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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Author: 정대천

제1화

Author: 정대천
연회의 막이 내림과 동시에 그들은 어엿한 부부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뜨거운 열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신수빈은 의식이 점점 흐릿해지다 못해 하늘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몸을 돌리거라."

어둠 속에서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짐승이 낮게 울부짖는 소리처럼 수컷의 매서운 기운을 띄고 있었다.

술에 취한 탓인지, 정신이 혼미한 탓인지, 신수빈은 지아비의 목소리가 전과는 다르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도 아마 평소의 자태를 유지하긴 어려웠을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진이 빠질 대로 빠진 터였다.

정신이 까마득해질 무렵, 신수빈은 건장한 사내의 품에 안기며 떨리는 팔로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서방님, 그만하시지요..."

그러나, 굶주린 늑대처럼 허기를 채우기 바빴던 그에게 애달픈 여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유독 긴 밤이었다...

*

단잠에서 깬 신수빈이 몸을 일으키려던 무렵,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방안을 뛰어 들어왔다.

"마님, 제발 도련님을 구해주십시오."

유모가 백지장 같은 얼굴을 한 채, 급히 달려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리께서 도사의 말을 듣고, 도련님을 강제로 끌고 가 불에 태워 죽이려 합니다!"

그 말에 벌떡 일어난 신수빈이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늘따라 세상 만물을 태우려는 듯 햇볕은 유난히 뜨거웠다.

곳곳에 풍기는 웅황(雄黃)의 향 속에, 미친 듯이 달려 평양 후부(平陽侯府)의 뒷마당에 당도한 신수빈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서방님, 연우는 서방님 친자식인데 어찌 저 도사의 말만 믿고 이런 짓을 하시는 겁니까!”

“멈춰라, 당장 멈추지 못할까?"

신수빈은 어린 아들에게 달려가고 싶었으나, 건장한 하인들에게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이제 겨우 다섯 살인 윤연우의 애원하는 목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머니, 살려주세요... 어머니... 뱀이 있습니다... 전 요괴가 아닙니다... 살려주세요..."

그럼에도 문지기는 짐짝 다루듯 매정하게 아이를 관(棺)에 밀어 넣었다.

다시 일어서기에 어린 몸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관 뚜껑을 닫고, 못을 박아라!"

어린 자식의 울부짖음에도 윤서원은 관심 없다는 듯, 뒷짐을 진 채 시종일관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와 달리, 관 뚜껑이 닫히려는 찰나에 신수빈은 안간힘으로 하인들에게서 벗어나 문지기들을 뿌리치고, 두려움에 벌벌 떠는 어린 자식을 품에 꼭 껴안았다.

"미치셨습니까! 우리 아들입니다! 제가 열 달을 품어 낳은 아이란 말입니다! 저자가…"

떨리는 손으로 윤서원 곁에 서 있는 도사를 가리키는 신수빈의 두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저자가 나쁜 마음을 품고, 후부의 적자를 해하려는 겁니다!"

말을 마친 그녀의 눈에 마찬가지로 윤서원의 곁에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윤서원의 첩 주서화였다.

"그리고 주서화! 저 도사는 주서화의 지시를 받고 우리 연우를 모함한 게 분명합니다! 연우가 사라져야 주서화 아들이 적자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말에 경멸의 시선으로 지켜보던 주서화가 곧장 가련하고 슬픈 표정으로 윤서원에게 몸을 돌렸다.

"언니가 어찌 저를 이리 모함할 수 있습니까? 도사님은 만인이 신봉하는 신선인 데다, 태후마마께서도 숭배하시는 분이십니다. 전 그냥 가문에 조용한 날이 없고, 대감마님께서도 갑작스레 세상을 뜨신 터라, 이는 분명 악귀의 짓이라 생각하여 도사님을 모신 것뿐입니다. 저도 태후마마 덕분에 겨우 도사님을 모셔 올 수 있었고, 요괴가 윤씨 가문 손아랫사람에게 탁생하여 산다는 말에 저도 제 아들 택이가 걱정 됐지만, 이 집안을 위해 협조해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헌데 도사님께선 요괴가 연우라고 하던데요. 저도 마음 아프지만 윤씨 가문을 위해서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어찌 이 일을 제 탓이라 하시는 겁니까?"

주서화는 흐느끼는 목소리와 슬픈 표정으로 신수빈의 품속에 안겨있는 윤연우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녀의 깊은 눈동자 속에 비치는 승자의 기쁨은 감춰지지 않았다.

신수빈도 알고 있었다. 눈앞의 도사라는 자는 궁을 드나들며 태후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자라는 걸.

그랬기에 지금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그저 소리 없는 아우성뿐이라는 걸.

절망이라는 가시넝쿨이 점점 더 그녀를 죄어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신수빈은 어린 자식을 품에 안은 채 허겁지겁 윤서원의 앞으로 걸어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에게 명했다.

"연우야, 어서... 넌 요괴가 아니라고 아버지께 말씀드리거라... 제발... 살려달라고 아버지께 애원하거라…"

"아버지... 아버지... 정말 소자를 버리시는 겁니까?"

작고 연약한 목소리로 애원하는 앳된 아이의 얼굴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면 책을 읽어드리라고, 어머니께서 서책을 외우게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분명 좋아하실 거라는 말에 아버지를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으셨지요... 아버지, 소자를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소자 앞으로 아버지 명만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소자는 뱀이 무섭습니다... 제발 절 관에 버리지 마십시오..."

윤서원은 신수빈의 품 안에 안긴 아이를 내려다봤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애원하는 아이의 눈동자에는 공포와 숭배, 그리고 간절함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신수빈도 마찬가지로 간절한 눈빛으로 윤서원이 그들 모자를 가여이 여기고 그간 부자의 정을 봐서라도 이 잔인한 짓을 멈추길 바랐다.

하지만, 윤서원은 옷자락을 잡은 아이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고 그 힘에 신수빈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게되었다.

"마님을 끌어내고, 저 요괴를 관에 가둬라!"

그 말에 신수빈은 아이를 꼭 껴안은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윤서원을 바라보며 연신 뒤로 물러섰지만 문지기와 하인들은 그녀의 품에서 어린아이를 데려가려고 곧장 다가왔다.

겁에 질려 몸을 바들바들 떨며 울부짖는 아이의 목소리는 한 어미를 미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신수빈은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 짐승처럼 아이를 뺏으려는 자들에게 날 선 이빨을 드러내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꺼지거라... 썩 꺼지지 못할까..."

몸부림을 친 탓에 그녀의 머리에 단단히 고정돼 있던 비녀가 떨어지며 그녀는 삽시에 산발이 되었다. 단정하던 대감 댁 마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 그녀의 모습은 미친 여인과 다름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문지기와 하인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윤서원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윤서원의 곁을 지키고 서 있던 주서화가 도사에게 눈짓하자, 도사가 냉큼 입을 열었다.

"나리, 단오의 (端午) 오시(午時)는 한 해 중 양기가 제일 왕성한 때입니다. 곧 오시가 다가오는데, 만에 하나 오시에 이 요괴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저로서도 방도가 없습니다."

윤서원은 점점 저무는 해와 미치광이 같은 신수빈을 어두운 눈빛으로 번갈아 보다 이내 결정을 내렸다.

"마님은 광증을 앓고 있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만에 하나 오시를 놓치거든 너희들도 순장 당할 줄 알거라!"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주서화가 하인들에게 눈짓했다.

주인의 명이 떨어졌기에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던 그들은 바늘로 신수빈의 몸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그럼에도 신수빈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어린 자식을 품에 꼭 껴안고 놓질 않았다.

'내가 이 손을 놓는 순간, 우리 연우는...'

고여오는 눈물에 윤서원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졌다.

그를 사모해 왔던 마음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사정없이 생채기를 내기 시작했고 절망과 증오라는 독이 결국 그녀를 만신창이로 만들고 말았다.

아이를 껴안고 있는 손이 강제로 잡아 당겨져 손가락 여섯 개가 부러지고 두 팔이 뒤틀려 골절된 상태가 된 신수빈은 더 이상 아이를 지킬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신수빈은 하인들에 의해 바닥에 짓눌린 채 굳게 닫히는 관을 보며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뙤약볕에 달궈진 청석판에 짓눌린 그녀의 얼굴은 아파왔고, 관속 아이의 처참한 울부짖음은 점차 작아지더니 이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도 않았다.

"소각, 멸령(滅靈), 녹골(銷骨)."

도사가 외우는 주문에 따라 관에 기름이 부어졌고, 관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그렇게 속절없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신수빈은 피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에 하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그녀를 억누르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속박에서 벗어난 그녀는 불길로 달려들었으나, 양팔이 부러진 탓에 온몸으로 관을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연우야, 어미가 왔다... 이 어미가 왔어."

그녀의 애타는 부름에 응하는 소리는 불꽃이 튀는 소리뿐, 아이의 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뜨거운 불길이 그녀의 옷과 머리를 태웠고, 그녀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연우야!"

단오의 정오임에도 불구하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소름이 끼치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한껏 울분을 토한 신수빈은 불길이 붙은 몸을 돌려 피눈물을 흘리며 윤서원을 향해 걸어갔다.

지옥에서 탈출한 악귀가 있다면 이 모습이 아니었을지...

"윤서원, 이 배은망덕한 자를 봤나! 감히 내 아들을 죽여? 악귀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 기필코 너희 가문을 멸시키고 말 테야!"

"막아라! 어서... 가까이 오지 못하게 어서 막아라!"

저주를 퍼부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신수빈의 모습에 윤서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고, 살아생전 이런 광경을 본 적 없던 문지기들도 순간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수빈이 덮칠 기세로 다가오자, 윤서원의 가까이에 서 있던 문지기가 검을 들어 그녀의 가슴을 향해 힘껏 찔러댔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윤서원과 주서화를 보호하며 뒤로 물러섰다.

순식간에 피눈물로 범벅된 가녀린 몸이 결국 줄 끊어진 연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불바다로 떨어지고 말았다.

"연우야, 미안하다... 이 어미가 못나서..."

타오르는 불꽃 소리에 신수빈의 마지막 목소리가 더해졌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신수빈은 어린 자식이 누워 있는 관을 향해 다가갔으나 결국 닿지 못한 채 두 눈을 감았다.

단 한 걸음...

단 한 걸음 차이였다.

그 짧은 한 걸음은 한 어미의 씻을 수 없는 미안함과 절망이었다.

*

모자가 죽고 나서 윤서원은 대사를 불러와 그들 모자의 유골을 뒷마당에 자리 잡은 쇄혼루(鎖魂樓:혼령을 가두는 건물)에 봉인시켰다.

신수빈은 죽고 나서야, 혼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쇄혼루에 갇힌 탓에 이도 저도 할 수 없었다.

화려한 누각이 그들 모자를 환생조차 할 수 없게 속박시킨 탓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갇혀있었을까.

일품 고명(诰命: 황제가 하사한 작위)의 차림을 한 주서화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웃으며 혼잣말하기 시작했다.

"7년 전 단오에, 평양 후부의 안채에 불이 붙어 평양후 세자의 본처 신수빈과 아이가 함께 숨을 거둔 일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얘기지. 처자식을 잃은 슬픔에 윤서원이 새 부인을 들이지 않고, 호화로운 누각을 세워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야. 하나, 이 얘기가 세간에 퍼지고 나서 신씨 가문 사람들이 무얼 했는지 알아?"

옅은 웃음을 짓던 주서화가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아니, 글쎄 모든 비용을 자처해서 내놓고 해마다 후부로 수많은 향불을 올리는 것 있지? 이 누각이 사실은 환생 못 하도록 혼을 가두는 곳이라는 걸 그들이 안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하, 안타깝게도 그들은 알 기회조차 없겠지만 말이야. 신씨 가문은 예로부터 나라를 상대할 만큼 부유했다지. 섭정왕이 남하(南下:남쪽으로 진출함)할 때 그를 도왔다는 이유로 그가 뒤를 봐주지 않았으면 진작에 처리되었을 것을."

"그래도 다행히 섭정왕이 7년 전에 사냥하다 낙마로 죽어준 탓에 태후마마께서 신씨 가문을 처리하기 시작하셨지. 부유하다 한들 힘이 없으면 어떤 결말을 맞는지는 언니도 잘 알 테지. 그 길은 죽음뿐이야."

"내 바람대로 신씨 가문은 몰락됐고, 가산은 국고로 충당되었어. 그 모든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윤서원이고. 태후마마께서는 그의 공을 높이 사셔 수공으로 봉하셨고, 나 또한 정실이 되어 이젠 일품 고명이 되었어. 언니가 살아서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필 그 잡종이랑 같이 죽어서는..."

"난 언니가 아직 그 잡종이, 언니와 윤서원이 낳은 자식이라 생각할까 봐 걱정이야. 윤서원이 내게 말했었거든, 실은 언니를 단 한 번도 품은 적 없다고 말이야."

"섭정왕이 어릴 적 태후마마를 연모했으나 품지 못하셨다지. 결국 그게 그의 한이 되었다 하더라고. 그걸 알고 있었던 윤서원이, 언니가 태후마마와 닮았다는 점에서 혼인 첫날밤에 순방영 지휘관의 직책과 언니를 맞바꾼 것이야."

"근데 언니가 회임할 줄 그 누가 알았겠어? 게다가 섭정왕이 죽은 마당에 윤서원이 그 잡종을 그냥 둘 리가!"

주서화는 제 할 말만 하고 입이 찢어지라 웃으며 자리를 떴다.

혼령이 되어 갇힌 신수빈은 필사적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누각을 벗어날 수 없었다.

오직 두 감정만이 그녀를 사로잡을 뿐.

윤서원과 혼인한 것에 대한 후회와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던 무력함.

'다음 생이 있다면, 내 반드시 이 모든 걸 되갚아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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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신병문이 마차 밖을 향해 묻자 마부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사유는 알 수 없으나 정오 무렵부터 갑자기 성문을 닫고 출입을 금했습니다.”신수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오늘 무슨 큰일이 있을 리가 있나?신수빈은 자신의 마부를 보내 평양후의 명호를 밝히게 했다. 그러자 성루 위에서 귀찮다는 듯한 고함이 떨어졌다.“상부의 명령 없이는 출입 금지라 했다!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그때, 성문을 지키던 노병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예전에 사가에서 신 씨 가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자였다. 그는 신 씨 쪽에서 건넨 은전을 받아 쥐고는 목소리를 낮춰 귀띔했다.“사대부님, 오늘 성 안에서 사건 수사가 있어 오늘은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당분간은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해 지기 전이니 성 밖 별장에서 며칠 머무르시지요. 삼오일 안에는 성문이 다시 열릴 겁니다.”신병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신 씨 집안의 위상이 아직은 미미한 이상 성문을 지키는 장수가 사정을 봐줄 리 없었다. 성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관의 일을 그가 좌우할 수는 없는 노릇.“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마침 경교에 신 씨 가문의 별장이 있었기에 일행은 우선 그곳으로 몸을 피하려고 했다. 가족을 맞이하는 기쁜 길이 이렇게 막힐 줄은 몰랐지만 조정의 일 앞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들이 방향을 돌리려는 순간, 성루 위에서 갑작스러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성문을 열어라! 어서 열어라!”주홍빛 동못이 박힌 거대한 성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자 성 안에서 차가운 철갑을 두른 기병 한 기가 번개처럼 튀어나왔다.길 양옆에 서 있던 군졸들이 성문 앞에 몰려 있던 백성들을 급히 몰아냈고 신 씨 가문의 마차들 역시 한쪽으로 밀려났다.말발굽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했다.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에 체구가 크고 갑주가 서늘한 철기병들이 호랑이 울음 같은 기세로 성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선두에서 달리던 남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03화

    신수빈은 그쪽으로 걸어갔는데, 형수는 이미 마차에서 내려와 있었다. 신수빈은 마치 아이처럼 그녀를 끌어안은 채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형수는 처음엔 그저 시집온 뒤 몇 달 동안 떨어져 지내며 그리웠던 탓이려니 생각해,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달래주었다.그러나 울음이 좀처럼 그치지 않자, 점점 마음이 다급해졌다.혹시... 수빈이가 그동안 힘들게 지낸 건 아닐까?정 씨는 고개를 들어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신병문은 아내의 눈빛에 담긴 의문을 알아차리고는, 신수빈에게 낮게 말했다.“수빈아, 이제 그만 울어라. 앞으로는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도 곧 나오실 텐데 네가 이렇게 울고 있으면 괴롭힘당한 줄 알겠다.”신수빈은 울음을 삼키며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여 눈물을 훔쳤다.“그냥... 형수를 보니까 너무 좋아서요.”정 씨는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나도 매일 네 생각을 했단다. 네가 장안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낯설어 힘들지는 않은지 늘 걱정했어. 네가 굳이 장안으로 시집만 오지 않았어도 항주에서 혼처를 정해 평생 네 오빠랑 가까이서 살았을 텐데.”신수빈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고였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기색이었다.신병문은 누이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부인은 알지 못했지만 방금 한 말이 그녀의 마음을 건드렸을 것이다.“그만하자. 바람도 센데 어서 아버지, 어머니를 뵙고 마차에 오르자. 집에 가서 천천히 이야기하자.”“아버지, 어머니는 지금 막 잠드셨어요. 먼저 돌아가세요.”정 씨가 답하자 신수빈은 형수의 마차에 올랐다.마차 안에는 갓 백 일을 넘긴 조카딸이 있었다. 살결은 눈처럼 희고 인형처럼 단정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예쁠 줄은 미처 몰랐다.“오라버니는 형수가 딸을 낳았다고만 했지 이렇게 예쁜 아기라는 말은 안 했어요. 정말 한 번 보면 마음 깊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아이네요.”신수빈이 아이를 안으려 손을 내밀자 정 씨는 그녀가 회임 중인 것을 염려해 곁에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02화

    은보는 이마를 짚으며 그녀를 힐끗 곁눈질했다.‘제발 부탁이야... 앞으로 사자성어는 쓰지 말아줘.’신수빈은 그 말에 웃음을 머금고 두 자매 같은 아이들과 함께 정원을 두어 바퀴 거닐다가 이내 돌아가 쉬었다.그날 밤 신수빈은 깊이 잠에 들었다. 가을밤에 우는 벌레 소리조차 그녀의 잠을 깨우지 못했다.한편 은보는 야간 당직을 서던 중, 창이 살짝 열리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곧장 몸을 일으켜 안채로 들어가 희미한 빛에 의지해 보니, 침상 곁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를 확인한 은보는 말없이 조용히 물러났다. 참으로 지독히도 고집이 센 사내였다.이도현은 깊이 잠든 신수빈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요하고 온화한 잠든 그녀의 얼굴은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그런 얼굴의 그녀가 이렇게 결단이 빠르고, 수단이 강경한 성격이라는 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본래 그는 그런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날이 갈수록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계산에 밝지만 먼저 남을 해친 적은 없었고 그녀가 내딛는 걸음마다 모욕을 견뎌낸 뒤의 반격일 뿐이었다. 이토록 분명하고 단호한 사랑과 미움. 그 명확함이 오히려 그의 마음을 깊이 사로잡았다.그는 종실의 왕야로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기 위해 이미 많은 것을 고려하고 양보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끝내 혼인을 거절했다. 그 사실이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분노가 가라앉자 마음은 더욱 놓아주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오늘 그는 이 일을 핑계 삼아 그녀를 꾸짖을 생각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곤히 잠든 모습을 보자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밖은 소란으로 뒤집혀 있었으나 그녀는 그 모든 일을 마음에 두지 않은 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둥글게 부푼 배로 옮겨 갔다. 그녀의 마음속에 이 아이 말고, 애틋하게 품는 존재가 없는 걸까?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마침내 한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서 또렷이 자리 잡았다. 그는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팔을 괴고 위에서 내려다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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