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그녀는 이어서, 추운 밤인데 왜 그냥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냐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은 자연스럽게 그의 발목으로 향했다.“많이 아파요?”
유봄은 그가 사업차 미국에 와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지내며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만나기 위해 시간을 내고, 심지어 자신을 살리기 위해 발목까지 다친 것 같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자신 때문에 그가 불편을 겪고 있다고 여긴 그녀는, 단순한 걱정을 넘어 그를 챙겨야 한다는 책임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사실 강민재는 그녀보다도 미국이 익숙했고, 오히려 한국보다 인맥이 더 많은 곳도 미국이었다. 그는 웨스트브리지 대학교 출신으로,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한 비즈니스 네트워크와 다양한 인맥을 구축해 온 인물이었다. 하지만 강민재는 굳이 그런 이력이나 배경을 드러내는 것보다, 지금은 그녀의 마음을 얻고 관심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굳이 설명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그녀의 걱정과 시선에 집중했다. 강민재는 그녀의 근심 어린 시선을 마주한 채, 속으로는 기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태연한 표정으로 한숨을 섞어 말을 꺼냈다.“발목이 갑자기 더 아파져서… 그쪽 생각밖에 안 나더라고요.”
겉으로는 힘겨운 듯 담담히 말했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연기가 꽤 그럴듯하다고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다.
유봄은 그 말을 듣자마자 망설임 없이 무릎을 굽혔다. 그의 발목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며 상태를 확인했지만, 육안으로 보기에는 크게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를 통증을 덜어주기 위해, 그녀는 숙소에서 급하게 챙겨온 파스를 꺼내 그의 발목에 조심스럽게 붙여주었다. 손길은 서툴지 않게, 하지만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유봄은 파스를 붙여준 뒤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말했다.“내일 시간 되면 꼭 병원에 오세요.”
그때, 조용한 밤 공기 속에서 갑자기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울렸다.
강민재의 배에서 난 소리였다. 그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점심도 거르고, 바쁜 일정까지 소화한 채 곧장 달려온 상태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유봄은 그가 자신을 기다리느라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얼굴로 향했고, 걱정과 미안함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유봄은 그의 배에서 난 소리를 떠올리며, 그가 민망함을 느끼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저… 저도 아직 저녁을 못 먹었는데, 같이 드시겠어요?”
상대의 상황을 배려한 듯한 그 제안에, 강민재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들어선 The Sapphire House 의 메뉴는 늦은 밤에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캐주얼한 다이닝과 바 메뉴가 함께 제공되어, 식사와 가벼운 안주를 동시에 고를 수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유봄은 메뉴판을 넘기며 자연스럽게 설명하듯 중얼거렸다.“여기… 샌드위치랑 파스타, 그리고 간단한 플레이트 메뉴들이 있어요.”
메뉴에는 이런 음식들이 있었다:
크리스피 치킨 샌드위치: 바삭한 치킨 패티에 신선한 채소와 소스를 더한 인기 메뉴 로스트 비프 샌드위치: 부드러운 고기와 진한 풍미가 특징 마카로니 앤 치즈: 크리미하고 고소한 미국식 대표 메뉴 그릴드 치킨 플레이트: 가벼운 단백질 중심 식사 프라이드 감자 / 트러플 프라이: 사이드로 곁들이기 좋은 메뉴 간단한 샐러드류: 신선한 채소 위주의 가벼운 식사 강민재는 메뉴를 훑어보다가,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이 시간에는… 이런 메뉴면 충분하네요.”
유봄도 고개를 끄덕이며, 둘은 자연스럽게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늦은 밤의 따뜻한 조명 아래, 간단한 음식들이 오히려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을 조금씩 녹여가고 있었다. 강민재는 유봄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하루를 살아가는지, 그날의 파티에는 왜 있었는지 궁금한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그녀를 알아갈 시간은 충분했고, 지금은 그저 이렇게 함께 있는 순간을 차분히 쌓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강민재는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병원 일… 많이 힘들지 않아요? 그리고 어느 과에서 일하세요?”
궁금함을 담은 그의 질문은 조심스럽고도 진심 어린 톤이었다.
그녀를 더 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유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네, 일반외과 전공이라 수술 케이스가 많은 편이에요.”
그녀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덧붙였다.
“긴장감이 있지만, 수술실에 들어가면 오히려 머리가 맑아져요. 손끝에 집중하게 되고… 환자 상태를 보면서 직접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저한테는 큰 보람이에요.”
말을 하는 동안, 그녀의 눈빛에는 일에 대한 확신과 애정이 자연스럽게 묻어나고 있었다.
김지숙은 유재원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고 싶다고 한다. 유재원은 김지숙을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았지만 정리는 해야 할 것 같아 약속 장소로 나간다.카페 구석 자리.유재원은 먼저 와 앉아 있었다.문이 열리고 김지숙이 들어오는 순간, 공기가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김지숙은 그를 보자마자 눈가가 붉어졌다.의자에 앉자마자 손을 모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여보… 제가 잘못했어요.저는… 정말로 지원이가 당신 딸이라고 생각했어요. 정말이에요. 믿어줘요.”유재원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이제는”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당신이 어떤 말을 해도 난 믿을 수가 없어.”김지숙의 어깨가 움찔했다.“당신의 그 뻔뻔한 거짓말로… 봄이 엄마와 봄이는 불행하게 살았어.”그의 눈에 서늘한 분노가 번졌다.“당신의 행복 하나 지키겠다고 다른 사람 인생을 통째로 무너뜨렸어.”“그게 아니에요”“아니긴 뭐가 아니야.”그가 말을 끊었다.“난 당신을 용서 못 해.”한 단어, 한 단어가 칼처럼 떨어졌다.“당신 때문에 난…봄이 엄마나 봄이에게 평생을 사죄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됐어.”김지숙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그래도… 그래도 우린 부부였잖아요.당신, 나 사랑한 거 아니었어요? 겨우 잘못 한번 한거잖아요”유재원이 허탈하게 웃었다.차가 식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유봄은 차트를 넘기며 VIP 병동 복도를 걸었다.며칠 전 인공로봇수술을 집도했던 환자, 한국대학교 원로교수 안기철의 병실 앞에 멈춰 섰다.가볍게 노크를 하고 들어서자 창가에 앉아 있던 노교수가 고개를 들었다.“교수님, 오늘은 좀 어떠세요?”안기철은 주름 깊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자네가 수술해줬는데 괜찮지 않을 수가 있나?덕분에 통증도 많이 줄었네.”“회복 경과 아주 좋으세요. 수술 부위도 깨끗하고요.”그는 한참 유봄을 바라보더니 문득 눈을 반짝였다.“그런데 말이야, 아직 결혼 전이면… 우리 아들 한 번 만나볼 생각 없나?”뜻밖의 말에 유봄이 웃음을 터뜨렸다.“교수님 아드님이면… 정형외과 안영찬 교수님 말씀이세요?”“그래, 그래! 그 녀석도 자네처럼 공부만 해서 아직 여자가 없어.집에 오면 연구 이야기밖에 안 한다니까.”유봄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안영찬 교수님 여자들한테 엄청 인기 많으신데요? 그럴 리가요. 다시 알아보세요. 분명 있으실 거예요.”“없다니까. 내가 아비인데 모르겠나.”“저한테까지 기회가 안 올걸요.”농담처럼 말하자 안기철의 병실에 부드러운 웃음이 번졌다.유봄은 차트를 덮으며 말했다.“회복 속도 보니까 이틀 뒤엔 퇴원하셔도 될 것 같아요.식사 잘하시고, 조금씩 걷는 운동도 하세요.”“알겠네, 우리 주치의 선생.”그는 흐뭇한 눈으로 유봄을 바라봤다.유봄은 정중히 고개
호텔방은 지나치게 조용했다.조금 전까지 살던 집에서 쫓겨나듯 나왔다는 사실이 현실감 없이 공기 속에 떠 있었다.캐리어는 대충 벌려져 있고 옷은 반쯤 쏟아진 채였다.김지숙은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창가에 서 있었다.“이게 다 강철수 그 인간 때문이야.그 인간만 아니었어도”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내가 가만 안 둬.”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유지원은 그 말을 듣다가 고개를 들었다.눈은 이미 퉁퉁 부어 있었다.“…왜 그랬어.”김지숙이 돌아봤다.“뭐가.”“왜 친아빠 버리고 그 집으로 가서 내가 친딸이라고 거짓말했어.”목소리가 갈라졌다.“이게 뭐야, 지금.다 끝났잖아.”김지숙의 얼굴이 굳었다.“내가 누구 때문에 그랬는데?”“……”“다 너 때문이야.네가 잘됐으면, 네가 똑바로 했으면 병원에서 쫓겨났겠어?”그 말은 비수처럼 꽂혔다.유지원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의사도 아니고, 집도 없고, 아버지도 사라졌고 자신이 서 있던 자리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느낌이었다.김지숙은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집어 들었다.“일단 나가서 밥부터 먹자.이러고 있어봐야 달라지는 거 없어.”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엄마가 그동안 챙겨둔 돈이 있어.조그만 아파트 하나는 살 수 있어.다시 시작하면 돼.”
전화가 끊기고 방 안은 조용해졌다.수술 케이스가 펼쳐진 책상 위로 스탠드 불빛만 고요히 내려앉아 있었다.유봄은 한동안 휴대폰을 쥔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할아버지의 떨리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우리 봄이 얼마나 외로웠을꼬…그 한마디가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렸다.엄마가 떠난 날 이후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거실에서는 늘 웃음소리가 들렸다.김지숙과 유지원, 그리고 아버지 유재원의 웃음.그 웃음은 자신을 향한 적이 없었다.유봄은 조용히 방문을 조금 열고 그 모습을 훔쳐보곤 했다.소파에 나란히 앉아 과일을 먹으며 웃던 세 사람.아버지는 유지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그 웃음은 예전엔 자신의 것이었다.그걸 깨닫는 순간마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아무도 모르게 다시 방문을 닫고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울음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입술을 깨물고 베개를 끌어안고 숨죽여 울던 밤들.“아빠…”불러도 오지 않는 이름을 속으로만 수십 번 되뇌었다.그 어린아이는 슬프다고 말하는 법도 몰랐다.더 미원할까 봐,혹은 더 싫어질까 봐.그 시절의 공기가 지금 이 방 안으로 스며든 것처럼 가슴이 먹먹해졌다.눈물이 소리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유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아파트 거실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자 밤의 한강이 보였다.잔잔한 물 위에 도시의 불빛이 길게 흔들리고 있었다.저 물은 저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 흐르는데 자신의 시간은 그날 이후로 한동안 멈춰 있었던 것 같았다.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한 번,그리고 또 한 번.“괜찮아&he
서재는 적막했다.불도 켜지 않은 채, 유재원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손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어린 유봄이 그의 넥타이를 붙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아직 앞니가 다 나지 않은 채, 아빠를 세상 전부처럼 바라보던 눈.그 눈을, 그는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퇴근하면 현관까지 달려 나오던 작은 발소리.“아빠!” 하고 매달리며 하루 있었던 일을 숨도 안 쉬고 떠들던 목소리.그때 옆에서 웃으며 말하던 여자.최진희.수술복을 입고 나란히 서서 환자 차트를 들여다보던 아내.어려운 케이스를 두고 밤늦도록 의논하던 동료.수술이 성공하면 누구보다 먼저 그의 어깨를 안아주며 “수고했어요” 하고 웃어주던 사람.그 여자가, 어느 날 그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그 여자… 어떻게 할 거예요.”김지숙을 만나고 돌아온 날이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리고 최진희는 끝내 말했다.“당신이라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 말은 원망이 아니었다.체념이었다.자신을 붙잡지 않는, 그저 남편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지막 배려였다.그런데 그는 그 배려를 짓밟고 돌아섰다.김지숙의 말만 믿고.눈물과 연기를 진심으로 착각하고.자신의 딸도 아니었던 아이를 위해 자기 피로 태어난 딸을 밀어냈다.사진 속 유봄이 웃고 있었다.하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 아이는 웃지 않았다.조용해졌고, 묻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다.“아버지에겐… 아무 기대도 없어요.”차갑게 말하던 딸의 목소리가 서재 안을 가득 채웠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유재원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현관에 서 있던 김지숙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어요? 지원이 일은”“앉아.”짧고 낮은 말.김지숙은 순간 심장이 철렁했지만, 혹시 유지원에게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를 안고 소파에 앉았다.유재원은 말없이 서류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당신… 나한테 속인 거 없어?”김지숙의 눈이 흔들렸다가 이내 표정을 고쳤다.“내가 왜 속여요? 무슨 말이에요.”유재원은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 그녀 앞에 밀어놓았다.유전자 검사 결과지.김지숙의 손이 떨렸다.한 줄 한 줄 내려가던 시선이 ‘불일치’라는 단어에서 멈췄다.“이, 이게 뭐예요…? 조작이잖아요. 이거 강철수 그 인간이 준 거죠? 그 사람 말 믿지 말아요!”“내가 했어.”차갑게 잘린 말.유재원은 손가락으로 결과지의 수치를 짚었다.“여기. 0. 전부 0이야.”그의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당신이 인간이야?”김지숙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아니야… 이건 뭔가 잘못된 거예요…”“당신 행복하려고 몇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 거야!”유재원의 목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당신 때문에 내가… 내가…”말을 잇지 못했다.그동안 믿었던 세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