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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씨는 이때 몹시 수척해 보였다. 얼굴빛은 창백했고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떠날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고작 스무 날 남짓한 사이에 어찌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서 씨에게는 자식이 둘뿐이었다. 하지만 딸 하나는 황명을 기다리며 남은 인생을 몇몇 환관들과 함께 보내야 할 처지가 되었고, 유일한 아들 또한 중풍에 걸렸다.서 씨는 윤서원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하녀들에게서 한마디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눈을 붉힌 채 신수빈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이 망조 든 년아! 집에 들어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윤 가를 이렇게 뒤흔들어 놓는 것이냐! 게다가 내 아들까지 병들게 하고, 서화의 뱃속 아이까지 잃게 만들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느냐? 오늘 내가 너 같은 천한 년을 가만두지 않겠다!”서 씨는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손을 치켜들어 내리치려 했다. 그 순간 금자와 은보가 앞으로 나서며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서 씨는 두 사람을 향해 더욱 거칠게 악을 썼다.“이 천한 계집종들이 감히 나를 막아서는 것이냐?”그때 큰 마님이 지팡이를 바닥에 세차게 내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낮고 엄한 음성이 울렸다.“이제 그만하지 못하겠느냐? 집안이 이만하면 충분히 어지럽지 않으냐!”그제야 서 씨는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못하고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그 눈물이 윤서령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윤서원을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큰 마님의 시선이 신수빈의 배로 옮겨 갔다.그녀는 가느다란 허리와 옷차림 덕분에 배가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회임한 기색은 분명히 보였다.“이 일은 본래 네 잘못이 아니니 스스로를 탓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제 몸에 아이도 있으니 마음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몸부터 잘 돌보거라.”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신수빈의 배로 쏠렸다. 과연 아랫배가 살짝 불룩해져 있었다.그때 호위들이 들것을 들고 와 마차에서 윤서원을 내려놓았다. 그가 하반신이 마비되었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아
이도현 역시 어딘가 멋쩍은 기색을 띠고 있었고, 더는 그녀를 왕비로 맞이하겠다는 말도, 왕부에 들어와 첩이 되라는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신수빈의 말대로 그녀의 신분은 확실히 낮았다. 방금 전, 그 한마디 역시, 그 자신도 어찌하여 입 밖으로 내뱉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여운이 짙게 남아 있었다. 이도현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금 전 그녀가 했던 말을 계속해서 곱씹었다.그녀는 다른 여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런 말은 이도현 역시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귀족이든, 재물이 넉넉한 집안이든, 심지어는 장터의 평범한 백성조차 약간의 여유만 생기면 첩 한 명쯤은 두려 했다. 그들의 아내가 된 여인은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됐고 설령 불만을 드러내더라도 질투 많은 여인이라는 이유로 내쳐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어디를 보아도 현숙한 여인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니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사내조차 견디지 못하는 일을 여인이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신 씨, 본왕은…!”이도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그녀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자신에게는 다른 여인은 없다고, 젊은 시절부터 전장을 전전하며 살았기에 다른 세가의 자제들처럼 어린 나이에 통방 시녀를 둔 적도 없었다고, 이후 몇 차례 일을 겪고 나서는 정사에 마음을 둘 여유조차 없이 십수 년을 남과 북의 전장을 오갔다고… 올해에 이르러서야 전쟁이 조금 잠잠해졌을 뿐이라고… 만약, 그날 밤, 암계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녀와 이런 인연이 생길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녀가 침상에서는 어떤 여인인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다른 친왕들처럼 어느 명문가의 여인을 왕비로 맞아 몇 명의 첩을 들이며 무난한 일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는 그녀의 첫 사내였고 그녀 또한 그의 첫 여인이었지만, 그는 이제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권세를 쥔 인물이 되었다. 스물일곱의 그와 비슷한 연령대의 사내들은 이미 모두 아이가
이도현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는 것을 보자 신수빈은 그가 자신의 말을 이해했음을 알아차렸다. 신수빈이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왕야께서는 지금, 제가 왕야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첩이 되든 측비가 되든 누구도 감히 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 생각합니다. 한데… 과연 척희가 총애를 받지 못해서 그런 결말을 맞은 것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왕야께서는 언젠가 반드시 정비를 맞이하셔야 할 겁니다. 정비가 어질다면 왕부의 후택에는 그나마 숨 쉴 곳이 있겠지요. 한데 만약 정비가 질투가 많은 사람이라면요? 그때가 된다면 왕야께서 제게 베푸신 총애는 곧 제게 씌워지는 가장 큰 죄가 될 것입니다.”이때 촛불이 툭 하고 소리를 내며 튀기 시작했다. 신수빈은 이내 탁자 위의 은침을 들어 촛심을 살짝 건드리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사내들은 늘 밖의 일을 돌보느라 바쁩니다. 제가 후택에서 모욕을 당한다 한들, 그런 사사로운 일들을 매번 왕야 앞에 들고 나와야 할까요? 게다가 훗날 제가 서자나 서녀를 낳게 된다면 그 아이들은 왕비에게 보내져서 길러지겠지요. 열 달을 품어 낳은 아이가 다른 여인을 어머니라 부르는 모습을 지켜본다 생각하면 저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혹여 제가 총애를 믿고 분수를 넘기면 규범을 어겼다는 이유로 어사들이 줄줄이 나서 왕야를 탄핵할 겁니다. 내실을 단속하지 못하고 첩을 총애해 정실을 업신여긴다고요. 그때면 왕야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결국은 제가 일을 키웠다 여기시며 왕야와 저 사이에 남아 있던 그 얼마 안 되는 정마저 소진되어 버리겠지요. 차라리 화이를 하고 평범한 사람에게 재가해서 정실이 되더라도 왕부의 첩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이도현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촛불에 비친 그의 눈빛은 어둠에 잠겨 속내를 가늠할 수 없었다.신수빈이 이토록 많은 말을 꺼낸 것은 두 사람 사이에 불편을 만들기 위함도, 그를 노하게 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이도현을 화나게 한다면 자신에게 이로울 것은 없을 테니까. 신수빈은
이도현이 행궁에서 사람을 빼냈다는 사실을 벌써 알아차린 것을 보고 신수빈은 자신에게 이미 그의 눈과 귀가 붙어 있음을 짐작했다. 그 명분이 보호이든 감시이든 결국 그녀의 모든 행적은 그의 시야 아래에 있다는 말이었다. 지금 그가 이런 질문을 꺼낸 것도 십중팔구 지난 이틀간 그녀가 벌인 일들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도현의 눈빛은 바다처럼 짙고 깊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듯한 강압이 담겨 있었다. 이 얼마간의 접촉을 통해 신수빈 역시 알고 있었다. 그는 성정이 강직한 인물로, 눈앞의 작은 기만조차 결코 참고 넘길 성정이 아니었다. 그를 속이려 든다면 결과는 오히려 더 나빠질 게 분명했다. 신수빈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한없이 진실한 눈빛을 장착한 채 말했다.“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신분과 지위가 어떠하든, 마음 깊은 곳에 감춰 둔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비밀 하나쯤은 지니고 있을 겁니다. 저도 그렇고 왕야께서도 그러하실 거지요. 그래서 왕야께서 일부러 이곳까지 오신 것도 제가 지난 이틀간 무엇을 했는지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이겠지요. 만약 왕야께서 윤서원과 주서화에 관한 일을 묻고자 하신다면 저는 단 한 가지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일은 왕야와는 무관하며 저는 왕야의 뜻을 거스르거나 해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요. 왕야, 이번 한 번만 제 고집을 허락해 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이 일을 부디…. 더는 거론하지 말아 주십시오.”이도현은 한참동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원래라면 입 밖으로 나올 말들이 그녀의 말에 막혀 나오지 못했다. 그가 신수빈을 높이 평가하고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녀는 무척 영리한데, 그 영리함에 분명한 선도 있었다. 신수빈은 이도현이 자신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호의를 등에 업되 지나치지 않은 요구만을 내놓았다. 설령 속내에 바람이 있다 해도 그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그는 원래 여인은 굳이 똑똑할 필요가 없고 얌전히 제 자리
신수빈은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아프다고?불길 속에 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도, 두 팔이 산산이 꺾이는 고통도 이미 겪어 본 그녀였기에 이 정도쯤은 마음에 담아 둘 필요조차 없었다.하지만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소매를 붙잡고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불안이 서린 시선에 가련함이 얹히고 그 위에 미안함이 겹쳐진 채로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왕야께서는 더는 저를 탓하지 않으실 거지요…?”이도현은 이를 악물었다. 단단하게 다문 그의 턱 선이 미세하게 움직였고 코끝으로 길게 숨을 내쉬며 억눌린 분노를 섞어 말했다.“사람은 이미 풀어서 보냈다. 이제 본왕이 어찌하길 바라는 것이냐? 너를 황성시로 넘겨 형문에 부치기라도 하라는 것이냐, 아니면 구족을 멸하라는 것이냐?”그 말에 신수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그녀는 사람을 구할 때 오로지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뿐이었지 그 이후의 일까지는 깊이 헤아리지 못했다. 구족이라는 말이 그녀의 심장을 세게 움켜쥐었다.“이번만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안 생기도록 하거라. 다음에도 이런다면 본왕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이도현의 말은 거칠고 날카로웠다. 신수빈은 겁에 질린 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얼굴 가득 미안한 기색을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사람을 불러 약을 들여오게 했다. 고개를 숙여 그녀의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조심스럽게 감아 준 뒤,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다시 본왕을 속일 생각이라면, 어떤 결과가 따를지 스스로 잘 생각해 보길 바란다.”신수빈은 아주 작게, 그리고 한없이 순종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예…”그녀가 진정으로 겁을 먹었다는 걸 느낀 듯, 이도현은 그녀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그자는 본왕을 노리고 온 자였다. 화살에도 피가 닿는 즉시 목숨을 앗아가는 맹독이 발라져 있었지. 전에 발생한 일에 대해서 본왕은 너를 나무라지 않겠다. 한데 그 두 사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지금 사실대로 말해주거
“호수에서 변을 당했던 그 날, 저를 구해준 이는 금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제게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더라고요. 저는 목숨을 건져준 은혜를 저버릴 수 없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며칠 전 밤, 금군이 자객을 샅샅이 뒤지던 그때, 저는 다시 그 사람을 마주했습니다. 이번엔 중상을 입은 다른 이를 데리고 제 방에 숨어들어 도움을 구했습니다.”신수빈은 고개를 들고 이도현의 눈을 또렷이 마주했다. 도망치지도 흐트러지지도 않은 눈빛이었다.“만약 이 일이 새어 나간다면 왕야께서 절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한데 은인에게 등을 돌린다면 제 마음이 평온하지 못할 것 같았거든요. 그래도 왕야께 죄를 고할 때가 오면 왕야께서 저희 사이의 작은 정분을 생각하여 한 번쯤은 눈 감아주시지 않을까… 어리석게 바라기도 했습니다.”물이 고인 듯 반짝이던 눈동자가 그의 넓은 어깨를 비춘 뒤 투명한 물방울이 되어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제가 왕야의 총애만 믿고 감히 제멋대로 행동한 것 같습니다… 한데 다시 돌아간다 해도 은인을 눈앞에서 죽게 두지는 않았을 겁니다!”고개를 조금 들자 목덜미의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하얀 붕대 위로 피가 스며 올랐다.이도현은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옥으로 깎은 듯한 얼굴에 투명한 눈물방울이 몇 점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목덜미에 번지는 피를 보고 속이 까맣게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이곳에 올 때 가득 차 있었던 분노와 의심. 그녀가 발뺌한다면 어떻게 굴복시킬지 계획까지 다 끝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사죄하며 무릎 꿇고 있는 그녀를 보자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그와의 정분을 믿었다는 그 한 줄이 어딘가에서 끓어오르던 분노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차마 가라앉히지 못한 불만도 있었다.그 자객은 명백히 자신을 노리는 자. 이렇게 행동했다는 건 범을 놓아 준 격이 아닌가? 그녀는 도대체 얼마나 철이 없단 말인가?침묵이 길어지려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