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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Penulis: 정대천

제1화

Penulis: 정대천
연회의 막이 내림과 동시에 그들은 어엿한 부부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뜨거운 열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신수빈은 의식이 점점 흐릿해지다 못해 하늘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몸을 돌리거라."

어둠 속에서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짐승이 낮게 울부짖는 소리처럼 수컷의 매서운 기운을 띄고 있었다.

술에 취한 탓인지, 정신이 혼미한 탓인지, 신수빈은 지아비의 목소리가 전과는 다르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도 아마 평소의 자태를 유지하긴 어려웠을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진이 빠질 대로 빠진 터였다.

정신이 까마득해질 무렵, 신수빈은 건장한 사내의 품에 안기며 떨리는 팔로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서방님, 그만하시지요..."

그러나, 굶주린 늑대처럼 허기를 채우기 바빴던 그에게 애달픈 여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유독 긴 밤이었다...

*

단잠에서 깬 신수빈이 몸을 일으키려던 무렵,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방안을 뛰어 들어왔다.

"마님, 제발 도련님을 구해주십시오."

유모가 백지장 같은 얼굴을 한 채, 급히 달려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리께서 도사의 말을 듣고, 도련님을 강제로 끌고 가 불에 태워 죽이려 합니다!"

그 말에 벌떡 일어난 신수빈이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늘따라 세상 만물을 태우려는 듯 햇볕은 유난히 뜨거웠다.

곳곳에 풍기는 웅황(雄黃)의 향 속에, 미친 듯이 달려 평양 후부(平陽侯府)의 뒷마당에 당도한 신수빈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서방님, 연우는 서방님 친자식인데 어찌 저 도사의 말만 믿고 이런 짓을 하시는 겁니까!”

“멈춰라, 당장 멈추지 못할까?"

신수빈은 어린 아들에게 달려가고 싶었으나, 건장한 하인들에게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이제 겨우 다섯 살인 윤연우의 애원하는 목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머니, 살려주세요... 어머니... 뱀이 있습니다... 전 요괴가 아닙니다... 살려주세요..."

그럼에도 문지기는 짐짝 다루듯 매정하게 아이를 관(棺)에 밀어 넣었다.

다시 일어서기에 어린 몸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관 뚜껑을 닫고, 못을 박아라!"

어린 자식의 울부짖음에도 윤서원은 관심 없다는 듯, 뒷짐을 진 채 시종일관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와 달리, 관 뚜껑이 닫히려는 찰나에 신수빈은 안간힘으로 하인들에게서 벗어나 문지기들을 뿌리치고, 두려움에 벌벌 떠는 어린 자식을 품에 꼭 껴안았다.

"미치셨습니까! 우리 아들입니다! 제가 열 달을 품어 낳은 아이란 말입니다! 저자가…"

떨리는 손으로 윤서원 곁에 서 있는 도사를 가리키는 신수빈의 두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저자가 나쁜 마음을 품고, 후부의 적자를 해하려는 겁니다!"

말을 마친 그녀의 눈에 마찬가지로 윤서원의 곁에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윤서원의 첩 주서화였다.

"그리고 주서화! 저 도사는 주서화의 지시를 받고 우리 연우를 모함한 게 분명합니다! 연우가 사라져야 주서화 아들이 적자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말에 경멸의 시선으로 지켜보던 주서화가 곧장 가련하고 슬픈 표정으로 윤서원에게 몸을 돌렸다.

"언니가 어찌 저를 이리 모함할 수 있습니까? 도사님은 만인이 신봉하는 신선인 데다, 태후마마께서도 숭배하시는 분이십니다. 전 그냥 가문에 조용한 날이 없고, 대감마님께서도 갑작스레 세상을 뜨신 터라, 이는 분명 악귀의 짓이라 생각하여 도사님을 모신 것뿐입니다. 저도 태후마마 덕분에 겨우 도사님을 모셔 올 수 있었고, 요괴가 윤씨 가문 손아랫사람에게 탁생하여 산다는 말에 저도 제 아들 택이가 걱정 됐지만, 이 집안을 위해 협조해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헌데 도사님께선 요괴가 연우라고 하던데요. 저도 마음 아프지만 윤씨 가문을 위해서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어찌 이 일을 제 탓이라 하시는 겁니까?"

주서화는 흐느끼는 목소리와 슬픈 표정으로 신수빈의 품속에 안겨있는 윤연우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녀의 깊은 눈동자 속에 비치는 승자의 기쁨은 감춰지지 않았다.

신수빈도 알고 있었다. 눈앞의 도사라는 자는 궁을 드나들며 태후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자라는 걸.

그랬기에 지금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그저 소리 없는 아우성뿐이라는 걸.

절망이라는 가시넝쿨이 점점 더 그녀를 죄어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신수빈은 어린 자식을 품에 안은 채 허겁지겁 윤서원의 앞으로 걸어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에게 명했다.

"연우야, 어서... 넌 요괴가 아니라고 아버지께 말씀드리거라... 제발... 살려달라고 아버지께 애원하거라…"

"아버지... 아버지... 정말 소자를 버리시는 겁니까?"

작고 연약한 목소리로 애원하는 앳된 아이의 얼굴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면 책을 읽어드리라고, 어머니께서 서책을 외우게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분명 좋아하실 거라는 말에 아버지를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으셨지요... 아버지, 소자를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소자 앞으로 아버지 명만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소자는 뱀이 무섭습니다... 제발 절 관에 버리지 마십시오..."

윤서원은 신수빈의 품 안에 안긴 아이를 내려다봤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애원하는 아이의 눈동자에는 공포와 숭배, 그리고 간절함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신수빈도 마찬가지로 간절한 눈빛으로 윤서원이 그들 모자를 가여이 여기고 그간 부자의 정을 봐서라도 이 잔인한 짓을 멈추길 바랐다.

하지만, 윤서원은 옷자락을 잡은 아이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고 그 힘에 신수빈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게되었다.

"마님을 끌어내고, 저 요괴를 관에 가둬라!"

그 말에 신수빈은 아이를 꼭 껴안은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윤서원을 바라보며 연신 뒤로 물러섰지만 문지기와 하인들은 그녀의 품에서 어린아이를 데려가려고 곧장 다가왔다.

겁에 질려 몸을 바들바들 떨며 울부짖는 아이의 목소리는 한 어미를 미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신수빈은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 짐승처럼 아이를 뺏으려는 자들에게 날 선 이빨을 드러내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꺼지거라... 썩 꺼지지 못할까..."

몸부림을 친 탓에 그녀의 머리에 단단히 고정돼 있던 비녀가 떨어지며 그녀는 삽시에 산발이 되었다. 단정하던 대감 댁 마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 그녀의 모습은 미친 여인과 다름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문지기와 하인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윤서원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윤서원의 곁을 지키고 서 있던 주서화가 도사에게 눈짓하자, 도사가 냉큼 입을 열었다.

"나리, 단오의 (端午) 오시(午時)는 한 해 중 양기가 제일 왕성한 때입니다. 곧 오시가 다가오는데, 만에 하나 오시에 이 요괴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저로서도 방도가 없습니다."

윤서원은 점점 저무는 해와 미치광이 같은 신수빈을 어두운 눈빛으로 번갈아 보다 이내 결정을 내렸다.

"마님은 광증을 앓고 있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만에 하나 오시를 놓치거든 너희들도 순장 당할 줄 알거라!"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주서화가 하인들에게 눈짓했다.

주인의 명이 떨어졌기에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던 그들은 바늘로 신수빈의 몸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그럼에도 신수빈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어린 자식을 품에 꼭 껴안고 놓질 않았다.

'내가 이 손을 놓는 순간, 우리 연우는...'

고여오는 눈물에 윤서원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졌다.

그를 사모해 왔던 마음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사정없이 생채기를 내기 시작했고 절망과 증오라는 독이 결국 그녀를 만신창이로 만들고 말았다.

아이를 껴안고 있는 손이 강제로 잡아 당겨져 손가락 여섯 개가 부러지고 두 팔이 뒤틀려 골절된 상태가 된 신수빈은 더 이상 아이를 지킬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신수빈은 하인들에 의해 바닥에 짓눌린 채 굳게 닫히는 관을 보며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뙤약볕에 달궈진 청석판에 짓눌린 그녀의 얼굴은 아파왔고, 관속 아이의 처참한 울부짖음은 점차 작아지더니 이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도 않았다.

"소각, 멸령(滅靈), 녹골(銷骨)."

도사가 외우는 주문에 따라 관에 기름이 부어졌고, 관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그렇게 속절없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신수빈은 피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에 하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그녀를 억누르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속박에서 벗어난 그녀는 불길로 달려들었으나, 양팔이 부러진 탓에 온몸으로 관을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연우야, 어미가 왔다... 이 어미가 왔어."

그녀의 애타는 부름에 응하는 소리는 불꽃이 튀는 소리뿐, 아이의 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뜨거운 불길이 그녀의 옷과 머리를 태웠고, 그녀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연우야!"

단오의 정오임에도 불구하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소름이 끼치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한껏 울분을 토한 신수빈은 불길이 붙은 몸을 돌려 피눈물을 흘리며 윤서원을 향해 걸어갔다.

지옥에서 탈출한 악귀가 있다면 이 모습이 아니었을지...

"윤서원, 이 배은망덕한 자를 봤나! 감히 내 아들을 죽여? 악귀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 기필코 너희 가문을 멸시키고 말 테야!"

"막아라! 어서... 가까이 오지 못하게 어서 막아라!"

저주를 퍼부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신수빈의 모습에 윤서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고, 살아생전 이런 광경을 본 적 없던 문지기들도 순간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수빈이 덮칠 기세로 다가오자, 윤서원의 가까이에 서 있던 문지기가 검을 들어 그녀의 가슴을 향해 힘껏 찔러댔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윤서원과 주서화를 보호하며 뒤로 물러섰다.

순식간에 피눈물로 범벅된 가녀린 몸이 결국 줄 끊어진 연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불바다로 떨어지고 말았다.

"연우야, 미안하다... 이 어미가 못나서..."

타오르는 불꽃 소리에 신수빈의 마지막 목소리가 더해졌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신수빈은 어린 자식이 누워 있는 관을 향해 다가갔으나 결국 닿지 못한 채 두 눈을 감았다.

단 한 걸음...

단 한 걸음 차이였다.

그 짧은 한 걸음은 한 어미의 씻을 수 없는 미안함과 절망이었다.

*

모자가 죽고 나서 윤서원은 대사를 불러와 그들 모자의 유골을 뒷마당에 자리 잡은 쇄혼루(鎖魂樓:혼령을 가두는 건물)에 봉인시켰다.

신수빈은 죽고 나서야, 혼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쇄혼루에 갇힌 탓에 이도 저도 할 수 없었다.

화려한 누각이 그들 모자를 환생조차 할 수 없게 속박시킨 탓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갇혀있었을까.

일품 고명(诰命: 황제가 하사한 작위)의 차림을 한 주서화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웃으며 혼잣말하기 시작했다.

"7년 전 단오에, 평양 후부의 안채에 불이 붙어 평양후 세자의 본처 신수빈과 아이가 함께 숨을 거둔 일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얘기지. 처자식을 잃은 슬픔에 윤서원이 새 부인을 들이지 않고, 호화로운 누각을 세워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야. 하나, 이 얘기가 세간에 퍼지고 나서 신씨 가문 사람들이 무얼 했는지 알아?"

옅은 웃음을 짓던 주서화가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아니, 글쎄 모든 비용을 자처해서 내놓고 해마다 후부로 수많은 향불을 올리는 것 있지? 이 누각이 사실은 환생 못 하도록 혼을 가두는 곳이라는 걸 그들이 안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하, 안타깝게도 그들은 알 기회조차 없겠지만 말이야. 신씨 가문은 예로부터 나라를 상대할 만큼 부유했다지. 섭정왕이 남하(南下:남쪽으로 진출함)할 때 그를 도왔다는 이유로 그가 뒤를 봐주지 않았으면 진작에 처리되었을 것을."

"그래도 다행히 섭정왕이 7년 전에 사냥하다 낙마로 죽어준 탓에 태후마마께서 신씨 가문을 처리하기 시작하셨지. 부유하다 한들 힘이 없으면 어떤 결말을 맞는지는 언니도 잘 알 테지. 그 길은 죽음뿐이야."

"내 바람대로 신씨 가문은 몰락됐고, 가산은 국고로 충당되었어. 그 모든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윤서원이고. 태후마마께서는 그의 공을 높이 사셔 수공으로 봉하셨고, 나 또한 정실이 되어 이젠 일품 고명이 되었어. 언니가 살아서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필 그 잡종이랑 같이 죽어서는..."

"난 언니가 아직 그 잡종이, 언니와 윤서원이 낳은 자식이라 생각할까 봐 걱정이야. 윤서원이 내게 말했었거든, 실은 언니를 단 한 번도 품은 적 없다고 말이야."

"섭정왕이 어릴 적 태후마마를 연모했으나 품지 못하셨다지. 결국 그게 그의 한이 되었다 하더라고. 그걸 알고 있었던 윤서원이, 언니가 태후마마와 닮았다는 점에서 혼인 첫날밤에 순방영 지휘관의 직책과 언니를 맞바꾼 것이야."

"근데 언니가 회임할 줄 그 누가 알았겠어? 게다가 섭정왕이 죽은 마당에 윤서원이 그 잡종을 그냥 둘 리가!"

주서화는 제 할 말만 하고 입이 찢어지라 웃으며 자리를 떴다.

혼령이 되어 갇힌 신수빈은 필사적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누각을 벗어날 수 없었다.

오직 두 감정만이 그녀를 사로잡을 뿐.

윤서원과 혼인한 것에 대한 후회와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던 무력함.

'다음 생이 있다면, 내 반드시 이 모든 걸 되갚아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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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8화

    청하는 신수빈을 한 번 바라보더니,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마님, 오늘은 왕야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떠세요? 오늘 밤만이라도… 왕야 마음에 마님 생각이 깊이 남게 해 두시면, 훗날에도 쉽게 잊지는 못하실 테니까요.”말을 마치자마자 청하의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신수빈은 옅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그분이 원하는 건 내 얼굴뿐이다. 세상에 아름다운 여인은 얼마든지 많아. 그분이 정말 누군가를 마음에 두는 사람이었다면, 이십여 년 동안 후원을 비워 두었을 리가 없지.”신수빈은 이도현이 훗날 다른 여인을 들인다 해도 크게 마음 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청하에게 윤연우를 잘 돌봐 달라고 당부한 뒤, 더 머물지 않고 돌아섰다.출발하기로 한 날은 정월 스무 날이었다.그날은 유난히 눈이 거세게 쏟아졌지만, 윤서원은 끝내 길을 나서겠다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하지만 막 관이 윤부를 나서려던 순간, 궁에서 내시가 칙명을 전하러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윤서원과 신수빈을 입궁시키라는 전갈이었다.윤서원의 안색이 미묘하게 어두워졌다. 혹시라도 일이 틀어질까 싶었던 그는 곧장 앞으로 나섰다. “내관, 아버지의 영구를 고향으로 모셔 가야 하니 시간을 늦출 수 없습니다. 부디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내시는 그를 힐끗 내려다보더니 차갑게 되물었다.“네 아버지의 시간이 중하냐, 폐하의 명이 중하냐?”윤서원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결국 그는 더는 토를 달지 못하고 칙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입궁한 두 사람은 곧장 조회가 열리는 전각으로 이끌려 갔다. 아직 조회가 끝나지 않아, 백관들은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윤서원은 대전 한가운데 무릎을 꿇었다.신수빈은 호국부인으로서 초품 고명에 오른 몸이었기에, 군주 앞에서도 절을 면하고 대전 안에 그대로 서 있었다.백관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한꺼번에 쏠린 가운데, 윤서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폐하께서 신과 신의 부인을 이 자리에 부르신 연유를 여쭙고자 합니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7화

    이도현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굳게 다문 입매에도 미세하게 힘이 들어간 듯 보였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조직의 실체를 밝혀내거라. 문주가 누구인지도 반드시 알아내고! 그리고… 부인 쪽에 무비랑 암위를 몇 명 더 붙이거라.”“예.”지시를 마친 뒤에도 그는 한동안 손에 든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편지에는 윤서원이 집안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신수빈의 말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그의 긴 눈매가 깊게 가라앉았다. 무언가를 조용히 곱씹는 듯한 눈빛이었다.*이튿날 아침, 윤서원은 자신이 말한 대로 곧장 움직였다. 평양후의 세습 작위를 사양하겠다는 상소를 올리고, 상여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집안 사람들까지 모두 떠날 채비를 시켰다.이런 일은 조정이라 해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다.윤서원은 근정전 안에 서서, 상좌에 앉은 이도현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조용히 기다렸다.그가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이도현이 권세를 앞세워 남의 부인을 빼앗으려 드는 것.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가 두 사람을 간통한 남녀로 몰아가고, 결국 그 소문이 그들을 짓누르는 것이었다.긴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이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윤서원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도현과 눈이 마주쳤다.한참 뒤에야, 이도현이 입을 열었다.“허한다.”윤서원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신수빈이 그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결국 그 정도에 불과했던 모양이다.아무리 아끼는 여자라 해도, 높은 권세 앞에서는 그저 버릴 수 있는 패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신, 왕야께 감사드립니다. 폐하께도 감사드립니다. 신은 부인과 돌아가는 길에도 밤낮으로 왕야와 폐하의 안녕을 빌겠습니다.”윤서원은 겉으로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다.‘그 사람’이 말한 대로였다.신수빈을 장안에서 데려가기만 하면, 이도현이 억지로 빼앗으려 들 경우 조정 안팎의 여론이 그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했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6화

    눈앞의 사내는 한 번 손을 쓴 것만으로도 금자와 은보를 밀어낼 수 있었다.윤 가에 저만한 실력을 지닌 호위는 없었다. 평양후에게 그런 힘이 있었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그렇다면 대체 누구일까. 누가 윤서원을 살려 냈고, 저런 고수까지 붙여 그를 지키게 한 것일까.신수빈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그물이 자신을 중심으로 서서히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그물의 끝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윤서원이 더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그가 낮게 웃었다. 눈빛은 여전히 축축하고 음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지금 네 머릿속으로 어떻게 빠져나갈지 계산하고 있다는 것쯤은 안다. 그러니 나도 솔직히 말해 주지. 나는 너와 화이할 생각이 없다. 더더욱 너를 순순히 놓아줄 생각도 없고. 윤 가를 떠나 그 사내와 함께 도망쳐 살 생각이라면, 애초에 접어라. 정 데려가고 싶거든, 그자를 불러와 우리 집에서 직접 너를 빼앗아 가라 해. 설마 내가 너희 둘을 곱게 이어 주기라도 바란 건 아니겠지? 그런 꿈은 깨는 게 좋을 거야.”말을 마친 그는 더욱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내일이면 상소를 올려 평양후 세자의 작위를 내려놓을 것이다. 그리고 집안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너는 내 부인이니, 당연히 나를 따라야겠지. 어디 두고 보자. 저 높으신 섭정왕이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신하의 부인을 억지로 붙잡을 수 있을지.”그의 웃음소리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번져 갔다.한참을 웃던 윤서원은 신수빈의 얼굴에 당황이나 혼란이 떠오르길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나 끝내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자, 그는 비틀린 냉소를 흘렸다.“부인, 고향에 돌아가면… 부군으로서 아주 잘 대해 주지. 앞으로 함께할 날이 길지 않겠나?”윤서원은 그대로 돌아섰다.그가 창란원을 완전히 떠난 뒤에도, 신수빈은 꽉 쥔 두 손을 풀지 못한 채 한참을 서 있었다.이윽고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곧장 붓을 들어 편지를 썼다.“왕야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5화

    요 며칠 사이 장안성은 평양후의 죽음으로 떠들썩했다.청루에서 여인들과 어울리다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소문만으로도 충분히 입방아에 오를 일이었는데, 반신불수로 누워 있던 세자 윤서원이 회복해 장례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까지 더해졌다.그 바람에 조문을 온 친지들과 옛 인연이 있던 이들까지 모두 윤서원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윤서원이 회복된 일은 신수빈에게도 전혀 예상 밖이었다.그 며칠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평양후의 빈소에 나가지 않았고, 윤서원 역시 그녀의 처소를 찾아오지 않았다.이도현은 이 일이 길어질수록 더 복잡해질 것을 염려했다.그래서 서 씨 때처럼 조칙을 내려, 신수빈을 윤 가와 갈라서게 하려 했다.훗날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 상대가 이도현이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졌다.그 일은 반드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터였다.윤 가에서 잇달아 벌어진 사건, 가문의 몰락, 신수빈이 거듭 받은 봉작, 신 가에 더해진 영광까지 한데 엮이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 안에서 다른 뜻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예로부터 사람들의 상상력은 결코 부족한 적이 없었다.찻집과 주루의 이야기꾼들은 한가할 때마다 권세가의 기묘한 소문을 끌어와 입맛대로 살을 붙이곤 했다.이도현이 그런 식으로 일을 밀어붙인다면, 스스로 제 명성을 깎아내리는 꼴이 될 수 있었다.섭정왕이 신하의 부인을 억지로 빼앗았다는 말, 신 씨가 윤 가를 해쳤다는 말, 그 밖의 온갖 억측과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질 것이 뻔했다.백성들의 마음속에서 더 이상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면, 그가 내리는 명령 역시 예전만 한 힘을 갖기 어려웠다.신수빈은 바로 그 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이도현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오히려 누구보다 권세의 이치를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 이 정도를 모를 리 없었다.술에 취해 있던 순간에는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했을지라도, 술이 깨고 난 뒤에는 그 방법이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4화

    이도현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신수빈은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그녀의 얼굴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눈빛에는 억눌린 증오가 서늘하게 번뜩였다.잠시 입술을 굳게 다문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저께… 그 늙은 개가 윤서원이 깨어났다며 저를 불렀습니다. 제가 방심한 틈을 타 함정을 파 놓았더군요. 독한 미약을 써서 금자와 은보까지 모두 쓰러뜨리고… 저를 범해 윤 가의 아이를 낳게 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후작부의 대를 잇게 하려 한 것이지요. 다행히 그곳에 가기 전 미리 대비해 팔찌를 차고 있었고… 그자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독을 써서 죽였습니다.”그자가 그녀를 탐하려 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도현의 온몸이 그대로 굳어졌다.방 안의 공기마저 한순간에 얼어붙은 듯 숨 막히게 가라앉았다.신수빈은 처음으로 그의 몸에서 이토록 서늘하고 노골적인 살의를 느꼈다.이도현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 했다.신수빈이 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왕야, 어디로 가십니까?”“본왕이 그자를 뼛가루도 남기지 않고 짓이겨 놓겠다!”신수빈은 낮게 웃으며, 아직 술기운이 남아 있는 그를 다시 끌어당겼다.“이미 벌은 받았잖아요. 윤 가 사람들은 체면과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고, 이익 앞에서는 눈이 멀어 버리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죽어서 그런 꼴을 당하고, 그런 오명까지 뒤집어썼으니 저는 이미 충분히 속이 풀렸어요.”이도현은 돌아서서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그의 눈빛에는 짙은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그런 일을 당하고도, 왜 본왕에게 알리지 않았느냐.”“왕야께서 바쁘시기도 했고… 이미 끝난 일이었으니까요.”이도현은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깊게 가라앉아 있던 눈빛 끝에서, 결국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그는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빈아… 이제는 내게 시집오너라. 더는 너를 이런 늑대굴에 혼자 둘 수 없다.”이 깊은 내택 안에서는 곁에 붙어 있는 시녀들조차 언제든 계략에 휘말릴 수 있었다.암위는 사내라 그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3화

    청루 같은 곳에서 하룻밤 새 수많은 여인을 끼고 놀다가 제 명을 재촉한 일은, 개국 이래 처음이었다.둘째 대감과 셋째 대감 역시 낯뜨거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듯, 더는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집안에서는 곧바로 빈소를 차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 윤씨 큰 마님의 장례를 치른 터라, 준비해야 할 것들 중 상당수는 이미 갖춰져 있었다.신수빈은 방 안에서 금자가 전해 주는 바깥 소란을 들으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때 바깥에서 시녀 하나가 들어와 아뢰었다.“마님, 큰 도련님을 보좌하는 무혁이 와서 내원 대패를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마님께서는 병환 중이시니 이번 후작의 장례에는 참석하지 않으셔도 되고, 이곳에서 몸을 추스르시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장례는 큰 도련님께서 모두 맡으신답니다.”신수빈은 본래도 그 늙은 개의 장례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삼베옷을 걸치고 곡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그녀는 은보에게 대패를 무혁에게 넘기게 하고, 장례 일은 윤수혁에게 맡겨 두었다.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윤수혁이 평양후를 이런 방식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것은, 그를 향한 원망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는 일이었다.하지만 이렇게 복수했다 한들, 앞으로 윤수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그는 분명 평양후의 아들이었다. 부친의 평판은 그의 앞날은 물론, 혼사와 출세에까지 영향을 미칠 터였다.그는 이미 적지 않은 나이였다.그동안 떠돌며 지내다가, 이제 겨우 조정에 발을 들여 관직도 얻었고, 총애 또한 받고 있어서 장래가 밝았다.그리고 이제는 혼사도 생각해야 할 텐데…윤 가의 이런 평판은 결코 그에게 이로울 것이 없었다.이도현이 윤 가의 일을 들은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요 며칠 동안 그는 이방 사신들을 접견하고, 각지의 관리들과 변경의 장수들을 맞이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섣달그믐 밤에 헤어진 뒤로는 아직 신수빈을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그런데 이날 밤 연회 자리에서 뜻밖에도 윤 가의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20화

    이도현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신수빈은 그의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사람을 불러 가마를 준비하게 했다. 그와 동시에 윤서원의 옷이 들어 있는 상자 몇 개도 뒤쪽 문으로 옮겨 수레에 싣게 했다.“수레는 뒤문에 놓거라. 오늘은 좀 피곤하니 가마는 안뜰까지 들이게 하고. 나는 가마를 타고 나가겠다.”청하를 비롯해 가까이에서 시중드는 이들은 모두 사정을 알고 있었다.상자들을 모두 내보낸 뒤에야 뜰 안의 다른 사람들을 물리고 두 사람을 밖으로 안내했다.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신수빈은 이도현과 함께 가마에 타고 나가 출문한 뒤에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23화

    이도현이 서원 안으로 들어서자 관리로 보이는 차림의 인물이 그를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처음에는 학문을 배우러 온 유생이라 여겼던 듯했으나 이도현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기골이 장대하고 기운이 단정하며 한눈에 보아도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몸에 걸친 옷차림은 지극히 수수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만큼은 옷자락으로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실례지만 어느 분이십니까?”그는 자기도 모르게 공손한 어조가 섞여 나왔다.“본… 그냥 들러 본 것이다.”이도현이 애써 담담하게 답하자, 관리인은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09화

    둘째 마님은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하마터면 웃어른의 체면조차 지키지 못할 뻔했다.“그건 너나 쓰거라!”그러나 신수빈은 오히려 더 짙은 웃음을 지었다. 한껏 무르익은 그 미모에 햇살을 머금은 듯한 눈동자가 번뜩여 한 번만 마주쳐도 마음이 환해질 정도였다.“그렇기도 하겠네요. 이방은 이제 후부와 살림을 따로 꾸리고 있으니 둘째 숙모처럼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성품이라면 제 친정 물건을 받는 것도 내키지 않으실 테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합니다. 제게 아직 몇 장 남아 있는데 혹시 숙모 댁의 하인들이 좋아한다면 원가로 드리겠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11화

    그는 기병 차림을 하고 있었다. 마치 밤이슬의 습기가 그대로 배어든 듯, 눈썹과 눈매에는 달빛의 맑은 기운이 있어 차갑지만, 온화한 기색 또한 어려있었다.그는 지금 탁자 앞에 앉아 있었고 그녀는 얇은 옷차림에 젖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물기가 은은히 얼굴에 서려 복숭앗빛 뺨과 고운 안색이 반쯤 드러난 모습은 요염하면서도 아리따웠다.천하에 더할 나위 없는 절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의 눈에는 오직 그녀만이 비출 뿐이었다.그는 수년간 전장을 누볐다. 대군이 어느 땅에 이르든 현지의 주둔 장수나 지방 관원이 으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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