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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Auteur: 정대천

제1화

Auteur: 정대천
연회의 막이 내림과 동시에 그들은 어엿한 부부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뜨거운 열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신수빈은 의식이 점점 흐릿해지다 못해 하늘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몸을 돌리거라."

어둠 속에서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짐승이 낮게 울부짖는 소리처럼 수컷의 매서운 기운을 띄고 있었다.

술에 취한 탓인지, 정신이 혼미한 탓인지, 신수빈은 지아비의 목소리가 전과는 다르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도 아마 평소의 자태를 유지하긴 어려웠을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진이 빠질 대로 빠진 터였다.

정신이 까마득해질 무렵, 신수빈은 건장한 사내의 품에 안기며 떨리는 팔로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서방님, 그만하시지요..."

그러나, 굶주린 늑대처럼 허기를 채우기 바빴던 그에게 애달픈 여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유독 긴 밤이었다...

*

단잠에서 깬 신수빈이 몸을 일으키려던 무렵,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방안을 뛰어 들어왔다.

"마님, 제발 도련님을 구해주십시오."

유모가 백지장 같은 얼굴을 한 채, 급히 달려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리께서 도사의 말을 듣고, 도련님을 강제로 끌고 가 불에 태워 죽이려 합니다!"

그 말에 벌떡 일어난 신수빈이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늘따라 세상 만물을 태우려는 듯 햇볕은 유난히 뜨거웠다.

곳곳에 풍기는 웅황(雄黃)의 향 속에, 미친 듯이 달려 평양 후부(平陽侯府)의 뒷마당에 당도한 신수빈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서방님, 연우는 서방님 친자식인데 어찌 저 도사의 말만 믿고 이런 짓을 하시는 겁니까!”

“멈춰라, 당장 멈추지 못할까?"

신수빈은 어린 아들에게 달려가고 싶었으나, 건장한 하인들에게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이제 겨우 다섯 살인 윤연우의 애원하는 목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머니, 살려주세요... 어머니... 뱀이 있습니다... 전 요괴가 아닙니다... 살려주세요..."

그럼에도 문지기는 짐짝 다루듯 매정하게 아이를 관(棺)에 밀어 넣었다.

다시 일어서기에 어린 몸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관 뚜껑을 닫고, 못을 박아라!"

어린 자식의 울부짖음에도 윤서원은 관심 없다는 듯, 뒷짐을 진 채 시종일관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와 달리, 관 뚜껑이 닫히려는 찰나에 신수빈은 안간힘으로 하인들에게서 벗어나 문지기들을 뿌리치고, 두려움에 벌벌 떠는 어린 자식을 품에 꼭 껴안았다.

"미치셨습니까! 우리 아들입니다! 제가 열 달을 품어 낳은 아이란 말입니다! 저자가…"

떨리는 손으로 윤서원 곁에 서 있는 도사를 가리키는 신수빈의 두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저자가 나쁜 마음을 품고, 후부의 적자를 해하려는 겁니다!"

말을 마친 그녀의 눈에 마찬가지로 윤서원의 곁에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윤서원의 첩 주서화였다.

"그리고 주서화! 저 도사는 주서화의 지시를 받고 우리 연우를 모함한 게 분명합니다! 연우가 사라져야 주서화 아들이 적자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말에 경멸의 시선으로 지켜보던 주서화가 곧장 가련하고 슬픈 표정으로 윤서원에게 몸을 돌렸다.

"언니가 어찌 저를 이리 모함할 수 있습니까? 도사님은 만인이 신봉하는 신선인 데다, 태후마마께서도 숭배하시는 분이십니다. 전 그냥 가문에 조용한 날이 없고, 대감마님께서도 갑작스레 세상을 뜨신 터라, 이는 분명 악귀의 짓이라 생각하여 도사님을 모신 것뿐입니다. 저도 태후마마 덕분에 겨우 도사님을 모셔 올 수 있었고, 요괴가 윤씨 가문 손아랫사람에게 탁생하여 산다는 말에 저도 제 아들 택이가 걱정 됐지만, 이 집안을 위해 협조해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헌데 도사님께선 요괴가 연우라고 하던데요. 저도 마음 아프지만 윤씨 가문을 위해서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어찌 이 일을 제 탓이라 하시는 겁니까?"

주서화는 흐느끼는 목소리와 슬픈 표정으로 신수빈의 품속에 안겨있는 윤연우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녀의 깊은 눈동자 속에 비치는 승자의 기쁨은 감춰지지 않았다.

신수빈도 알고 있었다. 눈앞의 도사라는 자는 궁을 드나들며 태후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자라는 걸.

그랬기에 지금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그저 소리 없는 아우성뿐이라는 걸.

절망이라는 가시넝쿨이 점점 더 그녀를 죄어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신수빈은 어린 자식을 품에 안은 채 허겁지겁 윤서원의 앞으로 걸어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에게 명했다.

"연우야, 어서... 넌 요괴가 아니라고 아버지께 말씀드리거라... 제발... 살려달라고 아버지께 애원하거라…"

"아버지... 아버지... 정말 소자를 버리시는 겁니까?"

작고 연약한 목소리로 애원하는 앳된 아이의 얼굴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면 책을 읽어드리라고, 어머니께서 서책을 외우게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분명 좋아하실 거라는 말에 아버지를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으셨지요... 아버지, 소자를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소자 앞으로 아버지 명만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소자는 뱀이 무섭습니다... 제발 절 관에 버리지 마십시오..."

윤서원은 신수빈의 품 안에 안긴 아이를 내려다봤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애원하는 아이의 눈동자에는 공포와 숭배, 그리고 간절함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신수빈도 마찬가지로 간절한 눈빛으로 윤서원이 그들 모자를 가여이 여기고 그간 부자의 정을 봐서라도 이 잔인한 짓을 멈추길 바랐다.

하지만, 윤서원은 옷자락을 잡은 아이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고 그 힘에 신수빈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게되었다.

"마님을 끌어내고, 저 요괴를 관에 가둬라!"

그 말에 신수빈은 아이를 꼭 껴안은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윤서원을 바라보며 연신 뒤로 물러섰지만 문지기와 하인들은 그녀의 품에서 어린아이를 데려가려고 곧장 다가왔다.

겁에 질려 몸을 바들바들 떨며 울부짖는 아이의 목소리는 한 어미를 미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신수빈은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 짐승처럼 아이를 뺏으려는 자들에게 날 선 이빨을 드러내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꺼지거라... 썩 꺼지지 못할까..."

몸부림을 친 탓에 그녀의 머리에 단단히 고정돼 있던 비녀가 떨어지며 그녀는 삽시에 산발이 되었다. 단정하던 대감 댁 마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 그녀의 모습은 미친 여인과 다름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문지기와 하인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윤서원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윤서원의 곁을 지키고 서 있던 주서화가 도사에게 눈짓하자, 도사가 냉큼 입을 열었다.

"나리, 단오의 (端午) 오시(午時)는 한 해 중 양기가 제일 왕성한 때입니다. 곧 오시가 다가오는데, 만에 하나 오시에 이 요괴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저로서도 방도가 없습니다."

윤서원은 점점 저무는 해와 미치광이 같은 신수빈을 어두운 눈빛으로 번갈아 보다 이내 결정을 내렸다.

"마님은 광증을 앓고 있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만에 하나 오시를 놓치거든 너희들도 순장 당할 줄 알거라!"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주서화가 하인들에게 눈짓했다.

주인의 명이 떨어졌기에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던 그들은 바늘로 신수빈의 몸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그럼에도 신수빈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어린 자식을 품에 꼭 껴안고 놓질 않았다.

'내가 이 손을 놓는 순간, 우리 연우는...'

고여오는 눈물에 윤서원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졌다.

그를 사모해 왔던 마음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사정없이 생채기를 내기 시작했고 절망과 증오라는 독이 결국 그녀를 만신창이로 만들고 말았다.

아이를 껴안고 있는 손이 강제로 잡아 당겨져 손가락 여섯 개가 부러지고 두 팔이 뒤틀려 골절된 상태가 된 신수빈은 더 이상 아이를 지킬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신수빈은 하인들에 의해 바닥에 짓눌린 채 굳게 닫히는 관을 보며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뙤약볕에 달궈진 청석판에 짓눌린 그녀의 얼굴은 아파왔고, 관속 아이의 처참한 울부짖음은 점차 작아지더니 이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도 않았다.

"소각, 멸령(滅靈), 녹골(銷骨)."

도사가 외우는 주문에 따라 관에 기름이 부어졌고, 관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그렇게 속절없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신수빈은 피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에 하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그녀를 억누르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속박에서 벗어난 그녀는 불길로 달려들었으나, 양팔이 부러진 탓에 온몸으로 관을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연우야, 어미가 왔다... 이 어미가 왔어."

그녀의 애타는 부름에 응하는 소리는 불꽃이 튀는 소리뿐, 아이의 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뜨거운 불길이 그녀의 옷과 머리를 태웠고, 그녀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연우야!"

단오의 정오임에도 불구하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소름이 끼치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한껏 울분을 토한 신수빈은 불길이 붙은 몸을 돌려 피눈물을 흘리며 윤서원을 향해 걸어갔다.

지옥에서 탈출한 악귀가 있다면 이 모습이 아니었을지...

"윤서원, 이 배은망덕한 자를 봤나! 감히 내 아들을 죽여? 악귀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 기필코 너희 가문을 멸시키고 말 테야!"

"막아라! 어서... 가까이 오지 못하게 어서 막아라!"

저주를 퍼부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신수빈의 모습에 윤서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고, 살아생전 이런 광경을 본 적 없던 문지기들도 순간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수빈이 덮칠 기세로 다가오자, 윤서원의 가까이에 서 있던 문지기가 검을 들어 그녀의 가슴을 향해 힘껏 찔러댔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윤서원과 주서화를 보호하며 뒤로 물러섰다.

순식간에 피눈물로 범벅된 가녀린 몸이 결국 줄 끊어진 연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불바다로 떨어지고 말았다.

"연우야, 미안하다... 이 어미가 못나서..."

타오르는 불꽃 소리에 신수빈의 마지막 목소리가 더해졌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신수빈은 어린 자식이 누워 있는 관을 향해 다가갔으나 결국 닿지 못한 채 두 눈을 감았다.

단 한 걸음...

단 한 걸음 차이였다.

그 짧은 한 걸음은 한 어미의 씻을 수 없는 미안함과 절망이었다.

*

모자가 죽고 나서 윤서원은 대사를 불러와 그들 모자의 유골을 뒷마당에 자리 잡은 쇄혼루(鎖魂樓:혼령을 가두는 건물)에 봉인시켰다.

신수빈은 죽고 나서야, 혼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쇄혼루에 갇힌 탓에 이도 저도 할 수 없었다.

화려한 누각이 그들 모자를 환생조차 할 수 없게 속박시킨 탓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갇혀있었을까.

일품 고명(诰命: 황제가 하사한 작위)의 차림을 한 주서화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웃으며 혼잣말하기 시작했다.

"7년 전 단오에, 평양 후부의 안채에 불이 붙어 평양후 세자의 본처 신수빈과 아이가 함께 숨을 거둔 일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얘기지. 처자식을 잃은 슬픔에 윤서원이 새 부인을 들이지 않고, 호화로운 누각을 세워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야. 하나, 이 얘기가 세간에 퍼지고 나서 신씨 가문 사람들이 무얼 했는지 알아?"

옅은 웃음을 짓던 주서화가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아니, 글쎄 모든 비용을 자처해서 내놓고 해마다 후부로 수많은 향불을 올리는 것 있지? 이 누각이 사실은 환생 못 하도록 혼을 가두는 곳이라는 걸 그들이 안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하, 안타깝게도 그들은 알 기회조차 없겠지만 말이야. 신씨 가문은 예로부터 나라를 상대할 만큼 부유했다지. 섭정왕이 남하(南下:남쪽으로 진출함)할 때 그를 도왔다는 이유로 그가 뒤를 봐주지 않았으면 진작에 처리되었을 것을."

"그래도 다행히 섭정왕이 7년 전에 사냥하다 낙마로 죽어준 탓에 태후마마께서 신씨 가문을 처리하기 시작하셨지. 부유하다 한들 힘이 없으면 어떤 결말을 맞는지는 언니도 잘 알 테지. 그 길은 죽음뿐이야."

"내 바람대로 신씨 가문은 몰락됐고, 가산은 국고로 충당되었어. 그 모든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윤서원이고. 태후마마께서는 그의 공을 높이 사셔 수공으로 봉하셨고, 나 또한 정실이 되어 이젠 일품 고명이 되었어. 언니가 살아서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필 그 잡종이랑 같이 죽어서는..."

"난 언니가 아직 그 잡종이, 언니와 윤서원이 낳은 자식이라 생각할까 봐 걱정이야. 윤서원이 내게 말했었거든, 실은 언니를 단 한 번도 품은 적 없다고 말이야."

"섭정왕이 어릴 적 태후마마를 연모했으나 품지 못하셨다지. 결국 그게 그의 한이 되었다 하더라고. 그걸 알고 있었던 윤서원이, 언니가 태후마마와 닮았다는 점에서 혼인 첫날밤에 순방영 지휘관의 직책과 언니를 맞바꾼 것이야."

"근데 언니가 회임할 줄 그 누가 알았겠어? 게다가 섭정왕이 죽은 마당에 윤서원이 그 잡종을 그냥 둘 리가!"

주서화는 제 할 말만 하고 입이 찢어지라 웃으며 자리를 떴다.

혼령이 되어 갇힌 신수빈은 필사적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누각을 벗어날 수 없었다.

오직 두 감정만이 그녀를 사로잡을 뿐.

윤서원과 혼인한 것에 대한 후회와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던 무력함.

'다음 생이 있다면, 내 반드시 이 모든 걸 되갚아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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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서원이 어떻게 마상풍 이후 반신불수가 되었는지는 금자와 은보 모두 잘 알고 있었다.그런 윤서원의 병세가 호전되었다는 소식에 평양후가 신수빈을 부르자, 금자와 은보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바라보았다.신수빈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은보, 내 화장함 맨 아래 칸에 있는 팔찌를 가져와라.”평소 신수빈은 윤서원을 가까이에서 볼 수 없었다.평양후가 사람을 시켜 그를 별채로 옮겨둔 뒤로는, 찾아가도 얼굴 한 번 볼 수 없었다. 의원의 말이라 사람을 만나게 할 수 없다는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지금 그가 정말로 호전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만약 그녀가 그를 만나러 갔다가 윤서원이 무언가를 입 밖에 낸다면, 그 팔찌 하나로 아무도 모르게 그를 죽일 수 있었다.그 팔찌는 윤수혁이 그녀에게 건네준 것이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한 적은 없었다.윤수혁의 물건으로 윤서원을 죽인다라...그녀도 본래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은보가 물건을 가져오자, 신수빈은 그것을 손목에 끼며 말했다.“너희 둘 다 나와 함께 가자. 왕야께서 내 곁에 암위를 붙여두긴 했지만, 여긴 후작부 내택이다. 그들이 늘 곁에 붙어 있을 수도 없고, 무슨 일이 생겨도 곧장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할 거다.”두 사람은 짧게 대답하고,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채 그녀를 따랐다.윤서원이 머물고 있는 별채는 비교적 외진 곳에 있었고, 평소에는 평양후 쪽 사람들이 지키고 있어 다른 이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다.신수빈이 도착하자 누군가가 안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금자와 은보가 함께 들어가려 하자, 문 앞에서 제지당했다.그 모습을 본 신수빈은 막 내딛던 발을 거두었다.“이 아이들은 내 곁을 지키는 시녀들이다. 어째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냐?”“후작의 명입니다.”신수빈은 코웃음을 쳤다.“그렇다면 나도 들어가지 않겠다.”그녀가 그대로 돌아서려는 순간,안쪽에서 평양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여보내거라.”문지기들은 더 이상 금자와 은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48화

    금자는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도대체 왜죠!”신수빈은 옅게 웃을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신격처럼 떠받들어지는 절대적인 황권은 누구도 쉽게 흔들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기다려라. 그렇다면 하나씩, 차근차근 너희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 주겠다.’이도현에게 시간이 없는 것처럼, 신수빈에게도 여유는 없었다.지금의 윤 가는 이미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었다.큰 마님은 세상을 떠났고, 서 씨는 광기에 빠졌으며, 둘째 마님은 내쫓긴 데다 친정까지 죄를 받아 몰락했다. 이제 셋째 마님마저 형옥에 끌려간 뒤 아무 소식도 없었다.삼방 쪽에서는 몇 차례나 사람을 보내왔고, 셋째 대감과 넷째 도련님 일가도 여러 번 창란원에 찾아와, 신수빈에게 호국부인의 이름으로 청을 넣어달라 부탁했다. 하지만 신수빈은 단호히 모두 돌려보냈다.“숙부님, 도련님, 참 우스운 말씀을 하십니다. 제게 무슨 낯이 있어 호국부인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천자의 노여움을 산 사람을 구하겠습니까?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숙모님 곁에 있던 유모는 제가 아이를 낳던 날 부자를 들고 와 독을 쓰려 했고, 다른 이들과 짜고 저를 암살하려 했습니다. 제가 왜 그런 사람을 구해야 합니까?”“수빈아,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 아니냐. 이번 일을 겪었으니,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게다.”“제 목숨은 단 한 번뿐입니다. 누군가의 인성을 다시 시험해볼 만큼 가볍지 않아요. 숙부님, 도련님, 저는 산후라 몸이 좋지 않으니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신수빈의 거절은 더없이 분명했다.셋째 대감은 속으로 분노를 삼키면서도 감히 드러내지 못했고, 넷째 도련님은 어쩔 수 없이 윤수혁을 찾아갔다.윤수혁은 지금 금군에서 요직을 맡아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그의 말을 들은 윤수혁은 짧게 물었다.“둘째 제수씨는 뭐라 하더냐?”넷째 도련님이 신수빈의 말을 그대로 전하자, 윤수혁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네 형수가 말을 제대로 안 했느냐, 아니면 네가 사람 말을 못 알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47화

    황권이 절대적인 시대에, 천명이 깃드는 것은 곧 신앙과도 같았다.그것은 조정 대신들뿐 아니라 백성들 모두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믿음이기도 했다.애초에 그들의 믿음 속에서 천명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었다.만약 백성들이 천자에 대한 공경을 잃게 된다면, 세상은 곧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다.전 왕조가 바로 그러했다.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권좌에 올랐기에,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공경이 사라져 있었다.만약 천자와 그 어머니가 신성한 자리에서 끌어내려지고, 그 일이 세상에 퍼진다면 백성과 조정 대신들의 믿음은 흔들릴 것이다.이는 역대 왕조마다 이어져 온 규범이며, 누구도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따르고 지켜온 질서였다.또한 바로 그 때문에, 예언과 하늘의 경고는 백성들 마음속에서 황권보다 더 무겁게 받아들여졌다.그들은 예언 한마디에도 동요했고, 때로는 반란까지 꿈꾸게 되었다.나라를 안정시키는 일은 곧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이었다.이것이 바로 왕도였다.이도현은 어려서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황형이 세상을 떠난 뒤, 그에게 자식이 있음에도 자신이 왕위를 잇는다면 형이 죽고 아우가 뒤를 잇는 형국이 되어 명분이 서지 않았다. 아직 평정되지 않은 천하는 다시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그래서 그는 어린 천자를 즉위시켰다.그래야만 이 강산을 더 확실히 장악하고, 끝내 하나로 통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기에 그는 태후를 단번에 죄로 다스릴 수 없었다.그저 ‘병이 들었다’고 하게 한 뒤, 훗날 ‘세상을 떠났다’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장월의 작위를 빼앗듯 정식으로 죄를 묻는 방식은 선택할 수 없는 일이었다.오직 ‘하늘’만이 ‘천자의 어머니’를 벌할 수 있을 뿐이었다.신수빈은 이런 이치를 알지 못했지만, 이도현은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눈앞의 혼란은 반드시 수습해야 했고, 더 이상 사태가 번져 백성들 사이로 퍼져 나가게 둘 수는 없었다.금군이 셋째 마님을 끌어낸 뒤, 내관이 천자의 조칙을 전했다.윤씨 셋째 마님 유씨는 어전에서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52화

    “왕야, 저는 지금도 여전히 윤서원의 부인입니다. 그가 이렇게 된 마당에 계속 이곳에 둘 수는 없지요. 우선 그를 데리고 함께 장안으로 돌아가려 합니다.”이도현은 원래 신수빈을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곧 선황의 제향을 준비해야 했고 그녀를 돌볼 시간도 없었으며 호심도에서와 같은 일이 또 생길까 두려워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어제 크게 놀랐으니 오늘은 편히 쉬거라. 내일 본왕이 사람을 보내 너를 데려가게 하겠다.”“왕야께서 정사에 바쁜데 굳이 마음을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금자와 은보만 함께하면 됩니다.”이도현이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53화

    잠에서 깨어난 윤서령은 온몸에 멍 자국이 가득한 채 알몸으로 침상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는 애써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희미하게 떠오르는 건 이도현이 사람들을 시켜 자신에게 억지로 약을 들이부었던 순간뿐, 그 뒤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몸을 조금 움직이자 하필 그곳에서 참기 힘든 통증이 밀려왔다. 윤서령의 뺨이 이내 붉게 달아올랐다.‘섭정왕께서 당시 꽤 화가 나 보였는데 결국은 나를 총애했단 말인가?’어제 입었던 옷은 이미 찢겨 입을 수 없게 되었고 곁에는 새 옷 한 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윤서령은 아랫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49화

    마님이 걱정할까 두려웠던 금자는 섭정왕의 좌시위에게 부탁해 많은 상처약을 보내오게 했다. 신수빈은 이도현의 겉옷을 벗기고 조심스레 피 묻은 속옷을 벗겼다. 검은 겉옷에서는 피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연한 속옷은 그의 상처를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오른팔의 속옷은 거의 붉게 젖어 있었고 찰나의 그 한 번 움켜쥔 것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신수빈은 이전에 감싸 두었던 붕대를 한 겹씩 벗겼다. 비록 눈앞의 이 남자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차디찬 뼈가 드러난 상처는 그녀조차도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이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50화

    “본왕이 너를 대하는 것이 아직도 부족하단 말이냐?”억지로 화를 내는 그의 목소리에는 본래의 위협이라곤 전혀 없었다. 귓가에 스치듯 낮고 허스키하게 들려오는 음성에 신수빈은 자연스레 그의 진짜 감정을 분간할 수 있었다.“족합니다. 한데 남녀의 일에서 좋고 나쁘다는 기준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자신만큼은 그 속에 담긴 차가움과 따뜻함을 아는 법이지요. 저도 한때는 꿈꾸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과 혼례를 올리고 서로 의지하며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을요. 한데 저는 결국 잡으려 하면 흩어지고 닿으려 하면 멀어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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