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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Penulis: 정대천
이도현이 싸늘한 기운을 뿜으며 후원의 사합채로 향하였을 때, 마당엔 인적이 없었다. 그는 서릿발 같은 기운으로 문을 걷어찼다.

애초에 그는 신수빈이 그 늙은이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라 여겼다. 이번에 그녀를 구하는 것은 첫날밤 자신의 죄를 덜어주는 셈이라 여겼고 이후로는 더 이상 연을 맺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

하지만 문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온통 피로 물든 장막과 흐트러진 옷차림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칼로 얼굴이 가려진 채 손에 비녀를 쥔 쥐고 쓰러진 마상서의 목을 반복해서 찌르고 있었다. 침상은 물론, 주위 장막까지 핏물이 튀어 있었고 마상서는 이미 숨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계속 찔러댔다.

그 모습을 본 이도현은 불현듯 그날 궁중 편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찔한 눈매와 달콤한 말투로 자신을 유혹하던 그녀 겉으로는 요염한 첩실의 외양이었으나 그 모든 것이 탈이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눈빛에 독이 서린 그녀야말로 진짜였다.

그녀가 혼례 첫날 밤에도 깨어 있었다면 아마 그날의 자신 역시 이렇게 찔러 죽였으리라.

서방에게 물건처럼 취급받고 타인에게 내쳐진 여자. 그런 여인을 보며 이도현은 처음으로 경외에 가까운 감정을 품었다.

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힘껏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아래로 시선을 떨구며 단호히 말했다.

"이미 죽었다."

신수빈은 자신만의 광기에 빠져 있었는지 그의 말에도 멍한 눈으로 허공을 헤맸다. 하지만 점차 흐릿하던 시야가 또렷해지며 그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철갑을 입은 강한 남자의 눈빛이 어지러웠고 가벼운 조소와 함께 억누른 감정이 엿보였다.

신수빈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피범벅이 된 얼굴로 꽃처럼 환하게.

"이 자는 죽었는데 왕야는 어찌 아직 살아 있는지요."

그 말에 이도현의 눈빛이 깊어졌으나 이내 감정을 누른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비로소 안도했다. 피는 모두 마상서의 것이었다. 그 사실에 이상하게도 마음 한 구석이 놓였으나 그 이유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대담하구나."

낮고 쉰 음성이 가볍게 울렸지만 그 안에는 놀람과 찬탄이 묻어 있었다.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문턱에 이르자 그는 멈춰 서며 말했다.

"내일 온 경성에 소문이 퍼지는 걸 원치 않으면 내 품에 얼굴을 묻어라."

신수빈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빛은 장난스럽기도 하고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려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소의 무표정한 장군으로 돌아가 있었다.

신수빈은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몸을 맡겼다.

그의 갑옷은 차디찼고 그녀의 달아오른 몸에는 오히려 시원한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무심결에 그의 등과 허리를 붙잡았고 그 차가움에 더없이 안정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그녀를 안은 그가 순간적으로 온몸을 굳히며 무심결에 숨을 삼켰다는 것을. 은은히 흐드러진 그녀의 향기와 귓가에 드리운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그에게 이성을 허무는 자극이었다.

그가 마당에 이르렀을 때 윤서원이 뒷짐에 묶인 채 끌려나오고 있었다.

"데려가라."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마가를 나섰고 뒤따르던 병사들 또한 모두 철수하였다.

부장만이 감히 왕야의 품에 안긴 여인을 힐끗 바라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온몸이 피투성이라 보기에도 섬찟하였다.

‘대체 누구이기에… 왕야께서 이렇게까지 마가에 쳐들어와 사람을 구하시다니?’

그러다 이도현이 곁눈질을 주자 부장은 그제야 정신이 들어 서둘러 시선을 거두고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말을 타고 돌아가는 길에 이도현은 신수빈의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두 눈이 점차 풀려갔고 마치 그날 밤처럼 그의 품에 안긴 채 몸을 자꾸만 뒤척이며 손이 점점 버릇없이 굴기 시작하였다.

이도현은 그녀가 아직 약기운에 취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역시 피붙은 사내였기에 그녀의 그리움 섞인 손길에 쉽게 버텨낼 수가 없었다.

그는 한 손으로 말고삐를 잡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쥐어 품에 가둬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아마도 속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그녀는 마치 새끼 고양이처럼 훌쩍이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는 실오라기처럼 귓가를 맴돌며 그의 마음을 휘저었고 결국 그는 속타는 마음을 억누르며 말에 박차를 가해 빠르게 섭정왕 저택으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곧장 태의를 부르라 명하고 다시금 일러두었다.

"반드시 여의를 데리고 오라."

이 약은 해독법이야 분명하니 그저 하룻밤 같이 누우면 그만이었다. 신혼 첫날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태기가 있었으니 만일 그렇게 되면 몸도 해치고 태중의 아이는 기필코 지켜내지 못할 터였다.

그 아이가 살든 죽든 상관은 없으나 자신의 침상에서 죽는다면 그건 실로 불길한 일이었다.

그는 그녀를 안고 내실로 들어가 그녀의 피 묻은 옷가지를 단숨에 찢어내어 한쪽으로 던져버렸다.

그러곤 가늘고 창백한 육체를 대강 살펴보다가 고개를 돌려 외쳤다.

"내복, 아씨의 옷가지를 들고 오라."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옷을 들고 들어와 침상 머리맡에 올려두었다.

그녀는 곁눈질로 침상 위를 바라보았고 그곳에는 신수빈이 왕야의 몸을 감싸안고 있었다. 숨결은 가늘고도 뜨거웠으며 금세 흐느낌 섞인 울음이 흘러나왔다.

시녀는 얼굴을 붉히고는 황급히 물러났다.

이도현은 평생 여인 옷을 입혀본 적이 없어 옷을 들고도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하필 신수빈이 마치 물뱀처럼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는 관자놀이를 씰룩이며 이를 악물었다. 다시금 그녀의 두 손목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턱을 움켜잡은 채 그 몽롱한 눈을 들여다보았다.

"신수빈, 난 군자가 아니다. 이리 덤벼들면 네 뱃속 그 피덩이 살리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마."

그의 눈빛이 냉랭하게 얼어붙었고 아이라는 말에 그녀는 겨우 정신을 조금 되찾은 듯하였다. 신수빈은 입술을 꽉 깨물어 피가 맺히도록 참으며 고통을 억눌렀다.

이도현은 그녀의 턱을 비틀어 억지로 눈을 마주치게 하였다.

"한 마디만 해라. 내 오늘, 너 하나 위해 ‘면수’ 노릇도 기꺼이 하마. 이리 몸을 망가뜨릴 필요는 없지 않느냐."

신수빈은 알았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그녀는 맹세했었다. 윤연우를 지키겠노라고.

신수빈은 간신히 입을 열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절… 묶어주십시오."

그 말투는 유려하게 흘러나왔고 이도현의 귀에는 한 덩이 불덩이처럼 들려왔다.

"윤서원이 너를 이리 능멸했건만 그 아이는 아직도 그토록 소중하단 말이냐?"

신수빈은 스스로의 이성이 점점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다. 그저 절박하고 절망스러운 눈으로 이도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제발…"

그녀는 태화전 편전에 끌려가 수치를 당할 때도, 어젯밤 욕보일 때도, 단 한 마디 부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토록 간절하게 그를 향해 애원하고 있었다.

이도현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주변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 정적이 흘렀고, 한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천한 계집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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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09화

    신수빈은 잠시 말을 멈췄다.순간 이도현의 눈빛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위험하고 날카로우며 검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 속에는 제멋대로 휘두르려고 하는 압박감이 번뜩였었다. 확실히 그는 결코 속이기 쉬운 인물은 아니었다. 이전의 몇 차례 대치에서도 그는 언제나 미묘한 이상을 짚어냈으니 말이다.신수빈은 다시 한 번 양피 두루마리를 바라본 뒤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린 이 배치도는 원본과 표기 하나까지도 다르지 않거든. 그가 설마 나를 의심하겠느냐? 이게 원본이 아니라 한들, 누가 도둑이 원본을 훔친 뒤 여러 장을 베껴 퍼뜨리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있겠느냐? 게다가 나는 일부러 평소 쓰지 않는 필체로 그렸다. 그러니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거야.”은보는 그제야 완전히 깨달았다. 마님의 진짜 목표는 태후 뒤에 선 장 가였다. 그녀는 그저 셋째 도련님의 억울함을 대신 풀어주기 위한 것이 아닌 최 씨 가문과 장 가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겉으로는 두 집안이 여전히 왕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예전과 같은 관계는 아니었다.그녀는 이제 장 가와 서 가의 혼맥마저 끊어내려 하고 있었다. 이 일이 터질 경우, 장 가가 서 씨를 감싸면 필연적으로 수면 위로 끌려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보호하지 않는다면 조정 안팎 모두가 장 가가 얼마나 냉혹한 집안인지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장 가와 혼인으로 얽힌 다른 명문가들 또한 자연스럽게 마음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을 터. 사람의 마음이란 가장 건드리기 쉽지만, 한 번 돌아서면 다시 돌리기 어려웠다.마님의 수는 정확했다.다만 은보는 이도현이 이 의도를 알아차릴까 두려웠다. 그의 성정으로 보아 만약 그 지점까지 이르게 된다면...은보는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부디, 마님이 왕야를 평생 속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이틀째 성문이 굳게 닫힌 탓에 백성들 사이에서도 불안한 기운이 맴돌았다. 거리의 상점들 역시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였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08화

    “이 일들은 네 어머니께는 알리지 말거라. 세상 물정을 많이 겪지 않으신 분이니 알아도 걱정만 늘 것이다.”“알겠습니다.”신병문은 고개를 숙여 물러난 뒤, 뒤뜰로 가 가족들의 짐 정리를 거들었다.한편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 되어서도 신수빈은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큰형수와 어머니가 반달 넘게 길 위에서 고생했음을 알기에 더는 붙잡지 않고 푹 쉬시라 인사를 건넨 뒤 먼저 돌아섰다.신 가를 나설 때, 대문 밖에는 갑옷을 갖춘 병사 한 대열이 대기하고 있었다. 다름아닌 도지휘사가 남겨 둔 이들이었다.신수빈은 낮은 목소리로 금자에게 한마디 당부한 뒤,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윤 가로 돌아갔다.그들은 모두 이도현의 친위병이었다. 금자와 은보 또한 예전에 그의 휘하에 있었던 적이 있어 그중 몇 명을 알아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호위병들이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다만 병부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했고 매우 중요한 물건이 사라졌기에 도둑이 성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전면 통제가 내려졌다는 말뿐이었다. 금자가 왕야가 어디로 향했는지 물어도, 그들 또한 모른다고 답할 뿐이었다.윤 가에 도착한 뒤, 금자가 전해 들은 이야기를 신수빈에게 전하자 그녀는 잠시 미간을 좁히고 깊이 생각에 잠겼다.병부에서 도난이라니...이도현이 그토록 급히 말을 몰아 나간 것을 보면 가벼운 일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바로 그때, 문득 한 생각이 스쳤다.혹시 군사 배치도가 도난당한 것은 아닐까?이도현이 직접 출성할 만큼의 사건이라면 결코 사소할 리 없었고, 병부와 관련되었다면 더욱 그러했다.신수빈은 도둑 맞은 물건은 서남 방면의 군사 배치도일 것이라고 완전 확신했다. 이도현이 서둘러 떠난 것은 도둑보다 먼저 서남 지역의 방어를 새로 정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훔쳐 간 것은 그저 쓸모없는 종잇조각이 된다.그녀는 예전에 이도현의 서재에서 보았던 대주 왕조의 군사 지도를 떠올렸다.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이도현은 아마도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07화

    신병호는 장남의 말을 듣자마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한동안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게 물었다.“그럼... 빈이의 뱃속 아이가, 바로 섭정왕의 혈육이라는 말이냐?”“그렇습니다.”“그렇다면 우리 신 가가 받은 이 후작 작위도 그가 모자에게 준 보상인 셈인 것이냐?”신병호의 마음은 복잡하게 뒤엉켰다.“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들로서도 섭정왕의 속내를 모두 알지는 못하니까요. 다만 그분은 아직도 빈이 뱃속에 있는 아이가 윤서원의 아이인 줄로 알고 계십니다. 빈이가 그분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모르고 계시지요. 다만 이 작위가 빈이 때문에 내려온 것만은 분명합니다.”“섭정왕이 그 사실을 모른다고? 그럼 왜 말하지 않았단 말이냐? 윤 가에서 그런 패륜한 짓을 저질렀다면 화이하고 나오는 게 옳았지 않느냐? 섭정왕과 이미 사사로운 관계가 있다면 화이 후 왕부로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떳떳한 일이다. 이렇게 몰래 관계를 이어 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신병문은 고개를 저었다.“빈이는 이미 계산을 마쳤습니다. 지금 윤서원은 병상에 누워 말조차 하지 못하는 몸이 되었으니, 빈이가 품은 아이는 후부에서 명백한 적장자, 장손가 될 겁니다. 게속 윤 가에 남는다면 당연히 후계자가 되겠지요. 이전에 아무리 왕부로 들어간다 해도 빈이는 첩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섭정왕이 신 가의 위상을 끌어올린 것을 보면 정식으로 혼인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허나 빈이는 그에게 마음이 없는데다가, 섭정왕비라는 자리가 하늘에서 떨어진 복도 아니잖습니까. 섭정왕은 행보가 워낙 거칠어서 황실이든 조정이든 가리지 않고 원한을 산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의 곁에서 잠자리를 함께하는 여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이 따르는지 아버지께서는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람에게는 백일의 영화가 없고 꽃도 백일 붉지 않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섭정왕이 권세의 정점에 올라 개혁을 밀어붙이며 기세가 등등하지만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06화

    문간은 이야기를 나누기엔 마땅한 곳이 아니었기에 신병문은 가족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신병호는 마차에서 내린 뒤로 줄곧 말이 없었다. 자식들이 기쁨에 들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그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져 있었다.조금 전 성 밖에서, 장남이 은전을 써서 길을 열어보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막내딸의 신분으로 평양 후부의 이름을 내세워도 소용이 없었다. 성 안으로 들어가기는커녕, 수문장의 얼굴에서 미소 한 점조차 얻지 못했다.아이들은 아직 젊고 세상 물정을 다 알지 못하기에, 굳게 닫혀 있던 그 성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넘볼 수 없는 권력이었다. 그리고 이어 섭정왕이 모습을 드러낸 뒤에야 길이 열렸다.그는 처음엔 섭정왕이 신 가의 체면을 봐서 통행을 허락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장수가 막내딸의 마차 앞을 한 발자국도 떼지 않고 따라붙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이상함을 느꼈다. 그는 섭정왕과 이전에 몇 차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 인물은 언제나 높고 멀었고 신 가는 그 발치에서 보호를 구하는 상인 집안에 불과했다. 은전과 군량을 바쳤고 난세에 신 가를 보전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그런데 어찌하여 저토록 빈이를 감싼단 말인가?더구나 이 후작 작위 또한 석연치 않았다. 부친은 마음이 맑은 사람이었다. 경성에는 분명 그들이 알지 못하는 변고가 있으리라 짐작했고 이 작위가 복인지 화인지 알 수 없기에 그저 길을 재촉했을 뿐이다.그래서 일단 신병문의 세 명의 적자는 신 가의 큰 어르신과 함께 항주에 남겨 두었다. 그런데 막상 입경하자마자 신병호은 공기부터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잠시 후, 그들은 저택에 들어갔다. 신수빈은 어머니와 큰형수와 함께 후택으로 가 짐을 정리했고 신병문은 따라가 도우려다 부친에게 붙잡혔다. 사람이 모두 물러난 뒤, 신병호은 어려서부터 함께 장사를 다니며 강하게 키운 장남을 향해 입을 열었다.“도대체 무슨 일이냐?”“아버지께서는 무엇을 물으시는지요?”“모든 것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05화

    “장군께 여쭙겠습니다. 성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부장은 공손하게 답했다.“말단 장수로서는 알지 못합니다.”이처럼 살벌한 기운이 도는 걸 보아 분명 작은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여기서 더 묻는 것도 무의미하리라.신수빈은 조용히 차렴을 내리고는 고개를 돌려 정 씨가 보내는 탐색 어린 시선과 마주했다.“윤 가와 섭정왕의 교분이 그리 깊은 것입니까? 그분의 부하가 수빈에게 저렇게까지 예를 갖추다니요.”신수빈은 순간 미묘하게 굳어졌다.신병문 역시 미간을 좁힌 채, 부인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정 씨는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누이와 남편의 표정만 보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음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곧 화제를 아이 쪽으로 돌렸다.“수빈아, 지금 몇 개월이 되었느냐?”“곧 여덟 달이에요.”그러자 정 씨는 후의 몸조리와 주의할 점들을 차근차근 일러주었다. 아이를 넷이나 낳은 사람답게 첫아이가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신수빈은 미소를 지은 채 그 말을 듣고 있었지만 문득 정신이 멀어지며 다른 생각에 잠겼다.신병문은 본래 가족들을 천일각으로 모시려 했으나 며칠 전 섭정왕이 하사한 저택 하나가 있었고 공부에서 손을 대어 새로 단장까지 마친 터였다. 이미 신 씨 가문이 입경한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다면 굳이 그곳을 피하는 것도 도리어 모양이 좋지 않았다.신병문은 미리 호원과 하인들을 배치해 두었기에 항주에서 데려온 사람들까지 더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부모님이 마차에서 내리며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신수빈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로 인해 신병문과 정 씨는 한참동안 그녀를 달래주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그때, 누군가가 신수빈의 어깨를 툭 치는 바람에 그녀는 흠칫 놀랐고 흐느끼던 숨도 멎었다.“네 눈에는 부모님이랑 큰형님만 보이고 넷째 오라버니는 전혀 안 보이나 보구나. 이렇게까지 마음에 없을 줄 몰랐네.” 신수빈은 그제야 돌아서서 신태안을 보았다. 전생의 단편적인 기억 속에서 그녀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04화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신병문이 마차 밖을 향해 묻자 마부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사유는 알 수 없으나 정오 무렵부터 갑자기 성문을 닫고 출입을 금했습니다.”신수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오늘 무슨 큰일이 있을 리가 있나?신수빈은 자신의 마부를 보내 평양후의 명호를 밝히게 했다. 그러자 성루 위에서 귀찮다는 듯한 고함이 떨어졌다.“상부의 명령 없이는 출입 금지라 했다!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그때, 성문을 지키던 노병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예전에 사가에서 신 씨 가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자였다. 그는 신 씨 쪽에서 건넨 은전을 받아 쥐고는 목소리를 낮춰 귀띔했다.“사대부님, 오늘 성 안에서 사건 수사가 있어 오늘은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당분간은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해 지기 전이니 성 밖 별장에서 며칠 머무르시지요. 삼오일 안에는 성문이 다시 열릴 겁니다.”신병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신 씨 집안의 위상이 아직은 미미한 이상 성문을 지키는 장수가 사정을 봐줄 리 없었다. 성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관의 일을 그가 좌우할 수는 없는 노릇.“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마침 경교에 신 씨 가문의 별장이 있었기에 일행은 우선 그곳으로 몸을 피하려고 했다. 가족을 맞이하는 기쁜 길이 이렇게 막힐 줄은 몰랐지만 조정의 일 앞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들이 방향을 돌리려는 순간, 성루 위에서 갑작스러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성문을 열어라! 어서 열어라!”주홍빛 동못이 박힌 거대한 성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자 성 안에서 차가운 철갑을 두른 기병 한 기가 번개처럼 튀어나왔다.길 양옆에 서 있던 군졸들이 성문 앞에 몰려 있던 백성들을 급히 몰아냈고 신 씨 가문의 마차들 역시 한쪽으로 밀려났다.말발굽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했다.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에 체구가 크고 갑주가 서늘한 철기병들이 호랑이 울음 같은 기세로 성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선두에서 달리던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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