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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مؤلف: 정대천
이도현이 싸늘한 기운을 뿜으며 후원의 사합채로 향하였을 때, 마당엔 인적이 없었다. 그는 서릿발 같은 기운으로 문을 걷어찼다.

애초에 그는 신수빈이 그 늙은이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라 여겼다. 이번에 그녀를 구하는 것은 첫날밤 자신의 죄를 덜어주는 셈이라 여겼고 이후로는 더 이상 연을 맺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

하지만 문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온통 피로 물든 장막과 흐트러진 옷차림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칼로 얼굴이 가려진 채 손에 비녀를 쥔 쥐고 쓰러진 마상서의 목을 반복해서 찌르고 있었다. 침상은 물론, 주위 장막까지 핏물이 튀어 있었고 마상서는 이미 숨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계속 찔러댔다.

그 모습을 본 이도현은 불현듯 그날 궁중 편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찔한 눈매와 달콤한 말투로 자신을 유혹하던 그녀 겉으로는 요염한 첩실의 외양이었으나 그 모든 것이 탈이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눈빛에 독이 서린 그녀야말로 진짜였다.

그녀가 혼례 첫날 밤에도 깨어 있었다면 아마 그날의 자신 역시 이렇게 찔러 죽였으리라.

서방에게 물건처럼 취급받고 타인에게 내쳐진 여자. 그런 여인을 보며 이도현은 처음으로 경외에 가까운 감정을 품었다.

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힘껏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아래로 시선을 떨구며 단호히 말했다.

"이미 죽었다."

신수빈은 자신만의 광기에 빠져 있었는지 그의 말에도 멍한 눈으로 허공을 헤맸다. 하지만 점차 흐릿하던 시야가 또렷해지며 그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철갑을 입은 강한 남자의 눈빛이 어지러웠고 가벼운 조소와 함께 억누른 감정이 엿보였다.

신수빈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피범벅이 된 얼굴로 꽃처럼 환하게.

"이 자는 죽었는데 왕야는 어찌 아직 살아 있는지요."

그 말에 이도현의 눈빛이 깊어졌으나 이내 감정을 누른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비로소 안도했다. 피는 모두 마상서의 것이었다. 그 사실에 이상하게도 마음 한 구석이 놓였으나 그 이유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대담하구나."

낮고 쉰 음성이 가볍게 울렸지만 그 안에는 놀람과 찬탄이 묻어 있었다.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문턱에 이르자 그는 멈춰 서며 말했다.

"내일 온 경성에 소문이 퍼지는 걸 원치 않으면 내 품에 얼굴을 묻어라."

신수빈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빛은 장난스럽기도 하고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려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소의 무표정한 장군으로 돌아가 있었다.

신수빈은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몸을 맡겼다.

그의 갑옷은 차디찼고 그녀의 달아오른 몸에는 오히려 시원한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무심결에 그의 등과 허리를 붙잡았고 그 차가움에 더없이 안정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그녀를 안은 그가 순간적으로 온몸을 굳히며 무심결에 숨을 삼켰다는 것을. 은은히 흐드러진 그녀의 향기와 귓가에 드리운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그에게 이성을 허무는 자극이었다.

그가 마당에 이르렀을 때 윤서원이 뒷짐에 묶인 채 끌려나오고 있었다.

"데려가라."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마가를 나섰고 뒤따르던 병사들 또한 모두 철수하였다.

부장만이 감히 왕야의 품에 안긴 여인을 힐끗 바라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온몸이 피투성이라 보기에도 섬찟하였다.

‘대체 누구이기에… 왕야께서 이렇게까지 마가에 쳐들어와 사람을 구하시다니?’

그러다 이도현이 곁눈질을 주자 부장은 그제야 정신이 들어 서둘러 시선을 거두고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말을 타고 돌아가는 길에 이도현은 신수빈의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두 눈이 점차 풀려갔고 마치 그날 밤처럼 그의 품에 안긴 채 몸을 자꾸만 뒤척이며 손이 점점 버릇없이 굴기 시작하였다.

이도현은 그녀가 아직 약기운에 취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역시 피붙은 사내였기에 그녀의 그리움 섞인 손길에 쉽게 버텨낼 수가 없었다.

그는 한 손으로 말고삐를 잡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쥐어 품에 가둬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아마도 속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그녀는 마치 새끼 고양이처럼 훌쩍이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는 실오라기처럼 귓가를 맴돌며 그의 마음을 휘저었고 결국 그는 속타는 마음을 억누르며 말에 박차를 가해 빠르게 섭정왕 저택으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곧장 태의를 부르라 명하고 다시금 일러두었다.

"반드시 여의를 데리고 오라."

이 약은 해독법이야 분명하니 그저 하룻밤 같이 누우면 그만이었다. 신혼 첫날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태기가 있었으니 만일 그렇게 되면 몸도 해치고 태중의 아이는 기필코 지켜내지 못할 터였다.

그 아이가 살든 죽든 상관은 없으나 자신의 침상에서 죽는다면 그건 실로 불길한 일이었다.

그는 그녀를 안고 내실로 들어가 그녀의 피 묻은 옷가지를 단숨에 찢어내어 한쪽으로 던져버렸다.

그러곤 가늘고 창백한 육체를 대강 살펴보다가 고개를 돌려 외쳤다.

"내복, 아씨의 옷가지를 들고 오라."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옷을 들고 들어와 침상 머리맡에 올려두었다.

그녀는 곁눈질로 침상 위를 바라보았고 그곳에는 신수빈이 왕야의 몸을 감싸안고 있었다. 숨결은 가늘고도 뜨거웠으며 금세 흐느낌 섞인 울음이 흘러나왔다.

시녀는 얼굴을 붉히고는 황급히 물러났다.

이도현은 평생 여인 옷을 입혀본 적이 없어 옷을 들고도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하필 신수빈이 마치 물뱀처럼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는 관자놀이를 씰룩이며 이를 악물었다. 다시금 그녀의 두 손목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턱을 움켜잡은 채 그 몽롱한 눈을 들여다보았다.

"신수빈, 난 군자가 아니다. 이리 덤벼들면 네 뱃속 그 피덩이 살리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마."

그의 눈빛이 냉랭하게 얼어붙었고 아이라는 말에 그녀는 겨우 정신을 조금 되찾은 듯하였다. 신수빈은 입술을 꽉 깨물어 피가 맺히도록 참으며 고통을 억눌렀다.

이도현은 그녀의 턱을 비틀어 억지로 눈을 마주치게 하였다.

"한 마디만 해라. 내 오늘, 너 하나 위해 ‘면수’ 노릇도 기꺼이 하마. 이리 몸을 망가뜨릴 필요는 없지 않느냐."

신수빈은 알았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그녀는 맹세했었다. 윤연우를 지키겠노라고.

신수빈은 간신히 입을 열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절… 묶어주십시오."

그 말투는 유려하게 흘러나왔고 이도현의 귀에는 한 덩이 불덩이처럼 들려왔다.

"윤서원이 너를 이리 능멸했건만 그 아이는 아직도 그토록 소중하단 말이냐?"

신수빈은 스스로의 이성이 점점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다. 그저 절박하고 절망스러운 눈으로 이도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제발…"

그녀는 태화전 편전에 끌려가 수치를 당할 때도, 어젯밤 욕보일 때도, 단 한 마디 부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토록 간절하게 그를 향해 애원하고 있었다.

이도현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주변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 정적이 흘렀고, 한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천한 계집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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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81화

    진하빈은 편지를 다 읽자마자 바로 촛대 위로 가져갔다. 불길이 천천히 종이를 집어삼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호위가 몰래 쥐여 준 작은 병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손안에서 굴리듯 바라보다가 조용히 품에 넣고 침전으로 돌아갔다.요 며칠 태후의 기면 증세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장 가가 죄를 입은 일로 마음고생이 깊어져 기력이 쇠한 것이라 여겼지만, 어느덧 두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는데도 태후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잠에 빠져 있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질 뿐이었다.태의가 다녀가도 뚜렷한 병증을 짚어내지 못했다. 그저 궁녀들에게 태후를 자주 뜰로 모시고 나가 바람을 쐬게 하라는 말만 남겼지만, 태후는 몇 걸음 걷지도 못한 채 금세 피로에 지쳐 버리곤 했다.진하빈은 오늘에서야 알았다. 태후는 병든 것이 아니라 독에 중독된 것이었다. 당장 목숨을 앗아가지는 않지만, 사람의 정신과 기력을 조금씩 갉아먹고 시간이 흐를수록 몸을 쇠약하게 만들어 결국 돌이킬 수 없게 무너뜨리는 독이었다.그것이 이도현의 수단이라는 생각에, 진하빈은 온몸이 서늘해졌다. 태후는 한때 그가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그런데도 신수빈과 얽힌 일 속에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버려졌다. 그 사실만으로도 남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박정하고 변덕스러운지 알 수 있었다.신 씨는 자신보다 훨씬 젊고 아름다웠으며, 남자의 비위를 맞추는 데도 능숙했다. 게다가 수완까지 뛰어났다. 반면 자신은 측비라는 신분을 얻었지만, 결국 깊은 궁 안에 갇혀 점점 버려져 가는 태후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앞날은 캄캄하기만 했다.진하빈은 그 사람이 해 두었던 안배를 떠올리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제는 그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비로소 살아날 길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그때 황 상궁이 다시 약을 들고 와 태후에게 올리려 했다. 진하빈은 곧장 다가가 약그릇을 빼앗아 들었다.“황 상궁, 이 약은 더 이상 태후 마마께 드리면 안 되네.”황 상궁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80화

    “이 작은 녀석, 네 어미랑 똑같구나. 어리광 부리고 애교 떠는 데에 아주 능숙해. 이 집에서 본왕이 제일 높은 사람인 걸 벌써 알아보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냐?”아이가 그 말을 알아들을 리는 없었다. 다만 누군가 말을 걸어주는 게 좋은지 입을 벌린 채 방긋방긋 웃을 뿐이었다.이도현은 아이를 감싸고 있던 작은 이불을 풀어 침상 안쪽에 눕히고, 겉포를 벗은 뒤 다시 침상에 몸을 기댔다.“네 어미가 없으니 본왕은 또 죽도록 보고 싶구나. 오늘은 특별히 네 작은 녀석에게 양보해 주마.”팔다리가 자유로워진 아이는 신이 난 듯 팔과 다리를 마구 버둥거렸다. 그러다 이따금 까르르 웃음소리까지 터뜨렸다.이도현은 몸을 옆으로 돌린 채 한참 동안 아이를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윤서원 같은 인간이 대체 무슨 복이 있어 이런 사랑스러운 아이를 얻었단 말인가.괜히 심술이 난 이도현은 아이의 통통한 턱을 손으로 받쳐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아버지라 불러 보거라.”물론 두 달 남짓 된 아기가 아버지라고 부를 리는 없었다.아이는 그저 까르르 웃으며 그의 손을 붙잡고 놀았다. 마치 그가 장난을 걸어온다고 생각하는 듯했다.이도현은 코웃음을 두어 번 흘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그래 봤자 무슨 소용이냐. 나중엔 어차피 본왕의 자식이 될 텐데, 윤 씨 성을 가진 그놈과 무슨 상관이라고.”그 말을 하고 나자, 이도현은 문득 낮에 신수빈을 두 번이나 품었던 일이 떠올랐다.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던 순간들, 두 사람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닿아 있었다.혹시 그녀가 아이를 갖게 되지는 않을까.이도현은 물론 신수빈이 자신의 아이를 가져주길 바랐다.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몸을 일으켜 밖을 향해 불렀다.“장풍.”장풍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침상 안쪽에 누운 어린 공자를 보고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낮에는 아이 어미를 끌어안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밤에는 아이까지 품고 자려는 모양이었다.“왕야, 분부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79화

    이도현은 왕부로 돌아온 뒤에야 공기가 지나치게 싸늘하다는 걸 느꼈다. 오후 내내 감돌던 따뜻하고 다정한 기운은 이미 온데간데 사라진 뒤였다.그는 침상에 누운 채 오후의 일을 곱씹었다. 눈만 감으면 떨리는 목소리로 흐느끼던 신수빈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 기억은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들 만큼 아찔했다.결국 이도현은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지난 반년 넘게 홀로 잠든 날이 훨씬 많았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 걸까. 분명 오후에 바라던 바를 이루었건만, 지금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그녀를 떨쳐낼 수 없었다.심장이 불길에 타오르는 듯 답답했다. 그는 결국 침상에서 내려와 그녀를 찾아가려 했지만, 문 앞까지 갔다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신 가는 윤 가와 달랐다. 신씨 부인과 신 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에 대한 반감만 더 깊어질 게 분명했다.그는 가슴속 불길이 오후부터 그녀에게 붙잡힌 채 좀처럼 꺼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린 듯,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유모와 청하는 방 안에서 어린 공자를 안고 놀아주고 있었다. 아이는 밤낮이 바뀐 탓인지, 지금 한창 기운이 넘치는 참이었다.이도현이 들어오자 유모와 청하는 뜻밖이라는 듯 깜짝 놀랐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예를 올렸다.어린 공자가 왕부에 머문 뒤로, 왕야가 이곳에 직접 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많아야 청하나 유모를 앞채로 불러 아이 상태를 물어보는 정도였다.이도현은 천천히 다가와 유모 품에 안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아이는 잘 자라고 있었다. 산후 기간이 지나고 나서는 하루가 다르게 살이 올랐고, 통통한 작은 얼굴에는 태어났을 때의 허약한 기색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무엇보다 아이는 신수빈을 꼭 닮아 있었다. 사내아이인데도 어딘가 고운 분위기가 어려 있었고, 벌써부터 장차 어떤 풍채로 자라날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이도현은 손을 뻗어 아이를 안아 들었다.평소 아이를 자주 돌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작은 녀석은 낯을 가리지 않았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78화

    신수빈은 비록 밖에 있을 때는 늘 온몸에 피로를 짊어진 채 살아갔지만, 가족들 앞에 서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마음껏 갑옷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그녀는 여전히 정 씨의 팔을 끌어안은 채 말했다.“형수님, 오늘은 형수님이랑 같이 자고 싶어요.”정 씨가 신 가에 시집온 지도 어느덧 십 년이었다. 그녀가 막 시집왔을 무렵, 신수빈은 아직 어린아이였고 정 씨는 늘 그녀를 데리고 놀아주었다. 밤마다 곁에 눕혀 재우던 날도 많았으니, 두 사람 사이는 친자매나 다름없었다.정 씨는 아직도 어린 시절처럼 자신을 따르는 신수빈을 보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짐짓 놀리듯 말했다.“이제 애 엄마가 다 되었는데도 어릴 때랑 똑같구나. 얼른 씻고 오거라. 내가 네 오라버니께 말씀드리고 오마.”신수빈은 얌전히 대답하고 방으로 들어갔다.그녀가 씻고 나오자, 정 씨는 이미 자기 처소에서 목욕을 마친 뒤 침의로 갈아입고 와 있었다.신수빈은 약까지 먹은 뒤 정 씨와 발끝을 맞댄 채 한 침상에 누웠다.평소 옷을 입고 있을 때는 목덜미에 남은 붉은 자국 몇 개 정도만 보였지만, 얇은 침의 차림으로 옆에 돌아누우니 옷깃 사이로 드러난 가슴 언저리의 흔적들까지 숨길 수 없었다.정 씨는 그 자국들을 보고 속으로 절로 혀를 찼다.역시 무장 출신 사내들은 거친 법이었다. 섭정왕 역시 애초에 여인을 살살 다룰 성정은 아닌 듯했다.신수빈은 몹시 피곤해 보였지만, 정 씨에게는 떠나기 전 꼭 해주고 싶은 말들이 있었다. 이번에 호국사로 들어가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호국사는 황실 사찰이었다. 섭정왕이라 한들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빈아, 나는 지금 아들만 셋에 딸까지 하나 있지 않느냐. 네 오라버니가 더는 내가 출산으로 고생하는 걸 원치 않아서, 다섯째 동생에게 부탁해 약왕곡에서 피임환을 받아오게 했단다. 매달 월경이 끝난 뒤 한 알씩 먹으면 몸도 상하지 않고 아이도 생기지 않아. 내일 떠날 때 한 상자 챙겨주마.”신수빈은 오늘 내내 바로 그 일을 생각하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77화

    말로는 성의가 없다고 타박했지만, 이도현은 결국 그녀를 놓아주었다.“본왕은 내려가지 않겠다. 훗날 정식으로 혼인을 청하게 되면, 그때 당당히 신 가의 문을 두드리지.”신수빈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그를 흘겨보았다. 그래도 스스로 지금 처지가 결코 떳떳하지 않다는 것쯤은 아는 모양이었다.그녀는 치맛자락을 들고 마차에서 내렸다. 두 번이나 쉬지 않고 이어진 일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휘청일 뻔했지만, 다행히 곁에 있던 은보가 단단히 부축해 주었다.“오라버니, 형수님.”신수빈이 조용히 그들을 불렀다. 자신이 오후에 돌아온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이미 다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신병문은 그저 마차를 한 번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이도현 역시 모습을 드러내기 곤란했고, 그들 또한 굳이 앞으로 나가 인사를 청할 필요는 없었다.신병문은 몸을 돌리며 말했다.“밤공기가 차다. 어서 들어가거라.”신수빈은 오라버니와 형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다가, 그제야 자신이 꽤 허기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 씨는 사람을 시켜 음식을 준비하게 한 뒤, 먼저 그녀를 데리고 신씨 부인의 처소로 향했다.신씨 부인은 오후 내내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야 돌아온 모습을 보자마자 못마땅한 얼굴로 눈을 흘겼다.“이제야 돌아올 생각이 들더냐!”신수빈은 어머니가 늘 엄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자신과 남매에게만큼은 누구보다 너그럽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신씨 부인 곁에 기대어 응석 섞인 목소리로 불렀다.“어머니.”신씨 부인은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가볍게 한 대 치며 성을 냈다.“그자는 정말 비열하고 뻔뻔하기 짝이 없구나! 아이를 데려가 우리를 협박하다니,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본래 신씨 부인은 딸이 화이한 뒤로는 그 남자를 다시는 집안에 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체면도 모른 채 억지로 데려가고 싶다면 어디 한 번 해보라지, 하는 마음이었다.그런데 그는 하필 아이를 데려가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76화

    신수빈은 손끝 하나 움직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지만, 가늘게 떨리는 손을 들어 이도현의 등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귓가에는 여전히 쉰 숨을 섞어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그의 목소리가 맴돌았고, 목덜미에는 뜨거운 숨결이 무겁게 내려앉았다.그녀는 천장 위로 흔들리는 술 장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이 왜 정과 욕정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는지. 그의 손길과 움직임에 휩쓸리던 순간, 그녀는 거의 자기 자신조차 아니게 되어 버렸으니까.그는 마치 그녀를 부서뜨렸다가 다시 빚어내려는 사람 같았다.신수빈은 목덜미에 닿는 축축하고 간질이는 감각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도 이도현은 다시 열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상태였기에, 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왕야, 이제 돌아가야 해요…”이도현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아직 급하지 않다.”“해시가 되면 통행이 금지된단 말이에요!”신수빈이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 하자, 이도현은 한 손으로 그녀의 두 손목을 붙잡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입술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눈가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어려 있었다.“아직 이르다. 한 시진도 넘게 남았으니 충분하지.”시작하기 전에는 분명 단 한 번뿐이라고 약속해 놓고, 이제 와서는 완전히 잊어버린 모양이었다.신수빈은 화가 치밀어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그런데도 이도현은 오히려 더 즐거워하는 듯했다.“왕야는 정말 약속을 안 지키… 읍…”입술이 막혀 버리자, 원망 섞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그렇게 등불이 성안을 밝히고 밤빛이 짙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모든 것이 끝났다.이도현은 그녀가 내일 호국사로 떠나면 한동안 장안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가족들과 나눌 이야기도 있을 테니, 더 붙잡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눌렀다.결국 해시가 되기 전, 그는 직접 신수빈을 신 가로 데려다 주었다.마차 안에서 신수빈은 꾸벅꾸벅 졸았다. 온몸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이도현은 품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37화

    이도현은 그렇게 몇 번이고 되뇌더니 가볍게 웃으며 읊조렸다.“아리따운 여인과 함께 걷고 있는데, 얼굴이 무궁화처럼 곱도다. 훨훨 날 듯 걷는 자태에 옥패 소리가 고요히 울리네. 아름다운 맹강이여 그 고운 수빈이 잊히지 않도다. 네 이름도 여기에서 따온 것이냐.”신수빈은 줄곧 그를 무인이라고 여겼다. 글 몇 편쯤 읽었을지는 몰라도 문인들만큼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선진 시경의 구절까지 줄줄이 읊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그를 얕잡아보았다는 걸 깨달았다.“맞아요. 저와 오라버니의 이름은 모두 조부께서 지어주셨습니다.”“좋은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29화

    신수빈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런데 곧 닥칠 것이라 여겼던 통증은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 벽 모퉁이에 기대어 있다가 조심스레 눈을 떴다.눈앞에 펼쳐진 것은 허리를 굽혀 작은 공간 하나를 떠받치고 선 이도현의 모습이 보였다.그 광경에 그녀는 잠시 멍해졌다.이도현은 고개를 숙여 창백한 얼굴로 움츠리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에 맞은 줄로 여긴 것이다.“어디 다쳤느냐?”신수빈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젓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요.”사방에는 흩어진 책들이 널려 있었고 그의 등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23화

    이도현이 서원 안으로 들어서자 관리로 보이는 차림의 인물이 그를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처음에는 학문을 배우러 온 유생이라 여겼던 듯했으나 이도현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기골이 장대하고 기운이 단정하며 한눈에 보아도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몸에 걸친 옷차림은 지극히 수수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만큼은 옷자락으로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실례지만 어느 분이십니까?”그는 자기도 모르게 공손한 어조가 섞여 나왔다.“본… 그냥 들러 본 것이다.”이도현이 애써 담담하게 답하자, 관리인은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11화

    그는 기병 차림을 하고 있었다. 마치 밤이슬의 습기가 그대로 배어든 듯, 눈썹과 눈매에는 달빛의 맑은 기운이 있어 차갑지만, 온화한 기색 또한 어려있었다.그는 지금 탁자 앞에 앉아 있었고 그녀는 얇은 옷차림에 젖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물기가 은은히 얼굴에 서려 복숭앗빛 뺨과 고운 안색이 반쯤 드러난 모습은 요염하면서도 아리따웠다.천하에 더할 나위 없는 절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의 눈에는 오직 그녀만이 비출 뿐이었다.그는 수년간 전장을 누볐다. 대군이 어느 땅에 이르든 현지의 주둔 장수나 지방 관원이 으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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