어들었다. 수도꼭지를 끝까지 틀고 머리부터 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