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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Author: 정대천
이도현이 싸늘한 기운을 뿜으며 후원의 사합채로 향하였을 때, 마당엔 인적이 없었다. 그는 서릿발 같은 기운으로 문을 걷어찼다.

애초에 그는 신수빈이 그 늙은이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라 여겼다. 이번에 그녀를 구하는 것은 첫날밤 자신의 죄를 덜어주는 셈이라 여겼고 이후로는 더 이상 연을 맺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

하지만 문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온통 피로 물든 장막과 흐트러진 옷차림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칼로 얼굴이 가려진 채 손에 비녀를 쥔 쥐고 쓰러진 마상서의 목을 반복해서 찌르고 있었다. 침상은 물론, 주위 장막까지 핏물이 튀어 있었고 마상서는 이미 숨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계속 찔러댔다.

그 모습을 본 이도현은 불현듯 그날 궁중 편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찔한 눈매와 달콤한 말투로 자신을 유혹하던 그녀 겉으로는 요염한 첩실의 외양이었으나 그 모든 것이 탈이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눈빛에 독이 서린 그녀야말로 진짜였다.

그녀가 혼례 첫날 밤에도 깨어 있었다면 아마 그날의 자신 역시 이렇게 찔러 죽였으리라.

서방에게 물건처럼 취급받고 타인에게 내쳐진 여자. 그런 여인을 보며 이도현은 처음으로 경외에 가까운 감정을 품었다.

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힘껏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아래로 시선을 떨구며 단호히 말했다.

"이미 죽었다."

신수빈은 자신만의 광기에 빠져 있었는지 그의 말에도 멍한 눈으로 허공을 헤맸다. 하지만 점차 흐릿하던 시야가 또렷해지며 그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철갑을 입은 강한 남자의 눈빛이 어지러웠고 가벼운 조소와 함께 억누른 감정이 엿보였다.

신수빈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피범벅이 된 얼굴로 꽃처럼 환하게.

"이 자는 죽었는데 왕야는 어찌 아직 살아 있는지요."

그 말에 이도현의 눈빛이 깊어졌으나 이내 감정을 누른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비로소 안도했다. 피는 모두 마상서의 것이었다. 그 사실에 이상하게도 마음 한 구석이 놓였으나 그 이유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대담하구나."

낮고 쉰 음성이 가볍게 울렸지만 그 안에는 놀람과 찬탄이 묻어 있었다.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문턱에 이르자 그는 멈춰 서며 말했다.

"내일 온 경성에 소문이 퍼지는 걸 원치 않으면 내 품에 얼굴을 묻어라."

신수빈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빛은 장난스럽기도 하고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려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소의 무표정한 장군으로 돌아가 있었다.

신수빈은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몸을 맡겼다.

그의 갑옷은 차디찼고 그녀의 달아오른 몸에는 오히려 시원한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무심결에 그의 등과 허리를 붙잡았고 그 차가움에 더없이 안정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그녀를 안은 그가 순간적으로 온몸을 굳히며 무심결에 숨을 삼켰다는 것을. 은은히 흐드러진 그녀의 향기와 귓가에 드리운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그에게 이성을 허무는 자극이었다.

그가 마당에 이르렀을 때 윤서원이 뒷짐에 묶인 채 끌려나오고 있었다.

"데려가라."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마가를 나섰고 뒤따르던 병사들 또한 모두 철수하였다.

부장만이 감히 왕야의 품에 안긴 여인을 힐끗 바라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온몸이 피투성이라 보기에도 섬찟하였다.

‘대체 누구이기에… 왕야께서 이렇게까지 마가에 쳐들어와 사람을 구하시다니?’

그러다 이도현이 곁눈질을 주자 부장은 그제야 정신이 들어 서둘러 시선을 거두고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말을 타고 돌아가는 길에 이도현은 신수빈의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두 눈이 점차 풀려갔고 마치 그날 밤처럼 그의 품에 안긴 채 몸을 자꾸만 뒤척이며 손이 점점 버릇없이 굴기 시작하였다.

이도현은 그녀가 아직 약기운에 취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역시 피붙은 사내였기에 그녀의 그리움 섞인 손길에 쉽게 버텨낼 수가 없었다.

그는 한 손으로 말고삐를 잡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쥐어 품에 가둬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아마도 속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그녀는 마치 새끼 고양이처럼 훌쩍이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는 실오라기처럼 귓가를 맴돌며 그의 마음을 휘저었고 결국 그는 속타는 마음을 억누르며 말에 박차를 가해 빠르게 섭정왕 저택으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곧장 태의를 부르라 명하고 다시금 일러두었다.

"반드시 여의를 데리고 오라."

이 약은 해독법이야 분명하니 그저 하룻밤 같이 누우면 그만이었다. 신혼 첫날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태기가 있었으니 만일 그렇게 되면 몸도 해치고 태중의 아이는 기필코 지켜내지 못할 터였다.

그 아이가 살든 죽든 상관은 없으나 자신의 침상에서 죽는다면 그건 실로 불길한 일이었다.

그는 그녀를 안고 내실로 들어가 그녀의 피 묻은 옷가지를 단숨에 찢어내어 한쪽으로 던져버렸다.

그러곤 가늘고 창백한 육체를 대강 살펴보다가 고개를 돌려 외쳤다.

"내복, 아씨의 옷가지를 들고 오라."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옷을 들고 들어와 침상 머리맡에 올려두었다.

그녀는 곁눈질로 침상 위를 바라보았고 그곳에는 신수빈이 왕야의 몸을 감싸안고 있었다. 숨결은 가늘고도 뜨거웠으며 금세 흐느낌 섞인 울음이 흘러나왔다.

시녀는 얼굴을 붉히고는 황급히 물러났다.

이도현은 평생 여인 옷을 입혀본 적이 없어 옷을 들고도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하필 신수빈이 마치 물뱀처럼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는 관자놀이를 씰룩이며 이를 악물었다. 다시금 그녀의 두 손목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턱을 움켜잡은 채 그 몽롱한 눈을 들여다보았다.

"신수빈, 난 군자가 아니다. 이리 덤벼들면 네 뱃속 그 피덩이 살리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마."

그의 눈빛이 냉랭하게 얼어붙었고 아이라는 말에 그녀는 겨우 정신을 조금 되찾은 듯하였다. 신수빈은 입술을 꽉 깨물어 피가 맺히도록 참으며 고통을 억눌렀다.

이도현은 그녀의 턱을 비틀어 억지로 눈을 마주치게 하였다.

"한 마디만 해라. 내 오늘, 너 하나 위해 ‘면수’ 노릇도 기꺼이 하마. 이리 몸을 망가뜨릴 필요는 없지 않느냐."

신수빈은 알았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그녀는 맹세했었다. 윤연우를 지키겠노라고.

신수빈은 간신히 입을 열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절… 묶어주십시오."

그 말투는 유려하게 흘러나왔고 이도현의 귀에는 한 덩이 불덩이처럼 들려왔다.

"윤서원이 너를 이리 능멸했건만 그 아이는 아직도 그토록 소중하단 말이냐?"

신수빈은 스스로의 이성이 점점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다. 그저 절박하고 절망스러운 눈으로 이도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제발…"

그녀는 태화전 편전에 끌려가 수치를 당할 때도, 어젯밤 욕보일 때도, 단 한 마디 부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토록 간절하게 그를 향해 애원하고 있었다.

이도현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주변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 정적이 흘렀고, 한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천한 계집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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